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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자료 스크랩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이상태 추천 0 조회 66 10.10.27 14: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앤드류 에이 데이비스 지음

 

조 규 윤 옮김

 

 

 

 

 

 

 

 

 

 

 

도서출판 성지

 

 

 

 

 

역 자 서 문

 

 

역자는 평소 교회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모라비안 교도들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가졌고, 그들의 순결한 삶을 동경해 왔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생활했고, 겸손하며 선교하며 기도의 생애를 보냈다.

100년동안 연속 철야기도를 한 그들의 헌신과 경건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역자가 평소에 가졌던 질문이며, 감탄의 말이기도 하다.

94년 12월 한 해가 갈 무렵 “ 모라비안 교도의 부흥과 그 결과”의 저자이신 영국의 목회자요 저술가인 앤드류 데이비스(Andrew Davies)목사께서 내한하여 횃불회관(서울)에서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신 일이 있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저자의 허락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번역을 하게 되었다.

수십여 명의 피난민들로 구성된 그들, 작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오직 성령의 은혜로 위대한 부흥과 선교의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다면 오늘 우리의 교회현실 속에서 가난과 소수의 사람들 속에서 교회의 부흥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소원하는 작은 교회와 그리고 목사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의 글이 되어질 줄을 믿는다.

본인이 가르치는 신학교와 다른 신학교에서 교재로 활용되기를 바라며 끝으로 이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있으시기를 바란다.

 

 

 

 

 

 

 

 

 

추 천 사

 

 

“번역은 창작보다 어렵다”

이말은 문인 작가들의 독백이다.

 

금번에 우리 서울 남노회의 중견 목회자이신 조규윤 목사께서 바쁘신 성역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본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역자는 평소 학구적인 목회자로서 많은 동료들에게 여러 가지로 모범이 되어 왔다.

본서는 독일의 경건주의자인 진젠돌프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를 다룬 것으로 교회사적으로도 훌륭한 글일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와 같은 그들의 생활과 부흥은 오늘날의 현대교회에서도 감동과 은혜를 주는 역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자이신 조규윤 목사에게 모든 목회자를 대표하여 그간의 노고에 감사한다.

모쪼록 이 책을 읽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시기를 기원한다.

저자와 역자와 독자가 다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다시 한번 믿는다.

 

 

 

1997. 10. 1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합동)

 

신세원 목사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앤드류 에이 데이비스 지음

조 규 윤 지 옮김

 

 

1722년 6월 8일 모라비아로부터 온 10명의 피난민들이 색소니에 있는 베델스돌프에 도착했다. 그 땅은 진젠돌프 백작의 소유였다. 여섯 명의 어른들과 네 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이들 피난민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캐톨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왔고 진젠돌프는 개심한 모라비안 목수인 크리스챤 데이비드로부터 그들의 곤경을 잘 알고 있었다. 수개월 전 진젠돌프는 지역 공동사회의 영적인 복지를 위해 베델스돌프에 있는 땅을 구입했고 그는 이 땅을 개신교 피난민들을 위해 그들의 피난처와 거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1727년에는 적어도 200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그곳에 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형제단(the Unity of Brethren)이라 부르고 그들의 영적인 시조는 ‘보헤미아의 개혁자인 존 후스’를 두었다. 1415년 후스가 처형된 후 그의 추종자들 중 몇몇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북동쪽에 있는 쿤 월드라는 마을에 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은 형제교회(the Church of Brethren)의 첫 정착지였다.

16-17세기에 이르러 그 교회는 성장할 뿐만 아니라 박해도 받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보헤미아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더러는 폴란드로 더러는 헝가리로 혹은 색소니로 혹은 화란과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남아 캐톨릭의 박해속에서도 조용히 그들의 신앙을 보존하고 열심히 그것을 지켜 나갔다. 그들 중 일단의 사람들은 진젠돌프의 초청을 받고 즉시 응하여 베델스돌프에 돌아와 헤른후드(주께서 감찰하신다는 뜻) 모라비안 공동사회를 이루었다.

당시에 진젠돌프는 22살의 젊은 청년의 나이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드레스텐에서 출생하여 그로스헨너스돌프성(the castle)에 있는 외조모의 양육을 받았고 스펜너와 후랑케와 할레대학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스펜너는 진젠돌프의 대부(god-farther)와는 친구 사이였고 할레대학은 경건주의자들의 중심지였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후랑케의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할레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적인 진리의 체험과 믿음과 거룩함과 생활에 의한 중생과 설교와 기도와 찬송과 헌신적인 실천을 하는 것과 교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는 것을 배웠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네 살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할레에 있는 6년 동안은 그 자신과 그의 동료 친구들을 위해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철저한 헌신의 생활을 위해 작은 신앙적인 모임을 만들었고 외국선교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그에게 법학을 공부하기를 권했고 그는 1716-1719년 까지 스콜라적이면서 루터주의의 요새인 비텐베르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여기에서 1719년 법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유럽을 떠날 때 까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영적인 생활을 열심히 추구했다. 그가 더셀돌푸를 방문했을 때 한 장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 초상화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는 루터파 교회의 목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가족들은 그가 법조인으로 생활하기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 결과 1727년에는 드레스덴(독일 동부의 도시)에 있는 색손 지역의 법률 변호인으로 일하게 되었고 같은 해에 베델스돌프에 있는 땅을 사게 되었다.

