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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I. 日本 茶文化의 歷史 Ⅱ. 日本 茶道의 特徵 Ⅲ. 日本茶의 種類 Ⅳ.日本의 茶器와 茶具 Ⅴ. 日本茶 마시는 法 참고자료 : 日本의 茶人 |
I. 日本 茶文化의 歷史
1. 나라시대, 헤이안시대
중국에서 처음 차가 수입된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어 천황이 등장한 나라시대(710-794)에 중국으로 건너간 견당사나, 중국, 인도 등지에서 들어 온 승려들에 의해 團茶가 수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나라시대(710-794)인 729년 성무천황이 100여명의 승려를 궁궐로 불러 반야경을 강독하는 대법회를 연 후, 다음날에 차를 내었다[引茶]는 것인데, 이 내용이 기록된 “師光年中行事”나 “公事根源”은 비공식 기록이다.
헤이안시대(794-1192)의 차는 의례적인 것으로 약용과 접대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었다. 헤이안시대 초기까지는 중국문화를 모방했던 때였으므로 귀족, 승려, 문인들 사이에 중국풍의 끽다취미가 유행했다. 그런데 894년에 그동안 계속되었던 견당사 파견을 중지함으로써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섭이 중단되었고 그러면서 우아하고 화려한 왕조문화로서의 일본 고유문화인 소위 국풍문화가 일어났다.
한편 백제에서 건너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행기보살(668-749)이 48개의 사찰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동대사요록”에 나오는데 일본에서는 그 기록을 전설로 치부하고, 견당사였던 사이초가 805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오우미(近江)에서 재배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당시 견당승으로 에이츄(永忠), 사이초(最澄), 구카이(空海)가 있었는데 홍인(弘仁) 6년(815) 에이츄가 사가천황이 숭복사에 들렀을 때 헌다를 했다는 “일본후기”의 기록을 차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天台宗을 창시한 사이초는 차 재배를 하였으며, 眞言宗을 창시한 구카이는 차종자와 돌절구를 일본으로 가지고 왔다.
헤이안시대 후기가 되면서 무사들이 등장하여 무사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토지개간 등으로 지방마다 토착 호족들이 생기고 자신들의 토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2. 가마쿠라시대, 무로마치시대
일본의 중세는 가마쿠라시대(1192-1333), 남북조시대(1333-1392), 무로마치시대(1392-1573)로 이어진다. 12세기말 280년 만에 중국과의 국교가 재개되었는데 그 서막을 여는 인물이 바로 에이사이(榮西)로 그는 송나라 천태산 만년사에서 수행한 후 귀국하면서 송나라 차문화인 말차문화와 선종인 임제종을 도입하였다. 에이사이는 1211년 일본 최초의 차백과사전인 “喫茶養生記”를 저술하였는데 약용성이 뛰어난 차의 효능을 강조하였다. 또 사네모토(原實朝) 장군을 차를 통해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함으로써 차는 일약 ‘養生의 仙藥’이 되었고 에이사이는 ‘일본의 육우’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한편 묘에(明惠,1173-1232)는 1206년 도가노오에 화엄종 도량 고산사를 건립하여 화엄종을 부흥시킨 명승으로 에이사이에게 선과 차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사이에게 받은 차 종자를 도가노오에 심어 재배에 성공했는데, 현재 이 산에는 ‘日本最古之茶園’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이 도가노오에서 생산된 차를 본차(本茶)로 그 밖의 지역에서 생산된 차를 비차(非茶)로 구별했다.
이 시기의 인물로 행기 승려의 환생으로 추앙받는 진언 율종의 개조(開祖) 에이존(叡尊) 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복지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이존은 나병환자와 거지, 천민들을 구제하고 교화하는 일에 힘썼다. 또 나라시대 수도의 서쪽을 수호하던 서대사(765년 건립)가 천도 이후 황폐화 되었는데, 1235년 에이존이 부임하여 4년간의 공사 끝에 재건하여 1239년 대법회를 열고 불전에 차를 올리고 진수신(鎭守神)을 참배하였다.
때마침 내린 눈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자 에이존은 참배자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차를 권하여 마시게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지금도 이 행사는 매년 계속되고 있는데 서대사(西大寺)의 ‘오-차모리(大茶盛)’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전승되고 있는 이 다법은 지름 30㎝가 넘는 큰 찻잔에 차를 담아 참가자들에게 마시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에이존은 우지가와(宇治川)의 어부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살생을 금하여 그물과 어구들을 땅에 묻게 하고는 그 대안으로 차 재배를 하게하여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생산이 시작된 ‘우지차’는 서대사의 오차모리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차를 단순히 마시는 한 것이 아니라 송대에서 유행했던 투차 즉, 차 겨루기가 유행했는데 찻물을 마셔보고 결과를 적던 채점표가 남아 있다. 전쟁소설인 ‘태평기’에는 “대숙소에 일곱 군데를 꾸미고, 일곱 가지의 차를 갖추어, 칠백 가지의 내기를 거는 물건을 쌓고 일흔 모금의 본비차를 마신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투차가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마쿠라시대가 붕괴되고 약 60년간의 남북조 전란시대가 있었는데 이 시기는 역사의 변혁기로 기성의 가치관들이 붕괴되었다. 바사라(婆沙羅)와 같은 새로운 인간상이 등장하고, 새로운 풍습들도 생겨났는데 기호품으로서의 차문화가 민중들에게까지 확산되면서 투차풍습이 대유행을 하게 된다.
60여년 간의 남북조 내란의 시대를 종결하고 무로마치시대(1392-1573)를 시작한 인물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였다. 이 시기의 중기에는 서원차(書院茶) 형식의 차문화가 탄생하는데 서원식의 귀족건축이 주택으로 보급되면서 8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尊政)을 필두로 무가, 귀족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넓은 서원에서 중국 목계, 양해의 전통 당회(唐繪)를 걸어 놓고 천목다완을 비롯한 중국 전래의 명품 도구들을 사용하여 복잡한 다법으로 형식과 법도를 지키면서 단정하고 전아(典雅)한 품위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완벽한 미를 추구했다.
무로마치시대의 차문화는 예능으로서의 차노유(茶の湯)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찰차였던 선원다례는 약용에서 헌공차라는 의식으로 자리를 잡고, 투차는 기호음료에서 예능화로서의 여러 조건들을 갖추면서 놀이예능으로 발전하는 이중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예능은 보통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이나 노래, 무용이 있고,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제례, 세시풍속, 축제, 그리고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예능, 마지막으로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다도, 꽃꽂이, 향도로 나눌 수 있다. 예능은 연기자와 관객의 긴장관계 속에서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무형성(無形性)이 있으며, 비일상 세계로 변신하고 싶은 소망이 내재되어 있다. 기호음료로 마시는 즐거움을 즐기던 차문화가 실내예능으로서 무대의상과 화장이라는 변신적 요소, 연기라는 행위적인 요소, 그리고 무대와 무대도구라는 장식적 요소, 마지막으로 미의식이라는 정신적 요소를 구비함으로써 예능화에 성공하게 된다.
이와 함께 오늘날 일본차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초암차(草庵茶)가 무라타주코(村田珠光, 1422-1502)에 의해 탄생하여 다케노조오(武野紹鷗, 1522-1555)를 거치며 발전해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에 이르러 완성되게 된다.
3.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1603-1867)에 시작된 에도시대( )는 사농공상의 신분이 정했는데 다도인들도 막부로부터 직제를 받아 쇼군가의 사범, 에도성 내의 스키야가시라, 샤도가타, 차보즈 등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각지의 영지를 부여받았다.
전국의 각 다이묘(大名) 또한 막부제도를 본받아 다도인을 고용하게 되었다. 이는 막부가 격식 높은 의례를 행정정책에 이용했기 때문에 오가사하라류의 예법 등과 함께 다도로 도입한 것이다. 에도시대에 들어와 다도는 여러 유파로 갈라졌고 어느 쪽이든 간에 전수받는 것이 사교조건으로 간주되었다.
