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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村에 가시거든 애국자 정세권을 찾아보십시오
[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1]
1930년대 북촌에 대규모 한옥주택단지 건설
물산장려운동 예산 절반 이상 대며 자립운동 주도
좌우 합작 신간회 참여해 독립운동 돕기도
조선어학회에 건물 희사… 훗날 고문받고 재산 빼앗겨
2016년 북촌 어디에도 '정세권' 이름 석 자 찾을 수 없어
사진 한 장이 있다. 1949년 6월 12일 '십일회' 기념사진이다. '십일회'는 1942년 10월 1일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이다. 맨 앞줄 왼쪽에서 둘째 자리에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다. 외국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종로 북촌(北村)에 가면 반드시 떠올려야 할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전형적인 조선 양반 마을'로 알고 있지만, 21세기 눈앞에 보이는 북촌은 조선 시대와 관계가 없는 1930년대 개량 한옥 마을이다. 그 한옥 마을 전부를 한 사람이 만들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1949년 6월 12일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인‘십일회’기념사진. 맨 아랫줄 왼쪽에서 둘째가 정세권이다. /한글학회 제공
미스터리의 애국자 정세권
지난 15일은 일제 강점기 최대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창립 89주년이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 회장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인 월남 이상재였다. 그때 정세권은 신간회 경성지부 재무부원이었다.
4년 뒤인 1931년 4월 20일 오후 4시 30분 경성 종로 낙원동 300번지에서 조선물산장려회 회관 기공식이 열렸다. 1923년 '조선인은 조선 물산을 만들고 쓰자'는 취지로 지식인과 상공인들이 만든 운동 단체였지만, 재정 불안으로 사무실조차 없던 차였다. 4층 양옥 건물 1층은 사무실, 2층은 물산 진열관, 3층은 식당, 4층 옥상은 가정집이었다. 정세권은 옥상 집에 살았다. 회관 부지와 건설비는 모두 정세권이 댔다.
1929년 정세권은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선출됐다. 1929~1930년 물산장려회 총예산은 1866원53전이었고 이 가운데 그가 지출한 사비(私費)는 65.4%인 1220원이었다. 당시 한옥 한 채가 500원이었다. 훗날 만해 한용운이 쓴 글 제목은 이렇다.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하는 정세권씨께 감사하라.'
1935년 3월 15일 경성 종로 명월관에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 창립됐다. 민족운동가들이 '길사(吉事), 흉사(凶事)에 함부로 돈을 써버리지 말고 그것을 영구히 기념되게 유익한 도서 출판을 하게 하자'며 만든 출판사 겸 도서관이다. 사무실은 종로 화동 129번지 2000평 땅에 있던 2층 건물이었다. 역시 땅과 대지는 정세권이 기증했다.
세월이 흘러 1942년 8월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적힌 함경남도 항흥영생고보 여학생 박영옥 일기장이 조선인 형사 안정묵, 일본명 야스다(安田)에게 발각됐다. 그해 10월 1일 경성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학자 33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증인 48명도 끌려갔다. 사람들은 몽둥이로 맞는 육전(陸戰), 물을 코와 입에 퍼붓는 해전(海戰), 공중에 매달아 패는 공전(空戰) 고문을 당했다. 정세권 또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화동(花洞)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관은 땅도 건물도 그가 기증한 재산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기억한다.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며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기이하지 않은가. 경제 자립과 민족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 문화운동에도 그가 나온다. 북촌을 포함해 익선동·봉익동·성북동·창신동 등 청계천 북쪽 땅과 서대문·왕십리·행당동에 조선인 마을을 건설하고 그 돈을 민족 운동에 아낌없이 퍼부은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서울 가회동 31번지 전망대에서 본 북촌 풍경. 일제 강점기 정세권이 대규모 필지를 잘게 쪼개 만든 서민용 개량 한옥단지다. 정세권은 개발에서 나온 돈으로 물산장려회와 신간회, 조선어학회를 지원했다.
2016년 서울 북촌(北村)
경복궁과 창덕궁·종묘 사이에 있는 동네를 북촌이라고 한다. 삼청동과 가회동, 재동과 계동이 북촌에 포함돼 있다. 한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북촌은 큰 길가는 물론 골목길에도 크고 작은 공방과 기념품 가게가 숨어 있어 관광객들 눈과 발을 바쁘게 만든다. 기와 처마 선이 중첩돼 있는 가회동 31번지 언덕길은 과장하면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광객이 붐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정서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다. 나무 대문마다 '주민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주민들은 골치지만 한국인에게는 추억을 주고 외국인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서울 종로구가 펴낸 '북촌' 유인물에는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돼 있다. 서울시 자료 '북촌 산책'에는 '조선 시대 양반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이곳은 당시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길과 물길들의 흔적, 그리고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북촌 초입 관광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이 두 자료와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던 집들"이라고. '전혀' 사실과 무관하다.
