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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개산행 스크랩 영암산 등산코스(鈴岩山)782m-성주 김천 칠곡 선석산742m 비룡산579m 시묘산367m
자유인 추천 0 조회 398 13.09.18 20: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암산 (현령산)

   : 영암산(鈴岩山)782m 선석산(서진/누진산)742m  비룡산579m  시묘산367m

   : 경북 성주군 초전면/김천시 남면/칠곡군 북삼읍 약목면

◎특징/볼거리

성주와 김천, 칠곡 3개 시군에 걸쳐있는 산으로 신령스런 바위산이라 불렀던 명산이다. 지도에 남북으로 놓여진 영암산의 머리부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가 영암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성주사람들은 가장 남쪽 봉우리를 영암산으로 알고 있고 표석까지 세워놓았다

 

영암산은 구미의 도립공원 금오산(977m)의 정남녘에 자리한다. 영암산 남동쪽으로 누진산(742m)과 비룡산(576m)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600m까지는 평범한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산 꼭대기는 180m의 높이로 원뿔형의 뾰족한 모양을 이루고 있어 수십 리 밖에서도 이 산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으며 산에 오르는 좌우 경관이 뛰어나지만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 보는 경관도 빼놓을 수 없는 좋은 곳이다.

 

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는 북봉은 나무가 많은 흙으로 된 봉우리로 별다른 특색이 없는 반면 남쪽 봉우리는 사방이 바위절벽으로 된 바위 봉우리로 경관과 조망이 좋다.

 

방울이라는 뜻의 령()자로 되어 있는 영암산은 방울이나 종과 관련있다는 전설 또는 방울이나 종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나 영암산을 성주쪽에서 보면 방울모양으로 보여방울바위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산행에 필요한 시간은 2시간이며 영암산은 선석산과 함께 묶어 산행하는 것이 좋다. 선석산을 함께 산행하면 선석산이 안고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이나 선석사를 돌아 볼 수 있다.

 

산행의 들머리는 김천시와 성주군의 경계를 이룬 신거리고개. 90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는 한 쌍의 장승부부가 서 있다.봄 소나무숲이 우거진 솔향 가득한 산길이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 사적 제444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 742.4m) 아래의 태봉(胎峰)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이곳은 세종 20(1438)에서 24(1442) 사이에 조성되었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은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1977년에 태실을 정비하던 중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 1(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국립경주박물관소장) 등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石)(저경(底徑) 102, () 42), 구형(求形)의 중동석(中童石)(() 26, 하경(下徑) 80, 상경(上徑) 75), 방형(方形)의 연엽대석(蓮葉臺石)(() 125.5. ()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비문에‘ㅇㅇ()군명태장 황명연호연월일입석(ㅇㅇ()君名胎藏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
봉비 비문은 멸실『( 실록』에 비문 수록됨)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조선조는 왕과 왕자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의 태를 묻었던 태실도 많다. 그러나 19기를 한데 모은 태실은 여기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밖에 없다. 이 태실은 그 자리와 방식이 특이하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를 묻은 석물 시설로, 조정의 관상감에서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로 하여금 태를 묻게 했다 한다.

 

조선조에서는 풍수지리설의 위력이 컸던 때문에 왕실의 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고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여기 태실은 1438(세종 20)에서 1442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해 적서 18왕자와 왕손 단종의 태까지 19기의 태실을 안장한 곳이다.

 

뒤에 수양대군의 폭거에 불복한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를 산 아래 버렸으나, 1975년 기단석을 찾아 복원해서 현재 기단석만 남아있다(사적 제444).

 

이 태실은 태실의 의궤에 따라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된 태호를 넣고, 그 위에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을 덮었다. 대군과 단종의 태실, 그리고 단순한 군의 태실이 구분되어 있다.

 

원래 이 태실 자리는 고려 말 문신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유명한 이장경의 묘지였다. 이장경은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손자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조선조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도 그의 후손이며, 이직의 손자 이정녕은 당시 세종의 누이동생의 남편(부마)이었다. 세종은 안태사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매제 이정녕을 파면까지 하며 이장경의 묘자리를 빼앗아 태실로 만들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태사가 태실을 앉힐 명당을 찾아 여기 인촌리에 들어서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려고 근처의 재실에 들어갔다. 그 재실이 이장경의 재실이었고, 안태사는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세종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정녕은 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보고를 무시한 죄로 파면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장경의 후손들에게도 과실은 있었다 한다. 이장경의 묘터를 잡아준 스님은 이장경의 후손들에게 '아무리 후손들이 잘 되더라도 여기에 묘각을 세우거나 재실을 만드는 등 묘의 치장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다. 그러나 많은 후손들이 영달하자 교만해져서 그 스님의 당부를 잊고 재실을 짓고 묘를 치장했던 것이다. 재실을 짓지 않았다면 안태사가 그 재실에서 비를 피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이장경의 묘터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선석사(禪石寺 大雄殿)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113

이 전각은 월항면 인촌리의 선석산(742.4m)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석사의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인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1(692)에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건립되었으며 “신광사(神光寺)”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0(1361)에 나옹대사(懶翁大師) 혜근(惠勤)이 신광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는데, 그때 새 절터를 닦던 중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선()”자를 넣어 사찰의 이름을 선석사라 고쳤다 한다.

