2. 대술면인민위원회
7월 12일 오후,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흐린 하늘에는 낮은 구름들이 때 없이 서성거렸다. 그 낮은 구름 사이로 인민군의 누런 군복들이 가마고개를 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온양을 무혈입성하고 아산군 송악면을 지나 윗대술 오형제고개를 넘어 예산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의 연대 병력이었다.
인민군이 지나는 즌불마을과 시리미로 이어지는 곳곳에 인공기가 펄럭였다. 그 동안 숨죽이며 몸을 감추고 있던 좌익들은 시리미 마을길을 채우며 모여 들었다. 1열 종대로 즌불 마찻길을 지난 인민군은 시리미 주막거리에서 2열종대로 바뀌었다. 넓은 32번 국도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좌익들은 주막거리를 메우고 국도 가장자리로 흐르는 인민군들의 발소리에 맞춰 인공기를 흔들었다. 그들의 목에서는 인민해방이 울려 퍼지고, 혁명조국과 민족해방전선 만세,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만세가 여름 햇살을 뚫고 번져 나갔다.
수백 수천의 인민군이 열을 지어 넘어가는 시리미고개, 문득 2개 소대 병력이 본대에서 이탈하여 아랫대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민군이 즌불로 들어서는 가마고개에 이를 즈음 시리미 주막거리 마당엔 커다란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 멍석 위엔 막걸리며 안주며 푸짐한 음식들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주막집 주인 권수덕은 40대 중반의 사나이였다. 키는 좀 작았지만 그의 체구는 다부지고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해방 전 만주에서 지냈다고 했다. 여러 해 동안 마오쩌뚱이 이끄는 중국 팔로군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고 했다. 그가 한번 몸을 날리면 장정 서넛을 단박에 쓰러뜨린다고도 했다. 그 소문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해방 뒤에 고향인 대술면 시산리에 돌아와 즌불 주막거리에 가게를 차렸다. 장꾼들에게 술을 팔고 개를 잡아 국밥과 안주거리를 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기운세고 날랜 장사라고도 했고 더러는 인심 후한 주막 주인이라고도 했다.
권수덕은 전날부터 바빴다. 내일이면 조선인민군이 예산에 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있었다. 전날 밤 그는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좌익 세포 몇몇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늦은 시각 시리미고개 위에 세워진 경찰 초소를 급습했다. 초소를 습격한 좌익 청년들은 죽창으로 무장한 몇 명이었지만, 인민군이 남하하면서 예산의 군경 주력은 이미 홍성과 청양으로 철수한 뒤였다. 형식적으로 초소를 지키던 3~4명의 청년방위대원은 좌익들의 습격을 받자마자 예산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를 확인한 권수덕은 장날이 멀었는데도 막걸리를 집안 가득 떼어놓았다. 새벽까지 사람들을 불러 돼지를 잡았다.
권수덕은 아랫대술로 향하는 인민군 앞을 가로막았다. 인민군의 행렬이 주춤하는 사이 그는 인민군 소대장과 마주했다. 둘은 마주서서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 권수덕은 적극적으로 음식 먹기를 권했고, 인민군 소대장은 극구 사양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요. 밤새 준비한 것이니 성의를 봐서라도 한 잔씩 하고 가시오.”
“참 고맙수다만 인민군대는 민간인의 양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거이 당의 명령입네다. 거기다 전투 중의 군인은 술을 입에 대는 법이 아니디요. 마음으로만 받갔수다레.”
“이건 민간인의 양식이 아니라, 남로당 당원들이 대접하는 음식이외다. 그리고 시방 이 부대는 전투병이 아니고 대술과 신양을 해방하러 가는 병력 아닙니까? 술이 안 되면 장꽌 고기라도 한 점씩 들고 가시오.”
“좋습네다. 그러나 이동 중의 소대원을 멍석 우에 앉힐 수는 없습네다. 서서 괴기 한 점씩만 먹는 것으로 하갔으니 양해해 주시라요.”
“좋소, 소대장 동무의 입장 충분히 양해하오. 이보시오 김검억 동무!”
“옛, 권동무!”
“해방군을 그늘로 안내하고 고루 접대하시오.”
