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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열사의 혁명적 복권! / 박노해.
피에 젖은 새벽 별
무거운 정적으로 횝싸인 오월의 한밤중, 분노와 공포에 불타는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어두운 광장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카빈 소총을 움켜쥐고 동지의 피로 물든 거리에 울려퍼질 계엄군의 탱크와 군화 발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전일 빌딩 옥상과 민원실 옥상에 설치된 캐리버 50과 LMC도 총구를 어둠 속으로 향한 채 결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도 시간도 심장마저도 멈춰 버릴 것 갈았다.
무기고가 있는 민원실 2층에서는 50여명이 창가마다 유리를 깨버린 창턱에 총구를 받치고 벽에 밀착해 있었다.
상원은 건너편에 서 있는 고등학생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꼈다. 떨고 있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이 씩 웃는 게 보였다. 하긴 떨 리가 만무한 녀석이었다. 지난 21일 도청 탈환 때도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총탄을 겁내지 않고 뛰어다求?녀석,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면 "놈들이 언제 쳐들러 올 지 모르는 판인디 잠이 오것소" 라며 신들린 듯 뛰어다니던 그런 녀석이었다.
상원은 주욱 한 바퀴를 돌면서 너무 창으로 노출이 된 사람은 벽으로 당겨 세우고 사격 자세를 고쳐 주기도 했다. 어디서 뭐하던 사람들인지도 서로 모르고 만난 지 비록 일주일 밖이 안되지만 혈육처럼 하나가 되어 버린 사람들 ! 하나가 되떠 함께 죽음의 항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
" 앗 ! 탱크다. 여기는 8조 ! 상황실 ! 탱크가 몰려온다 ! 저지는 무리다.
퇴각한다! ″
"여기는 유동 3거리 5조 ! 중과부적이다. 병력 지원을 바란다 ! "
" 본부 ! 여기는 서방이다 ! 화염 방사기다 ! 퇴각한다 ! "
무전기로 여기저기서 급박하고 처절한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외곽에서는 간간이 포성이 울리고 가끔 조명탄이 벌겋게 피어오르다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피시 시식 사그라져 갔다. 유령처럼 어둠에 감싸인 포가 와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가라앉곤 했다.
"드륵- 드륵 -드르륵 -"
M 16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외곽지역을 방어하던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가 도청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병력은 나갈 때의 반도 되지 않았다 동지의 시체를 넘어 퇴각해 온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는 차량과 화단 대를 은폐물로 삼아 도청 주위에 배치되었다.
"투다다닥‥‥‥‥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조명탄의 창백한 불빛이 꽃으로 뒤덮였어야 할 5월의 텅 빈 화단과 엉성한 은폐물 뒤에 몸을 숨긴 혁명군의 초라한 뒷모습을 비추었다.
화단을 지나 도청 담을 넘어 상원의 눈길은 금남로로 향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도로 군데군데 배인 핏물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했다. 아스팔트 위에 흥건한 그 피가 누구의 피던가 !
"죽을 사람만 따라 나오시오 ! "라고 외치며 차를 몰고 공수 대원 앞으로 돌격하다 한여름의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던 이름 모를 그 사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살아가다 마침내는 목마저 떨어져 나간 채 금남로에 뒹굴던 작업복 차림의 몸뚱아리. 그렇게 되찾은 저 거리에 넘실대던 수십만 민중의 물결, 물결들.
상원의 머리 속으로 지난 열흘이 꿈결처럼 스쳐 갔다.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금은 다시 돌려주마.
그러나 그냥 주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피를 남겨 주겠다. 파쇼 권력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봉기한 민중들의 피를 이 도청에 남겨 주겠다.
상원은 손바닥에 난 땅을 바지 자락에 쓱 문지르고 다신 총을 쥐었다.
‘우리 운동권이 조금만 더 빨리 준비하고 대처했더라면 이렇게 무수한 죽음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온갖 아쉬움 들이 밀려왔다.
이제 내 나이 서른, 못다 한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들불의 형제들,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비로소 전국적인 전망을 얻고 조직에 발을 디뎠는데 ……
그러나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
죽어서 살자 ! 이 전선에서 도망친다면 또 어디에 무슨 전선이 있단 말인가 !
상원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금남로 쪽에서 꿈틀거리는 얼룩 무뉘 군복이 언뜻 눈에 보인 듯했다.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동시에 도청 바로 건너편까지 다가온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드르륵 - 드르륵 - 드르륵•"
"탕탕 타앙 ! "
"꽝 ! 아악 ! "
총성과 비명, 수류탄이 터지는 파열음과 분홍빛 직선을 그으며 날아드는 예광 탄, 상원은 어둠 속의 적을 향해 카빈총을 그어 대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적의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죽여야 산다. 죽여야만 이길 수 있다.
저 파쇼 권력의 살인마들을 죽여야만 민중이 산다 !
한 놈이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만 한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들의 목숨을 끊어 놓기 위해 죽이리라 ! 죽여야 한다.
상원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겨 댔다.
분수대와 정문 앞에는 갈수록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오늘 저녁만 해도 얼굴을 맞댔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는 노란 섬광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떠다니며 비명소리, 총소리가 범벅이 되어 거리를 뒤흔들었다.
상원은 계속 적들을 향해 총을 긁어 댔다. 총의 약실 에서 탄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빨갛게 달구어진 총신은 불 속의 쇠처럼 쉬쉭 거렸다. 적개심에 불타는 상원의 마음인 양 총신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였다.
꽝- 하고 민원실 건물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폭음이 가시고 연기가 걷히자 피범벅이 된 젊은이의 시체와, 어깨가 날아가고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여자의 시체가 드러났다. 울컥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들의 동지를 걸레 조각으로 만든 놈들, 죽이리라 ! 죽이리라! 죽이리라 !
갑자기 총소리간 뜸해지더니 쩌렁 쩌렁한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들어라 ! 너의 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
건너편 혁명군 쪽에서 분노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폭도오? 우리보고 폭도라고? 네놈들이야말로 폭도다!"
상원은 그 순간 통쾌한 웃음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너희들이야말로 폭도다 ! 우리 민중은 그걸 알고 있다.
"개새끼들 ! 지랄하고 있네. 어디 와서 죽어 봐라 ! "
어느 혁명군이 마이크 소리가 났던 쪽을 향해 악을 쓰며 M16을 자동으로 긁었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놈들아 ! 네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 못한다.″
상원은 한창을 바꿔 끼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잠시 식었던 총구가 다시 달아올랐다.
"빨리 날이 새야 쓸 것인디."
"그래야 사람들이 싸우러 몰려올 것인디……″
새벽까지만, 새벽이 올 패까지만 버티자.
그러나 새벽은 애가 타게 오지 않았다. 새벽은 처절하게도 오지 않았다.
광주 민중의 새벽, 민중 해방의 새벽, 새로운 긍지와 희망으로 둥실 떠오르는 민중 권력의 새벽은 아직 먼 것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새벽은 그들의 피를 빨아 마시며 비로소 뒤척이고 있었다.
"아악 ! "
고등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2층 난간에 나가 엎드린 채 사격 중이던 상원은 높은 포복으로 그에겐 다가갔다. 머리를 안아 올리자 벌써 힘없이 축 늘어졌다. 죽어서도 적을 노려보듯 일그러뜨린 얼굴로 감지 못한 두 눈을 상원은 손으로 쓸어 내렸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만들려고 노력했던 세상을 그래도 너는 면 칠이나마 느끼고 갔으니, 어린 넋이여, 슬퍼 말아라. 도청 바닥을 물들인 너의 피는 민중의 권력을 탈취하는 낱, 다시 살아나리라. 미쳐 춤추며 민중의 나라에서 살아나리라.
상원은 다시 빠른 포복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사격 자세를 취했다.
아 그때였다 !
적의 총탄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
상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저졌다. 옆구리였다. 본능적으로 옆구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M16 총탄인 관통하여 뻥 뚫린 구멍으로 창자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아 앗 ! 윤형 ! 윤형 ! "
근처에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이 달려왔다. 상원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김영철과 이양현은 상원의 시체를 근처에 있던 이불 위에 누이면서 그날 밤 함께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삽시다. 지금 광주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0일 간 오로지 민중 봉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신들려 뛰던 사람 !
자발적인 민중의 봉기를 혁명적으로 이끌어 가고자 혼신의 힘을 다 짜내던 사람 ! '죽기 위해 살자' 며 뒤돌아보지 않고 철저하게, 철저하게 전진하던 사람! 해파(海跛) 윤상원은 적들의 총탄에 창자 하나 하나까지 다 쏟아진 채 이빨을 앙 다물고 그렇게 죽어 갔다.
그날 밤 광주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혹은 슬픔 때문에, 분노 때문에 ‥‥‥
이불깃을 눈물로 적시며 사람들은 새벽만 기다렸다. 새벽이 오면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바지 자락을 붙드는 어머니의 손길도 뿌리치고 아내의 눈물도 뿌리치고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 싸워서 쟁취하리라 !
그러나 새벽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피빛으로 밝아온 새벽은 이미 적의 것이었다.
어슴프레 밝아 오는 항전의 새벽 위로 '피에 젖은 새벽 별'이 빛나고 있었다.
혁명 투사 윤상원 !
남한 혁명 운동사에 빛나는 80년대의 새벽 별 !
그는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 서 이렇게 죽어 갔다.
이빨을 악물고
창자를 드러 내놓은 채
시커멓게 온몸이 탄 채로
다 쏘지 못한 탄창을 품고서
그렇게그렇게 봉기의 한가운데서
상원은 장렬하게 죽어 갔다.