 

그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이 지상에 나와 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숙종 10(1684)에 은현(?玄), 혜묵(惠默), 나헌(懶軒)이 중창하였다.
영조 1(1725)에 옛터로 옮겼다가 순조 4(1804)에 동파(桐坡) 서윤대사(瑞允大師)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으며,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기단은 장대석을2단 쌓고 그 위에 장대갑석을 돌렸는데, 전체 높이가 약 90㎝ 가량 되며, 자연석의 초석 위에 굵직한 원기둥을 세운형태로 되어 있다. 공포는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고 맞배지붕이다.

 

선석사는 조선 초기에 근처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의 수호사찰로서 유지된 듯 하며 영조로부터 어필(御筆)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현존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정법료(正法寮),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가 있다.

성주 백세각(星州 百世閣)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63

이 가옥은 조선전기 문신이었던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가 지은 것으로 명종 6(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한 건물이다.
송희규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있을 당시 세도가였던 윤원형(尹元衡)과 영의정 이기()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高山, 현재의 완주)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백세각을 지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원래는 고산(孤山)이었는데 귀양살이 하고 고향에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高山)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규모는 정면 7칸·측면 7칸이고 평면은 ‘口’자형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손도끼(자귀)로만 다듬어 만든 건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1919 3·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장날이 서는 날에 배포할 태극기를 이 건물에서 제작·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1919)의 모의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제작·배포한 곳으로서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다.

◎등산지도        ▶ 선석산 = 누진산 = 서진산 (같은이름)

◎등산코스

▶신거리고개~능선 삼거리~영암산~누진산~비룡산~약목면 복지회관 주차장 ( 4시간 30)

▶보손동(4번 국도)~미타암~중리지~영암산 동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선석산~

시묘산~신유 장군 유적지~약목 시내버스정류장 <5시간30분 소요>

▶신거리고개(김천시 남면, 월명성모의집)~영암산 북서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

선석산~선석사~세종대왕 왕자태실지 <5시간 소요>

▶보손동(4번 국도)~미타암~중리지~영암산 동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계곡~

중리지~보손동 <3시간 30분 소요>

▶보손동(4번 국도)~미타암~중리지~영암산 동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선석산~

비룡산~두만지~신유 장군 유적지~약목 버스정류장 <6시간 소요>

신거리고개 → 능선길 → 영암산 → 능선길 → 신거리고개(2시간)

▶월명성모의집-방울암산-누진산-비룡산-각산리대흥사-왜관(4시간30)

▶세종대왕 자태실선석사선석산잘록이영암산 주봉영암산 상봉월명 성모의 집( 4시간)
▶신거리고개영암산선석산비룡산신유장군 유적지( 4시간)
▶보손동(4번 국도)~미타암~중리지~영암산 동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선석산~

시묘산~신유 장군 유적지~약목 시내버스정류장(5시간30)

신유장군 유적지 주차장 - 시묘산(367m) - 정자쉼터 - 전망대 - 선석산(742m) - 용바위 - 태봉바위 -

   557m ?비룡산(579m) - 두만저수지 - 신유장군 유적지 주차장

대원사~305~328~배석이재~봉수대터~비룡산~557~선석산~영암산~영암산공룡능선~

신거리고개~금오동천~금오산~금오산매표소

◎산행길잡이 1 [근교산&그너머]

산행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세종대왕 자태실 관광안내소~불광교~선석사 갈림길~삼거리봉(선석산·비룡산 갈림길)~태봉바위~용바위~정상 직전 삼거리~선석산(742m)~잇단 선석사 갈림길~돌문이고개~(칠곡)보손지 갈림길~정상 직전 갈림길~영암산(782m) 정상석~북봉(784m)~김천시 남면 '월명성모의 집' .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 안팎. 산행 초입 길찾기에 유의하면 이후 능선길에선 이정표가 있어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세종대왕 자태실을 둘러본 후 관광안내소 옆 이정표 상의 '중암, 선나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 고샅길을 따라가면 어느새 임도급의 숲길로 이어진다. 숲길의 종착역은 사실상 들머리인 나무다리인 불광교. 가만히 보니 계곡합수점이다. 다리 옆 나무엔 '등산로'라 적힌 안내판이 걸려 있다.

불광교를 건너 물 마른 건천과 나란히 걷는 너른 직진형 돌길 대신 우측 급경사길로 오른다. 직진형 돌길로 올라가도 선석산으로 이어진다. 참고하길.

