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설 연휴 마지막 날이네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을 맞아
모든 가정에서 설을 쇠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좀 특이하게 설을 쇠어 소개할까 합니다.
이미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부모님 밑에 태어난 자녀가 8남매이고,
맏 형님이 올해 83세이다보니
시집간 여형제와 조카딸을 제외하고도
설날 모일 수 있는 인원이 30명이 넘어
부산 근교의 한 해변가에 팬션을 빌려서 설을 쇠었습니다.
설날은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서울과 부산 등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인 만큼
가족의 안부를 서로 묻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서,
설날 전날 전야제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팬션 근처에 있는 대변항 어느 횟집을 예약해두고
저녁 6시에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전국에서 한 자리에 앉으면서 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먹고 살기 바빠서 잊고 지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또 옛날 고향 안방의 한 이불 밑에서 자랐던
지난 날들의 향수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횟집에서 문을 닫아야 할 시간까지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후에 팬션으로 돌아와
삼촌 세대들은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2차를 즐기고
조카들은 고스톱을 즐기고,
여자 가족들은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즐기며 설날 밤을 보냈습니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단체로 목욕탕을 다녀온 후
팬션에서 조카들이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떡국을 끓여 먹으며 설난 분위기를 가졌고,
기독교 집안이라 조카가 사회를 보고
목사인 맏형님이 설교와 덕담을 하며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세배를 마친 후에는 그동안 있었던 가족들의
근황을 가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설날 같은 명절에 모이게 되면 금기시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노총각 노처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장가 시집 얘기지요.
얼마나 이러한 화제가 노총각 노처녀에게
부담을 주는지 최근에는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명절에 가족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핑게거리를 제공하는
소위 버스아웃족을 위한 명절대피소가
유행하고 있다는 보도도 들릴 정도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집안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처녀인 조카가
미리 이러한 질문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먼저 정면 대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이러한 얘기를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고,
꼭 하시고 싶으면 적극적으로 중매를
해달라고 해서 한 바탕 웃기도 했습니다.
가족 근황을 마친 후 실내에서 제기차기 시합을 했습니다.
남자 가족중에 일등은 열네개를 찬 둘째 아들이 차지했고,
여자 가족 중에는 아내가 일곱개를 차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상금으로 내걸은 꿀 2병은
모두 우리 가족이 챙겨왔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족구를 하기 위해
부산에 있는 수영하수처리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지역별로 창원가족, 부산가족, 기타 가족 등
세팀으로 나누어 돈을 타고 승자를 가렸는데
내가 패자가 되는 팀의 일등 공신역할을 할 수 밖에 없어
세월의 흐름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축구 선수는 아니었지만
반 대항 경기에서는 꼭 선수로 뛰었고,
가족끼리도 옛날에 족구를 할 때는 제가 주전이 되었는데
지금은 공이 오면 애러를 너무 자주 범해서
패배의 원인제공자로 역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내 나이가 66세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족구를 마치고 그 다음으로 잔디구장으로 옮겨
전 가족이 참여하는 축구대회를 하였습니다.
여기에는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모두 출전하여 함께 선수로 뛰었지요.
어린 손녀딸과 할머니가 골키퍼를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계급장 떼고
공격과 수비를 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손자들에게 아침에 세배를 할 때는 후환(?)이 없도록
세뱃돈도 신경써서 두툼하게 챙겨주었는데,
축구장에 들어 서니 안면 싹 바꾸어버리고,
할아버지라고 봐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문지기를 맡고 있는 제수씨와 질부들도
남자들이 공을 몰고 가면서 고함을 지르고
공포감(?)을 조성하면,
무서워 골문을 열어 줄줄 알았는데
목숨을 걸고 골문을 지키며 비켜주지 않았습니다.
그야마로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였고
나이든 할아버지라고 해서 봐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면 공을 차는 것보다
웃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 30 분이 되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장소는 옛날 향수가 깃든 고향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 함께 뛰놀던 형님 동생,
그리고 조카들이 모여 옛날 얘기를 나누다보니
고향에 온 분위기를 가졌고,
여기가 바로 고항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으며,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찾았던 느낌이었습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기쁨을 같이 할 수있고,
힘들고 어려울 때 인생의 짐을 함께 나눌
가족이 있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자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소박한 가족 얘기를 소개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