진젠돌프의 관심은 지역 공동사회의 영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정착자들을 위해 성소를 마련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 그들이 신실한 신자들의 연합된 사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정착자들의 마음이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형제단의 회원이었지만 루터교도들과 개혁파교도들과 침례교도들이 있어 예정론과 성결론에 대해 교리적으로 서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더욱 어려운 일은 진젠돌프가 드레스덴에 없을 때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감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도 영적인 각성과 은혜의 깊은 역사도 있었다.

1722년 8월 30일 요한 로오드가 베델스돌프의 목사로 취임했을 때 골릿츠로부터 온 이웃교회의 쉐이퍼목사는 예언적인 말을 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밝게 비추기 위해서 이 언덕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고 했다. 더욱이 로오드 목사의 설교는 아주 열성적인 것이었다. 이러하므로 부흥된 형제교회의 기념적인 날들과 동시대의 부흥의 기록은 1723년에서 1727년 사이에 베델스돌프와 헤른후트에서의 설교는 가끔 하늘로 온 불과 같이 능력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진젠돌프가 드레스덴에 있을 때에는 그는 직접 체험적인 신앙을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토비아스 후레데릭은 찬송으로 회중들을 격려하였다. 네 번째 지도자인 죤 왓트빌은 현명한 사람으로 개인적인 평등을 사랑하였다. 이것은 공동사회가 영적인 지도력이 인정되고 주일의 공적인 예배가 잘 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토의하고 기도하고 현명한 감독 하에 상호 격려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더욱이 1724년에 모라비아에서는 크리스챤 데이비드의 설교아래 큰 각성이 있었다. 멜카닛츠맨과 데이비드 닛츠맨이 1724에 도착했고 그들은 영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1727년에 진젠돌프는 베델스돌프와 헤른후트의 필요를 도와주고 완전히 헌신하기 위해서 드레스덴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진젠돌프의 첫 번째 관심은 정착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진리로 하나가 되고 대속적이고 희생적인 주님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우그스버그 고백을 인정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진젠돌프의 전기 작가요 18세기의 모라비안의 지도자인 스팡겐벌그(Spangenberg)는 1727년 5월 12일의 그날에 대해서 말하기를 “백작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언약을 했다. 형제단들은 개인적으로 구세주에게 완전히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분쟁을 부끄러워했고 그것들을 잊기로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기심과 고집과 불순종과 편견들을 포기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기를 소원했고 아무도 놀면서 소일하는 일도 없었으며 제각기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승리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다. 같은 날에 12명의 장로들이 임명되었고 진젠돌프는 감독이 되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오전 5시와 7시 30분과 오후 9시에 모였다. 그리고 3-5명의 소수의 사람들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것은 구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세 개의 초등학교가 백 명의 어린이들을 위해 세워졌다.

이러한 제반 활동은 형제단에서 역사하는 기도의 영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것은 1727년 7월 16일에 있었던 진젠돌프의 공적인 기도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기념의 날들(The Memorial Days)에 의하면 “그는 뜨거운 눈물과 넘치는 사랑으로 기도했다. 이 기도는 이상한 영향을 가져왔다. 그리고 생명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초가 되엇다” 7월 22일에는 10명의 형제들이 기도와 찬송을 부르기 위해 모였고 그들은 큰 각성을 경험했다. 8월 5일에는 진젠돌프와 12명의 사람들이 철야하며 기도했다. 다음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철야기도에 참여했고 큰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 그 다음 수일 동안에는 하나님의 이상하고 특별한 능력이 밤에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그들 가운데 임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8월 10일 정오 즈음에 로오드 목사가 헤른후드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스스로 체험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함께 한 사람들도 이상한 능력에 압도되어 땅에 엎드렸다. 이러한 상태로 그들은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며 울며 간구했다. 그 다음날 8월 13일 수요일에 그는 온 회중과 더불어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그 전날 그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성도 상호간의 불신과 불일치들이 제거 되도록 했고 각 사람들은 성찬식을 위해 마음이 준비된 상태였다.

 

“기념의 날”(The Memorial Days)이라고 일컫는 8월 13일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이 교회로 나아가기 전 헤론후트에서 발행된 “거룩한 성찬식”이라는 제목의 짧은 설교의 글이 전달되었다. 베델스돌프에 이르는 길에서 사람들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무리들이 서로 함께 가면서 진실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전에는 소원하고 떨어진 관계였으나 사랑과 우정으로 함께한 모습들이었다. 예배가 시작되어 찬송이 불러졌는데 찬송 중에 한 사람은 그저 구경하러 왔던 사람이요 대단히 악한 사람이었지만 회개하며 부르짖게 되엇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죄와 속박에서부터 구원하소서.” 그때 로오드 목사는 침(세)례 받는 두 자매에게 진실한 축복을 선언하고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그 이후 갑자기 회중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졌고 그들은 눈물로 마음이 녹아지게 되었으며 찬송이 불려졌다. 그들이 울고 있는지 찬송을 부르는지 분간하기란 어려웠지만 큰 눈물과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뒤이어 기도시간이 되었는데 기도에는 믿음과 확신으로 하나님께 기뻐하셔서 두 장로인 크리스챤 데이비드와 멜콰르 닛츠만이 그들과 똑같은 은혜를 받게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 두 장로들은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가까운 교구지역에 있어 그날의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2주 후에 돌아오자 사람들은 즉시 8월 13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두 장로들은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 날 10시에 사브랏에 있는 한 고아의 집에 있었는데 기도하고픈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한 작은방에 들어가 거기에서 주님께 무릎을 꿇고 집회를 위해 기쁘게 기도하고 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들이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눈물을 흘린적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마음에는 우리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지금과 같은 마음을 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예배를 마친 후 성도들은 거룩하고 황홀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진젠돌프는 27년 후 영국에서 설교하는 가운데 그날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하기를 “27년 전 그날에 헤른후드의 성도들은 베델스돌프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모였다. 그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비판을 삼갔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성찬식은 구주의 고상한 얼굴 앞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난을 아시는 분이시오 주님께서 그들의 후원자요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그들의 눈물을 기쁨의 기름으로 그리고 그들의 고난을 행복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짧은 순간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살아있고 행복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졌던 그날의 은혜와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고 했다 진젠돌프는 그날을 가리켜 교회의 오순절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경험하거나 알지 못했던 그 분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셨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지도자와 돕는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성령께서 친히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셨다.