막부나 다이묘들 사이에 다도가 성행하자 초닌 사이에서도 다도가 유행하였다. 특히, 다이묘들에게 출입용무가 많은 상인은 거래에 있어 다도를 이용하였다. 차카이나 차지 등의 행사가 많아진 것은 이 때문이다.
에도시대 후기에 유학이 부흥하자 불교적 색채가 다분히 있었던 다도는 유학자의 권세에 압박받아 다도인의 대우도 나빠졌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막부는 265년만에 멸망하고 德川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大政奉還(1867. 11월.9일)으로 왕정이 복고되자 천황은 강력한 메이지이신(明治維新)으로 국가의 대개혁이 이루어져 무사계급을 주축으로 한 봉건적 농경사회에서 상공인 중심의 근대 산업국가로의 대전환을 시작했다. 따라서 막부나 영주로부터 받은 영지로 생활을 유지해 온 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지금까지의 수준 높은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사회는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개화되어 봉건적 색채가 짙은 다도가 일본인에게 흥미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오코테센케의 11대 이에모토는 메이지 5년에 현대적 생활방식을 감안하여 의자와 탁자로 다테마에를 하는 입례식을 고안, 새로운 시대의 다도법에 순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일본사회가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기울면서 고유의 다도정신이 다시 각광을 받게되고, 더욱이 1차 세계대전 전후에 걸쳐 일본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증진하여 부유한 자본가들이 속출하면서 차도구의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하여 또다시 다도의 호황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다도는 상당히 민주화되어 일반 민중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친숙해졌지만, 한층 형식화되고 직업화된 경향이 있었다. 이는 메이지시대까지는 다도의 사범은 남자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다도가 일반화되면서 이를 배우려는 사람이 남자보다도 여자가 많아져 여성사범이 증가한 탓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도는 신부수업의 필수적인 코스로 젊은 여성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그때까지 문제되지 않았던 다도의 이론연구, 역사적 고증, 다기의 감상 등도 호사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일대 붐을 일으켰다.
草庵茶에는 일본다도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일본다인들은 그것을 ‘와비(佗)’로 부른다. 와비는 자득(自得), 한적한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 혹은 한거(閑居)로 설명하고 있는데, 마음의 충족을 구하여 도를 깨우치고자 한다. 와비는 부유한 귀족층이 많은 돈을 들여 호사를 자랑하며 물질적인 향락을 추구했던 서원차와는 반대로 가난함, 진지함, 청순함 속에서 화려함을 멀리하고 부족의 미를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지향했다. 그래서 당시 차인들은 한적한 곳에 소박하고 검소한 다실을 세워 검박하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다도의 핵심인 와비정신이다.
에도시대에 피어난 다도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한 센노리큐의 할복자살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정치이념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다도관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는 가운데 많은 유파들이 생긴다. 또 에도시대 말기부터 다인들은 직제화 되었다. 다인들의 직제화는 일본다도의 계보화를 촉진시켰다.
오늘날 우라센케, 오모데센케이 등 일본 내의 대표적인 유파들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메이지시대 초기 일본의 다도는 사회변혁기를 맞아 단절상태에 빠진다. 개화와 개방이라는 사회적 혼란기를 맞아 차에 종사하던 관리들의 일터인 다이묘나 장군 등 후원자가 없어짐에 따라 실업자가 생겨 다도계가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다도는 메이지 중기에 대두된 내셔널리즘에 따르는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과 다례의 재발견 때문에 살아났다. 다도의 후원자였던 다이묘(大名) 대신 메이지유신으로 성장한 재계의 거물들이 다도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다도는 아직도 ‘중생들의 정성어린 깊은 마음’을 사랑하는 센노리큐 그 차체다. 그는 “다도를 행함에 있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도록 수행의 덕목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고목이 눈에 의해 쓰러진 것처럼 서투른 솜씨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불완전한 미의 극치를 찬양했다. 센노리큐는 차 한 잔 속에 담겨진 정성과 인정의 향기, 그 속에 어린 손님과 주인의 마음이 화합으로 만나 이루어진 오묘한 소우주의 평정심이 진정한 차의 미학임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4. 초암차의 세계
와비란 한적한 가운데 느끼는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 혹은 한거(閑居)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세 무로마치 시대는 전통적인 미의식을 부정하며 값비싼 것이나 외면적으로 화려한 것보다는 정신세계를 충실하게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새로운 미의식을 존중하던 시기였다. 이런 미의식은 싸늘한 것, 시든 것, 절제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음의 추구로 나타났다. 이러한 미의식을 와비라고 한다.
일본의 다실은 한 칸짜리 작은 초가집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집이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단지 최소한의 심미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 일체의 호화로운 장식은 배제된다. 다실의 영향에 의해 오늘날까지 일본의 실내장식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하며 간단하여 마치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다실(茶室)을 만들어낸 사람은 센노리큐(千利休)였다. 초기의 다실은 독립적인 가옥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는데 단지 병풍을 치고 손님에게 차를 대접할 수 있는 객실의 일부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지금은 집안의 어떤 부분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집밖, 마당에 세워진 단독적인 공간을 다실이라 부르고 있다.
다실은 네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다실 자체는 다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다음으로 다구를 씻는 곳, 초대된 손님이 다실에 들어가지 전에 기다리는 공간 마지막으로 노지(露地)라고 불리는 화원의 작은 길이 있는데, 이것은 다실과 손님이 기다리는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길이다.
겉으로는 소박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다실에 나름대로의 심원한 예술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 세부적인 설계라든가 심혈을 기울이는 정도가 대단히 호화로운 궁궐을 지어내는 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좋은 다실을 짓는데 드는 비용이 웬만한 집 한 채 짓는 것보다 더 드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다실의 규모는 다다미 4장 반 (8.1평방미터)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크기다. 이것은 진정한 도를 깨우친 자는 공간적인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실의 기둥은 각기둥이 아닌 통나무이며, 벽은 풀을 쓰지 않고 칠하며 출입구는 쪽문이다. 노지(露地)는 손님을 다실로 안내하는 작은 길로 다회에 초대되어온 손님을 외부의 세계와 단절시키는 역할을 한다. 노지는 징검돌 등으로 길을 만들어 수목을 심어 만든 뜰이다. 노지(露地)를 지나면 손님들이 다실 앞까지 이르렀을 때 만약 그가 무사라면 반드시 옆 구리에 차고 온 칼을 벗어서 처마 밑에 마련된 시렁에 걸어야 한다. 다실은 절대적인 평화의 공간인 까닭이다. 그 다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작은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 다회에 초청된 손님의 의무이다.
다실에 들어오기 전에 노지 밖에서 기다리며 순서를 정했기 때문에 다실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을 때 아무런 혼란도 없다. 한동안의 고요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주인이 입실한다. 날이 밝은 때에도 경사진 지붕과 극히 낮은 처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내가 지나치게 밝아서 산만한 느낌을 주는 법이 없다.
다실 안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으로 깨끗하다. 어두운 다실에 먼지가 한 톨 발견될 경우 주인은 훌륭한 다인의 자격을 갖지 못함. 다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청소하는 법, 청결히 하는 법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실의 장식이나 다구의 색깔, 모양 그 어떤 것도 중복되어 서는 안 된다. 만약 꽃을 꽃아 놓았다면 화분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것이며, 둥근 다호를 준비했다면 물주전자는 각진 것으로 마련해야 한다. 검은색의 천목다완은 검은색 차통과 함께 있을 수 없다.
Ⅱ. 日本茶道의 特徵
일본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데 기울인 관심과 그로 인해서 만들어진 문화적 양상은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격식을 가지고 있다. 차를 마시는 데 있어서 단지 그 맛을 음미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모여 차를 마시는 순서와 차를 접대하는 방식, 다기의 제작 양식들을 일정하게 정하고 각 단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실을 꾸미고 다기를 준비하여 차를 마시면서 다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전체 과정의 양식을 통틀어 '다도'라 한다. 우리나라에도 차를 마시는 예법이 없지 않으며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일본 사람들만큼 그것에 세세한 규칙을 정하고 집착하지는 않기 때문에 다도라고 하면 누구나 일본식의 문화를 떠올리게 된다. 일본의 다도는 크게 세 가지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다실과 다기들의 물질적인 요소, 차를 마시는 방법에 관한 행위적인 요소, 다도에 관련된 미의식과 종교성들의 정신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곧 다도란 이런 요소들을 배워 익히며, 손님에게 접대하는 과정을 즐기는 일종의 유희 활동이자, 그런 가운데 세련된 의례로 전승된 전통 예능의 한 가지이며, 그것에 온 마음을 다 써서 몰입하다 보니 구도의 경지에까지 닿게 된 정신 활동인 것이다.
