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강좌(성경의 힘) - 제56강 아브라함
바벨탑을 쌓을때, 그때 악한 선동을 한 사람이 니므롯이라는 사람인데,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여호와 앞에서’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여호와를 대적하여, 여호와께 맞서서’ 이런뜻도 돼요.
그는 처음 영걸인데, 그 니므롯이 나쁜짓 못된짓 하다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동을 하다가 명대로 못살고 죽었단 말예요.
죽고나서 그의 아내가 남아있었는데, 그 아내 이름이 ‘세미라미스’라는 여자예요. 세미라미스..
그 악독한 여자가 자기 남편이 죽고나서 자기 남편의 시체를 12토막으로 나누어서 각 지방으로 보냈어요. 여러분 사사기에 보면 그 비슷한 얘기가 있죠? 세미라미스가 그런짓 해서 퍼져나갔던가봐..
자기 남편이 죽은지 2년이나 3년후에 아들을 낳으면 뭡니까? 결국 사생자를 낳아서 사생아라는 말을 하기가 챙피하니까 죽은 자기 남편이 자기를 통해서 다시 환생을 했다 하는 것이 환생설의 기원이야.
이 악한 여자 니므롯의 아내가 한거야. 환생한 것이다 하면서 그 이름을 ‘담무스’라고 해요.
그를 태양신이라고 하면서 자기 남편이 죽었다가 다시 자기 몸을 통해서 환생해서 나왔다 이렇게 사기를 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아들 담무스는 일반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는 거예요.
남편이 죽었다가 다시 자기 아들로 태어난 신이라는 거야.
그리고 이 담무스가 바로 여인의 후손이요, 구세주다 이렇게 사기를 칩니다. 이 여자가..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자기 몸에서 난 자기 아들 담무스와 결혼을 해요. 정신나간 여자죠..
자기 남편이 죽었다가 다시 환생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남편이라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갖다가..
그래서 다시 결혼을 해요. 그러니까 결국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이 신이니까 어머니는 당연히 신이죠. 아들이 신인데 어머니는 신이죠.
그래서 아들신 어머니신 구도가 여기에서 나온 거예요. 남신 여신도 여기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여신을 ‘키벨레’라고 하고, 아들신을 ‘데이오스’라고 해요.
가나안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스다롯’이라고 해요. 들어보셨죠?
에베소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르테미스’라고 해요. 아데미. 아르테미스. 혹은 ‘다이아나’라고도 해요.
지난번에 영국 황태자비가 다이아나죠? 여신 이름이예요. 여신 이름..
자기 무슨 여신이 될려고 하다가 죽었잖아. 이름도 지을게 따로있지 그렇게 지으면 안돼요.
고린도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프로디테’라고 해요.
애굽에서는 여신을 ‘아이시스’라 하고, 아들신을 ‘호루스’라고 해요.
그러니까 세상 도처에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지면서 어머니신 아들신 형식을 다 가지고 흩어져가지고 그것을 다 봤어요. 그러니까 본대로 한거예요. 본대로..
이게 바벨론 종교라는 건데,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최고의 신은 ‘마르둑 신’이고, 마르둑을 히브리어로 하면 ‘므로닥’이예요.
폭풍과 창조의 신 ‘엔릴’의 기능과 공적을 물려받았다하고 마르둑 신은 바벨론의 민족신이죠.
또 바빌로니아 신들중에 ‘벨로스’라는 신이 있는데, ‘벨’신이라고 성경에 소개되었어요.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다’ 이런말이 나와요.
그리스에서는 ‘제우스’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이신을 ‘뎨아우스’라고 해요.
데오스 데우스 제우스 뎨아우스 똑같은건데, 지방으로 가서 이름이 발음이 조금씩 바뀐거예요.
일반적으로 신화가 발달한 나라는 그리스와 로마이지만, 기원은 언제나 바벨론에서 출발한 겁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도 근본은 바벨론에서 출발합니다.
바빌로니아 그리스의 신화들은 사실 신화(神話)라기보다는 인화(人話)입니다. 인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을 신격화해서 한 인화(人話)예요.
인화(人話)요 민화(民話)요 이런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신들중에는 상당수가 사람을 신격화한 것이기 때문에 민화요 인화야.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신들중에 여신이 있었는데, 그중에 유명한 여신이 ‘밀리타’라는 여신이 있어요. 밀리타.
