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행정안전부(
행안부)가 공중목욕탕과 공중화장실, 탈의실 등에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할 수 없도록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회사원 이모씨(26)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아무런 제지 없이 탈의실이나 목욕탕에서 CCTV가 나를 찍고 있었나?’ 그러고 보니 CCTV에 노출되는 것을 당연히 여겨서인지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뿐, 얼마 전 찾았던 찜질방 카운터에서도 CCTV와 연결된 모니터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본 듯도 했다. 얼마 전에는 엘리베이터에서 초등생을 폭행하고 납치하려했던 범인이 CCTV에 범행현장을 고스란히 들키는 바람에 덜미를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체 우리의 생활은 어디까지 CCTV에 노출돼 있는 것일까. 범죄 해결에 도움을 주는 CCTV는 유용한 것 아닌가. 이쯤 되니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날 지켜봐 주니까’ 안심이라는 사람도 있고 ‘날 지켜보고 있어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는 CCTV는 과연 필요악일까.
증가하는 CCTV우리나라에 설치된 CCTV는 몇 대나 될까. 정답은 ‘알 수 없다’이다. 공공기관에 설치 중인 CCTV의 경우엔 관리의 대상으로 설치 위치와 수 등이 파악되고 있지만 민간의 경우 사실상 설치 절차 사항에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행정자치부(현재 행안부)가 펴낸
행자부 정책백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경찰,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범죄예방, 쓰레기투기 단속 등 공익적 목적을 위해 전국적으로 약 13만여대의 CCTV가 설치·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민간의 경우엔 250만~300만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간단히 하루 일과를 떠올려보면 사무실 복도, 버스안, 지하철 승강장, 엘리베이터, 건물 지하 주차장, 도로와 골목, 마트와 매장까지 자신이 알게 모르게 CCTV에 노출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CCTV 수요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시장도 커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CCTV 시장은 전년 대비 40%가량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테이프를 갈아 끼우던 VCR 방식이 아니라 디지털 하드 디스크를 이용해 녹화 시간을 길게 늘린 DVR 방식으로 성능도 발전하고 있다. 사업장뿐 아니라 CCTV를 보안장비로 설치하는 일반 가정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범죄나 위법행위를 단속하고 해결해야 할 공공기관의 경우 CCTV 설치는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 된 듯하다. 지난 3월 경찰청은 아동·부녀자 실종 사건 총력 대응 체제의 일환으로 놀이터·공원에까지 CCTV를 확대 설치하겠다고 밝혔고, 5월엔
교육과학기술부가 학교폭력 대책 가운데 2010년까지 전국 초·중·고교의 70%에 CCTV를 설치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국토해양부도 지난 5월 아파트 단지의 승강기, 놀이터, 동 별 주출입구에 CCTV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주택건설기준 등에 대한 규정·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실제 CCTV가 범죄 사건 해결이나 예방, 안전관리,
교통 정보수집 등 다양한 상황에서 이용되고 있다. 지난 15일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20대가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40대 남성을 살해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마트에서 흉기를 구입하고 범행 현장인 초등학교 근처에 나타난 범인의 모습이 찍힌 여러 대의 CCTV 화면이 단서가 됐다. 지난해 11월 경찰청이 국회 행자위(17대 국회 기준) 소속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에게 제출한 CCTV 현황자료에 따르면 강남구에 CCTV 관제센터 설치(2004년 8월) 전후 서울시 5대 범죄 발생 건수를 비교한 결과 설치 이전 3년 동안엔 42만2174건의 범죄가 발생했지만 이후 3년 동안엔 32만7063건에 그쳐 22.5%의 감소를 기록했다. 주로 강도, 절도, 폭력 등 우발적 범죄의 경우 CCTV 설치 효과를 본 셈이다.