김검억의 지휘 아래 젊은이 서넛이 익힌 돼지고기와 새우젓을 날라 인민군들을 대접하였다. 한 점씩만 먹기로 했지만 전쟁 통에 돼지고기는 한 점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접시의 고기는 인민군 두세 사람의 입에서 금세 동이 났다. 그리고 물처럼 따라주는 막걸리 한 대접씩을 마시고 인민군들은 산정리를 지나 한 소대는 신양면으로 떠나고, 한 소대는 꽃거리 대술면사무소와 지서를 접수했다.
7월 13일 오후, 소문은 말없이 고새울을 휘감았다. 누군가의 입에서인지 모를 소문들이 단편적으로 쌓여갔다.
‘인민군덜이 예산군청을 즙수혔댜. 군인과 경찰덜이 예산경찰서 유치장이 잽혀 있던 빨갱이 끈나팔 십여 명을 장 뒷날 꽃거리 산지슭이루 끌고가 총이루 쏴 직이고 첸양쪽이루 츨수혔댜.’
‘누런 군복을 입은 인민군덜이 개미떼차람 오형제고개를 넘어 시리미고개를 넘었다너먼. 인민군이 지나는 곳마두 수십 명의 빨갱이덜이 인공기를 흔들매 만세를 불렀댜. 그러고 군수고 면장이고 다 도망가 뻐려서니 군청이고 면사무소가 텡 비었댜.’
‘주막거리 앞이선 인민군덜이 주막주인의 대접을 받었댜. 먹다 남은 돼지괴기와 술이 면대로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였다너먼.’
다음날이 되자, 끊어진 실처럼 단편적이었던 소문들은 쌓여지고 이어져 커다란 실타래가 되어갔다. 출처가 불분명한 ‘-하더라’의 실타래는 은밀하게 부풀고 또 부풀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물안개처럼 동네를 휩쓸고, 그 불안한 소문들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주막 주인 권수딕이는 남로당의 연락책이었다더라. 빨갱이 대장 박흔영과 연락을 취허매 암약허던 남로당원이라더라. 의심을 받지 않고 주변 정세를 파악허기 위허여 주막을 열고 사람덜을 드나들게 헌 것이라더라. 그가 대술면 인민위원장을 맡게 될 거라더라. 그게 이전의 면장과 같은 것이라더라.’
‘예산경찰서가 예산내무서로 배꼈다더라. 보안원덜이 보도연맹과 빨갱이들의 죽음에 연루된 우익 인사를 무차별 잡아딜인다더라. 군경 가족들이 수읎이 잽혀갔다더라.’
‘군경의 맨 뒤를 책음지며 퇴각허던 방위대장 김철식이 인민군덜헌티 잽혀 내무서로 끌려갔다더라. 와이어줄이 묶여가는 철식이의 머리털이 다 빠지고 얼굴인 뻘건 피가 엥겨 있었다더라.’
7월 13일 오전, 예산 전 지역을 장악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의 병력은 차동고개를 넘어 금강 전선으로 진격해 갔다. 예산군당 인민위원회는 순조롭게 구성되었다. 인민군이 군청과 경찰서를 장악하자 남로당 좌익들은 예산군당 인민위원장을 선출하고 기민하게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보통 군당의 내무서장은 조선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장교가 맡고, 휘하에 보안대원과 인민군을 통솔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군당 인민위원회가 구성되는 며칠 동안 노동당에서 파견한 내무서장이 들어서는 식이었는데, 예산군은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재빨리 군당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내무서장을 선출하여 노동당에 보고하였다. 이에 조선노동당은 내무서장을 따로 파견하지 않았고, 예산군은 지역 좌익으로만 구성된 군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각 면 단위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면마다 분주소를 중심으로 한 치안 조직이 완성되었다. 군 조직 체계가 정비되자 예산읍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몇몇 공산당원과 2개 분대원 정도의 병력만을 남기고 7월 하순 경 예산에서 철수하였다.
