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망명 중인 캄보디아 제1야당의 지도자 삼 랑시(Sam Rainsy) 총재가 훈센 총리의 부인인 분 라니 여사를 프랑스 법원에 고발하면서, 여배우 삐셋 삘리까의 암살사건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 사건을 상세하게 다룬 유일한 보도인 프랑스 <르 익스프레>(L’Express) 지의 1999년 10월 7일자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공개한다. 원래 프랑스어로 작성된 해당 기사를 '케이아이 미디어'(KI-Media)의 회원인 룻 사(Luc Sâr)가 몇해 전에 영문으로 번역했는데, '크세'는 이 영문 번역을 저본으로 삼아 한국어 번역을 시도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영문 번역문 자체가 그다지 명료한 문장으로 구성되지 않았었다는 점을 인식하길 당부드린다. [크세] |
(보도) 프랑스 L’Express 1999-10-7 (영문번역) KI-MEDIA의 Luc Sâr (국문번역) 크메르의 세계
[르뽀] 캄보디아 국민 여배우를 누가 죽였나
Revelations on a State crime
캄보디아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무용수이자 여배우인 삐셋 삘리까(Piseth Pilika)는 정권의 고위 인사에 의해 살해된 것일까?
1999년 7월 6일 아침, 그녀의 몸에 총격이 가해진 후 그녀는 치명적인 출혈을 일으켰다.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사랑받던 그녀는 200만명의 희생자를 낸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의 학정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고 싶어했던 인물이다.
삐셋 삘리까는 함께 부상을 당한 7세의 조카딸과, 미친듯한 속도로 프놈펜의 '칼멧병원'(Calmette Hospital)으로 차를 몰고 가던 여동생과 사촌에게 살인자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이름은 이미 폴 포트(Pol Pot) 시대에도 슬프도록 유명했고, 그녀가 자신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몇번이나 인용했던 이름이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예고를 해준 바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만일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을 폭로하라고 부탁했다.
총상을 입은 삐셋 삘리까는 7월 13일에 사망했다. 이 비극의 목격자들은 캄보디아 경찰에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국가적인 사이비 근거'에 따라 고용된 총잡이로부터 근거리에서 수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무용수이자 영화배우였던 그녀의 바램에 따라서,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본 <르 익스프레>(L’Express) 지에 그 전말을 맡겼다.
34세의 삘리까의 생명을 앗아간 이같은 범죄는 캄보디아 국민들을 너무도 자주 괴롭히는 형식이기도 하다. 전직 크메르루주 당원이었던 그들(암살자들)의 전지전능한 스폰서들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한사람의 스타를 암살할 권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7월 중순에 진행된 삘리까의 장례식에는 프놈펜이 과거 20년 동안에 경험한 가장 많은 군중이 참석했다. 그녀의 관은 군중들의 추모 열기와 '캄보디아 전통악기들'의 연주 속에서, 자신이 '크메르 고전무용'을 가르쳤던 '왕립 예술대학'(RUFA) 캠퍼스에서 화장됐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장녀로서 [고전무용계의 거물인] 보파 데위(Bopha Devi) 공주는 감정에 북받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삘리까는 캄보디아 문화를 대표하는 위대한 여배우였습니다. 저는 유족들과 더불어 그녀의 안식을 기원하면서, 살인자가 조속히 체포되어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릅다왔고, 기품있었으며, 온화하고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전국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국민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마치 그녀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기라도 하듯이 화장에 사용된 장작들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과일장수는 그녀의 영전에 향과 약간의 돈을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날 그녀가 오렌지를 사러 왔어요. 저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미에 매혹됐죠. 그녀의 이미지는 제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
거의 국장(國葬)에 가까운 추모열기 속에서, 수많은 상점들이 자발적으로 철시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음반산업과 '신문들'은 그녀에 대한 특집물들을 쏟아냈다. 캄보디아의 가장 유명한 작곡자들과 음악인들이 그녀의 비극을 묘사했다. 프놈펜의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 노점에서 잘 팔리고 있던 유명 가수의 CD 속에서 "뭐가 잘못 된거지?" 하는 삘리까의 목소리가 들렸고, <우리 피앙새의 죽음>(The death of our fiancée)이라는 곡도 히트했다. 방송의 경우, 103국 라디오는 그녀를 추모하는 팬들이 만든 애도 특집이 방송됐다. <리어스마이 껌뿌찌어>(Rasmei Kampuchea)나 <꺼 싼떼피업>(Koh Santepheap) 같은 주요 신문들은 판매량이 최고에 달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얽힌 범죄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들의 요구에는 모두 다 부응할 수 없었다.
