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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주일 메시지 2013-09-22
묵상:
문제제기: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라고 하시던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복음은 무엇을 선포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의 삶을 점검할 기준은 무엇이며 지금 필요한 그 기준은 이 시대에 합당한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설교가 풀어주는 것이다. 설교는 이 모든 답을 성경을 통해 풀어주어야 한다. 다만 몇 가지의 삶에 대한 팁을 말하거나 전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뜻을 대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재정립되고 방향성이 다시 설정된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16의 영생을 얻으리라는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지금 같은 삶을 늘여 뺀 삶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김세윤,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010, 21쪽).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그것은 율법주의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들어가려면 혹은 그러한 생명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혹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려면,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려면 우리는 행위로는 안되고 오직 우리에게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라고 하셨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셨다. 자녀로 태어난 자가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
그러면 오늘날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삼일밤 예배를 비롯한 공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든지, 십일조를 내지 않는 성도는 지옥에 간다든지 하는 말로써 성도들에게 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도록 교인들을 가르치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압적인 부모의 명령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가정의 분위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는 오직 어떤 행동의 결과에는 어떤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성경에 경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가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이런 경고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인도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하였다(고후 5:14).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께서도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이 모든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그 동인(動因)과 동력(動力)이 모두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일으킬 수 없는 강요는 반발만을 불러올 따름이다. 거기에는 참 안식과 기쁨이 없으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며 이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타락했을지라도 그래서 엘리야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할지라도 그 결국은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랑에로 나아오게 인도하는 가르침이어야 할 것이다.
영생은 신적인 생명에 동참하는 것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적 생명인 영생을 얻으며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신적 생명인 영생에 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또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에서 끊어진 삶, 즉 스스로의 제한적인 능력과 원천을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삶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임을 알 수 있다(엡 4:18[1]). 이것이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이 죽음의 증상들로 고통을 겪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결국 사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하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이 결국 심판의 삶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자라가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그것이 우리의 위치를 밝혀주며 우리의 갈 바를 인도할 것이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이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피할 것이라고 정한다. 이런 분류는 개인마다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과 올바른 분별력이다. 모든 것을 율법적인 잣대로 들이댄다면 우리는 그 의문(儀文)으로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할 것이요 의문(율법조문)의 죽은 것으로 할 것이 아니다(롬 7:6[2]). 즉,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를 신적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피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흔히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예배를 드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예컨대,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면 이 문제가 명확해지는가? 예배를 중점적으로 드린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바울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사람은 더 나을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강조는 또 하나의 율법조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지식 없는 열심을 낳게 하기 십상이다. 이것도 역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행위가 강조될수록 그에게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과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맞지 않으며 성경도 이를 부정한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엡 2:8~9[3]). 그러므로 지식 있는 열심이 필요하다. 깨닫고 행함이 필요하다.
신적 생명의 반대 현상, 우상숭배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과 이방인의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구별 짓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사랑의 반대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이므로 우상숭배야말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삶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우상숭배자들은 거룩한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며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1:8, 22:15[4]). 우상숭배자들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자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에 순응하여 황제를 주와 하나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자들로서 이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포도주를 마신 자들은 땅의 임금들 곧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분봉왕들이며, 땅의 상인들을 가리키기도 한다(17:2, 18:3).