 

급경사길은 처음엔 사람 다닌 흔적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 흔적마저 사라져 사실상 개척산행이다. 25분쯤 뒤 소나무 아래 시야가 트이면서 선석산 산줄기 뒤로 암봉인 영암산이 보여 주변 지형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후 산길 주변으로 바위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길 흔적이 뚜렷해지면서 경사가 수그러진다. 15분 뒤 갈림길. 우측은 선석사에서 올라오는 길, 좌측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걷기 좋은 완만한 오름길. 7분여 뒤 또 갈림길. 나무에 '선석산' '비룡산' 방향이라 적힌 팻말이 걸려 있다. 산행팀은 삼거리봉으로 명명하고 직진한다. 잠시 후 길 우측으로 아파트촌이 보인다. 금오산 금오동천의 산행기점으로 유명한 칠곡군 북삼읍이다. 읍이라도 인구가 많은지 상당히 번화하다.

 

여유로운 이 길은 성주()와 칠곡()을 가르는 군경계이다. 5분쯤 뒤 '태봉바위'라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세종대왕 자태실 자리를 살펴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란다. 조그만 저수지 앞 볼록 솟은 동산이 세종대왕 자태실이다. 혹자는 이 지점이 연꽃의 한가운데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골짜기 양편의 산줄기가 여자의 양다리이며 태실이 위치한 자리가 여성의 음부에 해당된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낙점한 만큼 명당 중의 명당이 아니겠는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실제로 문외한이 봐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정도다.

 

5분 뒤 '용바위'를 만난다. 안내판에 따르면 선석산에서 가장 웅비해 예부터 용바위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얼핏 봐선 평범한 바위로 보이나 끄트머리에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면 수긍이 간다. 저 멀리 국내 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참외 비닐하우스가 호수처럼 장관을 이룬다.

용바위에서 2분이면 정상 직전 삼거리. 좌측은 앞서 사실상 들머리였던 불광교 하산길, 산행팀은 직진한다. 선석산 정상은 여기서 300m 남았다고 적혀 있지만 생각보다 힘들이지 않고 빨리 올라선다. 잡목에 둘러싸여 동쪽인 칠곡 약목면 이외에는 조망이 하나도 없다. 선석산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고 선석산의 또 다른 이름인 서진산(棲鎭山) 대신 한자를 착각해 누진산(樓鎭山)이라 적혀 있다. '()' 자와 '()' 자의 착각인 듯 싶다. 난센스다.

 

하산은 이정표 뒤 '영암산 2.8' 방향으로 내려선다. 호젓한 낙엽길이다. 안 보이던 붉은 단풍이 보이기 시작하고, 발밑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떨어져 천연 카펫을 걷는 기분이다.

 

차츰 숲 사이로 암봉인 영암산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우측으론 명산으로 손꼽히는 근육질의 금오산 역시 숨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부담없이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는 꼬불꼬불한 옛길인 데다 소나무와 울긋불긋 단풍의 색조화도 일품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환상의 숲길 구간이다. 좌측으로 선석사 방향으로 내려서는 옛길도 열려 있다.

 

일순간 지금과 달리 길이 약간 넓어지고 '보손지 2.2, 영암산 1.1'라 적힌 이정표를 만난다. 선석산과 영암산의 경계이자 칠곡 북삼읍과 성주 월항면을 잇는 일명 돌문이고개이다. 산 아래나 멀리서 보면 푹 꺼진 잘록이다. 성주 쪽은 아예 길이 없고, 오른쪽 북삼읍 보손지 쪽은 많은 산꾼들이 다니는지 길이 반듯하다.

5분쯤 뒤 놀랍게도 눈앞에 거의 직벽이 다가와 있어 순간 섬뜩해지지만 밧줄과 철계단 등 안전시설물이 설치돼 있어 그리 힘들지 않다. 보손지 갈림길을 지나 12분 뒤 갈림길을 만난다. 직진하면 로프 구간(270m), 우측은 우회길(350m)이다.

 

몇 걸음 내려서니 우측으로 집채만한 병풍바위가 떡 버티고 있다. 우회길인 셈이다. 얼핏 봐도 높이 20m, 30m쯤 된다. 돌계단을 따라 한 굽이 오르면 시야가 트이며 근육질 암릉의 위용을 드러낸다. 동시에 주변의 산세와 지형이 한눈에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선석산에서 방금 지나온 마루금이 손금처럼 보이고 좌측 칠곡 쪽에는 금오산을 배경으로 북삼읍 보손지와 약목면이, 진행 방향으론 밧줄이 요리조리 매여 있는 암봉이 우뚝 서 있다.

 

정상석이 있는 영암산 정상까진 13분이면 닿는다. 밧줄을 잡고 두 개의 철계단을 오르면 된다. 안전시설물이 없다면 만만찮은 구간이지만 이 정도면 힘겹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대신 방심은 금물이다.

