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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증권회사에 다니는 직원과 사귀고 있다는 친구에게 펄쩍 뛰면서 왜 하필 그런 사람과 사귀냐고 말했습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사람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대뜸 “그런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마음이 상한 친구는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금융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돈 밖에 모르고, 비열하고, 특히 주식과 관련된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권위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지루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문화적인 방면에서는 꽝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과 군인과 공무원과 교사와 부동산 업자들은 피해야 할 업종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가르쳐 주듯 말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패턴으로 연애하고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말에는 더욱 언성을 높였습니다. “네가 그런 사람들과 연애라도 해 봤니? 부대껴 라도 본거야?”라며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이 고추를 먹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살인적으로 맵다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절대로 먹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먹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다른 한 사람이 자신은 처음부터 먹고 있었는데 괜찮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고추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약간 맵기는 하지만, 먹지 못할 만큼 살인적으로 매운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곳에 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견해는 “중국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과 “중국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 정도로 상당히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옳습니다. 실제적인 경험을 토대로 해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중국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자주 일반화시킵니다. 직접 겪은 것이 때문에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어떤 일과 사람과 단체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다 심각한 경험의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경험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대적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경험에는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근거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깊은 절망에 빠뜨린 적은 없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경험의 오류로 인한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남자로 사모하는 여자”로 묘사됩니다. 이는 그녀가 일곱 귀신 들린 창녀였었다는 사회적 경험에 의한 편견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초 교회가 그녀에게 붙여준 애칭은 “아포스톨라 아포스톨로룸”(Apostola Apostololum)입니다. 곧 사도들 중의 사도입니다. 이는 교회가 그녀를 사도들 가운데 선임 정도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은 하나같이 도망갔습니다. 예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은 쫓아 다녔지만, 십자가 곁까지 동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십자가 행렬은 물론, 예수께서 처형된 이후에도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라고 외쳤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당당하게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랐고, 십자가 사건과 장례식과 부활까지 목격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사람들은 창녀들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을 한 사람의 남자로 생각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교회는 점차 제도화되었습니다. 로마의 정치 구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성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성을 깎아 내리는 모종의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미 고대 교회 안에서는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등 적지 않은 여성 지도자들이 남성 지도자들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교회 제도의 “로마화”를 시도했습니다.
그 일환의 하나로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라는 초상화 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제도와 의식에서 역할 상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6:3)이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멸시받아 마땅한 나사렛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의 예수께서 어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경험의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마십시오. 상황과 사건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십시오. 가르침에 순종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경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영혼도 실족시키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경험의 오류에 빠진 한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여전히 악인은 환난과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보상교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원칙에 입각해서 욥을 향해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욥15:17-19)라고 외쳤습니다. 교만한 주장을 그치라고 외쳤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신뢰할만한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주장했습니다. 먼저, 그의 말은 자신의 오랜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 그의 말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 지혜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조상들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1:8)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혈연관계와 사제관계를 통해서 갖게 되는 사회적인 지위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들의 경험에서 나온 훈계와 교훈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의 경험과 가르침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받아들일 때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험과 전통에 입각한 교훈은 자칫 현실의 상황이나 보다 개혁되거나 진보된 진리를 무시하는 폐쇄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고 전하려는 무사고주의(無思苦主義)적인 형식에 치우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배우고 따라야할 진리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아무리 탁월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지혜의 영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가르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외부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거나 왜곡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하고 충만한 지혜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가장 탁월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고전1:30)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과 조상들이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교훈을 받아야합니다. 책망을 받아야합니다. 우리를 직접 가르치시고 교훈하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참된 지혜이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에 집중해야합니다. 그런데 욥에게 주어진 고난은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고난을 당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당사자인 욥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일절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경험과 조상들의 경험들을 통해서 얻은 지혜로 무장된 엘리바스였다 할지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지혜의 영역에 속한 욥의 고난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 진단했습니다. 판단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던 욥을 궁지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으로 형제의 고난을 진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는 또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욥15:20-24)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근거로 악인들이 당하게 될 환난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교만하게 행동한 악인들은 평생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의 연수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안정도 보장 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두려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평안을 한순간도 누릴 수 없습니다. 죄 때문에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두려워합니다. 항상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소식이 연거푸 전해집니다. 괴롭힙니다. 형통은 잠깐이고 뜻하지 않는 재난이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곧 파멸합니다. 칼날 같은 고통스러운 환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칼날이 두려워 어둠 속에서 숨어 지냅니다.
