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났다.
대본 때문에 아이들끼리 싸우는 데 1주,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본을 준비해서 연습하는 데 1주, 꼭 2주 동안 만든 연극이었다. 연극반 아이들이 공연을 포기한 상태에서 그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그냥 5분짜리 꽁트 하나 정도 해 보겠다고 모인 아이들이 진짜 연극을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아이들도, 나도. 2주만에 연극을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그것도 연극반 아이들도 아닌, 무대에 서 본 적도 연극을 한 적도 없는 아이들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너무 열심이었다. 연습도 열심이었고, 연극 문제로 싸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싸움이 한번 끝나고 나면 무언가 해결이 되고 더 나아져 있었다는 것이다. 연극반 아이들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이놈들은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아이들에게 기대를 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내 작은 도움에도 아이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고마워했고, 아주 진지하게 고쳐 갔다. 누가 이 아이들을 공고 최고 꼴통이라 했던가. 툭하면 말썽에 여선생님이나 할배선생님들 놀려먹고 수업 분위기 흐려놓기 일쑤고 아이들 때려 학교 분위기 망치는 데 선수고, 공부나 학교 생활에는 관심 없고 학교 외 생활에만 관심 있는 놈이라고... 실제로 그놈들은 그랬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연극을 시작하면서 한밤중까지 학교에 남아 연습을 했고, 학교를 나가서도 모여 연습을 했다. 나는 이 아이들의 열성에 감동해서 내 논문 마무리를 뒤로 미루고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고, 예정에 없던 팜플렛까지 만들어 주었다. 물론 팜플렛에 넣을 글은 모두 이 아이들이 썼다. 팜플렛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감동했다. 처음으로 이 아이들의 진심을 보았다. 말썽꾸러기의 이면에 숨어있던 이 아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말이다. 어느 새 우리는 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연 날...
이번에는 연극도 짧고 분장도 그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간단히 분장만 해 주고 나는 차 안에 들어가 종일 공부해야지 하고 공연 전날 나는 생각했었다. 이 아이들 연극 도와주다가 놓친 시간이 워낙 많아서이다. 그런데 시민회관에 도착하면서부터 그 계획은 깨졌다. 여전히 나는 예전처럼 리허설 문제로 이벤트사 아저씨들과 언성 높여 싸우고, 아이들 연습이며 점심 저녁 먹이기며 무대 만들기며 의상이며...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상현이 구두가 영 여자같지 않아서 집에 달려가 내 헌 구두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칼로 뒷부분을 잘랐다. 상현이는 안 들어가는 발을 열심히 구두 속으로 끼워넣었다. 마치 정 안 들어가면 발꿈치라도 자를 기세였다.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 리허설 때 이벤트사 아저씨가 점심 먹으러 가 음향을 할 수 없게 되자 수영이는 재빨리 녹음기와 마이크를 가지고 오더니 훌륭히 음향을 해냈다. 멋진 녀석들...
분장을 한 아이들은 한결 자신감이 넘쳤다. 처음으로 예쁜 소녀가 되고 멍청한 순경아저씨가 된 이 아이들은 부끄럽고 망신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설렘과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순경역을 맡은 경철이는 분장이 끝남과 동시에 성격까지 완전히 순경 성격으로 바뀌었다.
1부 공연 직전, 아이들은 몹시 긴장했고, 서로 격려하고 보듬고 화이팅을 외치는 것으로 그 긴장을 풀었다. 이번 연극을 하면서 "공고화이팅!" 진짜 많이 했다. 이놈들은 툭하면 다 모여 "공고화이팅"을 외치는데 그 외침은 늘 아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더러 대사를 잊기도 하고 동선을 잊기도 했지만 이들은 반복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기가 막히게 서로 도우며 해결해 나갔다. 상현이가 대사를 까먹자 극수가 갑자기 "니는 무슨 여자가 다리가 이래 굵노?" 했고 상현이는 즉시 "자전거 많이 타서 그래" 하며 응수했다. 놀라운 순발력들이었다. 관객들은 큰 소리로 웃고 박수치고 환호해 주었다.
첫 공연이 끝났을 때 아이들의 얼굴은 기쁨과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땠어요?" 하고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 몸짓 하나에 아이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온종일 아이들과 나는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다. 모두들 마지막 공연을 정말 후회없이 멋지게 끝내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와도 아이들은 오늘만은 연극이 더 소중한 모양이었다.
2부 공연은 좀 시끄러웠다. 상현이는 적당히 애드립을 넣으면서 교묘하게 마이크를 목소리 작은 아이들 가까이 갖다 놓았다. 목소리가 작은 아이들은 알아서 교묘하게 마이크 쪽으로 움직였다. 이런 여유들은 어디서 배웠을까? 이렇게 "끼"로 똘똘 뭉친 녀석들이 그 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관객들의 반응은 너무나 좋았다. 좀 떠들던 아이들도 연극에 열중하기 시작하면서 조용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내가 받은 꽃을 연출 현민이에게 안겨 주었다. 현민이는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믿음과 감사와 사랑... 어느 새 우리는 말하지 않고도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모두 시끌벅적하게 기념촬영을 하고, 분장을 지우고, 분장실을 치웠다. 상현이가 갑자기 그랬다.
"선생님, 이제 아쉬워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괜찮아. 이렇게 공연 잘했는데 뭐."
"그래도 아쉬우실 거잖아요?"
"너도 그러니?"
"이상하게 뭔가 자꾸 허전해지는 것 같아요."
"한 동안 그럴 거야."
"한 달은 갈 것 같아요."
조금씩 심각해지는 상현이의 표정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정말로 그 동안 연극도, 사람도 아주 깊이 사랑했다는 걸 느꼈다. 정말로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놈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아이들은 스스로 "꼴통"이라는 딱지를 떼고 돌아갔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 아이들은 그 동안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었단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변할 순 없겠지만, 분명 앞으로 몇 번은 자기 인생에 대해 아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 것임을. 그리고 좀더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 아이들이 방황을 끝냈을 때, 누구보다도 야무지고 멋진 어른이 될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