이 여신이 앗수르 사람들은 ‘이쉬타르’, ‘아스다롯’ 이렇게 하고, 페니키아 사람들은 아스다롯이라 하고, 로마사람들은 ‘비너스’라고 해요.
이 신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그리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라고 하고, 에베소에서는 ‘아르테미스’ ‘아데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대 바벨론에서는 참 여인들이 불쌍했어요. 바벨론 여자들은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밀리타 여신의 신전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갖게끔 되어 있었어요.
악한 풍속인데, 이 말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역사의 아버지라고하는 ‘헤로도토스’라는 역사책이 있어요. 헤로도토스는 역사가의 아버지인데, 책중에 ‘역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악한 풍속을 소개하는데, 바벨로니아 모든 여인은 일생에 단 한번이지만 이런한 망측한 종교 행위를 하게 되는데, 그 기원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그 여인들은 밀리타 여신의 신전앞에 쭈욱 앉아 있어요. 줄을 맞춰서. 앉아 있으면 남자가 지나가다가 무릎에 은화 은전을 여자가 마음에 들면 무릎에 은전을 던지면서 ‘밀리타 여신의 이름으로’ 하면서 던지면 그 여자는 그날로 임자를 만나서 그 남자와 하루밤 종교행위를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후에는 다시는 오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빼어나고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여자는 금방 임자가 나타나서 집에 갈수 있는데, 얼굴이 민주주의형으로 생겼거나 호박과 메주의 중간형태로 생겼거나 이런 사람이면 골치 아파요. 집에 갈려면 몇 년동안 앉아있어요. 몇 년동안..
그래서 헤로도토스라는 역사가가 ‘참 고약한 풍속이다’라고 써 놨어요.
여인들은 신전에 앉아 자기를 지명하는 남자가 나타날때까지, 무릎에 은화를 던지면서 ‘밀리타여신의 이름으로’ 하는 소리가 들릴때까지 계속 앉아 있는거예요.
그래서 이런 풍속을 헤로도토스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자기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든 그런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런 악한 풍속이..
그러니까 온갖 더러운데 다 바벨론에서 나왔어요.
바벨론이라는 곳은 항상 그래요. 니므롯때부터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고, 나중에 이른바 신약성경시대 영적 바벨론 로마도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로마에서 나온거야.
지금은 온갖 더러운 것이 미국과 영국에서 다 나와요.
동성연애같은 그런 해괴망측한것도 미국과 영국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날 미국이야말로 마지막 바벨론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인 역사에서 다루는 밀리타여신의 기원은, 유대인 백과사전에서는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라는 여자가 바로 밀리타 여신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요세푸스도 ‘니므롯을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고, 구약성경에서는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다’ 할때,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여호와를 대적하여’ 라고 할수 있어요.
홍수 후에 바벨탑을 쌓게 된 사람들이 그 남신 여신을 섬기는 이 풍속과 형식을 가지고 세상 만국으로 흩어졌다는 거죠.
바벨탑을 쌓고 있을때 누구하나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날때쯤 되어서는 그 바벨론 갈데아 지방의 사람들은 악이 관영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어요.
그때까지만해도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가 아마도 60세쯤 될 때, 그때 노아가 세상을 떠났어요.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떠나서 하란으로 오게되는 그때쯤 되어서 노아가 세상을 떠나고, 그리고 노아는 그때 어디에서 살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떻든 연대를 계산해보면 아브라함이 60세 되는 해에 노아가 떠나게 되고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 다시 하란 우르파 쪽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란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하고 아브라함을 부르신단 말이죠.
여기까지가 구약의 원역사입니다. 원역사.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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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 부터는 아브라함 이야기인데,
여러분 아브라함 이야기는 다 제대로 할려면 시간이 많이 가요.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구삼고 싶을 정도로 아브라함은 좋은 사람이예요.
우리가 알고있는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 아브라함이예요.
그런데 이것도 역시 교회에 소개가 별로 잘 안됐어요.
겨우 그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하고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바쳤다 이런정도만 소개되었지, 그 외 아브라함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란에 살고있을 때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갈데아 우르에서 살다가 거기를 떠나자고 했던 사람이 오히려 데라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생각도 할수 있어요.
그래서 하란에 와서 한 10년정도 더 살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나서 아브라함이 75세쯤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지금 75세 같으면 곤란하겠죠?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어요. 그러니까 부름받고 나서도 1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으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했고 망설이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제가 사람을 전도할 때 한번딱 전도했는데 두말않고 따라나선 사람이 있어요.