멀리서도 식별이 되는 멋진 소나무와 돌탑 그리고 정상석이 서 있는 정상에 서면 정면으로 금오산을 배경으로 하산할 마루금과 김천과 성주를 잇는 905번 지방도가 동시에 보인다.

 

하산은 직진. 암릉을 에돌아간다. 그 길도 아주 거칠다. 9분이면 암봉 앞에 선다. 좌우로 우회길을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직접 타고 오르는 수밖에. 바위가 발을 내딛기 쉽게 깨어져 있어 크게 문제는 없다.

 

여기서 다시 한 굽이 올라서면 북봉인 784.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보다 2m 높다.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이곳에 영암산이라고 표기돼 있다.

 

본격 하산길. 꽤 험로지만 뜻밖에도 단풍나무가 즐비하다. 이 길은 옛길이라기보다 905번 지방도로 하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간벌하며 조성한 등산로인 듯하다. 특이하게도 형형색색의 단풍은 등산로를 벗어나 우측 칠곡 쪽 사면에 치우쳐 있다. 단풍 명산이 부럽지 않다. 이따금 좌측 뒤로 북봉과 가운데 암봉 그리고 소나무가 식별되는 정상석이 있는 782봉이 한눈에 보이기도 한다. 좀 더 내려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도 시원하게 펼쳐진다.

 

35분 뒤 갈림길. 산행팀은 좌측으로 내려왔지만 어느 쪽으로 와도 10분 뒤에 '월명 성모의 집'에서 만난다. 784봉에서 47분 걸린다.

◎산행길잡이 2 [월간산]

▶영남의 산 영암산~선석산

▷영암산~선석산 784m~742.4m·경북 칠곡
▷골산과 육산을 동시에 경험금오산 남쪽

 

경북 칠곡군 북삼읍과 성주시 초전면, 김천시 남면의 경계에 자리한 영암산(鈴岩山·784m)은 이 지역의 사람들만 가끔 찾을 뿐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다. 이는 인접한 북쪽에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인 금오산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암산은 결국 금오산의 유명세에 눌려 가려져 있었던 것

 

금오지맥의 가지를 이루며 남동쪽으로 선석산(742.4m), 비룡산(546m)으로 뻗어가는 지능선을 형성하는 영암산은 이름에서 방울()과 바위()에서 비롯된 산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방울바위산 또는 방울암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성주쪽에서 바라보면 3개 바위봉우리로 이뤄진 정상부가 흡사 방울을 닮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일부에서는 매달린() 방울()을 뜻하는 현령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금오동천이 자리한 북삼면 사람들은 바위산인 금오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바우남산이라 부른다. 이밖에도 바울암산, 바우암산 등으로 불리는 이 산은 모두 순우리말인 방울바위산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영암산은 바위봉우리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놓여진 영암산의 머리 부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에 영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성주 사람들은 가장 남쪽 봉우리를 영암산으로 알고 있고, 거기에 표석까지 세워 놓았다. 사실 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는 북봉은 나무가 많은 흙으로 된 봉우리로 별다른 특색이 없다.

 

반면 남쪽 봉우리는 사방이 바위절벽으로 된 바위봉우리로 경관도 좋고 조망도 좋다. 또 성주쪽에서 보면 이 남봉이 방울처럼 보여 산이름은 예서 얻은 것이다. 성주 초전면쪽에서 북봉(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된 봉우리)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편의상 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된 봉우리를 상봉이라 하고, 방울처럼 보이고 표석도 세워져 있는 남봉을 주봉이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 상봉(북봉)에서 주봉까지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편으로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다.

▶영암산과 선석산의 이름, 그리고 선석사
반면 선석산은 바위가 없으며 등성이가 넓고 번번하여 밭을 일구어도 될 정도다. 따라서 선석산은 숲이 좋고 비탈이 가파르지 않아 산길이 산책길처럼 순하다. 고스락은 둘레에 큰 나무들이 많아 조망이 좋지 않다. 이 선석산 아래에 옛절 선석사가 있고, 육관도사가 우리나라 30대 명당이라 했다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이 있다.

 

영암산의 한자는 방울이라는 뜻의 령() 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방울바위 산'이 된다. 처음에는 방울이나 종과 관계 있는 전설, 또는 방울이나 종 모양의 바위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송춘상 대장은 성주쪽에서 보면 방울 모양으로 보여 옛날부터 '방울바위산' 이라 했다는 것이다. 영암산의 이름은 이처럼 그 유래가 분명했다.

 

선석산의 이름은 선석사에서 유래한다. 의상대사가 신라 효소왕 1(692)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신광사라 했는데, 신라 화엄10찰의 하나로 이름난 절이었다. 그때의 절은 지금의 절 서쪽에 있었다 한다.
공민왕 10(1361) 나옹대사가 주지로 오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이때 절터를 판판하게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 해서 절이름을 터를 닦는다는 뜻의 선() 자와 돌 석() 자를 써서 선석사라 했다 한다. 그때 발견된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그 일부가 땅 위에 내밀어져 있다.