차의 고전적인 본디 형태는 한국이나 중국과 일본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를 약용으로도 마시고, 불전에 공양물로 올리기도 하며, 참선하는 승려들이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한 음료로 썼다는 점은 세 나라가 다 같았다. 일본의 차 문화도 본디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차 문화는 이미 나라 시대에 일본에 전해졌다. 815년에 승려 에이추가 임금에게 차를 바쳤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당시에는 중국 문화를 동경하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동안 차가 유행하기도 하였으나 곧 시들해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2세기 가마쿠라시대 초기에 승려 에이사이가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 가서 불교의 선종과 함께 중국의 차 문화를 들여와 사찰을 중심으로 마시다가 서서히 귀족들에게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14세기쯤의 귀족들은 자신의 호사로운 취향을 즐기는 방법 가운데 부수적인 하나로 차를 활용하였다. 중국에서 들여온 미술품이나 공예품들을 자신의 서재에 장식하고 손님을 불러 함께 감상하며 즐기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렇게 호화롭게 장식한 서재에서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차도 마시고 소장품을 감상했던 것이니 그런 가운데 차는 자연스럽게 상류계층은 물론 서민들의 생활에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5세기 후반이 되면서 차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적인 '다인'이 등장하였고 차를 마시는 여러 가지 규칙과 법도를 정하고 이 법도에 따라 차를 즐기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다도'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세 나라의 차 문화는 각기 크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직업적인 다인들은 차를 마시는 때와 장소, 그리고 차를 접대하는 절차와 차를 대접할 때의 마음가짐들을 일일이 정하였고 이에 다도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선종에서 따 온 참선의 정신과 의례 의식을 차를 마시는 정신세계와 과정 의식에 응용하여, 정신수양 수단으로서의 깊이를 갖추고자 했다. 요컨대 다도를 통해서 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선의 경지란 다도의 경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싹틔웠다. 곧 다도를 수련해서 얻은 경지와 참선을 통해서 얻은 경지는 같은 것이라는 '다선일미' 사상이 성립되었던 것이었다.
와비란 한적한 가운데 느끼는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 혹은 한거(閑居)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세 무로마치 시대는 전통적인 미의식을 부정하며 값비싼 것이나 외면적으로 화려한 것보다는 정신세계를 충실하게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새로운 미의식을 존중하던 시기였다. 이런 미의식은 싸늘한 것 시든 것 절제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음의 추구로 나타났다. 이러한 미의식을 와비라고 한다.
Ⅲ. 日本茶의 종류
일본차(茶)의 종류는 일본의 차는 제조 방법과 발효 정도에 따라 불발효차, 반발효차, 발효차로 분류된다. 일본에서는 불발효차가 발달되어 있으며, 반발효차와 발효차는 대부분 수입하고 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일본차’라고 하면 불발효차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불발효차
불발효차는 우리가 흔히 ‘녹차’라고 부르는 것으로 발효되지 않은 차를 말한다.
1) 센차(煎茶, せんちゃ)
불발효차 중 흔히 오차(お茶)라고 부르는 녹차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통 차를 말하면 ‘센차(煎茶, せんちゃ)’를 가리키며 일본 차의 약 80%가 이 센차이다. 차 잎의 색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새싹을 따서 바로 증기로 쪄 산화 효소의 활동을 멈추게 한 후 열풍으로 가열하면서 비벼 가늘고 길게 정리한 차로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차이다. 덮개를 덮지 않고 60℃에서 가장 맛있기 때문에 이 온도를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센차는 일본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거의 모든 일본 사람들이 식전 후에 마시는 차이다. 적당히 단 맛과 떫은 맛이 조화되어 상큼한 맛이 특징이다.
2) 타마료쿠차(玉綠茶, たまろくちゃ)
제조법은 센차와 비슷하지만 마지막 공정에서 가늘고 길게 정리하지 않고 동그란 모양 그대로 완성시키는 차를 타마료쿠차(玉綠茶, たまろくちゃ)라고 불리는데, 이 타마료쿠차는 떫은 맛이 적고 순한 맛이 특징이다.
3) 교꾸로차(玉露茶, ぎょくろちゃ)
차 새싹이 두세 장 펴졌을 때 차 밭 전체를 갈대나 짚으로 20일정도 덮어 씌워 햇볕을 차단하여 그늘에서 비료 등의 영양 공급을 충분히 하여 키운 고급 녹차이다. 빛을 제한하여 새싹을 키웠기 때문에 아미노산에서 카테킨으로의 생성이 억제되어 떫은 맛이 적다. 값도 비싸고 맛도 강해서 적은 양을 마신다. 특이 이 교꾸로차는 일본의 토산품으로도 아주 인기가 많다. (일본은 온천 지역마다 각 고장의 차를 판매한다고 한다. )
4) 말차 (抹茶, まっちゃ)
잎을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는 차로, 찻잎을 함께 먹는다. 교꾸로처럼 빛을 받지 않은 새순을 따서 찌고 말린 후 줄기와 잎맥을 제거하고 맷돌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갈아서 분말로 한 것이다. 보통 다도에서 사용되었는데, 최근엔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만들 때 사용되기도 한다.
5) 번차(番茶, ばんちゃ)
찻잎을 딴 곳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깎아낸 딱딱한 잎이나 센차를 만들고 남은(두 번째 이후에 딴) 크고 딱딱한 잎과 줄기로 만든다. 중저급품의 차를 의미하며, 강한 불에서 충분히 말린 다음 만들었기 때문에 황차(황차는 녹차와는 달리 차잎을 쌓아두는 퇴적 과정을 거쳐 습열(濕熱) 상태에서 차엽의 성분 변화가 일어나 특유의 품질을 나타내게 된다. 녹차와 우롱차의 중간에 해당되는 차로서 차엽 중의 엽록소가 파괴되어 황색을 띠고, 쓰고 떫은맛을 내는 카테킨 성분이 약 50∼60% 감소되므로 차의 맛이 순하고 부드럽다)에 속한다. 카페인등 자극성 성분과 떫은맛이 적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6) 호우지차(焙じ茶, ほうじちゃ)
번차를 강한 불로 볶은 것이 호우지차(焙じ茶, ほうじちゃ)로, 카페인이나 폴리페놀 자극물질이 적고 고소한 맛과 향이 시원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어린이들에게도 권할 수 있는 차이다. 이 호우지차는 95~100℃의 뜨거운 물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
7) 메차(芽茶, めちゃ)
센차나 교꾸로 차를 만들면서 새 싹을 가려내어서 만든 차로 맛이 진하고 향이 강하며 카페인등 자극 성분도 많다고 한다.
8) 쿠키차(莖茶, くきちゃ)
센차와 교꾸로 차를 가공할 때 나오는 줄기 부분만을 선별해서 만든 차이다. 그 중에서고 교꾸로와 고급 센차의 줄기는 카리가네라고 불리워 귀중히 여긴다. 쿠키차는 예로부터 자양강장의 묘약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독특하고 상큼한 향과 은은한 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 (참고로 적갈색의 굵은 줄기는 ‘봉차-棒茶’로서 판매하는 지역도 있다.)
9) 후카무시차(深蒸し茶, ふかむしちゃ)
차 잎을 찌는 시간을 보통의 약 두 배 정도 길게 한 차로, 차 잎 속까지 증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모양은 가루처럼 되지만 차의 색과 맛이 진해진다. 차 특유의 풀 냄새와 떫은맛이 적다. 장시간 찌므로 가늘고 미세해진 차 잎은 물에 잘 녹아 다른 차에 비해 유효성분도 많이 섭취할 수 있다.