누가 뭐라고 지적하지 않아도 자신을 절망의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있어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천하 만물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늘 만족을 찾아 헤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한 끼 음식을 구걸합니다. 늘 피곤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극도로 범죄 했던 대제사장 엘리의 후손들이 그랬습니다. 무엇보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하게 될 무섭고 떨리는 환난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채 오직 파멸의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립니다.
극도로 심각한 재난이 찾아옵니다. 악인들을 위해서 준비된 전쟁처럼 환난이 왕처럼 찾아와 정복해 버립니다. 그들은 결국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아니 절망이 너무 깊어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악인들은 이렇게 처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경험을 통해서 얻은 자신의 지혜를 절대 신뢰했던 엘리바스는, 욥이 처한 불행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혹독한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 가리라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욥15:29-35)
악인들에게 임할 추가적이고 구체적인 심판이 더 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은 계속해서 번영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번영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처참하게 망할 날이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자존심까지 포기하고 얻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래서 악인에게 영원한 소망이란 없습니다. 찍힌 나무는 때가 되면 다시 소생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악인은 한번 불행에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온전히 사그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자랑하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공허하고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의지하던 악인을 기만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악인이 다시 새롭게 될 소망을 가지는 것은 헛됩니다. 당연히 악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허망한 것을 믿고 기대하다가 도리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 아닌 한파와 재난으로 인해 포도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듯, 미처 대처할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매우 갑작스러운 사이에 재난이 들이닥쳐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 힘에 의해 파멸되고 맙니다.
이렇게 악인들에게 임할 재앙을 추가적으로 제시한 엘리바스는 또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 하였음이니라”(욥15:25-28)라고 외쳤습니다. 악인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열거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욥은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지도를 방패로 막듯이 적극적으로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는 곳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거기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모독한 적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고 몸까지 병들어버린 극한 재난 속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원망 섞인 탄식 곧 애가를 늘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대적하는 참람한 행위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죄악 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온갖 육신적인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을 만한 곳에 거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흠이 없었습니다.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악을 멀리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나를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욥2:3)라고 인정하실 정도였습니다.
욥에게 임한 고난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아 알게 하실 때에만 풀 수 있는 신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자신과 조상들의 경험을 절대시했습니다.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만 적용할 수 있는 지극히 제한된 지혜로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완전하고 충만한 지혜이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비를 풀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욥을 판단하고 비판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죄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결국 경험에서 비롯된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오류를 부르게 되는지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한 가운데 섰습니다.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지 연신 마른 입술을 축이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제 사랑하는 딸이....”라는 말까지 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순간 지하철 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여기저기서 “어떻게 딸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느냐?, 돈이 그렇게도 궁하냐?”라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 그는 “사랑하는 제 딸이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오늘 수술을 받는 날입니다. 제발 단 1초만이라도 기도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지하철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우리도 같은 상황이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느 날, 네 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왕은 “지금부터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에 심겨져 있는 망고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도록 하거라. 절대로 다른 계절의 망고 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명령했습니다. 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다시 네 아들을 불러 모은 왕은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 나무를 나에게 설명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는 잎이 푸르고 싱그러웠다고 대답했습니다. 셋째는 꽃은 장미처럼 아름다웠다고 대답했습니다.
막내는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러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네 아들의 대답은 각각 달랐습니다. 네 아들의 대답을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은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 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무조건 100%는 아닙니다.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자다 결국 사랑하는 아들 함의 후손들을 저주받게 만든 노아를 알콜 중독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던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육신의 정욕에 눈 먼 파렴치한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있을 수 없는 짓을 행한 아브라함을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고 한다면 죽음의 자리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고 해서,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습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따라야할 좋은 모습들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사실만으로 전체를 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경험의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의 오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하지 마십시오. 전체를 보려고 하십시오. 모든 상황과 사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무엇보다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가르침에 따르십시오. 그것을 통해 경험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영혼도 실족시키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