대술면도 순조롭게 조직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문대로 시리미 주막거리의 권수덕이 대술면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분주소장이 들어서고, 여성동맹과 청년동맹, 리 단위의 농민동맹위원회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럴 즈음 궐곡리 고새울에는 주민 두 사람이 좌익들의 호출을 받고 면대에 출두했다. 아침 일찍 완장을 찬 좌익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데리고 갔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좌익들이 끌고 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모셔갔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 두 사람은 점심때가 채 못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갈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들의 왼편 어깨 위에는 붉은 완장이 채워져 있었고, 남로당 세포로 드러난 양두갑이가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김덕식, 그는 체구가 작고 특별한 구석이 없는 인물이었다. 제 이름자도 쓰지 못하는 30대 중반의 농사꾼, 말이 농사꾼이지 변변한 농사처가 없는 말로만 농군이었다. 그가 대술면인민위원회의 호출을 받아 면대 회의장에 들어설 때 수많은 좌익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맞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궐곡리 농민동맹 서기장의 완장이 주어졌다. 서기장은 리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아래에 있는 직책이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두 차례 세 차례 완장이 권해졌으나 사뭇 거부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찰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회의장에서 면당 인민위원이라는 젊은이 하나가 일어섰다.
“김덕식 동무는 두 가지 이유로 궐곡리 농민동맹위원회 서기장으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수많은 친일자들이 창씨개명을 하며 일제에 협력할 때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경의 미움을 받아 북해도로 강제 징용되어 4년 동안이나 혹독한 봉욕을 버텨냈습니다. 수백 미터 지하 갱도에서 석탄을 캐며 일제의 만행에 온몸으로 항거한 김덕식 동무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히 지낸 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대술면에서는 징용에 끌려갔다 온 동무가 여럿이지만 김덕식 동무는 각별합니다. 김덕식 동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의 주체가 되는 순진무구한 무산자 계급을 대표할 만한 인물로 추천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원 김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에 거주하면서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아주 작은 텃밭 하나에 순결한 땀방울을 뿌릴 줄 아는 순결무구한 무산자입니다. 이런 인물이야말로 우리 인민해방조국이 추구하는 인간상이며, 받들고 함께 가야 할 공산주의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도 김덕식 동무는 자신의 부덕을 강조하며 서기장의 직책을 여러 번 사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 바로 겸손입니다. 이제 김덕식 동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줄 인물입니다. 자, 우리 모두 김덕식 동무를 만장의 박수로 서기장에 추대합시다.”
‘와아!’
달변이었다. 열렬한 박수가 회의장을 울렸다. 인민위원장 권수덕이 웃으며 다가와 달랑거리는 등걸이 어깨끈 위에 완장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는 넉넉한 가슴으로 김덕식을 끌어안았다. 회의장은 다시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김훤식, 그는 26세의 젊은이였다. 일찍이 결혼을 하고 돌 지난 아들을 하나 두었다. 180센티에 이르는 장신으로 체구가 헌칠하였고, 큰 힘을 지닌 대단한 장사였다. 거기에 인물 또한 미남에 호남형이어서 어디에 있든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런 외양에 비해 그의 별명은 얼치기 농사꾼이거나 한량이었다. 농사처가 많지 않아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농사처만 대강 거두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겨울철에도 남들처럼 악착스럽게 나무를 하러 다니지 않았다. 나무가 떨어져도 농사일이 바빠도 태평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데에도 관심이 없어 우익에도 좌익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허름한 옷을 입어도 늘 깨끗했고, 화를 내는 법이 없으니 남들과 다툴 일도 없었다. 그가 면대에 호출되어 받아온 직책은 궐곡리 청년자위대장이었다. 청년자위대는 마을의 청년들을 이끌고 좌익 활동에 협력하는 조직체로, 지금으로 치면 마을청년회와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두 사람은 등걸이 옷을 입고 있었다. 무명으로 짠 등걸이 옷은 말 그대로 어깨에 걸린 끈으로 앞가슴과 등만 가리는 옷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러닝셔츠와 다름없는 옷이다. 앞가슴에 단추 구멍 하나가 나 있고, 그 구멍 사이로 헝겊을 손톱 만하게 뭉쳐 만든 단추로 꿰고 있으니 배는 가리지도 못하는 웃옷이었다. 본래 완장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에 차야할 것이지만, 등걸이 옷인 탓에 그들의 완장은 옷핀에 매달려 검게 탄 어깨 위에 그냥 얹어놓은 것과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어깨 위에 붉은 수건을 걸쳐놓은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해 양두갑의 완장은 그럴 듯했다. 그는 한여름인데도 소매가 긴 광목옷을 입고 있었다.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옷, 타지 않은 하얀 살결, 여름 햇살에 반사되는 희디흰 광목 옷소매를 팔뚝까지 접어 올리고 그 위에 단 붉은 완장은 아주 근사하거나 매끄럽게 그의 이미지와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