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강제해직(解職)되다
일생일대의 대 변혁기를 맞았다. 꿈에도 그리던 결혼식 날이 회사에서 해고되는 날이 된 것이다. 정의(正義)의 신문, 양심(良心) 있는 기자. 자유언론의 선봉에 나선 기자들은 회사에서 강제 축출되어 거리로 내쫒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결혼식과 동시에 해직되는 비운(悲運)을 맞았다.
예정대로 청첩을 하여 3월 8일 (토요일) 신문회관 6층 결혼식장에서 < 동아일보> 직원과 임원, 대학 동창, 고교 친구와 흥사단 단우(團友)들과 친인척 100여명이 참석하여 축하와 성원 속에 예식을 치르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 첫날 밤 호텔 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니 회사에서 기구축소로 동료기자 17명을 해고시켰다는 것이다.
앗차--- 불길한 예감에 때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感知)하였지만 옆에 있는 신부에게 이런 기막힌 사건을 말 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회사 경영진과 극한(極限) 대립중인 편집국과 출판국, 방송국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는 신문, 방송 제작이 거부되는 등 언론 자유를 주장하는 기자들이 길거리로 나와 있었다.
축출된 기자들은 즉시 <동아자유언론 수호투쟁 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언론 실천의 보루(堡壘)를 사수(死守)하려다 밀려난 동아 기자 및 사원 150여명은 3월 16일 전체회의에서 각자의 해임 여부와 관계없이 전원이 당초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한층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따라서 우리의 투쟁은 농성 단식(斷食)의 단계를 벗어나 동아 및 조선의 사태에서 속속 드러난 오늘날의 고질적 언론 현실의 비리와 반자유, 반민주(反自由 反民主)적인 요소를 과감히 고발,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 될 것이다.......“
<권영자> 문화부 차장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위원회를 두었고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와 <동아방송 자유언론 실천총회>를 결성하여 전원 복직과 언론 개혁을 주장했다.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농성 중 신문사를 찾아와 격려해준 민주 인사와 정치인은 다음과 같다.
---박형규, 조승혁, 김상근 목사, 공덕귀, 이희호, 서제숙 여사. 윤정오, 김동길 교수, 문인 고은, 이문구, 박태순, 김영삼, 이택돈, 함석헌 , 장준하, 강원룡 목사, 이태영 여사, 안충석, 양홍, 김택암 신부, 이우정, 정금성, 이소선 여사, 양일동, 유택형, 김관석, 이영민 목사, 천관우, 시노트 신부, 쯔베버 신부, 홍성우 변호사, 오충일 목사 등 ......
3월 17일 150여명의 기자들이 회사에서 동원한 깡패에 의해 강제로 건물 밖으로 내좇기고, 매일 정문 수위에게 출근 저지를 당하며 6개월 동안 회사 앞에 도열하여 복직(復職)을 요구했으나 결국은 해직 통지를 받았다.
하루아침에 실직자(失職者), 실업자가 되어 있었다. 거리의 기자,< 룸펜>기자가 된 것이다. 결혼 초기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변비가 심해지더니 항문이 허는 치질에 걸려 하혈(下血)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가 수술비가 너무 많아서 취소하고 <돌팔이> 의사를 집으로 불러 1달 동안 누워서 치핵(痔核) 덩어리를 떼어내는 시술을 받아 겨우 일어나 걷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신혼집인 미아리 아파트에 살고 부모님과 동생들, 할머니는 진관내동 박석고개 집에 살았다. 할머니는 연로하셔서 점점 기력이 쇠약해져 <세검정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한약을 다려먹기 시작했다. 이후 병원으로 약방으로 다니며 수시로 치료를 받았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사람이 10월 15일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진찰을 받아보니 임신중독증(姙娠中毒症)으로 신장이 붓는 <신우염>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다. 일단 치료를 받아 퇴원했으나 한 달 뒤 병이 재발되어 재입원하는 소동(騷動)을 벌였다. 병원에서는 치료약이 너무 독하여 만일의 경우 뱃속의 아이가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며 투약 여부를 묻는 동의서를 내라고 하였다.
자식은 나중에 낳을 수 도 있으니 먼저 산모(産母)부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입원 20여일 후에 퇴원하였지만 우리 집은 질병과 가난과 고독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집사람을 간병(看病)을 하기 위해 매일 <성모병원>의 복도에 있는 기다란 소파에 누워서 자면서 회사로 출근하였다. 수시로 <와이셔츠>를 갈아입어야 하는데 시꺼먼 옷을 그냥 입고 자고 하면서 출퇴근하였다.
1975년 한 해는 결혼하고, 치질 수술하고, 실직하고, 직장을 옮기고, 할머니는 병환으로 고생하시고, 집사람마저 입원 치료를 하는 등 이중 삼중고(二重三重苦)에 쓰러질 것 같았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사는 집과 2중으로 돈을 대야 하는 신혼생활의 시작이었으니 얼마나 결정하기 어려운 형국이었는지 모른다. 집사람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섰다. 좌우간 살고 봐야지---자유니, 민주언론이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광화문에 <동아투위> 사무실을 차리고 <세종여관>을 중심으로 매일 출근하여 선배 기자와 복직을 주장하며 5개월을 버티다가 앞날이 불안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대두되어 나는 전직(轉職)하기로 결심하고 <주부생활>(여성잡지)에 이력서를 넣어 8월 9일 합격통지를 받고 이직(移職)을 했다.
험난한 실직사태와 비참한 가정생활
내가 이런 엄혹(嚴酷)한 실직생활을 하는 사이에 캐나다 동생 <근래.>는 소위 말하는 소포 국제결혼(國際結婚)을 하였다. 이민 간 동생이 오랫동안 팬팔을 하는 선생님 규수(김주은 28세, 당시 중학교 영어교사)가 있으니 만나보고 결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새 엄마는 내 결혼과 동시에 동생의 결혼을 추진하여 국내에서 서둘러 결혼 초청이민(招請移民) 형식을 밟았다.
캐나다 이민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초청이민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75년 3월 1일 삼일절 양가 부모(김원영)님들이 만나 상면을 하였고 3월 19일 재 상봉하여 결혼을 승낙하고 3월 22일 오후 1시 <호수그릴> 음식점에서 내가 신랑 대신에 참석하여 약혼식을 거행하고 사진을 찍어 캐나다에 보냈다.
4월 4일 캐나다에서 이민 초청장이 도착한 후 나는 규수와 같이 고향에 인사차 내려가 조상의 묘에 성묘를 다녀왔다. 두 달 후 6월 23일 캐나다 대사관에 가서 이민자 인터뷰를 마치고 9월 8일 정식으로 비자를 받았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규수는 9월 10일 출국 수속을 모두 마치고 캐나다로 출발하였다. 9월 15일 무사히 <토론토>에 도착하였다는 통지가 오고 9월 24일 교회에서 현지 결혼식을 올렸다.
동생은 이로써 6개월이 걸린 국제 소포결혼의 막이 내렸다.
굿바이,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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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캐나다 이주자 김근래와 김주은 부부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