10) 현미차(玄米茶, げんほいちゃ)
센차나 번차에 볶은 현미를 섞어 넣은 차이다. 여러 번 우려내어 즐길 수 있으며, 특히 용로차나 고급 번차와 현미를 같은 무게의 비율(50:50)로 하여 현미 녹차를 만들기도 한다. 볶은 현미의 고소함과 녹차의 산뜻한 맛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차이다.
11) 자스민차(じゃすみん茶)
녹차의 제조 과정에서 신선한 자스민 꽃잎을 넣은 차이다. 일본에서는 꽃차라고도 한다.
12) 코나차(粉茶- 가루차)
센차와 교꾸로의 제조과정에서 발생하는 가루를 선별하여 만든 차이다. 나누어진 공정 동안 다양한 타입의 가루차와 차 작물들은 상당히 주의 깊게 모아지며 다시 그 등급에 따라 나누어진다. 마침내 이 차 가루들이 혼합되어 코나차가 만들어 진다. 보통 코나차는 차 아가리라고 불리는 스시바(초밥집)에서 제공되며 비교적 낮은 등급들의 코나차들을 서로 섞여져 티백 형대로 만들어 낸다. 초밥이나 요리에 자주 사용되며, 녹차 특유의 색과 맛이 진한 차이다.
2. 반발효차
반발효차는 어느 정도 발효시킨 차로 우롱차(烏龍茶, ウ-ロン茶)가 있다. 차 잎을 가열처리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발효가 되는데, 도중에 발효를 멈추게 하여 우롱차를 만든다. 녹차와 홍차의 중간 성질을 가진, 발효 정도가 20%∼65% 사이의 차로 대만이나 중국 등에서 제조 되고 있으며 산뜻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3. 발효차
발효차는 거의 다 발효시킨 차로 코차(紅茶, こうちゃ-홍차)가 있다. 차나무의 어린 잎을 완전히 발효시킨 것으로 발효정도가 85% 이상이다. 떫은맛이 강하고 붉은빛을 띠며 인도, 중국, 스리랑카 등에서 제조 되고 있다.
Ⅳ. 日本의 다기와 다구
1. 다관 (차우리개) : 찻잎을 우려내는 그릇
끓여서 알맞게 식힌 물과 차를 넣어 우려내는 주전자. 다기를 선택할 때 가장 잘 골라야 하는 것이 다관이다. 기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다기를 사용하면서 가장 많은 불편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물이 다관의 부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직접 물을 따라보고 사는 것이 좋겠지만, 다기를 고를 때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다관에서 물을 따르는 부분인 부리가 몸체에 올려 붙지도 내려 붙지도 않아야 한다. 또 새의 목처럼 생긴 그곳이 알맞은 곡선을 이루어야 한다. 지나치게 휘이면 물줄기가 휘이고, 밋밋하면 반드시 찻물을 끊을 때 물이 흘러내린다. 부리가 몸체보다 길면 다관 입부분에서 찻물이 먼저 흐르고, 부리가 몸체보다 짧으면 물줄기가 세어서 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이 나오는 구멍이다. 구멍이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좋은데, 자른 각도가 밑으로 많이 쳐지면 물이 흘러내리고, 수평이면 물이 휘어져 내린다. 다관 속의 거름망 구멍이 크면 찻잎 부스러기가 빠져 나오고, 너무 작으면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초보자인 경우 가능하면 크기가 작은 것을 사용하는 게 차 맛을 잘 우려낼 수 있다. 이유는 차를 넣고 물을 넣은 상태에서 용적률이 80-90%일 때 가장 좋은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관이 여러 종류가 있을 경우 또는 어떤 특정한 차 맛을 깊게 음미하기 위해서는 전용 다관을 사용해 보면 아주 특별한 차 생활을 할 수 있다.
2. 찻잔, 찻종 : 차를 따라 마실 때 쓰는 그릇
찻종이라고도 하고 찻잔이라고도 한다. 위가 벌어진 것을 찻잔이라 하고, 엎어놓으면 종의 형태 또는 종지 모양을 찻종이라 한다.
우전차나 화전차 등등의 고급차로 여겨지는 차를 특별히 음미하고자 할 때는 작은 잔을 사용하는 게 깊은 맛을 느끼기에 적합하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큰 제다 공장에서 만들어 지는 차가 아닌 특별한 차의 맛을 내고자 할 때는 전용 다관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찻잔 또한 전용 찻잔을 사용하기를 권한다.
찻잔은 손에 잡았을 때 느낌이 좋은 것이 중요하다. 위가 벌어진 것, 종지 형태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개인의 기호에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대용차와는 달리 녹차는 한잔만 마시지 않고 여러 잔 마시므로, 지나치게 크지 않은 것을 고른다.
3. 찻사발
보통 사발정도(입지름 3cm적당)의 큰그릇 모양의 찻사발을 사용한다. 큰 찻사발은 두 사람 이상의 순배용으로 사용하며 작은 찻사발은 각자 잔으로 쓰인다. 청자 혹은 흑 유류의 찻사발이나 회백, 회청색의 분청다완이 말차용 찻사발로서 품위가 있으며 적당하다.
4. 잔대 (찻잔받침)
찻잔을 담아 나르고 찻잔을 올려놓기 위한 용기로, 도자기보다 나무로 만든 것이 편리하다. 찻잔이 도자기이기 때문에 받침까지 도자기이면 부딪치고 무겁다.
원형, 타원형, 사각형, 배모양 등이 있다.
5. 숙우(물식힘 그릇) : 잎차용 탕수를 식히는 사발
차의 제 맛을 내기 위해 끓인 찻물을 식히는 그릇으로, 잎차를 마실 때만 쓴다. 재료는 주로 도자기를 많이 쓴다. 물식힘사발 또는 귓때기사발이라고도 한다.
크기는 다관의 크기에 어울리는 것이 좋고 형태는 한쪽에 귀가 달려 물을 따르기에 편한 것이 좋다. 탕관의 끓인 물을 식히는 그릇으로 잎차에는 필요하지만 말차에서는 필요치 않으며 도자기로 만든 것이 좋다.
탕수를 다관에 부을 때 바깥으로 흐르지 않도록 입부분이 잘 만들어져야 하며 크기는 다관의 크기에 어울리는 알맞은 것이면 된다.
재탕이나 삼탕의 차를 낼 때나 손님이 많을 때 차를 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녹차는 물을 70℃ 정도 식혀 사용하기 때문에, 숙우가 필요하다. 이것을 고를 때 부리가 밑으로 쳐진 것을 선택하면 물을 따를 때 물이 그곳을 타고 흘러내린다. 따라서 쳐지지 않은 것을 골라야 한다. 또 밑의 굽 높이가 조금은 높아야 뜨거운 물을 따랐을 때 들기가 쉽다.
6. 다포 (찻상포)
차포는 찻상 위에 까는 삼베, 무명 등의 천으로 청결과 물기의 흡수를 배려하여 삼베나 무명을 사용한다. 무명은 가격도 저렴하고 삶아 빨아서 사용하기에도 좋다.
무명등의 천으로 떨어진 물기를 흡수하여 정갈해 보이며 상의 윗면을 보호한다. 면으로 된 것은 차포라고 하며 대나무나 등나무 껍질로 만든 것은 차석이라고 한다.
차상이나 차판을 덮는 덮개보는 홍색이나 자주색 보를 많이 쓴다. 찻상보는 예로부터 빨강색과 남색으로 안팎을 삼아서 만들어 썼다 한다. 굳이 붉은 찻상보로 하는 것은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붉은 보자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깔이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겨울에는 무명,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를 만들어 쓰면 좋고 차상과 차반을 덮을 정도의 크기면 적당하다.
붉은 계통의 보를 쓴 것은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민간신앙적 의미가 있다.
7. 다선 (찻솔)
찻가루와 끓인 물을 저어서 거품을 내어 차와 물이 잘 섞이도록 사용하는 다구. 대나무 껍질을 아주 가늘게 일으켜서 만든 것으로 찻사발에 가루차와 끓인 물을 붓고 휘저어서 융합 시키는 기구이다.