끊이지 않는 인권침해 논란CCTV는 그 긍정적 효과 못지않게 인권침해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현행법에 의하면 CCTV를 설치 목적을 넘어 카메라를 임의로 조작하거나 다른 곳을 비추어서는 안되고 녹음 기능은 사용할 수 없다. 또 CCTV의 설치 목적 및 장소, 촬영 범위와 시간, 관리책임자의 연락처 등을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인권단체 연석회의가 공개한 ‘공공기관 CCTV 관리실태 현장조사 결과’에 따르면 역시 현실은 법과 동떨어진 것 같다. 이 자료는 전국 공공기관에 설치된 13만여 대의 CCTV 카메라 가운데 서울시청,
서울지방경찰청, 서울시내 일부 구청, 정부청사, 교육청 등 14개 기관의 1만2778대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으로 79.5%인 1만159대의 CCTV에 줌, 회전기능이 설치돼 있고 당사자 모르게 음성녹음을 하는 등 법률을 위반하고 있었다. 안내판 설치율도 64%에 그쳐 CCTV 3대 중 1대는 안내판 없이 작동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안내판 설치율이 단 1%에 그친 기관도 있었다. 당시 인권 단체들은 “공공기관이 CCTV를 제멋대로 촬영하고 사용하고 제공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불법 CCTV를 즉각 철거하고 확대를 막아 인권 침해에 대한 시정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촛불 시위 국면에서도 CCTV가 논란이 됐다. 인권단체 연석회의가 꾸린 ‘경찰폭력·인권침해 감시단’은 시민들의 제보 등으로 수집된 사례를 통해 촛불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공공기관 CCTV의 줌 또는 회전 기능을 이용해 집회 채증을 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며 지난달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민간부문으로 넘어오면 현대판 ‘빅브러더’ 논란이 더욱 거세다. 공공기관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만 민간부분에는 CCTV 설치와 감독 등의 법적 근거도 미비하기 때문이다. 노동감시가 대표적 사례다. 지난 3월 인권단체들이 제시한 ‘이명박 정부가 해야 할 5개 분야별 인권과제 의견서’에는 CCTV 등 사생활 감시를 중단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의견서는 국가인권위가 발간한 ‘사업장 감시시스템이 노동인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해 근로자 204명 중 51.3%가 직장에서 카메라 등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으며 회사가 이런 장비를 설치하면서 노조와 협의를 거친 경우는 24.2%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감시는 노동자의 정신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으며, 노동 강도 강화, 노동조합 활동 감시 등 노동기본권 전반을 중대하게 제약한다”며 “직장에서의 CCTV 사용은 보안관련 업무에 한정해야 하며 공공기간에서의 설치 역시 제한적인 목적으로 국한하는 등 그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대로 된 개인정보 관리 기구 만들어야”CCTV를 둘러싼 논란은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 런던은 1999년 이미 하루에 300번씩 무인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통계가 잡힐 정도로 CCTV가 많아 ‘철(鐵)의 고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90년대 초 아일랜드 독립 활동과 맞물린 폭탄테러 등 테러의 위협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런던 전역의 CCTV는 이후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인구 14명당 1명꼴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프랑스의 경우 전국에 CCTV가 100만대 이상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지난해 “영국 경찰의 CCTV 네트워크에 감명 받았다”고 언급한 데 이어 CCTV를 3배 늘리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선 택시 강도사건에 대비하고 승객과 기사 모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택시 117대에 CCTV를 설치했다는 현지언론의 보도도 나왔다.
사생활 침해 논란도 격하다. 앞서 언급했던 이탈리아에선 택시가 승객에게 CCTV 안내판을 고지할 의무가 없어 시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BBC도 비판자들의 말을 인용해 “영국 전역에 수백만대의 CCTV가 있고 여기에 담긴 정보들과 최신 기술을 접목, ‘효율적인 감시체계’가 완성될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독일의 경우엔 대법원이 도로 위의 감시카메라 촬영에 제동을 걸면서 주목받고 있다. 대법원 내부통신망의 ‘해외사법소식 69호’에 소개된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최근 독일 헤센주와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에 사는 주민들이 도로 주행 시 차 번호판이 촬영되는 것에 대해 인격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재판소는 자동촬영은 위헌이라며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촬영된 번호판과 수배명단과의 비교·확인이 즉각 이뤄지지 않고, 번호판 정보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고 즉각 흔적없이 삭제되지 않는다면 개인들이 가지는 자기정보통제권의 보호 영역을 제약하게 된다”며 “자동촬영은 특별한 동기가 없거나 또는 포괄적인 영역에서 행해질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의 사생활과 정보 인권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지난 12일 행안부가 개인정보 유출과 오·남용을 막기 위해 개인정보보호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이용 목적, 기간 등을 반드시 알려야 하며 공개된 장소라고 하더라도 범죄 예방 및 수사, 교통 단속 등 공익적 목적이 아니면 CCTV를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시민단체들은 제정안에 대해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알맹이가 쏙 빠졌다”고 혹평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장여경씨는 “공공기관이 CCTV로 개인정보를 취급하는 것을 제대로 감독하려면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설립이 절실한데도 감독 대상인 행안부 스스로를 감독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유엔은 개인정보전산화 가이드라인을 통해 각국에 독립적인 개인정보 감독기구를 둘 것을 권고했고, 영국·독일·프랑스 등 유럽연합 국가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도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독립적인 감독기구를 설치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정부처로부터 독립되어 공공기관과 민간 영역의 개인정보 침해를 조사·감독할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의 설치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지난 17대 국회에서 여러 건 제출됐으나 해당 상임위에서 심의를 거치지 못하고 17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