스팡겐벌그는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날로부터 그해 겨울까지 헤론후트를 위하여 행하신 일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전 지역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임하여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의 대 부흥은 어른들에게만 임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성령께서 8월 13일 이전에 어린이들 가운데 이미 역사하고 있었다. 진젠돌프는 여름이 되기 전 열 살에서 열세 살로 구성된 아홉 명의 소녀들로 반을 만들어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일날에는 그들에게 진실한 회개와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그들 중 몇몇은 깨닫고 회개하였는데 그 중에 수산나 퀸넬양은 5월 2일 어머니를 잃은 후 8월 6일에 구원을 확신하고 기쁨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였다. 8월 18일에는 어린이들에게도 똑같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로 충만하였고 그 이후로 소년 소녀들에게 많은 은혜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는 두 번째 부분에서 그날의 부흥의 결과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나누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물론 간접적인 결과도 있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 부흥은 헤론후트와 베델스돌프의 형제단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기쁨과 평화가 그들의 마음에 충만하였고 지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교리들은 그들의 체험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에 진젠돌프는 마음의 경건을 크게 강조하였다. 교리는 사랑과 은혜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회개의 등급을 두고 쓸데없는 임상측정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자들과는 절교했다. 그는 신자의 경건한 마음은 규칙 속에서 외부적으로 일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콜라주의를 의심하였고 지리는 조직화하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관심은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사랑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경험한 것이 진리의 표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역사와 성경속에서 진리를 계시하였다. 그러나 진리는 느껴져서 알아야하고 느낌은 영적인 이해의 중요한 요소이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서로 똑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경험은 실제적이었다. 진젠돌프는 1727년 11월 제나(Jena) 대학을 방문하고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설교하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고 깊은 감동을 주게 되었다. 실제로 진젠돌프는 다음해에도 제나대학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스팡겐벌그와 피터 볼러도 있었다. 스팡겐벌그는 진젠돌프의 목회가 1734년 이후 더 많은 은혜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롸 그의 속죄적인 죽음이 더욱 확실하고 열열하게 전파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웨슬리 형제도 깊이 감동을 받았다.

1735년에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헤론후트에서 미국 죠지아주로 향하여 가는 26명의 모라비안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그들 웨슬리 형제들은 몇 년 전에 떠나 소수의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 었고, 모라비안 사람들은 삭소니에서 핍박을 피하고 또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들은 웨슬리 형제들과 같은 배에 여행하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그들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행을 기록하였다. 그는 여행 중에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소박한 교회의 의식과 감독하에 시행되는 질서와 찬송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감명을 받은 것은 사납게 휘몰아치는 대서양의 폭풍우 속에서 조용하면서도 담대한 그들의 행동에서 였다.

 

잘 알려진 그의 1736년 1월 25일의 일기를 살펴보자

“정오에 세 번째 폭풍우가 불기 시작했다. 4시에는 폭풍우가 더 심하게 불었다. 7시에 나는 독일인들에게 갔다. 나는 그들의 용감하고도 진지한 삶을 동경했고 그들의 겸손함은 다른 나라의 승객들을 위한 봉사에서 더욱 뛰어났다. 영국인들은 아무도 그와 같이 생활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댓가를 바라지 않았고 말하기를 겸손은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그들의 사랑하는 주님은 그들보다 더욱 더 겸손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날마다 그들은 그들의 온유함을 보여주었고 어느 누구도 마음이 상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들을 밀치고 때리고 쓰러뜨린다면 그들은 일어나 걷고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교만과 분노와 복수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는지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이 시편을 읽는 가운데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 때에 바다는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고 큰 돛대가 부러져 배를 때리고 갑판 사이로 떨어졌다. 물결이 그들을 삼킬 것 같이 위험한 순간이었다. 만약 영국인들이라면 큰 비명을 지르고 예배는 중단되고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나는 그들 중의 한사람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두렵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질문하기를 여자들과 아이들은 어떠냐고 했더니 그들은 그들도 마찬가지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여자들과 아이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웨슬리는 이 사건을 자신이 몇 주 전에 경험한 사건과 대조시켰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밤중에 나는 배가 몹시 흔들려 잠에서 깨어나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불안했고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했다.