몸의 길이는 5cm쯤 되며, 몸의 직경은 2.5cm로서 솔의 길이는 7cm정도 된다. 다선은 대개 대나무의 쪼개짐에 따라 80본, 100본, 120본의 세 종류가 있으며 차의 양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보통 다선(80본)으로 100회 정도 젓는다.
다선의 손잡이 부분을 수절이라 하고 젓는 부분을 수선이라 한다. 다선의 중앙부분(모여진 부분)은 차 덩어리를 부수는 역할을 하고 통발형의 수선은 거품을 일구는 역할을 한다.
북송의 휘종황제가 쓴 '대관다론'에는 찻잔의 말차를 거품내기 위해 늙은 대나무로 만든 차솔이 등장한다.
8. 퇴수기 (물버리는 그릇)
다관 데운 물을 버리기도 하고 차찌꺼기를 씻어 내기도 한다. 흔히 버리개라고 하며 다관과 잔을 데운 물을 버리거나 다관을 엎어 찌꺼기를 버리는 그릇으로 입구가 넓어야 한다.
자기류를 곧잘 쓰며 깨질 염려도 없고 소리도 나지 않기 때문에 목기류도 좋다.
9. 차호 (차통)
차를 낼 때 찻통의 차를 우릴 만큼만 넣어두는 작은 항아리. 뚜껑 모양에 따라 차호와 차합으로 구분된다. 차를 담는 그릇은 꼭 닫혀야 한다. 하지만 밀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담아두면 차맛이 떨어진다. 도자기로 된 것과 주석, 알미늄, 나무로 된 것들이 있다. 말차는 작고 둥근 차합에 담는다.
10. 차시 (차측, 차칙, 차숱가락)
마른 찻잎을 다관에 넣을 때 사용하는 찻숟가락. 대나무의 절반을 쪼개어 만들거나 대나무 뿌리로 만든 것이 있다. 차시는 차통에 들어 있는 차를 다관이나 찻잔에 옮기는 다구로 차칙(茶則)이라고도 한다. 잎차용과 말차용이 서로 달라 다선은 찻사발에 찻가루를 넣고 탕수를 부은 다은 이를 휘젓는 데 사용하는 말차용 다구이다.
잎차용은 은, 동, 철, 나무 등으로 만드는데, 동이나 철은 녹슬기 쉽고 금속 특유의 냄새가 나서 차의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따라서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한 것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이 좋다. 대나무는 냄새가 나지 않아 차향을 해치지 않고 습기에도 강하며 적당히 문양을 새겨 넣으면 모양도 좋다. 먹감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11. 차상 (다담상)
차상은 다구들을 올려놓고 행다를 하는 다기용 상이다.
재료는 은, 동, 나무 등을 사용하는데, 보통 옻칠을 하거나 자개를 박은 나무상을 많이 쓴다. 형태는 다리가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이 있고 원형, 정사각형, 타원형, 팔각형, 서랍형 등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앉기에는 원형이 무난하다.
크기는 다구를 배열해 놓고 볼 때 너무 크거나 작지 않아야 한다. 차상은 둥글거나 네모진 것이 대부분인데 너무 커도 불편하고 너무 작아도 볼품이 없다. 차상의 다리가 통반으로 되어 있고, 찻상 둘레에 외고가 있는 것이 차상으로 제격이다. 다구를 제대로 갖춰놓고자 할 때는 보통 두 개를 쓰지만, 차 끓이는 사람의 용도에 따라 개수가 달라질 수 있다.
차상에는 차를 우려내고 도구들을 올려놓는 차반과 손님과 다과를 올려놓고 차를 마시는 다과상이 있다. 차상은 낮은 것이 특징이며, 손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놓여있게 됨으로 보기에 편안해야 된다. 시야에 걸리지 않고 팔을 편히 뻗을 수 있도록 낮아야 한다. 높이는 7-16cm인 것이 많으며 외상과 겸차상이 있다.
손님과 주인이 가까이 앉아 다과상에서 차를 우릴 경우 작은 곁판에 차통, 수건 등을 놓아둔다.
12. 탕관 (물끓이는 솥)
찻물을 끓이는 용기로 형태에 따라 다리가 달린 다정(茶鼎), 다리가 없는 다부(茶釜), 주전자형의 철병(鐵甁) 등이 있다.
재료에 따라 금제, 은제, 동제, 철제, 옹기, 석기 유리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무쇠나 구리로 만든 것은 녹슬기 쉽고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열의 전도는 느리지만 물이 쉽게 식지 않고 물맛이 좋은 돌탕관을 제일로 친다. 도자기로 된 것이 많이 유통되며, 전기로 물을 끓이는 것을 대신 사용할 수 있다.
찻물을 끓이는 솥으로 무쇠솥, 곱돌솥, 약탕관 등이 사용되나 곱돌솥이 제일 좋다. 무쇠솥은 녹이 나고 냄새가 나기 쉬우나 돌솥은 돌속에 천지의 수기가 엉겨 있다가 탕을 끓일 때 녹아 나와 차와 함께 어울려 맛을 싱그럽게 한다.
지금은 의식 다례가 아니면 화로나 탕관은 사용하지 않는다.
13. 차수건
차수건은 물기를 닦는 행주이다. 외올베(가제)나 타올을 주로 쓰며 삼베를 쓰기도 한다.
14. 물바가지
표자는 탕관에서 탕수를 떠낼 때 쓰는 국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바가지이다.
Ⅴ. 日本茶 마시는 법
1. 차 마시는 법
1) 과자는 카이시(懷紙:접어서 품에 지니고 있는 종이로 과자를 나눌 때나 술잔을 씻을 때 사용한다)에 들어, 차가 나오기 전에 모두 먹도록 한다.
2) 테이블에 차가 나오면 차를 가져온 사람(한토우: 半東)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다.
3) 찻잔을 오른 손으로 잡고 다시 왼손으로 감싸쥐고, 지캬쿠(次客: 다도에서 주빈 다음에 앉은 손님)와의 사이에 놓고, “ お先に(먼저 드시지요)”라고 인사를 한다.
4) 지캬쿠와의 사이에 있는 찻잔을 오른 손으로 잡고 다시 왼손으로 감싸쥐고, 자신 의 앞에 놓고 “いただきいたします(잘 마시겠습니다)”라고 주인에게 인사한다.
5) 찻잔의 그림부분이 정면이므로, 정면으로 마시지 말고 약간 오른 쪽으로 돌려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신다.
6) 다 마시면 오른 손끝(엄지와 검지)로 찻잔의 마셨던 부분을 왼쪽에서 오른 쪽으 로 가볍게 한번 훔치고, 그 손끝은 카이시로 닦는다.
7) 찻잔의 정면이 자기 앞으로 오도록 해서 테이블 위에 놓는다.
2. 차 마시는 순서
1) 손님은 앉아서 조용히 기다린다.
2) 한토(半東-차를 내어 주는 사람으로, 오차카이를 진행한다.)가 손님의 정면에 앉 아 차를 손님 앞에 놓는다.
3) 한토가 가볍게 목례를 하면 손님도 그에 응해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목례를 한다.
4) 한토가 물러 난 후, 양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옆 손님 쪽으로 찻잔 하 나 정도쯤의 거리로 옮겨 손님에게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여 가볍게 목례 를 한다.
5) 옆 손님이 답례의 목례를 하는 것을 확인 한 후 다시 양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들어 원래의 자리로 옮겨 둔다.
6)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주인을 향해 목례한다.
7)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려 왼손 손바닥으로 옮겨 올린 후, 찻잔에 가볍게 목 례를 한다.
8) 오른 손으로 찻잔을 시계 방향으로 가볍게 (45도 전후) 움직인다.
9)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오른쪽 손끝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이고 주인을 향해 목 례한다.
10) 남은 차는 맛을 음미하면서 두 모금 반 정도로 나누어 전부 마신다.
11) 찻잔을 왼손에 올린 채 자신의 입을 댄 부분을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마 신 흔적을 닦는다. 닦은 손가락은 카이시나 손수건으로 닦는다.