 

영암산과 선석산의 산행은 따로따로 할 수도 있지만 두 산을 묶어서 하는 것이 좋다. 산 자체로 볼 때에는 영암산이 좋으나 영암산만 산행하면 산행시간이 짧고 선석산이 안고 있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나 선석사를 볼 수 없다. 또 선석산 하나만 오른다면 선석사와 왕자태실은 둘러볼 수 있으나 흙산으로 너무 단조롭고 산행의 맛이 적다.

 

따라서 영암산과 선석산을 함께 산행하고 선석사와 왕자 태실을 둘러보는 것이 산행의 맛도 좋고 뜻도 있다. 그러나 두 산이 성주군과 칠곡군 경계에 있어 산길은 양편이 모두 있지만, 아무래도 칠곡쪽에서는 두 산을 모두 오르기는 어렵다.

 

▶산행들머리는 신거리고개, 선석사, 보손동(칠곡군 북삼읍) 등 크게 세 갈래라 할 수 있다. 신거리고개(김천시 남면 월명리, 월명 성모의집)는 성주군과 김천시 경계가 되는 고개다. 월명 성모의집은 신거리고개에서 조금 북쪽 월명리쪽(김천시 남면)에 있다.

월명 성모의집에서 산등성이~~상봉~주봉~잘록이(영암산과 선석산 사이)~선석산~선석사를 거쳐 왕자태실로 내려서는 데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이 코스를 역으로 산행해도 된다.

 

4번 국도변의 보손동(칠곡군 북삼읍) 들머리에서 보손동~보손동 골짜기를 통해 잘록이(영암산과 선석산 사이)로 올라서는 데 약 2시간이 걸린다. 또는 보손동에서 등선이길을 이용해 곧장 선석산으로 올라서는 데에도 약 2시간이 걸린다. 보손동 길은 잘록이나 선석산까지 멀고, 영암산이나 선석산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흠이 있다. 칠곡이나 약목 북삼 주민들이 여가를 이용해 어느 하나를 산행할 때 이용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영암산-비룡산 종주산행의 들머리는 신거리고개.

김천시 남면과 성주군 초전면 경계인 고갯마루엔 장승부부 한 쌍이 산꾼들을 맞는다. 동쪽 지능선으로 산길이 뚜렷이 이어진다. 소나무숲길을 이어가면 금오산(976.6m)이 다가드는 전망바위 지나 이정표가 자리한 능선 삼거리에 올라선다(1시간20). 이곳에서 3분이면 영암산과 구미 시가를 조망할 수 있는 소나무 전망바위다. 다시 조심스레 안부를 내렸다 다시 오르면 정상석과 작은 돌탑이 자리한 영암산 정수리(20).

여기서 남동쪽 급경사 바윗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정동녘으로 능선길이 꺾어진다. 넓고도 느긋한 참나무숲길을 1시간10분 가면 누진산 정수리다. 다시 남녘 능선을 내려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르면 오늘 산행지의 막내인 비룡산 뾰족 정상에 닿는다(50). 하산은 남동 능선을 조금 내려가 첫번째 안부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계곡길을 이어야 한다.

 

다소 희미한 곳도 있으나 50분이면 두만지 지나 신유장군 유적지가 자리한 약목면 복지회관 주차장에 이른다. 신거리고개~영암산~누진산~비룡산~신유장군 유적지를 잇는 종주코스는 약 5시간 걸린다.

 

유적지 뒷산은 시묘산(367m). 이곳에서 길을 조금 내려간 곳에 세워진 등산안내도 지점에서 한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영암산영암산(782m)은 김천시 남면과 성주시 초전면, 칠곡군 북삼면의 경계에 자리한 산이다. 구미의 진산이며 도립공원인 금오산(977m) 정남녘에 자리한다. 영암산 남동쪽으로 누진산(742m)과 비룡산(576m)이 당차게 능선을 이어 달려간다.

산행의 들머리는 김천시와 성주군의 경계를 이룬 신거리고개. 90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는 한 쌍의 장승부부가 봄바람 같은 미소로 산꾼들을 맞는다. 절개지 위로 이어지는 산길 조금 오르면 소나무숲이 우거진 솔향 가득한 산길이다.

 

잔설이 더러 남은 산길을 휘적휘적 따라 오르면 벼랑 곁에 세운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다가드는 금오산의 묘한 산세며 남북저수지, 지경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산길을 이어가면 '영암산 정상' '무릉농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자리한 능선삼거리다.

 

여기서 길은 오른쪽으로 꺾이며, 곧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봉에 올라선다. 쌍봉으로 보이는 정수리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누진산, 비룡산으로 이어가는 산줄기가 햇살을 가득 받아 눈부시다.