광주 무장봉기를 이끌며
민중 권력 탈취의 신들린 화신으로
80년대 남한 혁명운동의 찬란한 새벽 별이 되어
민중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으로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서
서른 살의 장엄한 목숨을 거두다.
1980년 5월 27일 4시 40분 경.
그리고 만9년이 지났다.
만 9년 세월 동안 윤상원은 망각 속에 썩어 묻혀져 왔다.
산 자들의 비겁 때문에,
피의 봉기를 두려워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들의 무능과 불철저함 때문에.
9년 동안 통곡하며 썩어 가던 상원은, 자신의 몸에 쌓인 망각의 흙을 털고 일어서고 있다.
이빨을 앙다물구 한 손으로 터져 나온 창자를 거머쥔 채, 한 손엔 죽는 순간까지 꽉 움켜쥐고 있던 총을 치켜들고서.
상원은 그렇게 우리 앞에 다시 서고 있다 !어린시절잔치에 바쳐질 돼지꿈
"요상도 혀라. 무슨 꿈이 이럴까이."
"먼 꿈인디 그랴"
"아 글씨 돼지가 방에 네 마리, 마당에 세 마리나 우글거리는 꿈을 꿨단 말이요
말이요."
건넌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중녀의 여인네가 활짝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 그거 태풍꿈 히다 ! 아들 셋이 딸을 넷이나 둘란 갑다. 첫 애긴께 아들이나 쑥 뽑아야 쓸 것인디."
새댁은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근디 니가 큰자식 날란 모냥 이다. 돼지야 원래 잘 키워서 잔치 상에 올리는 거 아니냐. 그려 이왕 고생해서 낳는 거 나랏일에 바칠 큰 인물이나 하나 낳그라.
빨간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새댁은 총총 부엌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아이가 때어 났다. 웬일인지 아이는 울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엉덩이를 두드리고 별 짓을 다해도 허사였다. 3시간쯤 지나서야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그 집 담장을 넘어 골목길을 울렸다. 예쁜 고추를 단 사내 녀석이었다. 호적에는 이름을 윤개원으로 올려놓고 집에서는 상원이라 불렀다.
상원은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화순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탓에 여느 시골집처럼 궁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원이 어러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댁들을 분가시키고 나자 손에 쥔 차조처럼 재산이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상원은 잘 울지 않았다. 툭툭 털고 일어나 씩 웃으면 그뿐이었다. 상원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끔찍한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언젠가 차려질 허기진 민중의 큰 잔치에 바쳐질 한 마리 돼지가 되고자‥‥‥‥비례의 법칙이 안 지켜지는 나라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그렇듯 언제나 상원의 앞에는 놀라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19가 그랬고 5•16이 그랬다, 그런 날이면 상원은 일기장의 하루 칸이 넘쳐나도록 흥분해서 일기를 썼다.
"형과 언니들이 독재정치와 싸워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군인들인 혁명을 일으켰다. 군사들이 차지한 나라는 군사들이 정치를 한다. "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더 좋아하는 밝고 쾌활한 소년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대단히 성실했기 때문에 공부도 잘했다.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자식이 없었던 '큰방 할머니는 친자식보다 더 상원이를 아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꼴을 벤다, 쇠죽을 쑨다 하며 농사일 거들기에 바쁠 때에도 부모님과 할머니는 상원이가 흙을 묻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린 상원은 일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린 상원은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왜 나는 일을 안 시킬까?''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의 뜻인데 일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하고 일기를 적어 미안함을 달랬다.
상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보위상 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줄곧 일기를 써왔다. 상원은 일기를 쓰며 자기 생활을 뒤돌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전진적인 삶으로 자신을 추동해 나갔다. 어련서 부터 써온 일기 버릇을 통하여 상원은 훗날 혁명 운동과 조직 생활 속에서도 엄격한 자기비판과 사상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성실한 자기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특성을 보이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상원은 장손으로선 가문 부흥의 일대 사명을 안고 도시로 나왔다. 처음엔 하숙을 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자식 하나는 기죽이지 않고 가르치겠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배려였다. 그러나 애정도 돈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논을 팔아 배우는 처지라 상원은 자취방으로 옮겼다.
삼류라는 사레지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원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기 위해 아무리 바빠도 신문을 촘촘히 읽던 상원은 사춘기 소년답게 모든 일에 궁금중을 느끼고 불의 앞에 흥분했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를 적었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고 분노한 마음, 시장 아주머니나 신문팔이 소년에 대한 끈끈한 정, 농번기에 시골을 가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죄책감 등을 썼다. 어느 날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수학엔 비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우리 세상엔 왜 비례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가. 부자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도 떼돈을 벌고 시장 사람들같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몸 뚱일를 굴려도 없이 산다. 움직인 만큼 벌면 안 되는가. 이 세상이 환멸 스럽다."
게다가 광주는 도시였다. 다같이 그럭저럭 못살던 시골과는 달랐다. 돈 쓰는 데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부잣집 아이들, 화려한 집들, 그는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듯한 도시에 정이 가지 않았다.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 그것도 광주 제일 고 같은 일류가 아니고 삼류 학생이라는 열등감이 그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상원은 이 풀리지 않는 그늘을 벗어나고자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자기와 비슷한 고민에 바진 친구들과 격렬한 입 씨름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무전여행을 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고 잘 먹지도 못하는 술도 마셨다. 부정한 세상에 반항하고 도전하고 싶은 욕망에 상원은 입시 공부에만 처박히긴 싫었다.
상원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무렵에 대통령 선거를 겪었다. 상원은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분노로 지켜보았다. 대학생들의 격렬한 부정선거 규탄 대회에 끼어들어서 시위를 하고 난 상원은 소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잔에 시뻘겋게 올랐다. 상원은 작은 거울을 불꽃튀는 눈동자로 들여다보며 자신만은 부정하게 살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대학시절'끝없는 아리아'
71년에서야 상원은 전남대 정치 외교 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삼수를 거친 제법 늙은 학생이었지만 고향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상원의 대학 시절은 시작되었다.
상원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연극만에 가입했다. 수업은 둘째치고 상원은 연극 반에만 매달렸다. '끝없는 아리아'나 '멕베드' 같은 것들을 무대에 올릴 때면 상원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끝장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미였다. 온몸에 팜을 뚝뚝 흘리며 일하는 그를 보면 누구라도 함께 일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연극이 끝나면 흥건한 술판이 벌어졌다. 막을 내린 허탈감과 해냈다는 뿌듯함 속에서 젊은이들은 새벽이 오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상원은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기가 올라서 노래를 불렀다.
"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 비 내리는 벌판을 뛰어서 가자. 구름보다 더 높은 하늘 위에는 마음보다 더 고운 무지개 핀다. "
그가 연극에 미쳐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숨가쁘게 굴러갔다. 10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전국이 달아 오르구, 학내에서 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달았다. 상원도 시위 때면 열심히 참가했다.
상원은 아직 민중들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 사회의 모순과 박정희 군사파쇼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평등과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부재하였다. 아직 그는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위자들이 외치는 주장이 정의와 진리라고 생각하였기에 상원은 시위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상원은 시위가 발생하면 '문리 대생 모여라'고 외치며 대열의 맨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주동자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은 아직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만큼 논리적 인식과 확신은 없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실천과 아는 만큼의 행동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논리적인 정리와 이론 체계가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관적으로나마 느끼는 진리일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회피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상원은 자신보다 먼저 진리와 세계관을 확보하고 선구적으로 시위에 나서는 주동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연극 반일에 미친 상원의 학과 성적은 엉망이었고 학내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점차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왜 대학에 온 것인지, 왜 사는지, 왜 이렇게 정치와 세상이 엉망인지 알 수 없었다. 연꽃으로 뒤덮인 교내 호숫가를 거닐면서, 최루가스가 자욱한 학교를 오가면서 상원의 고민은 날로 커졌다. 2학년 여름 상원은 결국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 햇볕에 새까맣게 찌들며 농사를 짓고 논까지 팔아 가며 공부를 시켜 준 부모님을, 바빠서 품을 사더라도 자기에게는 공부하라며 일을 말리던 부모님을 그는 잊을 수 가없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 고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는 육군 하사관으로 입대하고 말았다.김상윤을 만나다
75년, 상원은 학교로 돌아왔다. 경북 상주에서 하. 사관으로 근무했던 3년은 상원을 조급한 젊은이에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회인으로 단련시켰다. 곱슬 거리는 짧은 머리, 군사 훈련으로 단단해진 체격, 부끄러워하던 하얀 피부가 건강한 갈색으로 변해서 그가 캠퍼스로 돌아왔을 때, 학교는 자기다 훨씬 더 많이 변해 있었다. 학교를 몇 시간인고 걸어도 아는 얼굴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떠났거나 유신체제의 폭압을 견디지 못한 젊은이들이 상원처럼 자포자기 속에서 군대로 떠난 까닭이었다. 연극 반 시절의 자유와 낭만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상원은 광주에 올러와 직장을 다니며 야간 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동생과 자취를 하며 썰렁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오로지 공부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원은 외교관이 되기 위한 고시 준비로 코리아 헤럴드를 수복이 쌓아 높고 영어를 공부하거나, 외교관이 되려면 테니스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테니스를 배우기도 하며 학교에 적응해 갔다. 가끔씩 연극반에 들러 후배나 친구들이 연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달래는 정도였다.