1999년 10월 초, 비극이 발생한지 세 달이 흘렀지만 이 사건에 관한 어떠한 실마리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캄보디아 데일리>(Cambodia Daily)는 사건발생 15일 후에 "아직도 여배우 죽음의 목격자들로부터 진술을 청취하지 않고 있다"(Witnesses of the actress death are still not being heard)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후에 실린 두번째 기사는 "권력층을 두려워한 몇몇 사람들은 몸을 숨겼다"(Several went into hiding for fear of powerful people)는 상당히 메세지가 강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여배우가 저격을 당하던 순간, 혼잡한 182번가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침묵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찰에서 자유롭게 진술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
캄보디아의 몇몇 신문들이 삐셋 삘리까의 죽음이 고위층의 명령에 따른 저격사건이었음을 암시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중 한 신문인 <섬레잉 유와촌 크마에>(Samleng Yuvachon Khmer: 크메르 청년의 소리)은 심지어 일부 소식통들을 인용하여, "르윈스키와 빌 클린턴 스타일"의 스캔들을 방지하기 위한 암살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 신문은 클린턴 대통령 부부가 훈센(Hun Sen) 총리 및 그 부인인 분 라니(Bun Rany) 씨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싣기도 했다.
본지(르 익스프레)는 그 점을 확인했다. 즉 훈센 총리 부인인 분 라니 씨의 이름이 사망한 삐셋 삘리까의 일기장에 등장한다는 것이며, 그녀가 사망 직전에 그 이름을 몇번이나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삘리까가 운명을 맞이한 7월6일 아침, 그녀는 당시 혼자가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막 입학시험을 통과한 12세의 조카에게 자전거를 사주려 했기 때문에, 몇몇 가족들(성인 2명과 어린이 2명)과 함께 외출한 상태였다. 이들이 프놈펜의 '오로쎄이 시장'(O’Russei market)에 위치한 '데롱 자전거점'(Derong bicycle shop)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30세 가량의 남성이 조용하게 가게로 들어와서 그녀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앞서 말한대로 삘리까의 조카딸이었던 세레이미언(Sereimean)도 함께 부상을 당했다. 세레이미언은 삘리까의 여동생과 함께 육로를 통해 태국으로 탈출했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그들을 유럽의 한 지역에서 만났다. 수줍어하는 소녀는 아직 다치지 않은 한 팔로 바비 인형을 껴안은 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남자가 처음에 총을 쏘았을 때, 나는 누군가 자전거 타이어를 펑크낸 줄 알았어요. 이모가 쓰러지며 '도와줘요'라고 고함쳤죠. 그리고는 제가 그 옆으로 쓰러졌어요. 큰 부상을 당했죠." |
작은 소녀는 자기도 함께 총을 맞은 사이에, 킬러가 냉혹하게 자신의 일을 마친 후 공범이 모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총알은 소녀의 팔을 관통한 후, 그녀의 위 속에 박혔는데 제거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삐셋 삘리까의 여동생과 사촌동생은 2명의 어린이들을 대동한 채, 부상한 여배우를 자동차 뒷자리에 태운 후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후로도 일주일 동안 생명을 유지했던 빌리까는 차 안에서 몇마디 말을 힘껏 발음했다. 어린 조카딸은 다음과 같이 조용하게 말했다.