대개 이런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성도도 성도 나름인데, 어떤 사람은 애를 먹여요. 심방 한번가면 교회 한번 나오고, 두 번가면 두 번 나오고 답방형식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안돼요.
딱 한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딱 따라나서는 이런 사람이 대개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대표적인 사람이예요.
그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부르셨는지 잘 알지 못하고, 또 어디로 가게 되는지도 잘 알지 못했어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채 상당한 세월이 흘러 갑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역을 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그런것도 아니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는데 그 일생을 하나님을 믿어서 훗날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것이 아마 그의 사명이었어요. 하나의 모델로.
하나님을 믿을때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로 사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어요.
왜냐하면 갈데아 우르는 물론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을 모델로 보여준 인물이 없었어요.
아브라함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범이요 순종하는 삶의 표본이 될만한 그런 인물이예요. 바로 그러한 삶의 모델로 사는 것이 아브라함의 사명이었어요.
우리도 단지 믿어서 내가 믿어서 구원받고 천당가고 그것만이 아니고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삶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그런 거룩한 삶이 있어야 되는데, 놀랍게도 우리 한국 기독교의 삶이 없다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서는 굉장히 잘 믿는 것 같은데 나가서 보면 전혀 차이가 안나는.. 세상사람과 구별이 안된다는 거예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교제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섭기만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섭기는 하지만 무섭기만한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보기만 하면 죽여버릴만큼 무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아브라함의 신앙은 무슨 큰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고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할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말해서 100살에도 아들을 낳을수 있는거야.
여러분 100살 다 안됐죠? 지금이라도 아들 낳을 각오를 해야돼요. 준비를 해가지고..
아브라함은 100살에 낳았는데..
노아시대 홍수로서 인류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훗날 니므롯 시대에 매우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된 것 같애요.
‘하나님 굉장히 무섭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다’ 너무 두렵기만 하니까 아무도 하나님께 가까이 올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 이미지가 영 잘못 심어져서 ‘하나님은 두렵기만 한 분이다..’
오늘도 우리 교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전혀 무골호인 같아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몰라 오늘날은..
안중에 하나님 두려워하는 그런 지식도 없어요.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부다.
성경을 잘못 본거야.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를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운 하나님이 화가 났다면 봐라. 언제 또 홍수로 심판하실줄 모른다.’
이런 생각 때문에 바벨탑을 쌓았던거죠.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소개되고 나타나는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지는 보여지는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라는 거야.
복의 근원 복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 앞에는 복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니까..
그냥 홍수로서 확 쓸어 버리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알고있었는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 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다’하는 것을 보여줄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볼때, 아브라함을 보지 말고 아브라함 뒤에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을 봐야 돼요.
그리고 심판을 해도 악하고 패역한 도시, 악하고 패역한 사람 골라서 제일 세계적인 대홍수 이런 것이 아니고 골라서 또는 지목해서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심판하신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능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 되시며 참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려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무슨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보여주실려고 하신 거죠.
이런 것은 무엇보다도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절대적 신뢰와 순종..
하나님을 믿을려면 똑바로 믿고 안믿을려면 아예 그만 두든지.. 절대적 신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역시 아브라함을 알아야 돼요.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다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건 복 받은게 아니야.
저는 우리 현대그룹을 일으켰던 정주영 어른같은 분이 정말 한국 사람중에 전형적인 한국사람이야.
그래서 지금은 세계 경영학 경제학자들이 정주영을 연구하기 위해서 온다는 거야.
그야말로 6.25 잿더미 위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거니까..
그런데 만약에 정주영 회장이 아브라함을 모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모르고 돌아가셨다면 그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야. 알고 있었다면 정말 위대한 사람이고.
그만큼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복받은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된다는 거죠. 그렇죠?
또 아브라함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 씨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요..
때문에 아브라함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윗도 알 수 없고 따라서 예수님도 알수 없는거죠.
천하만민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한 복을 받는 거니까..
한 사람의 이름으로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이름이 있다면 아마도 아브라함이 아니겠는가?
그는 참으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과연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 준거야.
여기 이땅에서만 아닙니다. 죽어 저세상 낙원에서도 아브라함의 이름은 창대한 이름이예요.