12) 오른 손으로 찻잔을 시계 돌아가는 방향으로 3번 정도 돌려 맨 처음과 반대 방 향으로 정면을 향하게 한다.
13) 오른 손으로 찻잔을 다다미의 정면에 놓고 아무 말 없이 기다린다.
14) 한토가 손님 앞에 앉아 찻잔을 정리하는 것을 허락 받기 위해 목례하면, 손님은 양손을 무릎 앞 다다미에 붙여 가볍게 목례한다.
참고자료 : 日本의 茶人
1. 무라타주코(村田珠光, 1422-1502) : 와비차의 開山
1) 생애
당물의 화려함을 추구하던 서원차와 당나라 장식법의 차가 유행하던 속에서 초암풍의 차에 대한 길을 열어 리큐의 등장까지 역할을 한 것이 나라 출신의 주코였다. 그런데 주코라는 차인은 차의 역사상에서 일본다도의 개조, 고금의 명인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지만, 어찌된 것이 그 당시의 근본 사료상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다. 주코는 1423년 나라에서 태어났다. 주코라는 이름은 승려들이 지어준 법명이며, 주코는 18세가 되었을 때 쇼메이지의 호린암에 살다가 출가를 하게 되었다. 주코는 22살이 되었을 때 번번이 속세의 일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승려로서의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다른 승려들과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되자 결국은 그 암자를 나와 세상을 떠도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그는 교토의 근처에 주인이 없는 작은 암자를 발견하여 거기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노아미를 알게 되어 노아미의 친구가 되면서 주코는 노아미에게서 문예와 예능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그는 서원대자의 차법을 배워 당화와 당물의 감정하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주코가 이후에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적인 것으로 하게 되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무렵 그는 노아미를 통해 차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삼십 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승려가 되어 다이토쿠지에 거주하고 잇큐 소준에 참선하였다. 잇큐의 지도는 매우 엄격하였지만 무사히 수행을 마친 그는 수행을 마치면서 인가의 정표로서「圜悟克勤 (환오극근)」를 하사받아서 이것을 도쿄 걸어서 사용하였지만, 이것은 차실용 족자로 한 것은 주코가 최초였다.
2) 무라타주코의 다도
일본 다도의 핵심 '차노유'의 시조는 무라타주코이다. 그는 나라의 승려 출신으로서 여러 곳을 유람하고 노아미를 따라 입화와 당물 감식을 배우고, 선승 이큐에게 가서 참선하고 선을 또한 배웠다. 그리고 불법도 '차노유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 지난날 히가시야마 시대의 당풍과는 다른 일본의 독특한 '차노유'법식을 세웠다.
'차노유'의 본질을 이루는 다다미 4조반의 초암 다실과 작은 뜰, 샛길을 특징으로 하는 다정등은 모두 이 뛰어난 다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와비차를 위해 착안한 법도이며 격식이었다. 그러한 주코를 스승 노아미는 "공자의 도를 배웠다"고 칭송하며 장군에게 추천하였다.
만사에 품위 있으며 마음을 가다듬어라.
행다례의 거취는 자연스럽게 눈에 띄지 않도록 할지어다.
항시 모이는 사람도 마음으로부터 명인처럼 생각하여라.
달에 구름이 가리지 않음은 좋지 않으니
초가에 명마(名馬)가 묶여 있음이 좋아라.
그러므로 변변치 못한 방에 명물(名物)을 놓는 것이 좋도다.
일상적인 차라도 노지(露地)에 들어서면서 나올 때까지 일생에
단 한 번의 모임(一期一會)처럼 차주인을 공경한다.
이상과 같은 주코의 가르침은 그의 다경(茶境)을 엿보게 함과 아울러, 와비차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다. 일본다도의 성립이다. 스스로를 천민이라 여긴 주코는 수도인 교토에 초암을 꾸미고 지냈다. 이른바 선풍의 시은(市隱)이다. 그리고 초암에 명물 다기를 간직하였다.'와비'의 경지에 몰입한 것이다.
일본 다도의 고전인 [산상종이기(山上宗二記,1589)]는 주코에서 비롯되고, 리큐에 이르러 대성되는 리쿠류 다도의 비전서(秘傳書) 이다.
다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주코가 비전을 기술한 <주코 일지>목록이다. 그 가운데 명물 도구의 이름을 열거한 부분은 뒤로 미루고, 다인의 각오를 강조한 부분을 보면,
*윗사람을 소홀히 다르고 ,아랫사람을 정중히 함을 신념으로 하여라.
*만사에 품위 있고 마음을 가다듬어라.
*마음으로부터 깨끗함을 좋아하도록 하라.
*아침에 일어나서 밤 이야기 나눌 때에는 오전 4시부터 '차노유'를 시작한다.
*주색을 삼가라.
*'차노유'는 겨울과 봄에 눈을 마음에 새겨 낮과 밤에 하여라. 여름과 가을은 초야(初夜:오 후 8시)가 지날 때까지 계속하여라. 그러나 달밤에는 홀로라도 밤늦게까지 하여라.
*자기보다 솜씨나 마음씨가 뛰어난 사람과 사귀도록 하여라. 상대의 사람됨을 살펴서 어울 리도록 하라.
*'차노유'에는 객실. 샛길. 경지(境地)는 물론, 대나무나 소나무가 있는 곳과 나란히 다다미 를 바로 깔도록(야외에서 차를 달일 경우)하라.
*좋은 도구를 지닐 것, 즉 주코-인세쓰,조오-리큐 등이 애호한 도구를 말함이다.
*'차노유샤'(다인)는 대체로 다능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재능이다.
주코 이래 다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차노유'를 하지 않는 자를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고, 제후(大名)는 물론 상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거기에 마음을 쏟았다.
2. 다케노조오(武野紹鷗, 1502-1555) :와비차의 골격 완성
1) 생애
조오는 30세쯤까지는 렌가 시인였지만 어느날 후지와-라데이카의 강의를 들으면서 영향을 받아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어 그 이후에는 학도에 몸을 담아 끝내는 명인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오의 조상은 원래 무사로 다케다라는 성을 얻었다.
조오의 조부는 오닌의 난으로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홀로 여러 나라를 유랑하다가 결국 상인이 돼서 사카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오의 아버지는 가죽가공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재력과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 되었다. 조오가 태어났을 때는 다케노 집안은 이미 사카이 상인중에서도 유수한 부호 상인이었다.
조오는 아버지가 40대 중반이 넘어서 처음으로 얻은 단 하나의 자식이어서 조오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성장하였다. 조오는 와카, 렌가, 다도, 릿카, 향도 등 당시 유행했던 문예나 예능에 몸을 담아 교양이 높은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랐다.
전국시대는 교토 중심의 문화였지만 오닌의 난 이후에 사람들은 동으로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신흥상업도시와 같은 사카이는 그 경제적인 조건과 지리적인 조건에 의해 형편이 좋은 피난의 땅이었다. 생활에 궁핍한 구게는 말할 것도 없이 렌가, 다도, 릿카, 향도 등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던 무리가 계속해서 사카이에 흘러들어왔다. 청년시절 조오는 그러한 사카이의 조건아래에서 와카와 렌가에 마음을 빼앗겨, 그 외에 여러 가지 예능에도 손을 내미는 등. 가업과는 동떨어진 취미생활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오에 있어서 다도를 말하자면 주코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고 기본적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창만해 낼 것만은 아니었다. 즉 주코는 당물 중심의 히가시야마풍을 전제하면서도 서민적이고 소박한 멋을 가진 히젠야키나 시가라키야키 등 일본적인 멋에 착안하여 그것을 특별히 여기는 방향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 주코의 다도의 의미는 당물과 일본적인 미의 조화로움 내지는 미적대비효과를 즐기는 새로운 차의 경지를 개척했다. 또 당물중심이라고는 하나 주코의 경우 수수하고 고담한 운치가 있는 당물에 착반하여 수집을 한 것이었다. 주코의 차에 있어서 이러한 다도의 미적이념은 조오에 의해 기본적으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조오는 이러한 미에 따라서 주체적인 심미안과 창의로 보다 획기적인 다도의 세계를 열게 된다. 그 당시는 조오의 취향에 의해 만들어진 차도구는 방대한 양에 이르고 서민 차의 세계에 끼친 영향력은 컸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2) 다케노조오의 다도
조오는 원래 가인(歌人)이었다. 상류사회의 전통적 교양으로서 긴 역사를 지니는 가도(歌道)는'미야비'의 가풍을 통해 차문화의 보급에도 이바지하였다. 지난날 히가시야마 시대에도 여러 다인이 가인이었으며, 차와 가도의 융합은 조오에 이르러 더욱 슬기롭게 이루어졌다.