"내 옆에 쓰러져 있던 이모는 '이렇게 한 건 훈센 부인이야'라고 했어요." |
소녀는 침착해보였고, 실언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훈센 총리와 삘리까 사이의 교제를 처음부터 지켜봐온 측근인 삘리까의 여동생도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그 같은 증언을 긍정했다. 여동생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언니는 들것에 실려가면서 자신이 '칼멧 병원'(Calmette Hospital)으로 가는 것을 알았죠. 그곳은 모든 캄보디아 고위층 관리들을 치료하는 곳이예요. 그녀는 그 병원을 떠나길 원했어요. 그 병원이 자신의 생명을 끝내 제거할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
삘리까는 두 차례의 외과수술을 하는 동안 의식이 있었지만, 일주일 후에 사망했다.
하지만 더욱 놀랄만한 고발이 남아있었고, 이 여배우는 비극적인 이성교제를 자신의 일기장에 남겼다. 본지는 바로 그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암살되기 두달 전인 1999년 5월 10일 일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혹 룬디(Hok Lundy) 경찰청장이 중요한 할 말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경호원 두 사람을 보내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동생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나는 혹 룬디 청장을 [껀달(Kandal) 도의] 끼언 스와이(Kien Svay) 군에 있는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그는 내게 잠시 동안만 몸을 숨기라고 조언해주었다. 분 라니 여사가 나에 대한 질투로 격노했고, 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통제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 목숨을 허락해줄지 죽일지에 대해 나는 알 수 없다..... 신령님(떼와다)께서만 나를 구해주실 수 있을 것이다." |
혹 룬디 경찰청장이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여 미리 경고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첫째로 모든 캄보디아인들과 마찬가지로 혹 룬디 청장 역시 그녀의 팬이었고, 심지어는 그가 삘리까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혹 룬디 청장이 삘리까와 마찬가지로 고향이 베트남에 인접한 스와이 리엉(Svay Rieng) 도 출신이란 점이다. 삘리까는 후에 이 일에 대해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하기를, 혹 룬디 청장이 그녀에게 가능한한 빨리 도망(망명)을 가도록 조언했다고 밝혔다.
분 라니 씨가 훈센 총리와 젊은 내연녀(삘리까) 사이를 알아차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진 날부터 이러한 위험은 명확한 것이 되었다. 삘리까는 일기장에서 "나는 단지 불길에 휩싸인 벌레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삘리까는 양가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가 13세였을 때 폴 포트(Pol Pot)의 학정 속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1998년 8월에 훈센 총리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 훈센의 이름을 일기장에서조차 제대로 적지 못했다.
"어젯밤 .....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매우 기뻤지만, 너무 당황하여 감히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 대화도 없었다. 이후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그가 나에 대해 알려준 것을 행복하게만 생각했다. 그의 말투는 존경하고 사랑할만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1998년 8월 18일 정각 8시에 '왓 보텀'(Wat Botum) 파고다 뒤에 위치한 한 주택에서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결혼한 상태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새로운 사람이 나를 포기하단 할지라도, .... 나와의 관계..... 매우 밀접했다." |
몇달 후, 훈센 총리의 이름이 그녀의 일기장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나와 섬다잇 훈센(Samdech Hun Sen: 훈센 공 각하) 사이의 관계는 굉장한 것이다..... 1999년 1월 31일, 오후 10시가 되기 조금 전에, 그는 내가 따크마오(Takhmao)에 새로 구입한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밤에 다시금 찾아왔다. ....... 그의 말은 너무도 매혹적이었고, 나는 감히 믿을 수조차 없었다." |
이 가난한 나라에서 훈센은 자신의 애첩에게 값비싼 선물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자택 인근에 18만 달러 상당의 주택을 현금으로 사주었다. 또한 그녀 앞으로 20만 달러가 든 은행계좌도 만들어주었다. 훈센 총리는 그와 동시에 사법부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녀의 이혼소송이 빨리 진행되도록 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던 전 남편은 호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훈센과 삘리까 사이의 비밀교제는 얼마 안있어 악몽으로 변했다.