어느 날 연극 반 친구 석균이와 철황이가 사람을 데리고 상원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상원은 조금 마르고 진지한 얼굴의 그가 누군지 담 박에 알아차렸다. 석균이가 늘 얘기하던 김상윤 이었다. 상원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감옥에 갔다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그런 고초를 격으 면서 남을 위한 삶에 뛰어든 건지 궁금했다. 네 사랑은 좁은 자취방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상원은 상윤에게 무엇 때문에 민청련에 참가했는지 물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상원은 귀찮으리 만치 질문을 해댔다. 대졸 자의 기득권과 노동자의 생활, 전태일의 분신과 노동운동, 또 이 땅의 분단에 대해서, 상원의 호기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 많고.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 김상윤은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했다.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캐물어 오는 상원에게 김상윤은 호감이 갔다. 진지하고 시골 태생답게 순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솜처럼 유연하게 사람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무 고시를 위한 책으로 묵직한 가방과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던 상원은 김상윤과 만나면서 다시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몇 푼 안 되는 봉급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공장으로 줄달음치는 어린 동생들, 해가 뜨자마자 논에 나가 뼈빠지게 일하고도 아픈 몸에 약 한첩 못쓰는 부모님, 가난하고 무권리한 무수한 이웃들, 상원은 결국 코리아 헤럴드와 테니스 라켓을 집어 던졌다.
상원은 김상윤이 이끌어 가는 소모임에서 집중적인 학습을 받기 시작했다.
김현준(현 전교협 서울 사무국장), 김영종(헌 사계절 대표), 박몽구(시인)등이 모임의 멤버였다. 삼수 까지 한데다 군대를 갔다 와서 뒤늦게 운동에 뛰어든 상원이었지만 어려움을 내색 않고 학습에 열중했다. 6개월간 집중적인 학습이 이루어졌다. 매일매일 책을 읽고 세미나를 가졌다. 6개월 내 내 상원은 방안에 틀어박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공부만 해댔다. 기본적인 한국 현대사부터 농업 문제, 노동 운동사, 정치경제학, 제3세계의 이해, 페다고지에 이르기까지 당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읽었다.
학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주로 상원의 집에서 학습이 이루어졌다.
공장 일이 끝나면 야간 학교에 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동생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들은 날마다 변해 가는 형이 조금은 짜증스러웠다. 형과 친구들이 토론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렴풋이 형이하는 일이 옳은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런나 집에 돌아오면 누을 자리도 없게 자리를 차지 하구 더구나 장남인 형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따른 일만 하는 게 야속하기도 했다. 당장 자신들은 고등학교도 변변히 못 다니고 야간 학교를 다니는 형편 아닌가. 형이 어서 졸업해서 훌륭한 사람되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동생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생들은 저러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가슴을 졸였다. 딴 공부를 해서 그렇지 언제나 자상한 형이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자기만 대학이 다니는 것을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에 지친 동생들이 웬만한 짜증을 부려도 형은 다 받아 주었고 자전거 배달을 하던 둘째 정원 이가 다리가 퉁퉁 부어 들어오면 밤새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하는 형이었다.실천하지 않는 학습은 싫소
당시 전남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운동 조직이 거의 박살난 상태였다. 전남대 운동권의 리더였던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해서 운동 조직을 확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써클 위주의 조직이었으나 써클 형태는 위험부담이 크고 조직 확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한 세포 분열식 확산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김상윤은 학습을 위한 사회 과학서의 보급과 운동권의 연결을 위해 녹두 서점이라는 사회 과학 서점을 열었다.
이 당시 광주 지역은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문화 운동, 재야 운동 등의 쁘띠 부르주아적인 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노동운동 역시 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당시 광주 운동권의 중심적인 과제는 여기저기 분산되어 떠도는 활동가들을 혁명적 노동운동의 방향으로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향후 활동의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과학적 인식의 무장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 지역 최초의 사회 과학 서점인 녹두 서점의 개설은, 사회 과학 서적을 보급하고 학습과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또한 광주 지역 활동가들의 사랑방이자 '조직 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녹두 서점은 상원과 소모임 1기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권의 활동 인자를 배출하는 양성소가 되었다.
6개월간의 학습을 끝낸 후 상원은 이미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인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상원은 학습을 계속하면서 연극 반을 이끌었던 경험으로 문화패 '광대'를 만들었다. 멋에 들떠 있었던 예전과 달리 상원은 민중극에 심취했다. 문화패 광대는 광주 지역의 문화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상원이 부르는 '소리의 내력'은 일품이었다. 흥만 나면 그는 어디서나 연극 쟁이답게 온몸으로 구수한 노랫가락을 뽑아 올렸다.
시간이 흐르자 상원과 그의 스승인 김상윤 사이에는 점차 이견이 생기고 논쟁이 시작 되 었다.
김상윤이 조직 확대를 위해 우선 학습만을 강조한 반면 상원은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고립된 학습이란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상원에게 김상윤은 여전히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그렇다고 이견이 있는 것까지 덮어두고 따라갈 수는 없었다. 상원은 독자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곤 했다. 77년 봄, 상원은 실천하지 않는 학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시위를 주도할 계획을 세웠다. 오히려 싸움을 통해 조직도 확산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한께 주도하기로 했던 학생들이 도중에 이탈하는 바람에 시위는 무산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훗날 그가 광주 봉기의 샛별로 떠오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고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광주 봉기를 혁명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이 안 팔려서' 예비 검속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 전선의 정면에 서 있으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상원의 운동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계급적 직관에 의해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원은 누구보다도 학습에 열심이었고 혁명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면한 실천을 방기한 채 막연히 해 두어야 할 필수적 무기로서의 이론 학습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 것이다.
이론 학습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혁명가의 학습은 구체적 목적성에 기초하여 당면 실천과의 정확한 역량 배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운동가의 목적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재조직 화함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을 이룩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관심과 노력과 행동은 '투쟁'에 있다. 투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화, 투쟁을 잘하기 위한 사상 투쟁으로 그의 구체적 실천 행위는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운동가는 단 한시도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시대가 혁명운동의 '선전 단계' 일지라도, 그가 설정한 긴급한 과제가 '이론 준비' 일지라도, 그가 맡은 임무가 '조직 재건' 일지라도 그의 시선은 당면한 투쟁 전선으로 모두 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학습은 그 이론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생생한 현실 계급투쟁으로부터 무게중심을 제공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 현실에서 진행 중인 계급투쟁을 막연히 밀쳐둔 채 '단계적으로' 우선 학습부터 하고 보자고 할 때, 그 학습은 무게중심을 상실하고 동력이 끊어진 채 캄캄한 불가지론과 관념의 안개 바다 속을 떠돌다 좌초하는 무력한 배가되고 말 것이다. 혁명 운동가는 현실 투쟁 속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이론적인 문제의식으로 끌어올리고 과학적 이론으로 해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은 항상 투쟁 전선에 못박혀 있고, 그의 촉각은 계급투쟁의 한 중심부에 뻗쳐 있기에, 그의 이론 학습과 연구 작업은 살아 펄떡이는 현실성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일한 전선 위의 또 하나의 투쟁으로 되는 것이다.마지막 효도입니다마지막 효도
상원은 농사 짓는 부모님이나 노동을 하는 동생들을 볼 때마다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생하는 가족만을 위해 자신이 돈을 버는 기계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상원의 걸음이 너무 튼튼하게 내디뎌져 있었다. 상원은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에게 최소한의 갚음이 뭘 까를 생각했다.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일 테지만 부모님이 당장 그걸 이해하실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자기 일을 몇 달 뒤로 미루고 취직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첫 월급 받는 모습만이라도 보여 드리자고 생각했다. 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고 취직시험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봉천동은 그의 부모와 같은 시골 사람들이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이주한 인민 지역이었다. 좌판장사, 껌팔이, 지게꾼들이 태반인 빈민촌에 살면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 은행이란 묘한 곳이었다. 하루에도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근무가 끝나면 상원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당시 서울대 75학번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던 겨레터 야학 등을 찾아다니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앞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민중의 집안에서는 한 명의 선택 자가 전 가족의 집중 후원을 받게 된다.
그는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희생 위에서 집안의 희망을 걸머진 기둥으로, 대를 이은 가난과 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 떠오르게 된다. 상원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피눈물 위에서 대학을 다닌 그가 마침내 성공하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배신행위이다.
그는 자신을 뒷받침해 준 서너 명의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수만, 수천만의 민중 형제들을 고통과 몰락으로 몰아넣는 신 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원은 자기 가족을 눈물로 배신하고, 격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가족을 포함한 전 민중의 진정한 희망의 기둥으로 나서기 위한 예비를 해 나갔다.후배들의 발길에 채여
78년 7월, 서울의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광주 후배들 몇 명이 그를 찾아왔다.
송기숙 교수 등이 국민 교육 현장의 군국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점을 비판했다가 연행된 뒤 이에 동조하는 싸움을 주도하여 수배를 당한 후배들이었다. 후배들은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침을 튀겨 가며 일일이 얘기해 주었다. 갈 것도 없이 선배 하나만 믿고 서울로 찾아온 후배들에게 상원은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월급을 다 털어 성심성의껏 챙겨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상원은 그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후배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도 없었따. 그들이 땡볕 더위 속에서 최루가스를 맞아가며 시위를 주도할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떤 핑계라도 비겁하다. 마지막 효도라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도피가 되고 만다.
상원은 투쟁하는 후배들이 자신을 걷어차는 발길질을 온 가슴으로 받았다. 그 발길질은 민중의 발길질이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리는 것처럼, 새롭게 진보하는 투쟁의 물결과 후배들의 비판을 정직하게 가슴으로 맞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 부정과 비판을 회피하고 자기 합리화하려는 순간부터 그는 반동의 대오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원은 후배들을 통한 민중의 발길질을 무릎꿇고 받으며 결단하였다.