바위를 돌아 내리면 구미시가를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 있다. 북풍을 피하고 따뜻한 햇살이 포근한 이곳은 간식을 나누며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인 쉼터다. 비탈길을 조심스레 내려 다시 20분 오르면 아담한 돌탑이 자리하고, 1998 '약목 설령산악회'가 세운 정상석이 자리한다.

 

정수리의 조망은 눈부시다. 북쪽으로 금오산이 성큼 다가오고, 동쪽은 굽이굽이 낙동강의 흐름이 아련하다. 영암산은 행정구역상 김천시, 칠곡군, 성주군에 걸친 산이건만 속하지 않은 구미 시가만이 한눈에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비록 법적으로는 나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방방곡곡의 명산을 두루 밟고 다니는 산꾼들의 무소유 정신을 이곳 산정에서 만난다.

 

묵묵히 사방을 둘러보노라면 어디선가 일깨움의 요령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요령산 이야말로 진정 깨달음의 청산이었으니, 누진산은 동남녘 능선을 이어야 한다. 밧줄이 걸려 있는 급한 절벽을 두 번이나 거푸 내려가 솔숲길을 이어가면 돌목재다. 영암산(한자를 풀이하면 요령바위산) 이름의 뜻을 살피려 몇 번이나 되돌아 본 내림길 적당한 지점에서 요령과 흡사한 정수리 모습을 발견하고 옛사람의 안목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돌목재 부근에서부터 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아름드리 참나무가 더러 보이는 넓고 느긋한 능선은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산책길이다. 급하지 않은 오름길도 이리저리 돌아가는 누진산 산길은 또 다른 여유로움의 인생길을 생각하게 한다. 준족이라면 영암산을 출발해 한 시간 조금 못되어 누진산 정수리에 올라설 수 있다. 베어 낸 나무들이 어지러이 누워 있는 정수리는 길고 넓은 여유를 보인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낡은 삼각점과 묵무덤이 자리하는 이곳에도 1997 '약목 청솔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다.

누진산은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를 이루었으나, 정수리 조망은 역시 구미시가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금년 4월 개통되는 경부고속철도가 발밑을 지난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1:50,000 옛 지형도에는 정상석에 적힌 것 같이 누진산이 분명하나, 최근 발행한 지도에는 이름이 선석산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비룡산으로 향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비룡산은 이름 그대로 하늘로 솟구치려는 뾰족한 산세를 자랑한다. 정상 조금 못 미친 바위지대에선 남녘조망도 시원하다. 누진산 출발한 지 한 시간이면 비룡산 좁은 정수리에 올라선다. 오늘 오른 3개의 산 가운데서 가장 낮은 막내며, 칠곡군에만 속한 산이건만 이름에 걸맞는 참으로 훌륭한 조망을 펼쳐 놓았다. 북쪽으로 도립공원 금오산과 구미시가 샅샅이 보이고, 낙동강대교를 지난 낙동강의 유유한 흐름이며, 경부고속국도, 4번 국도, 경부고속철도 등이 부처님 손바닥 보듯 한눈에 보인다.

 

하산은 동남녘 능선길을 따른다. 조금 내려가면 안부에 이르고,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계곡길을 따라야 한다. 간혹 희미한 부분이 있긴 해도 어려움 없이 '칠곡교육청 실습지' 팻말을 지나 초록못물 그득 고인 두만지에 이른다. 두만지 둑에 서서 내려온 산을 다시 우러르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비룡산 산세는 참으로 황홀하거니와, 백오십 여 미터 더 높은 누진산보다도 더 높아 보인다. 못 속에 비친 산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미련을 떨치고 다시 산길을 내려간다.

두만지 북녘 가에는 신유(1619~1680) 장군 유적지가 있다. 이 고장 약목 출신인 장군은 인조 23년에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여러 무직을 거쳤다. 효종 9(1658), 청나라의 요청으로 원군을 이끌고 러시아군을 전멸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이라 하며, 장군은 이 원정의 전말을 북정일기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이 일기는 우리나라와 러시아간 최초의 접촉에 대한 현지 사령관의 기록이란 점에서 세계적인 사료로 인정되고 있다. 그후 장군은 경상좌병사, 황해병사, 삼도통제사, 포도대장 등을 역임한 후 숙종 6(1680) 향년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경상북도 기념물 38호로 지정된 이곳 숭무사에는 신유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로써 두만강에서 비롯된 두만지 못 이름에 대한 화두가 저절로 풀리게 되었다. 지도에 이름이 없는 유적지 뒷산은 시묘산(367m)이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시묘산 등산로 안내도'가 자리한다. 시간이 허락하는 준족들은 이곳에서 한시간이면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다.  

 

▷신거리고개-(1시간20)-능선 삼거리-(3)-소나무 전망바위-(20)-영암산-(1시간10)-누진산-(50)-비룡산-(50)-약목면 복지회관 주차장

미타암~영암산~선석산~시묘산 종주코스

이번 등로는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칠곡군 약목면을 기점으로 보손동~미타암~영암산 동릉~북봉~남봉 정상~중리지 갈림길 안부(잘록이)~선석산~시묘산을 거쳐 신유 장군 유적지를 날머리로 삼았다.