그 후 미국에서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정착을 협의하기 위해 진젠돌프에 의해 보내어진 스팡겐벌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진정한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스팡겐벌그는 요한 웨슬리에게 “형제여 내가 한두 가지 질문을 하겠는데 그것은 당신 안에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과 함께 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웨슬리는 기록하기를 “나는 깜짝 놀랐고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잠시 후 다시 질문하기를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했고, 나는 “예,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했더니 “그러실 겁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을 구원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나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희망합니다.”라고 했더니 덧붙쳐 묻기를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했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 대답이 헛된 말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라고 했다.

1738년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에 피터 볼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요한 웨슬리 형제들에게 신앙이란 더 많은 지적인 확신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또한 영적인 확신을 의미하기도 했다. 웨슬리형제들이 5월 24일 알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가졌던 경험보다 이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로 종종 말해지고 있었다.

볼러는 웨슬리 형제들을 말하는 가운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무한한 은혜의 진리를 의심하는 죄를 회개했고 불쌍한 죄인으로써 용서와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진리를 받아 들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볼러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말한바 있는 그러한 진리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곧 반응을 가져오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제 볼러씨가 말한 믿음의 본질 즉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뢰와 확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진리에 대해 반대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아마 1738년 이전에는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마음으로부터의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의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믿는 일에 부족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만남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모라비안 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그리고 웨스리를 설득시켰는데 그것은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과 또한 확신함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었고 요한 웨슬리도 이것을 확신하였다.

1738년 4월 볼러와 다른 세 사람은 그를 방문한 가운데 말하기를 “신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간절히 찾고 찾는 자에게 확실하게 믿음을 주신다.”라고 했다.

요한 웨슬리도 “나는 이 진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끝까지 찾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는 나의 것 비록 그것이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내 자신의 능력이나 의로움이나 지식을 단호히 포기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완전히 의지하고 그를 나의 구주로 그가 나의 완전한 의와 성결과 구원이 되심을 믿고 이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요한 웨슬리는 알더스케이트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이전에 벌써 그는 지식적으로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방법으로 모라비안 인들은 요한 웨슬리에게 더욱 완전한 믿음을 알게 해 주었다. 진젠돌프와 스팡겐벌그와 미가엘린너와 볼러는 확신은 자신의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비록 진젠돌프는 그들과 교리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볼러가 말하는 신앙적인 확신과 경험적인 확신에 대해서서는 겉은 견해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이외의 교리에서는 진젠돌프와 다른 대부분의 모라비안 지도자들은 서로 약간씩 상이한 교리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성령의 직접 증거하는 것을 내재하시는 영으로 알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그는 신비에 관한 글, 특별히 프란시스코 디 로라의 그레고리의 생활을 읽었음) 그는 모라비안을 만나기 전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1738년 헤른후트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특별히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영국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비슷한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설교시 신자의 생활에서 지적인 확신과 경험적인 확신을 구분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시고 성령이 그들에게 있을 때 밝은 햇빛 속에서 빛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심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1727년에는 모라비안에게 일어났고 1735년에는 감리교회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감리교도보다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8년 정도 일찍 은혜를 체험했다.

진젠돌프는 1740년 베를린의 한 설교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간결하게 말했다. 모라비안 인들은 경험적인 것을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감정을 동반하며 회심에는 확신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성결(Snctification)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결이란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 다소 느슨한 말을 사용했다. 그는 완전성이란 개념에서 성령의 교리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했고, 이것이 영국의 복음전도에 큰 공헌을 했다. 또 하나의 공적은 그들의 생활이었다. 요한 웨슬리가 피터 볼러에게 말할 때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영국에 온 이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한 일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2. 부흥의 결과는 헤른후트와 베델스돌프 사이에 영적인 교제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스팡겐벌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진젠돌프가 그 지역에서 진정한 교제를 위하여 땅을 사게 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진젠돌프에게 있어서는 복음의 진리로 연합된 사람들이 다른 사정으로 인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었다. 그는 그의 짐을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누어 졌고, 그들과 함께 서로 기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의 개선을 위해 실제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형제단 언약(Brothery Covenant)을 만들고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점을 말하기 보다는 서로의 동일한 것을 발견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권고했다.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했으며 성도들의 교제와 영적인 조화로 말미암아 교회는 부흥되고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 간에 있어서 오해와 갈등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후 몇 년 동안은 형제단 내에서 약간의 교리적 문제로 충돌하고 혼란한 때도 있었다. 지도자인 진젠돌프는 스스로 강한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때때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독재적이고 오만한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와 요한 웨슬리 간에도 충돌이 있었으나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다.

1727년에는 새로운 정신과 기도운동이 헤른후트에 널리 퍼졌고, 수년동안 계속되었다. 8월 13일 공적인 예배가 있은 후 13일 동안 24명의 남자 성도와 24명의 여자 성도가 하루 한 시간씩 기도하여 24시간 연속기도하기로 작정했고, 얼마 못되어 그 수는 점점 많아져 77명이 되었으며 이것이 저 유명한 24시간 연속기도(The Hourly Intercession)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기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문헌에 의하면 100년간 연속기도 했다고 함, 역자 주)

이 기도가 한 달 동안 계속될 때 성도 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예배를 사모하여 하루에 세 번씩 예배를 드리고 교회는 은혜가 넘치고 또 이러한 변화가 계속적으로 번져 나갔다.