음행의 포도주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새 언약을 맺으시며 나눠주시던 포도주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사탄 마귀가 주는 것은 음행의 포도주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언약의 피 곧 거룩한 포도주였던 것이다. 어떤 포도주를 마시느냐에 따라 그의 소속이 결정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철학과 가치관은 우리가 매일 마시는 포도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거듭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매고 살았던 바울(고후 4:10[5])이야말로 날마다 언약의 포도주를 마시며 산 사람이다. 예수의 고난의 잔을 마시고 고난의 세례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막 10:38~39). 성령의 술로 충만함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교통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이기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구약시대 때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번영의 기원을 우상에게 두어 그것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삶을 말한다. 자연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과는 반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으며, 설령 나에게 해로운 일이 닥칠지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말할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근거, 삶의 희망, 미래에 대한 소망, 일용할 양식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거는 생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아만 장군과 우상숭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좀 더 관대해 질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우상숭배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서 고침을 받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한다(왕하 5:17~19):
림몬 신당에서 그의 주인의 몸을 부축하여 그의 신전에서 몸을 굽히는 행위에 대하여 용서하시기를 구할 때 엘리사는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를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여 세상 사람들과의 화목을 깨트리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조상에 대한 제사의 문제가 있어서 기일(忌日)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날에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통하여 조상의 음덕을 덧입고자 하는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 우상숭배라고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제사상을 차리고 그 음식을 나눠먹음으로써 조상의 음덕(蔭德)을 덧입고자 하는 행위는 명백하게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과의 화목을 깨트리면서까지 우상숭배의 율법의문에 매여 있으면 복음전파와 이웃 사랑의 정신에 위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다만, 믿음이 약하여 그것을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적절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이것을 공론화해서 모든 성도들이 그 기준에 따르게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 복음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복음의 장애물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사는 다음과 같다:
제사를 후에는 함께 술과 음식을 들면서 조상의 공덕에 대한 이야기, 역경을 이겨낸 지혜로운 조상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면 좋다. 이처럼 참된 의미의 제사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동기간의 우애를 배우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확대되어, 사회질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6]
가족의 기일에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상들이나 가족의 사랑과 유언 등을 생각하면서 가족애를 돈독히 하는 계기를 가지는 것이 좋다. 아울러 가족을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는 전통을 수립하는 것도 좋다. 친지들과도 서로 화목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우상숭배와 관련한 타종교에 대한 태도
사찰에 불상을 훼손하는 행위도 우상숭배에 대한 율법조문을 문자적으로 접근해서 일어나는 행위요, 복음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반복음적인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지난 해 사찰에 가서 땅밟기를 한 젊은이들의 몰상식한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사찰에 대한 국고지원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차원인지 우상숭배에 대한 몰지각적이고 과격한 적용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지적은 비기독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굳이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반대한다면 이는 질투에서 난 것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다. 우상숭배 금지의 명령은 신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물론 불신자가 우상숭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박수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것은 죄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들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성경은 우상숭배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이사야 44:9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어찌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의지하고 안심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다. 결과는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유다는 바벨론에게 큰 수치를 당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엘리야를 통하여 갈멜산에서 명백하게 증거해 주셨다. 우상숭배를 책망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다른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는 정죄와 심판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가? 우상숭배의 본래적 의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복을 구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서 마음의 위안과 신뢰를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그런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점치는 것과 우상숭배
먼저, 인간은 누구나 미래에 관해 궁금증과 불안이 있다. 내 사업과 결혼 등의 운세에 대해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 때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찾아가거나 운세를 점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오늘의 운세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일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7]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참 신앙인의 자세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다. 나의 미래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궁금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게 기대어 미래를 염려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는가(롬 8:28)? 그러므로 온갖 점이나 운세에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과 선을 행하라.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점쟁이에 관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미가 5:12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신명기 18: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예레미야 29: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예언의 은사와 우상숭배
이런 종류의 점은 교회 안에서는 예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을 할 때는 무질서하지 않게 하고 분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일어나는 예언을 이렇게 그 목적과 의의를 설명한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
이것이 무슨 말인가? 교회 예배 안에서 예언이란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설교자의 설교 외에도 찬송시,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이 있어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깨달은 바를 배우고 주님의 임재를 더욱 크게 느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피차 가르치고 권할 수 있었다(골 3:16[8]).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는 남용될 때 권면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부작용이 일어난다:
1) 자신만이 유일한 교사라고 생각한다.
2) 자신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3)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렇게 착각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혹하여 금품을 요구하거나 강압을 행사하여 그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이런 능력이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할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결단을 할 마음을 져버리고 더 확실하고 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자신의 모든 자유를 맡겨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자유로운 신앙의 분별력을 상실하여 삶에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가 의지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부리거나 대하도록 하는 은사 남용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예언은 지도자나 회중 모두가 건강하게 알고 있어서 미혹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맡겨야 할 신앙적 소망을 사람에게 일임한다는 점에서 남용하는 예언의 은사는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조언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결정은 자신의 책임 있는 양심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도 자신이 받는 것이다.