그에게는 당장의 생계 보장도 없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그럼에도 상원은 그 따뜻한 자리를 박차고 나서기로 하였다.
자신이 처한 그 자리가 안주와 부끄러움의 자리라면, 나날이 살아 전진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침몰의 자리라면, 그의 혁명 성과 투쟁의 의욕을 꺾어 나가는 굴절의 자리라면 지금 당장 과감히 박차고 나서라!
그 자리가 그대의 사고와 혁명 성을 제약하고 있기에, 날이 갈수록 혼란과 번뇌의 안개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그대의 건강성과 모험심을 좀먹어 소심한 생활인으로 주저앉히기에, 그 절망의 뿌리인 생활의 토대를 과감히 깨뜨려라 !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일떠나서라 !
그것이 너의 혁명, 너의 생명의 새순이다 !
상원은 부질없는 고뇌를 끊어 버리고 훌훌 털고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자 했다.
다음날 상원은 사표를 제출했다. 벙긋 웃음까지 흘리고 있어서 직장 동료들은 그가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줄 알고 반은 선망으로, 반은 진정으로 축하해 주었다. 어디로 옮기냐고 물어도 상원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다시는 전설에서 비켜나지 않으리라 ! 사표를 던지고 나오면서 그는 하도 푸르러서 눈이 시린 하늘을 보며 가슴에 새겨 넣었다. 잠시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모님께 온 정성을 기울여 편지를 썼다.
" ‥‥‥‥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께서 저를 이토록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하여도 부족하겠지만, 유신 독재가 판치는 우리 나라 상황은 저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이 처한 현실에 뛰어들어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는 볼초소생의 마음을 용서하셔서 차라리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소서,"
한 혁명가가 거쳐온 생의 역정에 대한 최종적 평가는 그가 그 속에서 혁명 운동에 필요한 자양분과 경험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활용할 수 있는가 이다. 상원은 7개월의 직장 생활을 통하여 자본주의히의 부르주아지와 소시민들의 생활과 대중적 정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넓은 사회성과 실무적 능력을 부분적으로나마 훈련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다시 서자 프롤레타리아트로 !오매 피곤허다
"국수를 먹고 나니 나른하고 조금은 졸립고 하는 일이 더없이 짜증스러웠다. 1시간 1백 20원, 이걸 생각할 때마다 기계를 부숴뜨리고 싶었다. 이건 아마 나의 감정이리라. 더 고된 일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해내고 있지 않은가."
시골에 살았어도 손에 흙 한번 묻혀 본 적이 없던 상원에게 공장 일은 너무 힘들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는 하루 열 시간 노동에 1천2백 원을 받고도 묵묵히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을 보며 자신을 '공장 체질'로 개조시켜 나갔다.
상원은 78곁 7월 말 광주에 내려와서 잠깐 녹두 서점에서 일했다. 노동 운동을 하겠 다고는 했지만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일단 현장 생활을 경험하기로 하고 광천 공단의 한남 프라스틱이라 회사에 일용직 으로 들어갔다. 상원은 노동자들의 감정, 생활, 근로조건들을 온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이 끝나면 하도 피곤해서 술 먹을 생각은커녕 쓰러져 자고 싶었으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하루에 2백50만원씩이나 순수익이 남는데도 임금으로는 6만원도 안 쓰는 사장 놈을 함께 욕하기도 하고 스물이 넘은 나이에 공부가 하고 싶어서 검정고시를 하는 노동자의 인생살이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일이 힘들면 힘들 수록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솟았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장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적어 나갔다.
한남 프라스틱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 대해서 노동자가 얼마인지, 노동조건이 어떤지, 임금 수준은 어떤지 조사해 나갔다. 드러눕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는 고된 노동 속에서 상원은 프롤레타리아로 다시 서서 힘찬 전진의 걸음을 시작하였다.광천 시민 아파트
광천 공단에 위치한 광천 시민 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지 좁은 복도를 사이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을 위한 집단 수용소와 같은 곳이다.
당시에는 나무를 땠을 정도였고 일용 노동자나 도시 빈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1978년 10월 말 상원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무슨 일에든 전부를 쏟아 부처 야만 시원한 그의 기질 탓이었다.
한남에 입사한 얼마 후 상원은 후배인 박기순을 만나게 되었다. 박기순은 여러 사람의 우려를 무릅쓰고 광주에서는 최초로 노동 야학인 들불 야학의 문을 연 사람이었다. 상원은 함께 일을 하기로 하고 들불 야학이 위치한 광천동으로 아예 방을 옮긴 것이다. 상원은 자기의 방을 강학이나 야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공개했다.
상원은 방을 옮긴 후 곧장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영철을 찾아갔다. 5급 공무원을 하다 때려치고 아주 헌신적으로 빈민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김상윤의 소개가 있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 상원은 몹시 궁금했다. 김상윤의 소개로 찾아온 야학 사람이라고 하지 김영철은 상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박용준이라는 사람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광천 시민 아파트 사람들을 대상으르 하는 광천 삼화 신용 협동 조합에 근무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박용준은 삼화 신협에 근무하던 중 김영철을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고아들과 함께 자란 김영철이, 혼자서 외롭게 사무실에서 자취 생활하고 의로운 김영철과 의형제를 맺고 광천동 시민 아파트 김영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용준은 자신이 외롭고 가난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가만있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베풀고 도우려 했다. 낮에는 직장 일을 하고 밤이면 집에 와서 광천동 시민들을 위한 시민 헙동 조합 일과 반장 활동과 야학 일에 밤을 지새웠다. 용준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아침이면 세수 대야에 벌건 코피를 쏟곤 하였다.
용준은 가끔 집에 안 들어 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평소에 찍어둔 탐욕스런 사장 놈들이나 부자 놈들 집에 칼을 품고 들어가려다 붙들려 광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잡혀 있곤 했던 것이다.
박용준은 광주 무장 봉기 기간 내내 상원과 함께 영웅적으로 투쟁하다 함께 죽어 간다. 박용준은 고아로서 영아원인 영신 원과 고아원인 무등 육아원에서 서럽게 자라났다. 그러나 굳세게 성장하여 숭의 실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신용 협동조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용준은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고 가난과 어둔 속에서 자라났지만 정의롭고 활달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끔찍히도 사랑하였다. 재능도 많아서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 미인이었고, 글씨도 잘 썼고 나무도장도 잘 팠고 조합 간판이나 썬팅도 전문가 못지 않았다.
노래도 잘 불러 가곡을 부를 때면 테너 가수 뺨치게 불렀다.
광주 봉기에 중대한 역할을 한 「투사 회보」와 「민주 시민 회보」는 그의 힘찬 필경 솜씨로 제작되었다.
김영철과 용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야학의 운영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광천동 사람들에게 우리 반장 소리를 들으며 착실히 빈민 운동을 해 나가던 김영철은 박용준과 함께 열심히 야학 일을 도왔다. 입학식 땐 주인 대표로 격려사를 해주고 레크레이션과 세계사를 가르치는 강학 으로 뛰기도 하며 김영철은 야학이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썼다.
아파트 앞 조그만 공터는 때로 마당극을 하는 놀이판이 되기도 하고 야학 사람들과 광천동 청년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어쩌다 상원이 관계하는 전남 연극반 친구들이 와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면 온 아파트가 떠들썩했다. 고통받는 노동자의 푸념으로 극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그래, 맞아맞아' 박수를 치면서, 한숨을 쉬면서 하나가 되어 열심히 극을 보았다. 청년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한 아주머니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나섰다. 테너 가수 못지 않은 박용준 더러 노래를 부르라는 성화가 빗발쳤고 상원의 소리 내력에 맞춰 검정 고무신의 박관현이 엉성한 춤이라도 추게 되면 아파트가 떠나가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주 혁명은 광천동 에서 많은 것을 빼앗 아갔다. 80년 5월 이후로 광천동엔 이전과 같은 웃음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상원의 소리 내력도 , 박용준의 노래도, 반장 김영철의 넉넉한 웃음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자 상원과 박용준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고 관현도 선배들의 뒤를 따라 단식투쟁으로 죽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불구간 된 김영철은 정신이상이 되어 버렸다. 광천동 사람들은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사랑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아파트 아주머니들은 혀를 차며 김영철을 이렇게 얘기한다.
"얼매나 두들겨 맞고 병신이 됐다 더니만 몇 년만엔가 여기를 찾아왔습디다.
아이고 동명이 아버지 아니요, 그랬더니만 멍청하게 나를 보면서 '아지매, 나 아파. 아파 죽것소, 그래서 본게 눈이 확 풀렸습디다. 시상에 고문을 얼매나 모질게 했으믄 지가 죽을라고 벽에 머리를 박다가 그렇게 됐다고 누가 글대요 차비를 줘서 보내면 여기가 머가 좋다고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ㅤㅁㅕㅈ 년은 통 얼굴을 못 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 다고 ……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몇 년은 통 얼굴을 못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 사람이 얼매나 끔찍이 생각했다 고라. 그런 사람 다시없소 죽은 사람들도 그라고"
'나도 상원이, 용준이 따라 가야제' 김영철이 헛소리처럼 늘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아주머니는 덧붙인다.민중과의 약속이야 !
78년 12월 중순 경 새학기 준비 관계로 들불은 강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중요한 회의라 미리 철저하게 연락을 했는데도 약속 시간까지 나타난 사람은 몇 명이 안됐다. 약속 시간인 11시가지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 형 어디 가요?"