 

약목면 소재지에서 김천으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 택시로 10분쯤 되는 거리의 길 왼편에 미타암을 가리키는 입간판이 있다. 산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멘트도로를 따르면 길 왼편에 가정집 같은 미타암을 두고 제법 널찍한 산길로 접어든다. 길가에 보손지 표석을 볼 수 있지만, 보손지는 물이 고인 저수지가 아니라 홍수나 산사태 방지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사방댐이다.

 

곧이어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편 길로 5분 정도면 중리지다. 저수지 옆 갈림길 팻말(영암산 2.4km, 영암산 2.8km)에서 우측 능선길로 접어들면 짙은 소나무숲으로 산길이 이어진다. 처음부터 올려치던 산길은 10여 분이면 경사가 다소 누그러지면서 임도를 건넌다. 속옷이 땀에 후줄근하게 젖을 무렵 숲속을 벗어나면서 암릉길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1시간쯤 올라야 한다.

 

이 산은 이름 그대로 바위로 형성된 골산이다. 특히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암릉은 이 산의 옹골찬 골격을 이루는 근간이라 할 수 있겠다. 크게 위험하지 않는 바위를 붙들고 이리저리 돌아 오르는 재미는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가 아닌가 싶다.

 

깎아지른 벼랑에 설치된 로프를 붙들고 올라서면 세 바위봉으로 이뤄진 영암산의 모습이 또렷하다.

 

아기자기한 암릉을 뒤로하고 올라서면 영암산 북봉(북봉, 중봉, 남봉은 필자가 임의로 붙임)이다. 세 바위봉우리 중 지형도에 표기된 상봉이지만 아무런 표시물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잡목들로 둘러싸인 일반적인 봉우리로 조망마저도 시원찮다. 여기서 북서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신거리고개에 이르고, 선석산 방향은 왼편의 바위봉으로 이어진다. 북봉에서 중봉을 거쳐 정상표석이 서있는 남봉까지는 양편이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어 약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봉에 올라서면 아담한 돌탑과 함께 정상표석이 자리하고, 운치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사방이 시원스럽게 트인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압권이다. 성주에서 김천쪽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공사가 한창이다.

 

성주군 초전면 일대의 비닐하우스 단지는 한낮의 햇빛을 받아 넓은 호수를 연상케 한다. 비닐하우스 단지 너머로 가야산이 솟아 있고, 시계방향으로 대덕산, 민주지산, 삼도봉, 황악산을 잇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아슴푸레하게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여기서 선석산까지는 1시간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널찍한 바위를 지나면 로프를 붙들고 내려가는 암벽지대다. 곧이어 또다시 로프가 걸린 바위를 내려서면 눈앞에 암릉이 나타난다. 이 암릉을 넘어서면 세 번째 로프가 걸린 바위벼랑이다.

 

이곳은 이때까지와는 달리 제법 고도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초보자들은 반드시 암릉 직전에서 오른편 우회로를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

암벽지대를 통과하면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 숲길이다.

 

곧 안부인 잘록이에 갈림길 팻말이 서있다. 다시 500m 정도 더 진행한 곳에도 이정표가 있는데, 보손지라고 가리키는 곳은 중리지의 등산로 입구를 말한다.

 

이제부터 선석산까지는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산등성이를 비켜 오른편 산허리를 에돌아 이어지는 산길은 수목으로 뒤덮인 숲길이다.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선을 따르는 이 산길은 영암산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영암산이 날카로운 바위와 벼랑으로 이뤄진 골산이라면 선석산은 부드럽고 넉넉한 육산의 면모를 지녔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여유롭게 올라선 선석산 정상은 널따란 쉼터를 제공한다. 둘레에 큰 나무들이 많아 조망은 좋지 않지만 주변은 넓고 편평하다. 선석산(禪石山)은 이 산자락의 성주군 월항리에 있었다는 옛 절 선석사(禪石寺)에서 유래한다. 절 아래편에는 육관도사 손석우씨가 우리나라 30대 명당으로 지목한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지가 있다.

 

그런데 정상표석에는 누진산(樓鎭山)으로 표기돼 있어 의아하다. 칠곡이나 성주의 지명에서 서진산(棲鎭山)으로 표기된 문헌은 많은 편이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누진산은 그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이는 한자인 루()와 서()가 서로 비슷한 글자인 관계로 잘못 쓰는 우를 범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국립지리원 지형도에도 선석산으로 표기돼 있다. 또 옛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성주목 산천조에는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의 태를 봉안하였다고 기록돼 있다잘못된 표석과 이정표 등은 하루 빨리 정리해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선석산은 남동쪽의 비룡산과 동쪽의 시묘산으로 산길이 나눠지는 갈림목이다. 이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시묘산으로 향한다. 시묘산은 지형도에 표기돼 있지는 않지만 신유 장군 유적지 북쪽의 366.9m봉을 일컫는다.