조오는 '가심'(歌心),즉 시의 경지를 빌려 차문화의 궁극적인 '와비'를 표현하였다.
"옛사람들도 갖가지 노래로 읊었는데, 가까이는 진솔하고 공경하며 오만하지 않는 모습을 '와비'라 한다.
'4조반'의 이념을 더욱 추구한 조오는 가도에서 '간나스키'(神無月:음력 10월)의 마음을 '와비'의 근원으로 삼았다. 일본 다도의 화두라고 할'와비'는 선어(禪語)가 아니며, 전통적인 일본 시가(和歌)에서 오는 가도의 상징적인 하나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표현을 처음으로 차에 받아들인 다인이 바로 조오였다. 조오는 스승 주코의 차의 참뜻을 중국 오대의 화가 서희가 그린 백로 그림을 보고 감득하였다고 한다.
화려한 <백로도>(白鷺圖)에 주코가 소담한 표구를 해둔 것이다.
<신상 종이기>는 당물을 간직하고 다기 감식과'차노유'에 뛰어나며'한 길에 뜻이 깊음(一道志深)을 '명인'(名人)이라고 칭하여,
조오를 주코와 더블어 고금의 명인으로 드높인다. 조오는 만년에 선종에 입문하고,'일한거사(一閑居士)의 호를 받았다.
그때 선승이 그의 오덕(悟德)을 칭송하여 읊은 시의 한 구절.
다선(茶禪)하나임을 잘 헤아려
솔바람을 퍼올려 한점 부정(不淨)함이 없도다.
"차사(茶事)는 원래 한거(閑居)하여 탈속을 즐김"을 신조로 삼아왔던 조오의 다도는 고급 무사들과 사카이의 상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조오 자신이 부유한 상가 출신이었듯이, 문화생들 또한 부유한 상인이요 스승을 닮아 교양 있는 가인이며 다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천하 제일의 차노유 명인'이라 불리게 된 리큐가 나왔다.
3.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 : 일본의 茶聖
1) 생애
리큐는 1522년, 아버지가 사카이(堺:오사카 근처의 도시)에서 창고업자로써, 소금과 생선을 취급하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요시로오이고 23세 때에 소오에키라는 법명으로 개명했으며, 거사호인 ‘리큐’라는 이름은 1585년 그의 나이 64세 때 오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리큐는 17세 때 노아미(能阿彌, 1379~1471)의 흐름을 계승한 다인, 키타무키 도친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고, 19세에 도친의 소개로 쥬코류의 다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케노죠오에 사사받아 다도의 극치를 깨우쳤다.
그는 오다노부나가, 토요토미히데요시 두 장군 아래서 다두(茶頭;다인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특히 히데요시가 궁중에서 다회를 열었을 때 참여하여 다회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천하제일의 다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다가,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고, 쿄오토에서 70세의 생을 마감했다.
리큐가 천하제일의 다인으로까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노부나가와의 만남이다. 리큐의 출생지 사카이를 지배하에 넣은 노부나가는, 다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명물 다기를 속속 손에 넣기 시작한 이래, 이어서 리큐를 다두로 발탁했다. 노부나가가 혼노사의 난으로 사라진 후에는,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에 중용되어 그의 벗이자 다도 상대가 되었다. 이때가 1582년 리큐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 이후 다도에 심취했고, 다도의 보급을 원했다. 그는 전쟁으로 지고 새던 전국시대의 피폐해진 무장과 서민의 마음을 다도로 안정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2) 리큐의 다도 개혁
차 애호가로서의 여러 가지 다사개혁도 히데요시의 다두가 된 그의 만년에 주로 이루어 졌다. 예를 들면 리큐는 무라타쥬코 당시부터 초암의 다실로 출현한 다실풍의 건물에 대해서도 연구 개량하여 개조했다. 다다미 방 내부에 고천장, 통나무 기둥, 칠벽, 작은 출입문등 설비를 개량했다. 또, 다다미 4장반의 다실 외에 3장, 2장, 1장반의 작은 방도 만들었다. 다다미 3장의 방은 다케노죠오 때까지는, 명물 다도구를 갖지 않은 와비차인 전용의 다실 이었으나, 리큐의 식견에 따라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다미 3장, 2장의 작은 방에서 당으로부터 들여 온 다도구를 사용하여 다회를 개최하는 습관이 되었다. 다실에 꽂는 꽃도 화려하지 않은, 계절의 들꽃을 가볍게 꽂는 것을 최상으로 치고 봄과 겨울에는 엷은 동백꽃을, 여름과 가을에는 무궁화를 애호했다. 이외에도, 차 끓이는 법, 차요리, 복장, 차회에서의 휴대품 등에도 많은 개혁을 했다.
센노리큐는 다실에 들어설 때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문을 만들었다. 다실에 들어설 때는 고개를 숙여라. 그는 그러길 원했다. 다실에 들어설 때는 천하의 장군도, 지체 높은 그 어떤 귀족도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다. 자기를 낮춤으로 겸손과 속세와 인연을 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와비'의 정신이다.
센노리큐는 한적하고 청아하게 다실을 만들었다. 그 작은 방에서 무려 5, 6명이 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차를 마셨다. 천하의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콧구멍만한 방안에서 차를 마시는 광경. 이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의 '와비'의 정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평화이다. 재물과 권력욕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느끼는 평화. 그의 다도는 심미적 종교의 단계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그 전까지의 일본 다도는 귀족들의 사교문화였다. 권력이 있는 무인과 상인들이 다실에서 만나 서로 밀담을 나누며 상호이익을 도모했었다. 실제로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사카이의 거상, 가미야를 오사카 성에 초청해 다회를 열었는데, 그의 목적은 큐슈연안의 해상권을 잡고 있던 가미야의 협력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미야는 수많은 배를 가지고 있었고, 통상과 운수에 정통한 상인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초청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필요한 배를 빌리려고 했다. 임진왜란은 일본 유력상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센노리큐는 권력자와 상인이 만나 서로의 목적을 위해 담합하는 그런 다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본래 자유무역항 사카이 시의 상인 출신이었던 그는 귀족들의 다회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3) 센노리큐와 다실
리큐의 ‘차노유'의 궁극적 스카타는 초암 다실에서 구현되며, 와비차가 추구하는 이상경은 바로 다실이다. 일본 차문화에 처음으로 독립된 다실을 창시한 것은 리큐였다. 차문화의 초기, 다회는 보통 객실의 한쪽을 병풍으로 가린 다석에서 행해졌다. 그러다가 다실의 넓이는 조오에 의해 대체로 다섯 사람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다섯 사람이 넘는 다석은 ‘잡스럽다'고 한 중국의 다경에 따른 것일까. 다실은 다기를 미리 씻어서 마련해두는 예비실과 손님이 다실에 들어오기 전에 대기하는 현관, 그리고 좁은 뜰과 ‘노지'라고 부르는 들의 샛길로 이루어진다. 엄격한 격식으로 의장된 다실의 넓이는 4조반, 3조. 2조. 1조 반의 작은 공간이며, 실내 양식으로 말하면 천장은 줄 천장이며, 방 상좌 ‘도코노마' 의 폭이 4척 4촌, 깊이가 2척 4촌, 기둥은 각기둥이 아닌 통나무이며, 벽은 풀을 쓰지 않고 칠하며, 출입구는 쪽문이다. 그런데 칠한 벽은 농가의 벽에서, 쪽문은 어부의 집 출입문을 보고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스키야(취미의 집)'또는 ‘아키야'라고 부르는 다실은, 옛 선림, 즉 달마 상에 향화만이 놓인, 따라서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찬 선방을 다른 것이라 한다. 다실과 바로 일체를 이루는 다정은 원래 몇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쓰보노우치'와 다실에 이르는 샛길로 이루어졌다. 리큐는 다정에 더욱 마음을 써서 ‘쓰보노우치'에 손 씻을 물을 떠놓는 푼주를 두고, 나무는 한두 그루만 심었다. 다실에 이르는 좁은 길 ‘노지'도 다실 다정과 혼연일체가 되어, 단순한 공간이나 통로가 아닌 하나의 천지(天地)로서 엄격히 양식화되었다. 거기서는 리큐가 고안한 ‘세타'라는 나막신을 주객 모두가 신었다.