1930년 경성 북촌 재개발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경성은 일본인과 지방에서 몰려드는 조선인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일본인은 청계천 남쪽 남촌에 자리를 잡고 일식 가옥을 지었다. 조선인은 북쪽 북촌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북촌은 원래 고관대작들이 살던 언덕이었다. 나라가 사라지면서 조선 시대 사대부 집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성삼문·박규수·홍영식과 김옥균 집이 그랬다. 가회동 31번지는 대부분 명성황후 친족인 민대식 가문 땅이었다. 민대식이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인사동 쌍둥이 집은 한 채는 뜯겨나가 주차장으로, 한 채는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상상해보라, 저 넓은 언덕배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대저택들을. 세종대왕 스승이었던 맹사성은 그 가회동 꼭대기에 살았다. 경복궁으로 출퇴근하면서 언덕을 넘었는데,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다녔다. 그 언덕을 맹현(孟峴)이라고 했다. 지금 가회동 31번지에 있다.
가회동 31번지 북촌 골목 풍경. 정세권이 만든 한옥 처마 선이 아름답다.
1920년대 인구가 폭발하면서 총독부는 이 땅들을 거둬 주택 건설업자에게 불하했다. 남촌이 밀집되면서 북촌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업자들에 맞서 조선 건설업체들은 경쟁하듯 북촌 땅을 매입해 거대한 필지를 수십 개로 나눠 대청 유리문과 처마 함석챙이 있는 '똑같은' 표준형 한옥들을 줄 맞춰지었다. 상하수도도, 전기도 없이 초가집에 살던 조선 서민들에게 편의 시설이 있는 '마이홈'이 생긴 것이다. 여러 업체 가운데 정세권이 운영하던 건양사는 2등 없는 1등이었다.
정세권과 북촌을 연구 중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을 조선인이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주한 삼청동의 모습은 대량의 적산 주택 단지이지 한옥 집단 지구가 아닐 수 있다." 정세권과 함께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던 법조인 최태영(작고)은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경민이 찾아낸 정세권의 건축 철학은 명쾌하다. '건축비, 유지비와 생활비 등의 절약에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인가 합니다. 재래식의 행랑방, 장독대, 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중류 이하의 주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난에 대해서는 다소의 공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정세권 '건축계로 본 경성' 1925) 정세권의 딸 정정식(작고)은 김경민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옛 양반 대저택이 남아 있다면 경관은 좋았겠으나, 1930년대 북촌 개발은 필연이었다. 우리 눈앞에 있는 북촌 한옥은 90%가 그때 정세권이 지었다. 한창수 집터가 있던 큰길 건너 가회동 11번지 한옥촌도 그가 건설했다.
후배 건축가 황두진과 정세권
건축가 황두진은 북촌 한옥 마을 중건사업이 시작되던 2000년대 중반 정세권이 만든 가회동 31번지와 11번지 한옥 여덟 채를 중건했다. 서울 토박이인 황두진은 서울대 건축과를 나오고 예일대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가인 그에게 건축주가 한옥을 맡겼을 때 장난인 줄 알았다. 대학에서는 한옥사는 배웠지 한옥은 배운 바가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한옥을 고치면서 정세권을 알게 됐다. 그가 말했다. "1930년대는 대호황기였다. 소규모 개량 주택을 짓지 않으면 폭발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정세권이 북촌을 이렇게 개발하지 않았다면 한옥의 맥도 끊겼을 수 있다. 1930년대 한옥은 그 자체가 근대 건축물로 큰 의미가 있다. 북촌에서 제일 오래된 한옥은 윤보선 집인데, 1870년 건물이다."
많은 건축가가 그를 '무명 집장사'로 깎아내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옥 마을로 사람들을 북촌으로 끌어들이는 서울과 종로구는 아예 정세권이라는, 건양사라는 이름을 그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도 '조선 시대'라는 환상 속 향기를 맡으며 북촌을 걷고 있다.
정세권은 청계천 북쪽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을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물산장려회에, 문자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어학회에 쏟아부었다.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총독부에 땅도 다 빼앗겨버렸다. 교수 김경민이 말했다. "조선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실천한 사람이다. 물산장려운동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계몽 사업이었다."
암울한 식민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애국 운동을 한 인물, 정세권이 북촌을 만들었다. 아니, 정세권이 바로 북촌이다. 그 북촌을 오늘 걸어가 보시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2016.02.17
北村 골목길엔 그의 흔적이 숨어 있다
[1930년대 한옥마을 北村과 미스터리 애국자 정세권] [2]
경술국치 후 '조선 귀족'들 차지한 가회동 북쪽 땅
1930년대 정세권이 사들여 근대 한옥 단지 건설
지금도 북촌 도로 일부는 정세권 가족 명의로 남아 있어
집 판 돈 통째 임정 군자금… 평생 민족운동 지원
일제 탄압에 가산 빼앗기고 낙향해 말년 보내
새로 쓰는 북촌 역사
1930년대 근대 한옥 마을인 서울 북촌(北村)에 가면 떠올려야 할 사람이 있다. 이름은 정세권(鄭世權)이다. 집 팔아 번 돈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그리고 조선어학회를 지원한 애국자다.