1728년에는 교회는 90여개의 기도 그룹으로 확대되었고, 각 그룹에는 5-7명의 인원으로 편성하여 그들은 일주일에 2-3번 모임을 가졌다.

한편 찬송에 있어서도 특이하다. 모라비안 인들의 찬송은 그들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불리어졌고 특히 저녁 집회 시에는 여러 번 반복하여 찬송을 불렀고, 진젠돌프는 설교 시에도 찬송을 부르면서 설교했다.

찬양대원들은 그들의 결혼유무와 연령과 성별에 따라 10개의 찬양대로 나누어 편성했고, 그들에게는 각기 지도자가 있었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들의 경험을 서로 주고받고 격려하며 또 기도했다.

철야예배는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하여(Congreation Day) 지켰고, 이 날에는 다른 지역에서 복음전도를 사역하는 사역자들이 그들의 전도를 보고했고, 예배는 연합정신과 단순하고 생기를 불어 넣은 은혜 가운데 진행됐다.

이와 같은 모라비안 교도들의 예배와 교제는 웨슬리와 영국에 즉각 영향을 미쳤다. 요한 웨슬리는 이미 미국 조지아주로 가는 여행 때 그들의 생활을 경험한 바 있다.

1738년 그가 조지아주를 방문했을 때 그들로부터 더욱 강한 은혜를 받았다. 그는 헤른후트에 있는 동생 찰스에게 편지하기를 “이곳 형제단들의 영적 감동은 우리의 기대보다 더 컸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신앙으로 숨 쉬고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사랑으로 생활했다.”라고 했다. 그는 또 그의 형제인 사무엘에게도 글을 썼는데 “나는 천국에서 대화하는 교회와 함께 있었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마음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생활을 했다.” “그들은 모두 한분의 주님과 한 믿음을 가졌으며 온유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고, 한결 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서로가 생기를 불어 넣은 대화를 하였다”라고 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나의 생애를 이곳에서 보내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포도원에 일하도록 부르신다. 나는 이 행복한 장소에서 떠나도록 주님의 권고를 받고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웨슬리는 헤른후트에서 듣고 본 모든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영국에 돌아온 이후 그는 헤른후트와 마리엔본(Marienborn)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충고겸 솔직한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들 모라비안 인들은 합심하여 금식하는 연합금식이 없음과 진젠돌프의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성격 등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는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동생 찰스에게 “나는 기독교 진리와 관련이 없는 사소한 부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내 앞에서 보여진 그들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본 뒤에는 진리에 대한 열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웨슬리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실제적인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모라비안 인들의 조직과 축제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단순성과 자원성 그리고 구역과 찬양대원들의 질서정연한 생활들이었다. 웨슬리는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도 교회의 교제의 모임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안토니 호르넥(Anthony Horneck)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그 스스로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룩한 모임(Holy Club)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모라비안 인들의 신앙은 그 자신의 경험적인 영적확신과 기쁨에 대해서는 부족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작은 그룹들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전도하는데 는 유용한 것임을 알았다. 웨슬리 자신도 사람들을 정확히 나누는 것이 성도들의 영적인 양식을 얻는데 필요한 것임을 인정했다.

감리교 연감(1748년 발행)에서 그는 말하기를 “그들의 방법을 따라 나는 기혼자와 독신자, 기혼녀와 미혼녀 등의 작은 구역으로 나누었다”라고 했다.

웨슬리와 헤른후트의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는 그들의 방법을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이상을 따랐다. 그는 또한 모라비안 인들의 사랑의 축제에도 영향을 입었다.

스팡겐벌그는 말하기를 1727년 8월 이후에는 7개의 작은 구역들이 사랑의 축제를 위해 조직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각 가정에서 모이고 초대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은 서로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흑빵과 물을 먹으면서 대화하고 경험을 서로 나누면서 친교를 가졌으며 얼마 후에는 모든 교회에 전파되어 시행되었다.

웨슬리는 처음에는 미국에서 모라비안 형제들과 이러한 축제를 가졌다. 1737년 8월 8일 기록된 그의 일기 속에는 “저녁기도 후에 우리들은 그들의 사랑의 축제에 독일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그들은 초대교회처럼 감사하고, 기도하고, 경건과 거룩함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후 그는 헤른후트를 방문하고 더 큰 감동을 받았다.

1739년 1월 1일 큰 사랑의 축제가 페터래인(Fetterlane)이란 곳에서 개최 되었다. 웨슬리는 그 때의 일을 기록했는데 “홀, 킨친, 잉함, 휘트필드,헛친스 등과 나의 형제 찰스와 60명의 우리 형제들과 함께 사랑의 축제에 참석했다. 아침 3시경에 우리들이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우리들에게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외쳤고,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졌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경이로우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한 목소리로 ‘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을 인정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사랑의 축제의 기원은 초대교회로부터 온 것이나 보다 정확한 것은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739년 이후에는 자주 축제를 가졌는데 통상 2주일에 한번, 나중에는 3주일에 한 번씩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축제는 18세기에 감리교회의 습관이 되었고, 복음의 증거와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보다 큰 집회로 발전하였다.