종말론과 관련한 넘치는 예언들
지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온 국민을 소동하게 한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씨는 어린이들을 통한 직통계시를 강조하면서 종말에 관한 낭설(浪說)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팽개치고 종말에 심취,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예언이 가져오는 폐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도 소위 지옥을 보았네, 천국을 다녀왔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남미의 안젤리카양 간증이로부터 한국의 여목회자들의 간증, 여집사들의 간증, 심지어 신성종 목사님의 간증까지 나오고 있다. 꿈을 믿지 말라고 한 예례미야 29:8을 기억하자. 삼층천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의 소리를 들은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지 않는가? 그것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지 그것으로 진리를 왜곡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면 오용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을 위하여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별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혼미하게 하는가? 그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신학을 무시하거나 인간의 이성과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그리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영적인 능력과 계시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집착이다. 그것도 요한계시록을 잘못 풀어 사람들을 혼미하게 하는 일이 많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물론 전에도 기도원에 가면 이단의 목록이 붙여 있는 곳이 있었다. 조심하라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무분별한 은사운동과 신비주의에 집착한 한국교회는 성실하게 자신을 성찰하기보다는 교회 성장이라는 획일화된 가치에 매몰되어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위해 고민하기보다 어쨌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들어졌다. 그 결과 이단사설이 자라기에는 적절한 토양이 되었다. 습기가 많은 곳에 곰팡이가 번식하듯이 그리스도를 진실되이 따르려는 정신이 희박해진 곳에서는 이단 사상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지금은 누구라도 인터넷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있고 자신의 설교나 주장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잘못된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 올바른 정보를 고르는 것이 실력이다. 그리고 예언이 회중 가운데 일어나면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 나라의 목회자들은 그 교육이 너무 일천하고 준비가 덜된 채로 목회 현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동안 우리는 교회성장론에 치우쳐 건전한 신학, 사회를 선도할 진리를 갖추지 못하고 사회와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신앙적 행태를 하면서도 그것이 도리어 진실한 믿음인양 착각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 문맹이 문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이신 은준관 박사에 의하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의 쇠퇴의 원인을 ‘영적 문맹Spiritual Illiteracy’이라고 지적한다.[9]영적 문맹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진리를 바르게 읽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 교회가 빠진 구덩이는 다음과 같다: 올바른 목회자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목회자의 타락이 흔한 일이 됨, 교회성장주의의 덫에 걸려 교회와 교인들의 배타성이 증가하고 서로 분열하고 하나되지 못함, 헌금강요로 교회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영혼들이 늘어남,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근심거리가 됨. 이 영적 문맹의 원인을 은준관 박사는 신학교육과 목회자에게 돌린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급격하게 변화되는 목회 환경과 목사상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한 신학교육의 실패에 그 첫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목회와 신학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 심지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목회에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일까지 생긴다. 교회를 어떻게 부흥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능주의는 신학교의 과목에 온갖 세속 과목을 첨가하여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사회복지자격증을 곁들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실패는 교회 안에는 심각한 반지성주의가 무성하게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목회자 중에는 교회에 올 때는 머리는 집에 두고 와야 하며 따지고 묻는 것은 믿음이 없고 불손한 것으로 치부되어 교회 안에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 정신을 말살하고 말았다. 목회자들도 신자들을 목회의 대상으로 객체화해 왔다. 심지어 신자들을 양이라고 하며 무지하고 약한 존재라는 인식도 많이 있다. 그 결과 평신도는 병신도로, 영적 문맹으로 무력화해 온 ‘우민목회’를 한 것이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원로목사의 고백
지난 9월 16일 CBS 방송에 출연한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 밀알복지재단 이사장)는 자신의 40년 목회를 실패로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미국의 대형교회를 바라보고 그들을 흉내 내는 목회를 해 온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그의 대담 내용이다:[10]
"결론적으로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목회 40년을 뒤돌아보고, 제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대형 교회 목사들을 볼 때, 예배당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인 거 외에 (교회가 세상과) 뭐가 다르냔 말이지. 그런데 제가 그 허상을 좇아왔어요. 지금도 큰 것, 그것뿐이에요. 목표가 잘못 설정됐어요. 그런 점에서 실패예요. 그 사람들이 하는 제자 훈련도 해 보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속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요. 다음 세대는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실패한 목회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남서울은혜교회는 가장 존경 받고 칭찬 받는 교회 중의 하나로서 지난 1995년에 세워져서 현재 조선일보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다:[11]
서울 일원동 남서울은혜교회는 홍정길 원로목사가 자폐장애인특수학교로 세운 밀알학교의 강당을 예배당으로 쓴다. 이 학교엔 유치원·초중고를 거쳐 직업교육과정까지 장애인 200여명이 다닌다. 주일엔 6000여명 교인이 장애인 650여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본다. 홍 목사는 "건물을 포기했더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광장'이 생겼다"고 말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신적 생명 대신에 다른 무엇으로 나를 채우려는 인간의 발동이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행동은 우상숭배가 아니다. 점쟁이를 찾거나 꿈꾸는 자들의 낭설을 믿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리고 잘못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우상숭배다. 조상의 기일에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는 것, 교회성장의 과열에 내몰리는 것 등은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영적으로 무지하면 우상숭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가로막는 진정한 우상숭배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 ἡ πλεονεξία ἐστὶν εἰδωλολατρία, (Col 3:5 BGT)
탐심이 우상숭배다. 탐심(ἡ πλεονεξία)이 무엇인가? 문자적으로는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감사하지 않고 더 가지려는 마음을 탐심이라고 한다. 탐심을 경계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전서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3: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우상숭배 금지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 경계하는 탐심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돈 곧 소유 재산, 급료에 관하여 적용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다른 것에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은 바로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표현되는 몸과 돈이다. 몸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의 신 곧 맘몬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은 말세의 현상이요, 돈의 사랑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탐심인데, 그것은 자기 사랑과 돈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위의 본문에서 탐심의 반대에 해당하는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은 아르케오(ἀρκέω)라는 말인데 이 말은 아레고(ἀρh,gw)유사한 말이다. 아레고는 충분하다는 뜻 외에도 도와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충분하니까 도와줄 것이다.