아브라함은 무엇보다 우리들의 모범으로 사명을 잘 감당한 분인데,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모범이죠.
그는 실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고, 흔히 선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수있다고 그러죠?
아브라함이야말로 정말 법이 필요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후 약 500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인데, 어느 시대라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요구할게 없어요.
우리가 만약에 아브라함처럼 산다면 율법이 요구할게 없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때 곧바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곧바로 순종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야.
엘리사 같은 사람은 자기 스승 엘리야가 길가다가 겉옷을 벗어 던졌는데 “알았습니다” 그렇게 따라 나서는 거야.
여러분도 집에 가다가 한번 해봐요. 저고리를 벗어서 탁 던져서.. 무슨 말을 하느냐 “날 따라와” 해봐요.
그게 예수님 전도 방법이죠. 세관에서 세리가 업무를 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딱 가셔서 눈을 맞춰요. “일어나 나를 따라와” 어떻게 합니까 따라와야지. 그 마태가 사도가 되었어요.
여러분 동사무소 민원실에 가서 “일어나 나를 따라와” 해봐요.
그게 예수님 전도 방법이라. 긴 말 안해요. “따라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할것없이 딱 부르자 바로 따라나서요. 곧바로..
이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죠.
또 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한 복을 받았는데,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는 사실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처음 나타난거야.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준거죠.
믿음과 순종은 정말 복을 받는 지름길이죠.
신명기에서 다시 인간이 복을 받는 길도 ‘내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지켜 행하면 즐겨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또 그렇게 복을 받았어도 그 복에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거부가 되었지만 자기 소유물 자기 재산에 노예가 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소유물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때 깨끗이 양보할수 있는 사람이라.
초지(草地) 문제 때문에, 여러분 양을 치는 사람 육축을 치는 사람은 초지가 생명과 같아요.
넓고 드넓은 소돔쪽을 자기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한다. 하고 선택권을 먼저 남에게 주는.. 이런 멋이 있는 사람이야.
그 다음에 아브라함은 언제나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기에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도 에셀나무를 심어놓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고 끊임없이 제단을 쌓고 예배와 경배를 성실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용기도 있고 담력도 있고 그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계산을 해서 승산이 없을때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한 적이 있었죠.
바로왕의 군대와 맞선다면 그것은 죽을려고 환장한거죠. 정말..
그런데 나중에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와서 사람들을 빼앗아 갔을때, 자기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사람..
사람을 길리고 연습시켰어요. 318명을 거느리고 3개국 연합국을 무찌르고 다 빼앗아 온거예요. 아브라함이..
겁쟁이라면 그렇게 못하죠. 아브라함은 아주 담대한 사람이예요.
그리고 그는 살렘왕이요 당시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던 사람이예요.
여러분 십일조 제도가 율법에 의해 생긴게 아니고, 율법이 있기전 아브라함때부터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손님 접대를 잘 했어요.
이게 복받는 비결이고 또 선교하는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돼요.
아브라함은 별로 할일이 없으면 길가에 나가 앉았어. 오는사람 가는사람 데리고 집에 들어올려고..
요즘 어떤 남편이 그래봐. 이혼을 하고 또 하고 열 번도 더 했을거라.
쓸데없이 남편이 길가에 나가서 오는사람 가는사람 붙잡고 데려 들어와봐..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고 사라도 그것가지고 이혼한다고 설쳤느냐?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사람을 모셔오면 사라는 종들 시켜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한 거야.
오는사람 가는사람 길손을 맞이해서..
여러분 여기 믿음 제일 좋은 사람 자신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복받게 살지도 않해놓고 복 달라고 우기는거야..
아브라함은 복받는게 당연하지요. 하는 것 보세요. 길에 나가 서서 오는사람 가는사람을 자기집에 불려 모셔서 발씻을 물을 주고 내가 송아지를 잡아올테니까 먹고 마음을 유쾌하게 한 후에 길을 떠나시오.
세상에 이렇게 하니까 복을 받죠.
아브라함이 복받을 일 한 것은 안보고 그런 것은 흉내도 못내면서 자꾸 축복 축복.. 그게 다 부도수표야..
아브라함은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린 것은 본 적이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또 그안에 살고있는 자기 조카 롯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단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잘 아시는데로 의인 50이 있으면 어떡합니까? 50에서 다섯명이 모자라 45인이면 어떡합니까? 40명 30명 20명 10명.. 아무리 아브라함도 10명에서 더 내려오지 못하더라고..