 

 

3. 위의 두가지 부흥의 결과는 세 번째 결과와 연관되어 있다.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교도들은 하나님과 은혜로운 경험을 한 후 예배와 찬양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교회는 새로운 찬양의 물결로 넘쳤으며, 찬양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인양성 즉 하나님이 되심과 사람이 되심 그리고 그의 인격성과 그의 공로와 속죄사역이었다. 또 성부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했다.

그들은 아들을 높이는 것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높임이 된다는 것과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젠돌프가 강조한 것은 칭의와 경험과 중생과 양자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그가 지은 찬송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과 고귀한 보혈의 공로를 강조했다.

그가 쓴 찬송 중에는 “예수님과 보혈의 의로우심은 나의 아름다움이요 나의 영광스러운 옷”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찬송은 그가 1739년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여행 중에 썼다.

진젠돌프는 거룩한 신앙으로 생활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모라비안 찬송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다. 그리고 성령을 강조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과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찬송가 작가로는 진젠돌프 외에도 스팡겐벌그, 루이즈 본헤인, 크리스챤 레나투스(진젠돌프의 아들), 존 데 왓트빌(진젠돌프의 사위), 크리스챤 프레데릭 조지, 그리고 존 케닉 등이 있었는데 진젠돌프는 존 케닉을 가리켜 살아있는 바울이라 불렀다.

존 케닉을 통하여 존 몽고메리가 회심하였고, 몽고메리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모라비안 교회에 출석하다가 나중에 서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었으나 그들의 아들인 제임스는 풀넥(fulenck)에 있는 모라비안 학교에서 배웠고, 후에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모라비안 교회의 위대한 찬송가 작가가 되었다.

1727년 부흥운동은 체험적인 찬송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진젠돌프는 1725년 이전에 이미 몇 개의 찬송과 시를 작성하였고 1725년에 발간한 바 있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찬송가를 부르는데 있어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했다. 찬송을 위한 별도의 집회가 1727년 부활절 이후 네 번째 주일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개인적이며 체험적인 찬송이 부리어졌고, 진젠돌프는 설교시에 찬송을 불렀다.

웨슬리는 이미 언급된 바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안 인들의 찬송에 은혜를 받았고 몇 개의 찬송을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다. 진젠돌프는 1725년에서 1735년까지 다섯 개의 찬송가집을 책으로 펴내었는데 이중 90편의 곡이 있는 찬송가에서 28편은 그가 직접 쓴 것이다.

모라비안 인들은 찬송을 부를 때 몇가지 목적이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중요한 진리를 교훈하기 위해 불렀고, 어떤 때는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찬송으로 불렀고, 가끔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때는 회개와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불렀으며,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불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지식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을 가졌고,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다.

웨슬리는 모라비안 인들의 헌신적인 찬송에 영향을 받았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도 마찬가지 였다. 그는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인들을 사랑하였다. 찰스 웨슬 리가 1738년 5월 21일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체험을 한 후 기록하기를 “나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소망속에 기뻐했다.”라고 했다. 그의 찬송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썼으며 은혜의 기쁨을 찬송으로 표현했다. 그는 처음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변화되는 과정을 노래했고, 구원의 확신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주님의 생활 즉 그의 열심과 본을 보이시는 모습을 찬송하였다. 이러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 경향은 미국에 있는 감리교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 부흥의 결과는 새로운 모라비안 교회의 출현을 가져오게 했 다.

 

진젠돌프는 1727년 이전에는 독일에 있는 루터란교회(Lutheran Church)의 경건주의의 성장을 격려하고 부흥을 일으키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독일에 있는 루터란교회가 너무 스콜라적이며 고백적인 것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았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회는 지나치게 강조되었고, 감정의 요소는 무시 되었다. 믿음의 진리에 있어서 감정의 요소를 제한하는 경향이었으며 엄격한 이론이 그리스도의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지식의 필요성을 대신하고 있었다. 더구나 기독교 교리의 실제적인 내용은 무시되어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복음을 실천하는데 쇠퇴하였다.

경건주의자들은 이에 대항했다. 그들은 특별히 일반적인 신자들의 도덕적인 쇠퇴와 신앙의 훈련이 부족한 것과 신학적인 논쟁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루터교회가 교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천적인 생활에 개혁이 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자들의 신앙의 균형과 성경적인 생활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진젠돌프는 루터교회가 부흥되고 신자들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바랐고,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믿고, 서로 교제하고, 사회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호소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생각지 못한 요인을 가져오게 했는데 이것은 명칭 상으로는 새로운 이름이지만 루터주의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전통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모라비안 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1735년 형제교회의 최초 감독인 다니엘 재브런스키는 부흥된 교회의 최초 감독으로 데이비드 닛츠맨을 세웠고, 10년 안에 다른 25개의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독일에서 10개처, 나머지는 네델란드,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러시아, 미국 등이었다.

와인릭이란 사람은 이러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생활에 대해서 다음과 간이 말했다. 그들은 교회를 중심하여 작은 마을로 이루어 살고 있었고, 일상생활과 경제적인 활동은 서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공업과 소규모의 사업과 농사를 짓는 일을 했고, 외부세계와 상거래를 함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한 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사를 돕는 일을 감당했다.

대개 이들 정착촌에 생활했던 첫 세대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들이었고, 선교의 사명을 가진 신실한 신자들이었다.

 

 

5. 모라비안 교도들은 현대 교회사에서 선교사역의 위대한 발자 취를 남겼다.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교회에 강림하심으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초대교회의 역사에 대한 비전을 가졌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다.