상원은 급하게 뛰어 나가면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라이."
나가자마자 상원은 택시를 집어타고 불참한 강학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 집 저 집을 돌아 상원은 집에 있는 강학 들을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올 때까지 상원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강학 들이 늦게 나타난 강학 들을 향해 여지없이 주먹을 날렸다.
"나쁜 놈들 ! 느그 들이 이러고도 민중을 위한다는 놈들이냐?"
한바탕 주먹과 욕설이 난무했다. 한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상원이 자리를 정리했다. 때린 사함도 맞은 사람도 말없이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상원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놀러 왔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역사 발전을 위해 뛰러 왔는지 차제에 분명히 해 두자. 사전 연락이 충분히 되었는데도 이런 식으로 지각하고 불참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민중과의 약속을 전제로 한 만남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철저하게 자기비판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의 맹세를 글로 남기자고 제안했다. 상원도 가장 진실한 말을 남기 자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모두 찬물로 머리를 감은 후 자세와 마음을 정돈하여 각자의 각오를 적었다. 상원의 차례가 오자 상원은 잠시 눈을 갚고 생각한 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써나 갔다.
"죽기 위해 살자 ! "
상원은 운동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일지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혁명 사업과 조직적 규율을 운동가들끼리 하고 싶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충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혁명운동은 개인의 감정 상태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 도중에 쉴 수도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개인 사업'이 아니다. 혁명운동은 계급 사회의 인간이 살아 숨쉬는 한 객관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역사의 강제이다. 혁명 운동가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노동과 피눈물과 근육의 땀방울로 찍혀진 민중의 명령서다.
혁명운동의 규율이란 상호간에 지키면 좋은 약속어음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의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민중의 부릅뜬 눈동자 위에서 맺어진 엄중한 서약이자, 개인을 부숴 가며 준수해야 할 공동의 철칙이다.
상원이 분노한 것은 불철저한 동지들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민중과의 약속을 배신한 임무 유기 행위에 대한 분노이자 진실한 계급적 감정의 표출이었다.
등지의 오류에 대하여 대충 넘어 가구 예민한 문제는 무비판적인 '긍정 체계'로 말하여, 대립된 견해들을 부분적 장점들만 뽑아 절충하고 동지애와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좋은 품성'을 상원은 갖지 못했다. 아니, 철저히 배격했다.
상원은 자신부터 먼저 철저히 수양하여 모범을 보인 다음에야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쁘띠부르주아적 도덕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혁명 운동가 상호간에 잘못된 오류를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범해 왔던 오류를 동시에 비판하고, 서로가 용납하는 데서 열려지는 기회주의적 도피구를 민중의 이름으로 봉쇄시킨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 조직은 더욱더 철저한 계급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통하여 개인들은 점차 수준 높은 혁명 투사로 집단적으로 단련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일을 잘하기 위한 비판'으로, 동지적 결속을 고양시키는 비판으로 조직해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상원이 머리를 감고 가슴팍을 모두어 쓴 '죽기 위해서 살자'라는 비장한 서약은, 향후 죽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장봉기의 한복판으로 서슴없이 나서는 그의 장엄한 출사표가 되었던 것이다.연탄가스에 죽은 '노동자의 누나'
거리에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 다음날, 박기순이 죽었다.
'노동자의 누나'가 죽어 버렸다.
야학 활동이 학생운동을 위축시킬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는 선배들에게 '야학은 침체에 빠진 학생운동의 활성화와 과학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당차게 주장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심지어는 리어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들불을 탄생시켰던 박기순이, 몸바쳐 싸워 왔던 노동 해방의 그 날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것이다. 후배이자 뛰어난 동지였던 박기순을 언 땅 속에 묻고 돌아오면서 그러나 상원은 울지 않았다. 울며 비탄에 빠지기에는 기순의 삶이 너무도 굵직했고 자신 앞에 남겨진 일이 너무도 엄중했기 때문이다. 같이 일했던 강학 들의 가슴속에, 수업을 받았던 노동자의 가슴속에 기순의 그 넉넉한 모습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순이 떠나자 상원은 더욱 바빠졌다. 함께 준비했던 광주 공단 실태 조사 기획을 이제는 영일이와 다 해내야 했다. 광주 공단 실태 조사는 학생 운동권의 선진 학생들이 겨울방학 동안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꼭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도록 상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학생운동의 민중 지향성을 강화하고 확대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들불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실태 조사를 했던 조사팀에게 노동자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임을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상원은 이 작업을 통해 놀랍게 성장한 후배 박관현 과도 만나게 된다. 고무신을 끌고 아니며 말없이, 그러나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박관현을 상원은 눈여겨보고 있었다. 삼 수를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가난한 늙다리 대학생, 고시 준비를 하는 고가 실태 조사를 거치면서 느끼는 갈등과 고통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당신들 빨갱이 아니요 ?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상원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방으로 올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뜬금없이 먼 소리다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돈도 안 받고 자기들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긴 해도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을 같이 쓰자니 ?
다들 책을 챙겨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데 누군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상원은 싱긋 웃음이 나왔다. 왜 야학에 나왔 느냐고 물었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여기 오면 여자 애들과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던 2기생 성섭 이였다.
"나가 같이 있어도 괜찮것소?"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에 집이 있던 성섭이는 어머니를 떠나서 다음날 상원의 광천시민 아파트로 옮겨 왔다. 상원의 동생들도 노동자였지만 혈육과 달리 상원은 성섭이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를, 순간 순간 감정을 세밀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반발하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조금만 성급한 말이 튀어 나가면 꼭 그랬다 성당 교리리 실에서 옮겨와 교실로 쓰는 아파트 방에서 욕설이 들려 왔다. 상원은 교실로 갔다. 무엇 때문인지 명관 이가 열이 받쳐서 책상을 집어던지려고 하는 중이었다. 명관이는 1기생으로 가장 착실하게 나오는 놈이었다. 명관 이는 밝고 명랑해서 늘 웃음을 몰고 다녔다. 녀석이 몰고 다니는 건 웃음뿐만 아니었다. 싸움과 소란도 몰고 다녔다. 성질이 급한 탓이었다. 게다가 오기도 대단해서 한번 삐딱선을 탔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명관 이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 상원에게 대들었다
"당신들, 다 빨갱이 아니야?"
상원은 계속 그를 달랬다. 명관 이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씨팔, 권리 ? 권리 좋아하네. 니네들이 가서 한 번 일해 봐라. 편한 밥 먹고 대학 다니는 놈들이 알긴 뭘 안다고 지랄이야."
상원은 버럭 소리를 질렸다.
"야 이 새끼야, 아가리 닥쳐 ! "
평소 상원의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명관이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너 이리 따라아왓! "
시끄럽던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둘은 포장마차에 앉았다.
"술 할 줄 알제 ?"
명관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은 별 말이 없었다. 명관이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상원은 지금 명관에게 가장 필요 한게 시간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관 이는 지금 혼돈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미래의 희망이 사실은 자본가의 착취 체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때, 어쩌면 명관이의 반발은 당연한 것일 터였다. 둘은 포장마차에서 한껏 기분을 내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나명관씨는 그날 밤을 이렇게 얘기한다.
"원래 형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라. 말을 해도 다른 강학허고는 다르게 쉬운 말로 했어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멀라고 공장 꺼정 다님서 그 고생을 허는지 요상 시럽 기는 했어도 아무튼 친 형님 같았 제라. 그날도 영 말을 안하고. 내가 멀 잘못 허긴 헌 거 같은디 영 깝깝 헙디다. 허긴 먼 말을 했으면 속만 더 뒤집 혔것지만‥‥‥술을 꽤 먹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부르고 그랬 구만이라."관현 이는 반드시 들불로 온다
79년 새 학기가 되자 야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지도 교수, 학생과, 상담 지도 관실, 학원 출입 형사, 부모 등을 통해 들어오는 삼증 사중의 압력은 들불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압력에 못 이겨 그만두는 강학들이 생겨났다.
들불의 재정비가 요구되고 있었다.
상원은 관현을 생각했다. 실태 조산 때 말없이 묵묵하게 누구보다 앞서 일하던 모습,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 그런 관현을 생각하는 것은 상원만이 아니었다. 들불은 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관현은 쉽게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했다. 관현의 태도에 사람들이 초조해 하자 상원은 말했다.
"관현이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가 아픔과 고통을 이기고 긴 터널을 지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던 기 다쳐야 한다. 그가 지금 당장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위해서 삼고 초려가 아니라 십고 초려라도 할 것이다."
상원의 말대로 관현은 아픈 자기 확인을 거쳐 들불에 참여했다.
상원이 박관현이 결국은 들불 강학 으로 참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것은 관현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빼앗길 것 없는 빈농의 자식이자, 동생들이 노동자라는 계급적 토대의 일치에 대한 신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까지는 처절한 자기 투쟁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혁명적 삶의 길로 결단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공단 실태 조사 과정과 그간의 실천 과정 속에서 확인한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 엄중한 책임감과 우직함, 관념성이 파고들 여지조차 없이 현실 상황과 밀착된 문제의식과 강한 실천성, 고통받는 민중을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형제 애 적 동정심을 소지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현 이와 똑같은 조건 속에서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먼저 거쳐 나온, 풍부한 사회성과 경험을 체득한 선 험자 로서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그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 때문이었다
박관현에 대하여 '십고 초려 하겠다'는 결의와 같이, 상원은 탁월한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과 끈질긴 집념으로 달라붙어 운동 대열에 서게 하였다.