탐심1. 자기 사랑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사랑과 돈 사랑이다. 자기가 주님께 받은 사랑이 많고 이웃이나 가족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많음에도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고 더 받으려는 것이다. 남의 행동에 관해서 내가 받아야 할 사랑이 부족한데 내 사랑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되어 남에게 화를 내고 섬겨주기를 바라고 높여주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남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일진대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이야말로 정말 큰 우상숭배다. 자기 사랑은 다른 말로 이기심 또는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애라고 할 수 있다. 자기애에 도취된 사람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가치를 놓이고 자기가 멋지게 보이는 일에 늘 관심을 갖는다. 그의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 사랑이 있을까? 늘 자기 사랑, 곧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므로 제사보다 불상에 절하는 것보다 더 악한 우상숭배는 자기 사랑이라는 탐심의 우상숭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나를 내려 놓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위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는 자신은 지금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골로새서 3장 6절 이하에서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후에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는데 다음과 같다: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자기 사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분노와 악의 비방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 모든 말씀은 자기 사랑이라는 우상을 찍어버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 아래 앉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야 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머무를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자기 사랑의 찌끼가 벗어지고 점점 나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불만이 있었으나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임한다. 이것은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살 수 없는 기쁨이다. 오직 주님 앞에 기다리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기쁨이다.
탐심2. 돈 사랑
탐심이라는 우상숭배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은 돈 사랑이다. 돈에 관해서는 형제간에 재산 상속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형제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눅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위의 그림은 2010년 한국인의 기부통계 그래프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더 많이 버는 사람이 기부에 인색하며, 종교단체 기부금은 많으나 개인기부금은 평균 한 해에 6만원이 안 된다. 물론 기부에 참여하는 비율이 기독교인이 천주교나 불교인보다는 높게 나타났다고 하지만 우리의 기부와 자원봉사 문화는 개선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을 보면 산상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6장에서는 기독교인의 3대 의무는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이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삶의 표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반성할 것이 많다.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내가 먼저 쓰고 남을 돕겠다는 마음은 아직도 돈 사랑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돈을 얼마나 더 가져야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을까? 나의 경제 생활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탐심, 곧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생명이요 축복이다. 이런 삶을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으며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3]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4]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6] 이재영 박사의 글, http://cafe.daum.net/yuldoguk/Beal/74 참조.
[7] 점의 종류는 신내림을 받아서 점을 치는 신점, 귀신과의 대화를 통해 점을 치는 영점, 주역을 가지고 사주팔자를 사용하는 역점이 있다. 이 역점에는 사주팔자, 주역, 육효, 육임, 기문둔갑, 자미두수(별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점성술, 타로카드 등 까지도 망라한다.
[8]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9] 한국교회 목회자: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2013년 6월 17~18일에 경기도 안성 사랑의교회 수양관에서 열린 한목협제15회 전국수련회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이 수련회의 주제는 ‘한국교회 목회자, 현재와 미래를 말하다’였다. 한목협은 고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되어 현재 15개 교단 목회자들의 모임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가장 큰 기치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이다.
[10] 동영상과 자세한 기사 참조. http://cafe.daum.net/jmsoo./JJuv/239?q=%B8%F1%C8%B8%20%BD%C7%C6%D0%20%C8%AB%C1%A4%B1%E6%20%B8%F1%BB%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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