1740년 진젠돌프는 베를린에서 가졌던 설교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든 증인들의 주요한 일은 모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특별히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영접하는 일을 강조하였고 불신이 큰 죄임을 지적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 모라비안 설교자들은 특별히 복음의 우주적인 헌신(Universal Offer)에 대해 강조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다는 것이었다.

진젠돌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모든 죄인들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했다. 이 말은 물론 모든 인류들이 다 구원받았다(만인 구원설, 역자 주)는 말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이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며 우리의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진젠돌프는 명확히 말하기를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그가 믿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어린 양 예수의 속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지시고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온다면 그들은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으며 성령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라비안 지도자들의 설교는 힘있게 외치는 설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증거에 가까웠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기회를 찾아서 전하였다.

스팡겐벌그는 1742년 미국 인디안들이 사는 지역을 여행하면서 진젠돌프와 아내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진젠돌프가 숲을 지나면서 그를 안내하는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냐고 했고, 나는 루터교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묻기를 “당신이 루터교인이 될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느냐”로 했고 그는 이 질문에 놀라면서 정직하게 답변하기를 모르고 있다고 했다.진젠돌프는 그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 안내자에게 진실한 루터교인이 되는 것을 계속 말해 주었고 그는 변화되었다. 라고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예들이 있는데 그들 모라비안 인들은 지혜롭고 예의를 갗추고,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게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초기 활동의 이야기는 1727년의 사건들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진젠돌프는 소년시적부터 복음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베델스돌프의 땅을 살 때에 그곳 농부와 생활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땅을 샀다. 그러나 이것은 헤론후트 형제단들이 다른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일어난 부흥운동 전이었으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부흥운동 전에 진젠돌프의 이상이 먼저 실천되고 지도자의 리더십의 훌륭한 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727년 첫 번째의 선교사역이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보트랜드, 헝가리, 살펠드 그리고 덴마크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1728년 2월 1일에는 첫 번째의 금식과 감사의 날이 터키와 에티오피아, 그린랜드, 래프랜드에서 시행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진젠돌프는 주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형제단들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가 1731년 코펜하겐을 방문했을 때 그의 마음은 뜨거워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덴마크에 있는 지방의 사람들이 회심한 것을 보고서였다.

그는 두 사람의 그린랜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에게디라는 한 덴마크 선교사의 충성스런 사역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얼마 후 성 토마스의 웨스트 인디아 섬으로부터 한 흑인이 변화된 것을 보았다. 이 흑인에게는 믿지 않는 여동생이 한면 있었는데 그는 누군가 그 여동생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진젠돌프가 헤른후트에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 했을 때 두 남자가 자원하여 웨스트 인디아로 가기로 했다. 결국 1732년 8월 17일 레오나드로버와 데이비드 닛츠맨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노예세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하게 된 선교사들이다. 그 후 50년 동안 모라비안 인들은 웨스트 인디아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다른 교단의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하기전 대략 13,000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복음은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매투 스트래취와 크리스찬 데이비드란 두 사람은 1733년 1월에 헤른후트를 떠나 그린랜드로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헤른후트의 설립과 비슷하게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다른 사역이 네델란드, 남아프리카, 황금의 해안(the Golden Coast), 왈라차이나, 러시아, 퍼자, 이집트, 독일계의 유대인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또 미국에도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조지아주에서 시작하던 것이 다음은 펜실바니아주 그 다음은 아메리칸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데이비드 제이스버그는 60년동안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초기에는 혹독한 추위나 기후, 병 혹은 폭력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견고하고 확고하게 심어졌다. 이들의 선교는 풍성한 영적인 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에게는 큰 규모의 계획이나 화려한 청사진(blue point)도 없었다. 선교의 역사는 조용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기쁨을 서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리고 작은 구역을 세우는 것을 힘써 행했다. 이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개념이기도 하다.

진젠돌프는 한 교파에서나 혹은 모든 교파들이 서로 연합된 가운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해 모이고,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힘썼다. 그들은 공중 집회에서보다는 신자들의 개인의 생활과 증거를 통해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신도 전도자들이었고, 교회의 인정을 받고 스스로 자원하여 봉사하였다. 어떤 사람은 장사하면서 주님의 일을 했고, 가능하면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마을이 세워지는 곳에 그곳에 정착하면서 생활했다. 이들 디아스포라 사회는 일정한 규율 속에서 가정교회와 같은 친밀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교회를 중심하고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의 정신은 진젠돌프가 1727년에 두 사람의 전도자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그 편지를 기록한 것이다. “헤른후트 교회가 설립된 이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부르신 그 분의 공로를 전파하고 주님의 평강속에서 계속해서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 여러분은 그 분의 인도하심 따라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고, 한 장소에만 머물지 말고 의를 찾는 거리를 찾아 널리 그리고 넓게 순회하십시오.

여러분의 왕 예수님을 자유롭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하시고 우리들에 대해서나 우리 가운데 있는 은혜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온유하게 말하고 그들의 말을 들으십시오. 어디로 가든지 모든 교회의 유익을 위하고 누가복음 6장(산상설교)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깊이 탐구하고 교만한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끝으로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동역자 진젠돌프로부터“

 

이들 초기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큰 확신의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이 교회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기 전에는 그들의 소명이 여러 가지 시험으로 증명되어져야 했다.