"그의 부인이 우리의 관계를 알았고, 우리가 서로 전화통화를 끊게 되자 내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1999년 4월 11일 일요일, 섬다잇 훈센은 마지막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부탁했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부정했다...... 나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몇시간 동안이나 엎드려 있었다......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심격을 시(詩)로 적었다. 나는 매일마다 울면서 지냈고, 내 마음은 쓰라림으로 가득했다." |
하지만 슬픔에 이어 곧 굴욕이 찾아왔다. 4월 19일 월요일, 훈센 총리와 가까운 관계이면서 여러 외국 기업들과 두드러지게 함께 일하는 한 영향력 있는 재벌 사업가가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훈센 총리가 그녀에게 사줬던 주택을 훈센의 부인(분 라니) 명의로 양도한다는 매매계약 서류에 지장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삘리까는 일기장에서, "나는 깊이 상처받았다.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영혼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고 적었다.
며칠 후 그녀는 '카나디아 은행'(Canadia bank)에 돈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이 나라의 퍼스트 레이디인 분 라니가 그녀의 계좌를 폐쇄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이 찾아와 그녀가 훈센 총리에게서 받았던 모든 선물들, 즉 토요타 4륜구동 자동차, 휴대폰, 사진들도 가져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삘리까는 훈센 총리가 친필로 작성한 [사랑의] 시 한 수는 감춰서 보관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시는 공문서 속의 총리 필적과 대조하는 필적감정을 거쳤다. 그 외에도 훈센 총리의 몇몇 소지품들이 그녀의 집에 잊혀진 채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귀중한 증거품으로서, 프놈펜에서 멀리 떨어진 안가에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삘리까에 대해 굴욕을 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분 라니의 복수에 대한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분 라니는 먼저 킬러들을 고용했다. 이러한 일은 서구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멀리 떨어진 캄보디아에서 그다지 큰 문제도 아니었고, 단돈 400달러면 총잡이를 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삘리까와 같이 숭배받는 스타를 제거한다는 것은, 심지어 '직업적인'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 라니가 고용한 첫번째 팀은 삘리까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위험을 경고한 후 국경지대로 몸을 숨겨버렸다.
이후 두번째 팀이 자신들의 계약사항을 이행했다. 삘리까에 대한 암살사건이 발생한지 4일 후, 삘리까의 여동생 남편, 즉 함께 부상당한 조카딸인 세레이미언 양의 아버지인 에앗 짠드라(Each Chandara)는 여러 대의 군용차량들에 둘러싸였다. '왕립 헌병' 병력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를 구타한 후 "입 닥치고, 처형의 죽음에 끼어들지 마!"라며 위협을 가했다. 프놈펜의 북쪽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현장에는, 군인들이 떠난 후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캄보디아 데일리>는 7월 12일자 1면에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하지만 '내무부'나 '군 총사령부'에서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삐셋 삘리까의 여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최초의 암살 시도가 있던 날부터, 어떤 경우든 우리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우리의 이야기와 진실이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보호책이 될 것이다." |
현재 미국의 일부 관리들이 법의 심판을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대너 로러배처(Dana Rohrabacher) 하원의원은 1999년 9월 16일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미 국무부 차관에게 서한을 보내, 훈센과 분 라니 부부가 삐셋 삘리까의 살해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분명한 점은 캄보디아 국민들이 자신들의 스타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서 자신들의 일상을 다시금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프놈펜에서의 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절대권력과 면책의 특권, 전직 크메르루주 당원들이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냉소주의 같은 것들이다. 훈센 총리도 크메르루주 지휘관들 중 한명이었다. 오늘날 캄보디아 지도부는 야만성과 부정부패, 그리고 무질서의 폭력 속에서도 자신들의 옛 동지들을 심판하는 척하고 있다.