벼룩도 낯짝이 있어야지.. 더 내려오면 ‘내 조카 롯’ 해야하는데, 그 말을 차마 못해요.
말 안해도 ‘하나님이 소돔을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신지라 그 조카 롯을 내어보내셨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꼭 말을 해야 압니까?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는 신실한 삶을 살았어요. 항상..
이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비멜렉이라고 하는 사람, 아비멜렉은 그랄목자죠. 그랄 왕인데, 그 군대장관 비골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평화의 조약을 맺자고 찾아 왔어요.
이유가 뭐냐고 하니까 아브라함의 삶을 가만히 지켜 보건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 같다는 거야.
불신자가 와서 보고 당신의 삶속에 함께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분명히 봤다는 거야.
불신자가 성도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가 되는 거죠. 전도가..
오늘 우리는 엉망으로 살고 엉망진창으로 살고 세상사람보다 더 세속적으로 살고 하니까, 세상 사람이 밤낮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또 아브라함은 사람을 기를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사람 기르는 걸 해야돼요. 제일 위대한 일이 사람 기르는 일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기업이 바로 사람 기르는 일이예요.
양봉하는 것은 벌을 기르고, 양어하는 사람은 양어장 하는 사람은 물고기를 기르고, 양돈 하는 것은 돼지를 기르는데, 사람을 기르는 일이 바로 목회야 목회.. 하나님 하시는 일이예요.
가장 거룩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 곧 사람 기르는 일이죠.
또 그는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이야.
자기집에 길리운 사람 중에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에게 맡긴 것은 뭐든지 돌아보지 안해. 완전히 다 믿고 맡겨버려요..
위대한 일 할려면 사람을 믿어야 됩니다.
속을때 속더라도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맡겨야 위대한 일 할수 있어요.
그 다음에 그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충직한지는 성경을 읽어보면 알수 있어요.
어떤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은지 엘리에셀이 믿음이 더 좋은지 모를정도로 그렇게 믿음의 사람이예요.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손자도 아니고 다메섹 사람이야.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이예요.
또 아브라함은 공짜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기 아내가 죽었을때 세겜 사람들로부터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살려고 하니까 ‘아이고 우리가 어떻게 계산하고 따지고 사고팔고 합니까? 그냥 쓰십시오.’ 그렇게 해도 ‘아니야 내가 준가를 주고 사리라.’
공짜를 바라지 않고 준가를 주고 샀다는거야.
그는 아무리 전리품이 좋은게 있어도 전리품을 가지고 치부하지 않았다는 거야.
자기는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수지맞았다 그런말 듣기 싫다는거야.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 그것을 복을 누려야지 전쟁에서 수지 맞아서 전쟁 덕 봤다. 이런말 듣기 원치 않는다.
전리품으로 치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 돌려보내고 사람만 돌려보내고 우리 병사 올때 갈때 먹은 것은 할수 없고.. 하고 전리품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을수 없는, 도무지 인간 이성으로 믿을수 없는것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믿는사람이 아브라함이야.
또 더 나아가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실때는 드릴수 있는 사람이야.
100살에 얻은 독생자 이삭이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그것을 바치라는 거야. 잡아서 불에 태워서..
저는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고 고민하는 고뇌하는 장면들을 영화로 그렸는걸 봤는데, 속으로 아브라함이 뭐를 갈등하느냐? 그럼 하나님이 정말 가나안에 있는 신들과 똑같은 신입니까? 아들 잡아 죽이라는거요? 가나안 신들처럼요? 하고 아브라함이 갈등해요.
하나님께서 일절 말 안해요. 네가 알아서 해라. 네가 알아서 해.
그런데 정말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쳤단 말이죠.
사실은 바치지 않았지만 묶어놓고 칼을 들고 칠려고 했을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할때 칼이 내려오다가 딱 선거 아녜요.
그것은 사실 하나님은 받은걸로 간주하는거야. 받은거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던 아브라함을 보고 세상에 무슨 믿음이 그래.. 믿음도 팔자다 그냥..
100살에 얻은 독자를 찔러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느냐? 하나님이 아주 감동을 받으신거야. 감동을..
그래서 ‘네가 네 독자 100살에 얻은 독자를 나를 위해서 아끼지 않았으니까, 나도 너의 후손 너처럼 믿는 너의 후손을 위해서 나도 내 독생자를 내 놓을거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고 받을수 있는 수준의 친구예요. 친구..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자 했고 섬기고 싶어 했어요.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때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이 모범적인 신앙이예요.