그들의 선교관(the View of Missonary)은 그저 로맨틱한 것으로 생각 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레오날드 도버와 데이비드 닛취맨은 처음에 모라비안 인들과 교제하기 위해 그들의 일하는 곳으로 가서 종으로 일하면서 철저히 선교를 준비했다.

이것은 인도의 선교사였던 윌리암 캐리(Willam Carry)가 일하기 전 약 5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발행된 선교 잡지는 윌리암 캐리를 감동시켰다. 그가 한번은 침례 교도를 만났다. 그리고 선교잡지를 복사한 것을 책상위에 놓으면서 외치기를 “보라, 모라비안 인들이 하는 것을! 우리들은 그들을 따를 수 없다. 그들은 주님께 복종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우리보다 앞서 행하고 있다”라고 했다.

나는 아이안 무레이 목사가 보낸 한통의 편지 사본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데 그 편지는 1795년에 존 뉴톤이 에딘버그에 이는 존 켐벨에게 보낸 것이다. 그 편지 속에는 런던 선교회의 형성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기록하고 그 다음은 모라비안 교도들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나 스스로는 벌써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을 때 주님은 먼저 그 일을 하시려고 손을 내미셨다. 나는 그들 선교사들이 철저하게 세상과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과 인내와 지혜와 온유함으로 구비된 자임을 알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공은 진실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행했던 일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없었을 것이다.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는 형제단들이나 모라비안 인들과 관계되는 한 귀하게 말해질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주님의 음성에만 듣고 순종하였으며 그들은 무명의 사람들이요,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헌신과 기독신자의 훈련은 복음을 믿는 어떤 다른 단체보다도 훌륭하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우리들의 시대를 위하여 모라비안 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고자 한다. 명백한 것은 우리들은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하게 됨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우리들이 모라비안 인들의 생활을 보면서 단순히 그들의 삶을 그저 테크닉으로 배우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라비안 인들의 부흥을 그저 단순하게 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위험을 배제하면서 모라비안 인들의 삶과 부흥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삶의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 현상유지레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이해의 수준이나 교회의 질서에서나 복음적인 단체들의 존재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교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초는 영적이라야 하고 은유를 사용하지 말고 신학적인 것은 생명이 약동하는 말로 옷을 입혀야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더욱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예배와 교회의 구조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넘치고 살아 있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같은 방법으로 전도 단체들은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균형을 유지하며 독립적이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되고 협력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것과 관련하여 1727년의 부흥은 우리 앞에 두 가지 과제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는 교회의 분열을 지양하고 복음적인 일치를 위해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모라비안 인들은 그들 위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진리와 성령으로 하나 되기를 구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 서로가 냉랭한 마음을 가지고 잇는데 대해 슬퍼했다. 그 다음은 우리들은 이 일을 우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개혁이나 부흥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의 시대에 영광을 받기 위해 우리들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들의 교회가 진실한 교제와 찬양과 기도와 위로하는 일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모라비안 인들의 사회적 모임은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치 있는 모임이었다. 형식적이고, 생명 없는 예배는 위험한 것이다. 진실한 신자들의 모임은 서로 경험을 나누고 기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교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셋째는, 모라비안 인들의 부흥의 역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진실한 성 령운동에 확실한 증거를 주었다 .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들은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교훈을 받아 떡을 떼면서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을 큰 능력으로 증거 했고, 거룩한 두려움으로 충만했고, 그들은 서로 돌아보고 함께 즐거워했으며,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서로 기쁨으로 만났으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은혜를 받았다. 또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1727년에 재현되었다.

부흥은 사람들의 마음의 경험과 성도들 간의 깊은 교제의 기쁨, 겸손한 마음, 기도에 충만한 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전도와 설교를 했다. 이러한 부흥은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일에 소망하고 기뻐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에 오시고 그 자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들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20세기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전례 없는 불신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를 배척하고 물질을 추구하고 황금만능사상에 젖어있고, 미신과 악이 관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즐거워 할 수 있다. 그의 연대는 변함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18세기에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작고 하찮고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피난민을 통하여 행하신 기이한 역사를 이루셨다면 다른 곳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나타내실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이룰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소망 중에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의

기도를 소개한다.

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이시여

당신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이

인간이 걸어가는 발자취 위에

우리들의 불신앙적인 발걸음 위에 내리소서

모든 사람들, 멀리있는 자나 가까운데 있는 자나

침례를 받게 하시고

십자가의 승리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을 받게하시고

모든 민족이 주를 부르게 하소서.

 

 

 

 

 

 

 

 

 

 

 

 

 

 

 

 

 

 

 

 

 

역자소개

총신대 신대원 졸업

미 트리니티 신대 졸업

육군 정훈장교 역임

서울대 교관, 소령 예편

남광교회(예장합동) 담임

총신(합동개혁측) 조직신학, 설교학, 영어성경 교수

영어성경 제자훈련원장

저서 “청교도 신앙과 현대목회”

 

 

 

 

 

 

 

 

 

 

 

 

모라비안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1997. 11. 25 인쇄

1997. 11. 30. 발행

 

옮긴이 : 조 규 윤

발행인 : 김언한

발행처 : 도서출판 성지

등 록 : 제 13-528호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978-19

TEL 842-9988

값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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