바로 그들이 사는 사회 속에 여성들의 고통도 존재한다. 여성들이 쾌락의 대상이나 봉사자 역할에만 머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삘리까의 희생 및 그보다 이전에 일어난 여타 여성들의 희생에 대해,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빛을 투영시켜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은 무용하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캄보디아 국민들이 그녀 앞에서 굴복하길 원했던 바로 그 스타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소개한 <르 익스프레>의 기사 외에, 삐셋 삘리까의 죽음에 관한 또다른 증언도 존재한다. 프놈펜 광역경찰청장을 지낸 헹 뽀우(Heng Pov 혹은 Heng Peov)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혹 룬디 경찰청장과 알력이 있었고, 잠시 동안 해외로 도피했다가 2006년에 체포된 후, 2009년에 부정부패 등 각종 혐의에 대해 도합 90년이 넘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그는 <자유 아시아 방송>(RFA)과의 회견에서, 혹 룬디 경찰청장이 바로 삐셋 삘리까 살해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혹 룬디 전 경찰청장이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한 이후에 나온 것으로서, 진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캄보디아 정보 웹사이트인 '크메라이제이션'(Khmerization)은 2010년 6월 29일에 그의 진술 중 일부를 영문으로 공개했는데, 그 출처를 http://ia311543.us.archive.org/1/items/ HengPoevStatementofHengPoev/Statement_of_Heng_Peov.pdf 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 내용 역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르 익스프레>의 1999년 기사보다 훨씬 최근에 공개된 그의 증언은 앞서의 기사와는 또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 [크세] |
삐셋 삘리까는 누가 죽였나?
Who killed movie star Piseth Pilika?
'국가 마약단속국' 프놈펜 책임자였던 헹 뽀우의 진술
1999년에 나는 경찰부청장으로서 '범죄수사국'(Anti-Crime Bureau)을 이끌고 있었고, 그 영화배우(삐셋 삘리까)의 사망사건을 수사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죽기 전에 혹 룬디 청장과 교제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자주 해외로 나가곤 했다. 혹 룬디가 [그러한] 그녀와 만났고, 파티에 데려가거나 선물 등을 사주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발전했고, 그녀는 혹 룬디의 아들 하나를 임신했다 떼기도 했다.
이후 혹 룬디는 그녀를 훈센 총리에게 소개했다. 훈센은 그녀를 만났다. 삘리까는 훈센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센을 만난 후부터 그녀는 부유해졌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녀의 은행구좌에는 3만 달러가 남아 있었다. 또한 그녀는 최신형 혼다(Honda) CRV 자동차와 빌라 1채도 소유했다.
훈센의 부인(분 라니)이 그들의 은밀한 교제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는 매일마다 자신의 안전을 염려했다. 훈센의 부인은 혹 룬디를 뚜쟁이라고 비난했다. 혹 룬디는 분 라니와 화해를 시도했고, 삘리까를 훈센에게서 떼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살해됐다. 나는 살인범이 혹 룬디의 경호원이란 것을 알아냈다. 내가 [혹 룬디의 경호원이었던] 본나(Bon Na)를 심문하자, 그는 자신이 혹 룬디의 명령에 따라 공범인 께오 위쩻(Keov Vichet)과 함께 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했다.
나는 혹 룬디 청장이 연루된 사건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건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매우 심란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해됐지만, 경찰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고자료)
아래에 첨부된 사진은 훈센 총리가 삐셋 삘리까에게 전달한 친필 사랑의 시로서, 삘리까가 암살된 후 그녀의 유품 가운데 발견된 것이다. 이 사진은 1999년 말에 <프놈펜포스트>(Phnom Penh Post)가 공개했던 것이다. [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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