상원은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관현과 더불어 들불을 노동 야학으로 키워 내고 김영철이 주도하는 시민 아파트 주민 조직과 연대하여 들불을 노동 운동가 배출 소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강학과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그즈음 상원의 일기에는 소주 값이며 안주 값 몇백 원이 촘촘히 적혀 있다. 술을 마시면 흥건한 놀이판이 벌어졌다. 강학과 학생과 지역 주민이 하나가 되어 서툰 솜씨로 탈춤을 추기도 하고, 상원의 구성진 판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즉석 마당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들불은 하나로 단단히 뭉쳐지고 있었다.내가 독선적인 것은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의 대부분이 정말 자기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갔다. 많은 강학 들이 빠져나가면서 수업이 진행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학생들은「노동의 역사」나 상원이 직접 만든 일반 사회 책을 교재로 자기들끼리 수업을 진행시켰다.
10•26이 터지자 상원은 유화 정세를 틈타 들불을 확대했다. 노동법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소그룹 형태고 야학 졸업생 모임을 묶어 낼 준비를 했다.
들불 야학은 침체된 학생운동에도 활기를 가져왔다.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그룹은 들불의 강학을 거치며 노동자계급 속에서 단련되어 나갔다.
뒤늦게 운동을 시작했지만 상원은 광주 운동권 내에서 노동운동의 중심부로 자리잡아 갔다. 상원은 일신 방직, 화천기 공사, 아시아 자동차 등의 남성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에 관여하면서, 야학 졸업생으로 구성된 소모임을 통해 노동 운동가를 육성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원은 김상윤의 추천으로 「민주 회복 통일 국민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적 역량으로 조직화하는 작업에 주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당면한 정치투쟁의 중대한 의미를 그는 과소 평가 하지 않았다. 현장에만 틀어박히고 노조 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올바른 원칙을 상원은 투철히 자각하고 있었다. 「민주 회복 통일 국민회의」사무국장 선임 과정에서 윤한봉이 상원을 독선적이라고 평가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장기표와 김상윤의 강력한 설득으로 사무국장에 선임됐다.
우리는 종종 혁명가에 대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접하게 된다.
특히 혁명운동의 최전선에 앞장선 인물이나 강렬한 개성을 소지한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상원에 대하여 '솜과 같은 흡수력과 개방성'으로 평가하는 사람과 '독선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대립된 것도 당연한 것이다. 찢겨진 계급 사회에서의 모순 대립이 복잡하고 첨예할수록, 올바른 투정 방침의 결정을 앞두고 전개되는 사상 투쟁은 그만큼 치열하다. 이 속에서 한 인물의 개성과 작업 방식과 장단점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가 가진 정치 지도 노선에 따라서 상반된 견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인물이 지닌 프롤레타리아트 당파성이 아직 과학적 이론과 사상 체계를 획득하지 못할 때, 그의 행동과 성품은 '독선적' '극단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 무장봉기에 나선 볼세 비키에는 혁명 진영 내에서조차 온갖 비방과 방해 책동이 퍼부어졌다. 그 와중에서 무식한 노동자 출신인 한 수병이 경계 총을 하고서 모스크바의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3백 여명의 군중들이 몰려와 그를 에워싸고서 무장봉기를 비방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한 사람이 "당신이 무슨 마르크시즘을 아는가? 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하다가 짜르에 의해 감옥까지 갔다 왔다." "볼세 비키 봉기는 잘못되었다. 총을 내리고 길을 비키라"고 호통을 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볼세 비키 수병에게 삿대질을 하였다.
피로에 지치고 때에 쩔은 이 수병은 혼자서 수백 군중의 온갖 야유를 받으면서도 길을 비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렁거리는 목소리로 떠듬 떠듬거리며 소리쳤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계급밖에는 없다! 볼세 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의 편이다! 우리는 무장 봉기했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백군은 우리의 봉기를 비방하고 깰려고 하고 있다 !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과 수병의 권력을 지켜야만 산다 ? 이 전쟁에서의 태도는 두 가지밖에 없다 ! 옳은 것은 단 하나뿐이 다 ! "
느린 느릿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면서 총을 꽈악 움켜잡았다. 그러자 참새 떼 마냥 떠들어대던 군중들은 슬금슬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윤한봉이 상원의 독선적인 성격을 들어 사무국장 추천을 반대한 것에 대하여 김상윤은 "상원의 실천력과 과감한 추진력이 독선적으로 비쳐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가지 일에 매달리면 무섭도록 집착하고 최선의 진리라고 결정이 내려지면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일을 몰아 나가는 상원의 성격으로 보아 '독선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도 상원이 다운 현상이다.
군대를 갔다 온 후에야 뒤늦게 운동 대열에 참여한 상원이었지만 그의 놀라운 현실성은 그를 바른 속도로 발전시켰다. 그는 한번 뛰어든 투쟁 전선에서 일분일초도 눈 돌리지 않았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원은 광주 지역 노동 운동권의 중심인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역사 속의 한 개인에게 있어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시기는 각기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혁명운동의 출발 시기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진을 거듭하는 가이다. 생을 건 결단으로 혁명운동에 떨쳐나선 순간부터 그는 개인이 아니다. 그가 혁명 운동가로 불리 우고, 한 노선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고, 한 조직의 일원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 그는 이미 '부르주아적 자유' 라는 끈끈이에 달라붙은 개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전 존재를 해체시켜 혁명과 노선과 조직 속에 투여함으로서 역사의 발전과 함께 솟구쳐 오르는 주체적 개인으로 거듭난다. 날이 갈수록 도도하게 진전하는 혁명 대오 속에서 멈춰서고 물러서는 것은 곧이어 후퇴의 걸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점차 멀어져 가는 자신의 자리를 따라잡지 못하고 끝내 이탈하는 순간, 그것은 곧 혁명가의 파산이다. 그가 갈 자리는 부르주아 체제에 포위된 무력한 소시민 생활이거나 다른 계급이 되거나 반동적인 적대자로 서고 만다.
한때는 혁명운동에 앞장서던 사람들이 뒷전으로 물러서서 퇴락 한 생을 영위하는 것도 이와 같이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과 자신을 일치 시켜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상원은 비록 늦게 혁명운동에 투신하였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전진을 거듭하여, 거센 혁명의 파도를 타며 역사의 절정 위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이태복과 전국적 전망
남한 현대사 위에 '군사 파쇼'라는 흉칙한 각인을 새겨 놓은 박정희도 점증하는 민중 투쟁 앞에서 반등 권력 내부의 분열에 의해 죽고 말았다. 10•26이 터진 것이다.
서울에서 '광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태복은 이 고양기를 이용해「 전국 민주 노동자 연맹」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주에 들른 이태복은 당시 광주 노동 운동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이양현을 만났다.
2개월에 걸쳐 전국적 전망을 가진 조직 결성에 대해 토론했으나 이양현은 대중 조직 강화가 우선 시급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자 이태복은 상원의 소개를 부탁했다. 이양현은 상원도 자기와 함께 논의하고 있으므로 쉽지 않을 거하고 하면서 상원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녹두 서점에서 처음 만났다. 둘은 현 정세와 노동운동에 대해 전반적인 얘기를 나누면서 합일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태복과 상원은 두 사람의 만남과 논의 내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일 것을 상호 합의했다. 상원은 이양현에게 이태복과의 일을 거절했다고 하면서 비밀한 만남을 유지했다. 둘의 만남은 단선으로만 연결되었다. 이미 확보된 전민노련 멤버들도 모르고 있었다.
이태복은 자주 광주에 내려왔다. 가끔 상원의 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있었다. 상원의 집에서 잘 때면 관현도 함께 얘기에 끼어 들곤 했다. 물론 관현 앞에선 일반적인 얘기만 나눌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태복이 세수를 마치면 상원은 옆에서 두 손으로 수건을 들고 서 있다가 건네주곤 했다. 이태복은 봉건적인 태도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운동과 동지에 대해서 갖는 상원의 열정에 가슴이 찡했다.
상원이 동지와 조직, 그리고 혁명운동에 대하여 갖는 정성과 사랑은 지극했다. 그는 조직을 우선 으로 사고하고 모든 이익과 성과를 조직에 귀속시키려는 자세에 있어 철저했다.
비록 농촌 출신의 봉건성이 배인 순박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그의 혁명운동과 동지를 대하는 자세는 이처럼 정성과 사랑이 지극했던 것이다.전민노련의 중앙위원이 되다
4월 초순 충장로의 다방에서 상원을 만난 이태복은 상원에게 전민노련의 중앙위원 겸 광주 지역 노동운동을 총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상원은 엄숙하고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평소에 상원은 협소한 써클 적 관계와 지역적인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전국적 전망을 가진 혁명 조직 건설은 한시도 방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에 전위 조직이라기에는 아직 초보적이고 원칙적 지향성을 내포한 정도였지만, 이태복이 추진한 전민 노련 추진은 상원에게는 질적 비약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당시 전민 노련 추진 주체들은 노동 운동 내에 만연한 조합주의적 경향성과 써클 적인 고립 분산 성을 극복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하여 진보적인 지식인과 선진적 노동자가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기존의 어용 노총을 대신할 새로운 노동 조합 운동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를 통하여 노동 운동 내에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혁명적인 노동 계급 당파성을 세워 내고자 하였다.
당시 전민 노련 성원들 모두가 혁명적 전위 정당 결성의 전망과 계획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그 기초적인 지향성은 강력히 내포하고 있었다.