 

시묘산으로 향하는 산길은 구불구불한 능선으로 연결되지만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려야 한다. 15분쯤 지나면 금오산이 바라다보이는 전망 좋은 마당바위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얼마동안은 하늘을 가린 수목들로 주변 전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사거리 안부를 지나면 가끔 갈림길을 만나지만 능선길로 진행한다. 한 굽이 산길을 올려칠 즈음 산허리를 가로질러 나아가면 송전탑이 흉물스럽게 자리한다. 여기서 15분이면 능선 상에 쌓아놓은 돌탑이 있고, 발아래로는 북삼 일대와 약목 일부가 훤하게 보인다.

 

다시 10분 뒤면 이정표가 있는 안부 갈림길. 곧장 통나무 계단길로 오르면 체육공원을 만나고 된비알의 산길을 왼편으로 돌아 오르면서 봉분이 커다란 묘지가 있다. 다시 한 굽이 내려섰다가 올려칠 즈음 길가에 길원지(吉原地)라 새겨진 뜻을 알 수 없는 표석을 지나 왼편으로 오르면 시묘산 정상이다. 잡목에 가린 산정에는 삼각점(선산 45, 1982 복구) 외에는 별다른 시설물이 없을뿐더러 주변 조망도 시원찮다.

 

시묘산(侍墓山)의 시묘는 부모가 돌아가면 3년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묘지를 돌보는 시묘살이를 일컫는다. 이 산은 이와 같은 내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행방향으로 곧장 내려서면 시묘샘 팻말을 볼 수 있고, 신유 장군 유적지까지는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데,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있어 큰 어려움은 없다. 하산 후 알게 된 사실은 능선 갈림길에서 200m 떨어진 헬기장에 시묘산 표석이 있다는 것이다.

▶도기념물 제38호인 신유 장군 유적지(申瀏將軍遺蹟地)는 조선시대 무장을 모시는 사당이다. 장군은 1619(광해군 11) 이 고장에서 태어나 27세 때 무과에 급제, 1658(효종 9) 청의 요청에 의해 원군을 이끌고 만주로 원정하였다. 청 군사들과 함께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곳에서 스테파노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과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조선의 제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 하는데, 장군은 이 전투의 기록을 북정일기에 남겼다. 그 뒤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경상좌도와 황해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주차장 옆에는 약목면 복지회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별로 사람이 없지만 벚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지역학생들의 교육장소로, 또 연인들은 데이트장소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여기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도로를 따라 20분이면 닿는다.

◎도로/교통

▶대중교통 당일치기 불가, 승용차 이용해야

▷남해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서울 김천 방향~성주IC~왜관 성주 33~무주 성주 30~경산교 건너자마자 무주 김천 왜관 30분 좌회전~김천 구미 왜관~김천 초전 905번 지방도 좌회전~선석사 13.1~세종대왕 자태실 선석사 직진~김천 남김천IC(선석사)~김천 구미 남김천IC 905~어산 세종대왕 자태실 선석사~선석사 갈림길~세종대왕 자태실 관광안내소(주차장) .

 

▷날머리 '월명 성모의 집'에서 들머리 세종대왕 자태실 주차장에 위치한 차를 회수하기 위해서는 택시(054-931-7673)를 불러야 한다. 15000. 대중교통편으로 당일치기는 불가능하다.

▷노포동종합터미널에서 북대구터미널로 가서 갈아타야 하지만 오후부터 시외버스가 출발한다.

 

▶영암산 산행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일단 경부선 열차(1 49회 운행)를 이용,

구미·왜관·김천역에서 하차하는 것이 편리하다.

구미역에서 왜관역을 오가는 시내버스 1, 111(구미버스 054-481-7728·일선교통 054-452-2528) 1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약목면 소재지를 경유한다.

약목 정류장(054-975-6219)에서 산행들머리인 보손동 미타암 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선석사를 산행 들머리로 할 경우에는 성주(공용버스정류장 054-933-1208)에서 1 5회 운행하는 인촌행 군내버스가 있다. 선석 마을에서 성주로 나오는 버스 시각은 성주발 버스시각에 30분을 더하면 된다

 

▷신거리고개(월명성모의집)는 김천(공용버스터미널 054-432-7600)에서 성주를 오가는 시외버스(1 12회 운행, 1시간 간격)를 이용하면 된다.

▷대구 북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약목을 경유하는 시외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고 있다.

◎안내 사이트

영암산 : [성주군도로교통안내] 소개, 교통안내 등

영암산 : [칠곡군대중교통안내]

선석산 : [성주군시내버스안내]

김천시대중교통안내

비룡산 : [칠곡군대중교통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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