정세권(鄭世權·1888~1965) /사진 제공=정희영
1935년 7월 12일 화동 129번지
"경성부 낙원동 300번지에 있는 장산사 사장 정세권씨가 화동 129번지에 있는 시가 4000여 원 되는 이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조선일보 1935년 7월 13일자) 회관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 가옥 근처 길모퉁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어학회 터'라는 표석만 남아 있다.
정세권은 '집 장수'였다. 건양사라는 주택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일제강점기 중반인 1930년대 청계천 북쪽 지역 땅을 사들여 중소 규모 근대 한옥 단지를 건설한 업자였다. 정세권의 셋째 아들 정용식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어학회 회장이던 이극로 선생이 아침이면 세수하러 나오는 것도 봤다. 집에 놀러도 오곤 했다." 1989년 홍익대 건축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와 가진 인터뷰에서다. 훗날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정용식은 광복 후 경북 문경 광산촌 사택 단지를 시공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며 파산했다. 손자 정희영은 "친척들 빚도 갚지 못해 이리저리 작은 집으로 이사하며 살았다"고 했다.
궁궐보다 높은 마을 북촌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던 안국동을 비롯해 재동과 원서동, 가회동, 삼청동 일대를 '북촌(北村)'이라 통칭한다. 가회동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이다. 특히 1930년대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근대 한옥이 집단으로 보존돼 있어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골목길 양쪽으로 담장을 나누며 들어선 기와지붕과 나무 대문, 돌담…. 한국인보다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31번지 골목은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북촌은 1930년대 정세권을 비롯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만든 근대한옥 마을이다. 정세권은 여기서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가회동 31번지와 붙어 있는 삼청동 35-62번지에는 북촌 전망대가 있다. 1980년 대구에서 올라온 장옥희(88) 가족이 운영하는 사설 전망대다. 장옥희가 말했다. "집과 집 사이가 하도 좁아서 부엌에서 부엌으로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여섯 채마다 동서로 큰 도로가 하나, 두 채마다 남북으로 도로가 나 있는 네모 반듯한 마을이니." 그녀가 한마디 더 했다. "전망대를 찾아온 풍수가들이 그랬다. '옛날에는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고". 질서정연하게 집들이 붙어 있으니 양반집일 리가 없고, 풍수가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1910년 경술국치와 조선 귀족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날 일본은 고위급 조선인 76명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따위를 받은 귀족들은 은사 공채와 토지도 받았다.
일제강점기 초기 가회동 31번지 소유자는 이재완이었다. 가회동 33번지는 민영휘, 11번지 소유자는 한창수, 95번지는 한상룡이다. 1번지 소유자는 박영효다. 이들의 이력은 각각 이렇다.
정세권이 1935년 지었던 서울 안국동 조선어학회 터.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이재완(1855~1922): 후작. 은사 공채 33만6000엔.
민영휘(1852~1935): 자작. 은사 공채 5만엔.
한창수(1862~1933): 남작.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유학 보냄. 은사 공채 2만5000엔.
한상룡(1880~1947):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종신 의원.
한상룡이 지은 집은 훗날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사들여 지금 민속자료로 지정돼 개방돼 있다. 연전에 서울시장 관저로 쓰려다 무산된 그 집이다. 한창수가 지은 집도 남아 있지만 개방은 하지 않는다. 가회동 1번지 땅은 민영휘와 은사 공채 28만엔을 받은 후작 박영효 공동 소유였다.
경성 인구가 폭발하던 1920년대 이들 자제인 이달용, 민대식, 한상억 등이 이 땅을 팔아치웠다. 그 땅에 가회동 북쪽 한옥 마을이 건설됐다. 2000년대 초 모 재벌이 빌라촌과 저택을 지은 1번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11·31·33·95번지가 현재 관광객으로 붐비는 북촌 한옥 마을 핵심이다. 거기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정세권, 북촌을 건설하다
정세권은 1888년 경남 고성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면장이 되었다가 경술국치를 맞았다. 1919년 정세권은 경성으로 올라왔다. 막내딸 남식(88)이 말했다. "고향 초가집을 다 기와집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면장직을 사임했다. 더럽고 가난한 경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저걸 다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정세권은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명동 일본인 빵집에서 배달한 빵과 우유로 식사하고 현장으로 나가 작업을 감독했다. 딸 남식은 그 빵이 먹고 싶어서 새벽마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한상룡이 지은 가회동 백인제 가옥. 한식과 양식을 절충한 집이다.