상원은 자신이 지금까지의 운동 과정 속에서 품고 있던 문제의식과 아직 선명히 정식화되지 못하고 단상과 직관으로 머물러 있던 사상들을 이태복과의 토론 속에서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석 달 동안 밤을 지새는 격렬한 토론과 치열한 확인 과정을 통하여 서로의 정치사상을 일치시켜 나가는 힘겨운 작업 끝에, 마침내 상원은 전민노련에 가입할 것을 결단한 것이다.
상원은 이와 같이 이태복과의 만남과 전민 노련 중앙위원으로 선임되는 과정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로서 자신을 새롭게 단련할 계기를 맞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혈연적 관계를 유지하여 함께 일해 온 이양현에게 조차 감쪽같이 위장을 하면서, 전민 노련의 조직원으로서 비밀스런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운동 풍토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을 위해서는 혈연적 정분과 인간적 신뢰라는 소중한 관계조차 박차고 나서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로가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고 한솥밥을 먹어 온 가족 같은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고 해서 강력한 투쟁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굳건한 인간적 신뢰와 뜨거운 동지애에 기초하여 '사람 끌어 모으기'를 시도한다고 혁명 조직이 건설되는 것은 아니라 혁명 조직이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사상의 통일이다. 먼저 올바른 정치 지도 노선을 정식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상호간에 무엇이 일치하고 무엇이 다른가를 철저하게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정치 지도 노선의 통일성의 정도에 따라 서로간에 책임질 수 있는 조직적 관계를 형성하고 더 높은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상원이 한 것처럼 한 혁명가가 맺고 있는 많은 관계 중에 가장 통일성이 높고 엄격한 전위적 조직을 최상의 중심 축으로 설정 하구 여타의 모든 활동과 관계를 여기에 복속 시키고 재편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
상원은 혁명가로서의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책임 있게 준수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보다 엄격하고 철저한 전위 투사로 자신을 단련시켜 나갔다. 상원은 죽음의 최후까지도 자신이 전민 노련 중앙위원임을 가장 친밀한 동지들에게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5월 1일부터 3일간 인천 이태복씨의 집에서 전민 노련 결성식이 있었다.
이 결성식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노동운동의 과제를 토의했으며 조직의 성격과 운동 목표 설정, 조직 요강 등이 논의되었다. 결성식 후에는 오락회가 있었는데 상원은 소리 한 대목을 뽑았다. 빈농의 아들이 도시에 와서 밑바닥 일을 하다 노동자가 되어 건강한 노동 운동가가 되는 내용을 담은, 자신이 직접 만들어 부른 창이었다. 소리가 끝나자 여기 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갈이 일도 해보지 못하고 죽어 간 상원에 대하여 전민 노련 중앙위원들은 그날의 훌륭했던 소리를 내내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박관현을 총 학생회장으로
80년 2월 이후 상원은 공식적으로는 들불을 그만두고 강학들에 대한 지도만 담당했다. 이제는 상원이 직접 모든 분야의 모든 일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다.'체계를 통한 조직적 지도'의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상원은 그 당시만 해도 살벌한 금서였던 사회주의 서적을 학습하고 강학들 에게도 교양 시켰다. 특히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는 상원이 특별히 아끼던 책이었다.
70년 당시, 남한 운동가들의 지적 환경은 매우 척박하였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의 원전은 거의 부재하였고, 정통적인 개설서 역시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직 모택동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위시한 몇 가지의 논문과 이집트의 낫세르, 쿠바의 카스트로, 체 게바라, 까밀로 또레스 신부, 그리고 일본에서 들어온 몇 가지 개설서들이 전부였다.
이것은 6 • 25전쟁 이후 야만적인 반공 정책으로 일관된 파쇼 권력의 탄압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강제된 당시 남한 운동가들의 잘못된 선입견과 역사적 한계, 그리고 몇 가지 조건이 지적 풍토를 규정하였다.
스탈린의 '숙청'이미지로 인하여 마르크스, 엥겔스와 러시아 혁명과 레닌은 정서적으로 멀게 느껴졌고,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제3세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마오 이즘의 영향, 배우기 쉬운 일본어 강습과 일서의 광범한 유통, 해방신학의 도입으로 친밀해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그리고 이영희 교수의 중국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선구적 업적 등이 70년대 남한 운동가들의 학습 풍토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80년 봄의 학내에는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5년만에 학생회가 부활되었다. 변화된 정세에 따라 공개적으로 민주화 투쟁을 담보할 수 있는 민주적 학생 기구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었다.
상원과 김상윤은 이미 「학원 자율화 추진 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괄목할 만한 지도성을 발휘했던 관현을 주시했다. 상원이 관현 에게 현 정세의 성격과 총학생회가 수행할 임무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총 학생회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시했으나 관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들불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상원은 계속 관현을 설득했다. 상원은 이 일이 결코 노동자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혁명적으로 강화시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견고하게 지켜 나감으로써 더 큰 모습으로 노동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원의 끈질길 설득에 마침내 관현은 출마를 결정했다. 헐렁 바지에 고무신만 신고 다니던 관현은 상원이 잠시 서울에 취직했을 때 그의 부모님이 맞춰 준 단벌 양복을 입고 선거를 치르면서 뛰어난 대중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상원과 김상윤의 지도에 의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관현은 이후 5월 초반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훌륭한 대중 연설과 지도력으로 이끌어 갔다. 관현은 학생들에게만이 아니라 광주 민중들에게 김대중과 함께 거론될 만큼의 대중적 지도자로 떠올랐던 것이다.5월 9일의 무장 준비 논의
5월 초 전민노련 결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상원은 5월 9일, 청년 운동권의 사람들과 만나 향후 정세와 전술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상원은 민청협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주체 역량의 한계로 인한 계급 역 관계상, 반동이 불가피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유화 국면을 이용한 싸움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원은 이 모임에서 계엄이 확대되면 무장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광주 지역의 민주화 열기가 분출 직전의 휴화산과 같음을 상원은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었다.
군대 투입과 무장 진입에 대항해서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확보하고 TNT를 제작해서 자체 무장을 해야 한다고 상원은 힘주어 말했다.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원은 노동자 대중이 부산 연합 철강을 불지르는 등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이 확대되고 있고, 파쇼 무리의 내부분열로 통일적인 권력 통제가 잘 되지 않고 있는데, 민중운동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니냐고 다그쳤다.
상원의 단호하고 강력한 주장에 대하여 '군이 먼저 총을 쏘면 함께 쏘자'는 말은 나왔지만 더 이상의 얘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엄이 확대된다면 지금까지의 광주 분위기로 보아 싸움의 양상은 예상을 초월한 폭발로 이어질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러면 군이 투입되고 예비 검거가 이루어질 텐데 예비 검거 대상자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의제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기본 정세 인식과 전술 방침에 대한 원칙에 있어 명백히 드러나는 차이 때문에 모두가 합의하는 대안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봉기를 전면적인 기술적 차원에서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윤상원은 분명하게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항쟁 진행 과정에서 그 문제를 놓고 논의하기도 했었죠."
그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TNT제작을 연구하기도 했었다며 제작 방법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광주 봉기 이전인 5월 9일에 상원에 의해 무장 준비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대한 사실이다!
아마도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성토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혹시라도 '정당방위'와 '피해 당한 광주'이미지가 훼손되어, '무장봉기'와 '권력 탈취'로 몰러 서(?) '광주 문제 종결'에 손해가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생각 해 보라 !
계급투쟁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전개되건 간에 그 본질은 '무장력 대 무장력'의 투쟁이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계급이 수천만의 노동자계급을 무참하게 착취하고 억압하면서도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단 하나, 자본가계급이 현재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공권력'으로 지칭되는 국가권력이란 '조직된 무장력'으로 유지되는 계급 지배의 도구에 다름 아니다.
자본가들은 상시적으로 국가권력이란 '조직된 무장력'으로 유지되는 계급 지배의 도구에 다름 아니다.
자본가들은 상시적으로 조직된 무장력인 군대와 경찰과 감옥을 기반으로 하여 법과 정책과 여론과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기에 , 자신의 착취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과 민중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뿌리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체계'를 타파하기 위하여, 먼저 '조직된 무장 기관'인 기존의 국가 권력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어, 노동 조합 투쟁이나 총 파업이나 대중 집회나 시위 행진 등의 협소한 투쟁 형태에만 시야를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 '노동자 총파업으로 군사 독재 타도하자'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총파업만으로 국가권력은 타도되지 않는다. 우리 노동자계급은 다른 투쟁 수단, 즉 무장 투쟁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일상 투쟁 속에서도 끊임없는 대비를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들어 노동자가 대중 집회의 원천 봉쇄를 비밀스런 동원 망으로 돌파 해내고 직접 꽃병을 제작하여 최전선에 나서서 투쟁을 수행하고, 민주 미사일 탄을 제작하고, 파업 자위대로 무장하여 적의 도발 책동을 격퇴하는 것을 주목하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무장 투쟁은 '언젠가는 해야 할'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혁명적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폭압 적인 신 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체제하에 이글이글거리고 있는 무장 투쟁의 발화점을 현실로서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불꽃의 분출조차 놓치지 않고, 언제든지 불새처럼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대비를 갖춰 나가야 한다.