리큐의 말을 들어보자.
노지에서 주인의 첫 몸가짐은 물을 나르고 객도 첫 동작에 세숫물을 쓴다. 이것은 노지 초암의 대본이다. 이 노지에 찾아오는 객이나 맞이하는 주인이나 서로가 세상사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기 위한 세숫물 푼주이다......... 노지에서 나갈 때에는 객이나 주인 모두 나막신을 신어야 한다.....발소리로 그가 숙달된 자인지, 미숙한 자인지를 알 수 있다.
다실 속의 정주(亭主)와 객, 다회는 객을 맞아들인 주인인 정주에 의해 주로 진행된다. 주인은 극도로 섬세하게 의장되고 계산된 다실이라는 연극적 공간의 연출자이며 주연자이다. 그리고 객 또한 단순한 관객이거나 방관자가 아닌 어엿한 공연자이다. '차노유'란 이 주객이 호흡을 마쳐 엮어내는 영겁을 향한 순간의 드라마이다. '검'의 승부에 임하는 듯한 모두의 각오는 노지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짐되었다.
이제 다실 속의 소도구를 들여다보자. 다완의 귀함은 앞에서 말했으니 접어두고,
실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도코노마'의 족자로서 ‘첫 번째 도구이다.'
왜냐하면 주객이 더블어 ‘차노유' 3매(三昧)를 체득하는 데 소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족자는 다인이 귀의할 불가의 말씀 또는 앞선 명인들의 글씨를 제일로 여겨, ‘차노유'때에는 당연히 비장의 명품이 걸린다. 꽃 그릇의 꽃은 “반드시 단색으로 두 송이 가볍게 꽂는 것이 좋으며", 화려한 주홍색은 금기이다. 밤 다회에는 꽃을 피하나 흰 꽃은 괜찮다고 한다. 다회에 앞서 대접하는 식사를 ‘가이세키'라고 하며, 공복에 마시는 진한 차는 맛이 덜하므로 국과 채소 두세 가지 정도로 내놓는다. 그것이 당시 서민의 식사였다. 그리고 다과도 나오고 술도 가볍게 한다.
‘가이세키'란 옛날 중국에서 선승이 따뜻한 돌을 품고 공복을 참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찻단지, 향로, 차 솥, 수주(水注), 차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구 하나하나가 빈틈없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고 연출되었다.
이상과 같이 리큐 미학의 소담하고도 응축된, 그러나 극도로 양식화된 완벽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회마다 일생에 오직 한 번의 차사라고 명심하며 주객 모두가 엄숙히 임한다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 그 다어가 일본 다도의 또 하나의 키워드로 더욱 절실하게 떠오른다. ‘이치고 이치에', 일본 다도의 본질을 잘 표현한 이 말에서 나는 일상에서도 ‘진검승부(眞劍勝負)에 임하는 듯, 빈틈없는 표정을 드러내는 일본 무사도의 검은 그림자를 엿본 듯하여 적이 당혹스럽다.
4) 리큐의 죽음
다도의 스승으로서의 리큐의 권세는, 당시 다도라는 예도자체가 상류 무사 계급 사회에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일종의 은연한 세력이 되어 차츰 그것이 히데요시의 정치 외교면까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1590년 내란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천하의 대군을 이끌고, 관동지방에 출장을 갔는데 이때 리큐도 수행했다. 내란이 평정되고 리큐는 먼저 귀경했는데, 그 다음해인 1591년 돌연 죄를 뒤집어쓰고, 고향인 사카이에 칩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이토구지의 산문인 킨모카쿠에 리큐의 목상을 안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도구의 감정과 매매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제일의 다도 스승이라고 칭송 받던 리큐는 결국, 70세의 나이에 할복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주전자에서 찻물이 다글다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데,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칼로 복부를 좌에서 우로 일자로 갈랐다. 튀어나온 창자를 꺼내 놓고, 다시 복부를 횡으로 가르고 난 후 조용히 앉아 그의 애제자의 칼을 목에 받았다. 1591년 2월 28일, 아시야 거리에 있던 그의 집에서 할복하던 때의 광경이다. 할복한 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가이샤쿠, 즉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었던 것이다. 리큐가 자결하는 현장에는, 전날부터 3천명의 군사들이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리큐 문하의 다이묘들의 만일의 행동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리큐는 왜 죽어야 했는가? 리큐의 보호자였던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의 죽음과 함께, 위의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 것이 틀림없는 원인이다. 그러나, 목상과 다도구 사건 때문에 처벌된 것이 아니라, 리큐를 처벌하는데 있어서 이 두 사건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서 리큐 처벌의 진정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사카이 시민의 기골(氣骨)이 참화의 근원이 되었다. 무사를 무사로 여기지 않는 기개 있는 사카이 시민들이 지배층에게는 눈의 가시가 되었다. 더구나, 천하의 다이묘를 문하의 제자로 거느리고 있으며, 히데요시의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고개를 쳐드는 리큐 또한 눈의 가시였다. 그래서, 특권을 자랑하는 평민 출신, 다도의 스승이 없어져야 할 필요가 생겨 서둘러 처벌된 것이다.
5) 삼센케이(三千家)의 성립
센노리큐의 자손들은 그의 다도를 이어나가 오늘날 일본의 다도를 정립하고, 그 다도를 이끌어가는 지위에 올라가 있다.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인 다도의 유파 셋이 바로 그의 자손들이다. 소오탄(宗旦, 리큐의 손자)이 승계한 리큐의 정통 다도는 그의 자손에 이어졌는데, 그의 자식 때부터 세 집으로 나뉘어졌다. 셋째 아들 소오사(宗左)가 오모테(表)센케, 넷째 아들 소오시츠(宗室)가 우라(裏)센케, 둘째 아들 소오슈(宗守)가 무샤노코지(武者小路)센케의 이름으로, 그 계통을 이어 오고 있다. 각 유파 모두 종가의 스승을 제○○세 소오사, 제○○세 소오시츠, 제○○세 소오슈 식의 이름을 지금 까지 계속해서 쓰고 있다. 이 세 다도 유파를 산센케이라 한다.
오모테센케는 센케의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지금 제14세 소오사에 이르고 있다. 오모테센케의 종가는 현재 쿄토의 불심암 안에 있으며, 나고야, 토오쿄, 오오사카에 연습소를 두어 종가의 스승이 직접 출강교수하고 있다. 쿄토의 하원 서점에서『다도잡지』란 기관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무샤노코지센케는 센소탄의 차남인 일옹 종수가 타카마츠번 송평가의 다두에서 물러나 귀향, 쿄토의 무샤노코지에 다실 관휴암을 짓고 관휴암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돼, 현재 14세 불철제 종수에 이르고 있다. 무샤노코지센케는 쿄토를 기반으로 하여 종가의 선조의 인연으로, 타카마츠에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토쿄에는 과거 유호제 종수가 직접 출장 지도한 인연으로 주로 지식층 간에 보급시켰다.
우라센케는 센 소탄의 4남 소오시츠가 아버지 소탄이 세운 다실 곤니치안을 계승, 곤니치안 1세라고 칭한데서 비롯되며, 현재의12세 붕운제 종실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우라센케 종가에서는 센리큐를 1세로 하고 현재를 15세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