정세권의 회사 건양사는 이후 1940년대 초반까지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갔다. 익선동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봉익동, 명륜동과 혜화동, 성북동, 왕십리까지 영역을 넓히며 근대 한옥 지구를 건설해갔다. 이 지역 조선인들은 주로 초가집 또는 토막(土幕)이라는 움막집에 살고 있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삼청동에 소나무숲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가난을 비관해 목매달고 죽는 사람이 있었다."
정세권은 다른 주택업자와 달랐다. 정세권이 지은 집은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작지만 마당이 있는 '살 만한 집'이었다. 그리고 한옥이었다. 딸 남식이 말했다.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신도 늘 한복을 입고 새벽에는 시조를 읊곤 하셨다."
1989년 북촌과 정세권을 연구한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 김란기 박사는 "정세권은 서민층을 위해 월부, 연부라는 제도를 도입했고, 집 규모 또한 서민에게 부담이 작은 소규모로 설계했다"고 했다. 춘원 이광수의 세검정 집도 그가 시공했고 배재학당 대강당도 그가 지었다. 정세권은 큰돈을 벌었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무정'에서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다.
야밤에 찾아온 임정 요원
막내딸 남식은 소학교 1학년 어느 날 아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33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어젯밤에 상해에서 김구(金九)씨 심부름꾼이라는 사람이 와서 군자금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 집 몇 채 판 돈이 있어 통째로 내줬다고 하셨다."
정세권의 막내딸 정남식(88).“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 임정 요원은 굳이 밤에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정세권은 이미 1927년 설립된 좌우 합작 민족 단체 신간회 경성 지부 재무부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1930년 대홍수가 나자 정세권 가족과 건양사 직원들은 조선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수재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1931년에는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짓고 사비로 장려회를 이끌고 있었다.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만주에서 순국한 조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족 지사들이 양사원이라는 인재 양성 학교를 만들자 여기에도 참가해 큰돈을 출연했다. 1939년에는 고향 덕명리에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 초등학교로 바뀐 학교는 1993년 폐교됐다.
그리고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다. 학자 33명과 정세권을 포함한 증인 48명이 함흥경찰서로 연행됐다. 일본 경찰은 정세권이 양사원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자양동 고아원 부지 3만평을 빼앗고 정세권을 석방했다. 이듬해 총독부는 건양사 건축 면허를 취소해버렸다. 집 장수 정세권은 광복 때까지 집을 짓지 못했다. 땅과 기업을 빼앗긴 정세권은 몰락했다. 가난한 조선인을 위해 근대 한옥을 짓고, 번 돈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한 대가였다.
2016년 가회동과 정세권
정세권은 지금 고향 하이면 덕명리에 잠들어 있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울에 마련된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한글학자 최현배였다. 덕성여대 명예교수인 손녀 정희선이 말했다. "존경하는 집안 어르신이요 세상에 자랑스러운 큰 어른이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있는 정세권 묘. /사진-고성문화원
가회동 31번지 골목 옆에 한적한 길이 하나 있다. 길 주소는 가회동 33-39번지다. 지금도 등기부에는 이 길이 정세권 명의로 되어 있다. 정세권과 그 후손 명의로 남아 있는 도로가 가회동과 삼청동에 열 군데가 넘는다. 그가 만든 조선어학회 회관 터 표석에도 정세권 이름 석 자는 없다. 안내판 하나 없지만, 북촌에는 이렇듯 정세권의 흔적이 깊다. 세상에 보기 드문 인물 정세권과 그가 만든 마을 북촌 이야기였다.
[새로 쓰는 북촌 역사]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89년 당시 홍익대 건축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던 김란기(현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대표)가 쓴 '한국 근대화 과정의 건축제도와 장인 활동에 관한 연구' 논문에 정세권이 등장한다. 김란기는 "건축학계는 집장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아 논문 통과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2005년 북촌이 한창 개발 중일 때 서양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황두진(사진)이 북촌 한옥 다섯 채를 중건했다. 황두진은 "한옥이 생소할뿐더러 나 또한 업자들이 만든 주택단지를 그다지 높이 생각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정세권 같은 인물이 1930년대 한옥을 짓지 않았다면 근대 한옥은 맥이 끊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익선동 한옥 지역을 조사하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경민은 찾는 자료마다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아예 연구 방향을 정세권으로 틀어버렸다. 가장 늦었지만 김경민은 실질적으로 정세권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김경민은 "국회도서관까지 뒤져 자료를 모아보니 정세권은 단순한 집장수가 아니라 잊힌 애국 기업가였다"고 했다. 김경민은 '경성의 건축왕 정세권(가제)'을 집필 중이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역사는 땅에 각인된다. 북촌 역사가 다시 쓰이는 중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01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