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左: 나혜석 부부/ 右: 유럽 일주 당시(1927~29)의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빠리에 체류하고 있는 고암 이응로 선생의 부인 박인경 여사와 차 한잔을 나누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이화여고 졸업반 때였어요. 안양으로 스케치를 나갔다가 친척이 하던 양로원엘 들렀지요. 할머니들이 돌팍에 앉아 해를 쪼이고 있는데 저만치 홀로 앉아 있던 40대 여인 한 분을 가리키며 친척이 일러 주셨어요. "저분이 나혜석 씨야." 다가가 인사를 드리자 스케치북을 좀 보여 달라면서, "눈부신 나이로구나" 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린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는 그분이 더 눈부셔 보였어요. 그날 나 여사는
냄새 나고 어두운 방 한쪽에서 원고를 찾아내 와서는 손이 떨려 글을
더 못 쓰니 원고 정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빠리 생활을 기록한
글들이었지요. 훗날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문득 그 글들이 떠오르곤 했답니다."
아직도 조선 왕조의 잔영(殘影)이 서려 있는 수원. 정조 사후 한 세기 만에 수원에서는 증조부가 조선왕조 호조참판을 지낸 왕족 같은 명가(名家)에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인 나혜석(羅蕙錫.1896~1946)이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뼈저린 슬픔을 당해야 했던 내력마저 닮아 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나혜석의 이름이다. 아직 조선이 캄캄하던 1910년대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던 화려한
명성의 그 나혜석만을 기억한다. 구시대적 권위와 인습과 도덕률에 저항하며 실의와 고독 속에 삶의 종장(終章)을 맞았던 또 다른 나혜석에는 무심하거나 무지하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부친이 용인 군수를 지낸 명가에서 태어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 나혜석.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의 첫 개인전(1921년 3월, 경성일보사 안의 내청각)이 몰고온 경이로운 폭발력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 씨의 양화 전람회는... 인산 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더욱 많아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 5천 명에 달하였더라..."
한 사람의 전시회에 4, 5천 명이 몰렸다. 요즘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녀는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하여 1927년 구라파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또 한번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풍편(風便)으로나 듣던 피안이었다.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 총독이 마중 나갔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 여성으로서는 선택 받은
신데렐라였다. 장장 16개월에 걸친 구미 여행은 벅찬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을 들러 서구 미술의 흐름을 숨가쁘게 체험하고 193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구미유기(歐美遊記)>라는
글로 월간지 <삼천리>에 집중적으로 연재한다. 빠리에서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엿보았으며,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밤 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미술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거기서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오더라도 변변한 화랑 하나 없던 경성을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다. 예술가라고는 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가사와 육아 문제 등에 있어서 그녀라고 별다른 면책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 김우영만 귀국하고 그녀는 1년 동안 빠리에 남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 나혜석의 삶을 영위한다. 이 기간이야말로 완전히
화가 나혜석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리에 홀로 남은
그녀는 몇몇 연구소와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호흡하는데 특히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이고 활달한 필치가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꿈같은 빠리 체류 동안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의 염문으로 생애의 분수령을 가르게 된다. 여성의
버선목만 보아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제까지의 박수가 비난으로, 선망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류화가 나혜석>의 글을 쓴 이명온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의 과오도 아니며 원죄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 특히 이방 예술가를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빠리의 분위기가 감성 여린 그녀에게는 덫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삼천리>지에 저 유명한 "이혼백서"를 쓴다. 그와
함께 사회적 지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재기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여 마침내 100여 점이 넘는 작품으로 최후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급격하게 황폐해
갔고, 붓을 놓아버린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등지에 전전하며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언젠가는 수덕사 견성암으로 승려가 다 된
여류작가 김일엽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 남편과 아이들은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어미 노릇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고 먼 발치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송림의 바람 소리마저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로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육신은 무너져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해 겨울 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반신불수의 그녀는 마지막으로 옛 화우 이승만의 집에 들렀다. 거의 폐인의 행색이었다. 그녀는 몰라보게 피폐해 있었다.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앓고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오만하던 미의 여왕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달싹여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식들이...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른 볼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 2년 후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용산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고 절규했던 나혜석.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은 신화처럼 묻혀버렸다. 불과 50년 세월의 안팎에서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의 생가 터인 수원 "나 참판댁"도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지도 불명이다. 심지어 문화관광부에서 예술가들의 생가 터나
묘지에 세우기 위해 마련한 표석지마저도 수년 동안 수원시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김병종의 화첩기행에서-
농촌 풍경, 캔버스에 유채, 27.5x39cm, 개인소장
작품 설명
나혜석은 여성의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배치함으로서 평범한 농촌의 일상생활을 재현하고 있다. 그 예로 <봄>, <농가>, <농촌 풍경>, <봉황산>등이 있다. <농촌 풍경>은 흰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농촌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초가짚단 앞을 지나 걸어오고 있는 작품으로
농촌의 서정적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쪽의 쌓아올린 짚단으로
보아 풍요로운 수확을 마친 뒤의 시기로 보이고 왼쪽의 나무는 가지가
앙상하게 남아 있다.
강변, 유채, 23X32cm, 개인소장
인천 풍경, 합판에 유채, 15x22cm, 개인소장
다솔사, 합판에 유채, 54x69cm, 개인소장
선죽교, 목판에 유채, 23x33cm, 개인소장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원류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수원에서 출생하여 최초의 여성화가, 최초의 여성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독립운동가이며 선각사상가였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는 동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춘원 이광수의<무정>보다도 더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아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원전으로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나혜석은 3.1 독립운동에 가담. 5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쳐 우리 나라 한국 여성운동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에 정부가 2000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여 나혜석의 창조적인 인간상을 확인시켜 준 바 있다. 나혜석의 세속적인 삶은 파멸일망정 자기 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로서 나혜석을 패배자로 쉽게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여성"으로 보다도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당당한 사람, 나혜석이 1921년 시로 쓴 여성해방운동을 한편 읽어보자.
인형의 家
1.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2.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사명의 길로 밟아서/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3.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4.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유혹 횡행할지나/다른 날, 폭퐁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