우리가 만약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아볼려면 그 집의 청지기에게 물어보면 알아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알아볼려면 사찰 집사님께 물어보면 잘 압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가서 물어봐. 아브라함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면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벗이 될만한 분이예요.’ 이렇게 소개할꺼예요.
또 아브라함을 알아볼려면 그 일가친척 조카 롯에게 가서 물어볼수 있어요. 그렇죠?
사람이 타인에게 잘하면서 일가친척이나 가족에게 잘하기는 오히려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일가친척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참으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예요.
아들 이삭에게 물어볼수 있어요.
여러분 자기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는 훌륭한 아버지예요.
남에게 존경받기도 힘드는 일이지만 자기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는 실로 위대한 사람이라 할수 있죠.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보면 아브라함이 죽일려고 할때 죽기까지 할수있는 것 보세요.
그리고 맨 나중에 가장 점수따기 어려운데가 아내죠. 아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가서 아브라함이 어떤 분이지 물어볼수 있어요.
먼데 있는 사람에게 존경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존경받는게 어려운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의 말을 순종하고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는것처럼 섬기는 그런 사라였어요.
자기 남편을 ‘주’라고 자기 ‘주’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멀리 있는 사람 우리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벗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아브라함은 그럴만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독생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100살에 얻은 네 아들 독자를 나를 위해서 아끼지 않고 내어 놓았도다’ 하고 감탄해요. ‘나도 너와 너의 후손을 위하여 내 독생자를 내어 놓는 일이..’ 하는 여운을 남기는 겁니다. 그 안에서..
독생자를 희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먼저 경험했던 분이 바로 아브라함이예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얻은거죠.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자의 조상이 되게 한 겁니다.
또 그는 진실로 오고오는 모든 세대에 믿는자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로마서 같은데서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는거죠..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일생을 제대로 익혀보면 굉장한 인물로 드러나는 거예요.
앞으로 부분적으로 보지말고 전 삶을 통해서 보는 거죠.
75세에 하나님을 만나서 그로부터 정확하게 100년동안 즉 175세까지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100년을 하루같이 한결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문화의 도시 갈데아 우르를 떠나서 낯선땅에 일하면서 고향 생각이 많이 났겠지만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려고.. 그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나온바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즉 하늘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거죠.
우리 한국사람은 특히 고향을 사랑하죠.
그리고 외국에 가 있을수록 고국을 더 그리워하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나온바 고향에 한번 돌아가지도 않았어요. 떠나온 다음에 여행삼아 관광삼아도 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며느리감을 고르러 갈때도 직접 안가고 종을 보내었어요. 안갑니다. 다시는..
아브라함은 모든 선교사의 조상이죠. 바로 아브라함이야말로 초대 선교사예요.
물론 노아도 선교사라고 할수 있습니다만..
오늘날 선교사는 한번 파송받으면 그곳에 자신의 뼈를 묻고 막벨라 굴을 사 놓고, 아예 고향은 바라보지도 않고 전화도 하지말고 편지도 하지말고 오지도 말고..
거기에 가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돼요. 진짜로..
여러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양화진이 얼마 안돼죠. 양화진에 가면 감리교 선교사님 묘비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것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런 비문이 있어요.
어떤 분은 ‘나에게 목숨이 1000개라도 있으면 그 1000개 목숨을 한국을 위해 바치리.’ 그런 묘비가 있고요.
어떤 선교사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그런 묘비가 있어요.
그런 분들이 그렇게 선교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어쩌면 이만큼 온 거야.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생활은 오고오는 세대에 모든 믿는 사람, 모든 성도, 모든 선교사,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될만한 그런 인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개할 때,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정도 심도있게 잘 해주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이삭의 생애는 다음 시간에 이삭을 만나보겠습니다.
[정리]
◎ 니므롯
-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여호와 앞에서..' : '여호와를 대적하여, 여호와를 맞서서'라는 뜻
◎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
- 남편 니므롯이 죽은 후 사생자를 낳음
- 죽은 남편이 환생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담무스'라고 함
- 자기 아들 담무스를 신이라 하고, 자기도 여신이라 함
- 아들신 어머니신 또는 남신 여신의 기원이 됨
◎ 지방별 여신 아들신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