상원은 무장 투쟁의 준비에 대하여 조만간 밀어닥칠지 모르니 적극 사고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차원의 논의에 그쳤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수준에서라도 진지하게 무장 투쟁을 연구 검토하고 논의를 조직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5월18일이 닥치자 신속히 화염병을 만들고, 송곳과 무기를 휴대하도록 민중들에게 촉구하고,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주창하며, 거침없이 무장봉기의 지도자로 떨쳐나서게 한 예비 과정이 되었으리라,폭풍 직전의 정적
5월 17일, 광주의 밤은 '폭풍 직전의 정적'이 날카롭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위 12 • 12사태로 권력의 핵심인 무장력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5월 17일 밤 11시 40분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날 밤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 26인이 체포되었다. 한동안 지속되던 '유화 국면'도, 서울역에서 전개된 10만 명의 대규모 학생 시위도, 뜨거웠던 '민주화 성회'도 급격한 정세 변화에 인하여 일시에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는 조금 달랐다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이 5월 16일을 기점으로 시위를 중단하고 정국을 관망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16일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3만 명이 모인 시국 성토 대회와 횃불 가두 행진으로 광주는 온통 민주화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전두환 반동 파쇼의 피 부름은 광주를 노리며 예외 없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5월 16일 공수부대 병력을 실은 군용 트럭의 길고 긴 행렬이 광주로광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7일 계엄령이 공표 되기 직전부터 시위의 주도 체인 학생 회장단과 복학생들에 대한 예비 검거가 기습적으로 실시되었다.
상원은 유화 국면을 맞이하여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광주 지역의 노동운동을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활성화시키고자 주력하고 있었다.
호남 전기의 단식 파업과 전남 방직의 임금 협상, 아시아 자동차의 어용 노조 민주화 투쟁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상원은 광주 지역의 대규모 사업장에 해당하는 아시아 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 10여명과 함께 투쟁 지도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날 상원은 횃불 시위를 지켜보면서 향후의 정세 변화와 대응책에 골몰하였다.
상원은 일단 YMCA 간사들과 함께 아시아 자동차 노동자들을 만나 빠른 시일 안에 대의원 총회 소집을 요구하고 이를 계기로 조합원 총회 소집과 어용 노조 타도 투쟁으로 밀어붙여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원은 광천 동으로 돌아와 정세 변화 추이에 다른 투쟁 방침과 주변 동지들에 대한 임무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긴 신작하였다.아 살았다, 무기고다 ?
18일 아침 8시, 관현이 황급하게 광천 동으로 상원을 찾아왔다. 언제나 시골 농부처럼 넉넉하던 관현의 표정은 바짝 긴장돼 있었다.
"형 ! 뉴스 들었소? 계엄령인 확대되고 포고령 10호가 떨어졌소 전국 대학 동시 휴교에다 집회, 시위, 파업을 금지 한다요 예비 검속도 시작됐소
아마 김상윤 선배도 달렸을 거요 우리는 미리 연락을 받고 피했는데 전대, 조대에 공수부대가 진주 했다요"
잠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랫동안 한께 들불을 이끌면서 누구보다 가깝던 선후배, 이들은 이것이 살아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도 모르고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도저처럼 우직한 촌놈 관현은 80년 봄을 거치면서 감동적인 대중 연설과 조직 지도력으로 광주 민중의 샛별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어째야 쓰것소?"
"일단 몸을 숨겨야 한다. 잡히면 안돼."
언제나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으려는 관현의 성격을 잘 아는 상원은 관현이 스스로의 피신을 얼마나 못 견뎌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이 부르면 뛰어와야 한다. 나는 시방 광주 민중의 지도자가 아니냐? 앞으로 시위는 틀림없이 격화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열기로 보아 무장봉기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대는 민중들이 널 필요로 할 게다.
그때 네가 나서야 돼 ! 그때까지 잡히지 않는 게 네 임무다. "
관현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불꽃튀는 눈으로 상원을 바라보았다.
"잘 알것소"
관현은 주위를 경계하던 광천동을 빠져나갔다. 상원은 관현의 다부진 어깨를 지켜보다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민중들이 널 부르면 달려와야 한다 ! "
이 마지막 작별 이후 관현은 끝내 상원과 다른 장소에서 산화하고 만다.
광주 민중이 무장봉기의 한가운데서 박관현 열사를 부를 때 박열사는 나타나지 못했다. 그의 귓전에는 "관현아 ! 민중들이 너를 찾는다. 어서 나서라! "는 상원형의 피 맺친 절규가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으리라. 박열사는 상원형의 동지답게, 상원형의 아우답게, 봉기에 떨쳐나서지 못한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처절한 옥중 투쟁으로 대신했다. 10일 간의 무장봉기 기간보다 더 긴 40일 간의 단식 투쟁으로, 광주 민중이 당한 것처럼 무수한 구타와 살인적 고문을 감수하며, 엄중한 책임성으로 젊은 목숨을 다부 어서 그는 민중의 부름에 떨쳐나선 것이다.
민중이 자신에게 부여한 정치적 명망을 개인의 소유물로 끌어안고 썩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부르는 순간 그것이 죽음인 줄 알면서도 기쁘게 달려나가, 자신의 명성에 걸 맞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중의 지도자이다.이제 적과 동지가 있을 뿐이다
원래 18일은 강학과 학생, 광천동 청년들 간에 야구 시합을 벌이기로 했던 날이었다. 상원은 강학들에게 상황이 긴박하니 야구 대회를 일찍 끝내고 시내 상황을 알아보라고 부탁한 뒤 시내로 달려갔다. 예비 검거고 연행된 김상윤을 대신해서 상집이가 녹두 서점을 지키고 있었다. 서점에 가면 뭔가 좀 알 수 있을까 해서 몰려나온 연행 자의 가족들로 서점은 북새통이었다.
상원은 상집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서점을 종합 상황실로 하고 여기저기 사람을 풀어서 시내 전체 상황을 파악하자고 말했다. 상집은 연락온 전화를 받아 수취하는 걸 맡기로 했다. 그때 막 전화가 울렸다.
"여기 전남대인데요 ! "
학생은 아예 울부짖고 있었다. 전화통에서 예전과 달리 악 받친 구호 소리가 멀게 들려 왔다.
"공수들이 막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애들이 피를 흘림서 쓰러지고 곤봉에 막 살점이 묻어나고…… 지금 애들이 카톨릭 센타로 가서 시민들을 불러모으자고 시내로 나가는 참입니다."
"알았소 계속 연락 좀 해주씨요."
잠시 후 상원과 상집도 카톨릭 센타 앞으로 달려나갔다. 돌을 던져도 공수들이 물러가지 않자 학생들을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빠바빙― "
곧 최루탄이 터지면서 얼룩무늬 옷을 입은 공수들이 미친 사냥개 마냥 학생 대열로 뛰어들었다.
공수들은 찍어 논 한 사람만 집요하게 뒤쫓았다. 공수에게 잡힌 한 학생이 '윽-'하며 푹 고꾸라졌다. 곤봉으로 내리친 머리에서 콸콸 피가 샘솟았다. 상원과 상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 부대 지휘 장교가 잠시 땀을 닦느라 방독면을 벗었다. 김상집이 깜짝 놀라며 상원의 어깨를 툭 쳤다.
"어 ! 형. 저 사람, 형 친구 아니요? 종수형 맞제 ?"
상원은 상집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를 노려보던 상원이 분노한 목소리로 그를 소리쳐 불렀다.
"종수야 ! "
전대 정 외과를 졸업하고 경찰 행정 대학원을 거쳐 전남 도경 정보 과장으로 있던 김종수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상원을 발견하고는 얼른 방독면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상원의 부름에도 그는 외면했다.
우리를 외면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진정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들은 누구인가? 첨예한 계급투쟁의 전선에서는 혈연도 학연도 지연도 소용이 없다. 오직 적과 동지로, 아군과 적군으로, 우리는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무장봉기의 순간에 마침내 두개의 계급은 두개의 전선으로 재편된다.
이 전선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 오직 '죽음'과 '죽임'만이 있을 뿐이다. 같은 전선에 굳게 서서 총을 쥔 전우만이 진정한 형제이고 친구이며 동지인 것이다.휘발유를 확보하라 !
학생만 보면 공수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었다.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고 젊은이는 무조건 끌어내렸다. 귀를 질질 잡아끌다가 '나는 학생이 아니다'고 울부짖으면 귀를 싹둑 자르거나 대검으로 허벅지를 푹푹 쑤셔 댔다.
녹두 서점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어댔다.
"거리가 온통 피바다다 ! 상집아. 사람들이 모두 맨손이다. 맨손으로 죽어 가고 있다. 화염병을 만들어야 한다. 빨리 휘발유를 확보해라 ! "
상원의 전화를 받고 상집은 주유소로 달려갔다. 시내를 다 뒤져도 미리 지시가 내려왔는지 휘발유를 팔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마침 서점에 고등학생 둘이 나타났다. 자기 학교 선생님에게 녹두 서점 얘기를 듣고 할 일을 찾아왔다는 믿을 만한 애들이었다.
"아이로 마침 잘 왔다. 사람들이 공수에게 죽어 가고 있다. 휘발유를 구해야 한다. "
상집은 그들에게 돈을 쥐어서 휘발유를 사러 보냈다. 학생들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한참 만에야 낑낑거리마 휘발유를 들고 학생들이 나타났다. 상집은 웅성거리고 서 있는 연행자 가족들을 다 불러모았다.
"형수님들 ! 그렇게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같이 화염병을 만듭시다."
이불을 뜯어내 솎을 꺼내고 병을 구해 오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전화는 불이 나게 걸려 왔다.
"애들이 피곤죽이 돼서 죽어 가는데… 화염병은? 화염병은 얼마나 됐냐?"
상원은 한 시간이 열흘은 되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이 다르게 공수의 살인극은 더욱 악랄하고 잔인해졌다. 공수가 도착하는 곳은 30분이 못 돼 괸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자기 집 담장 너머로 공수의 만행을 지켜 본 아주머니들이 참다 참다 식칼을 들고 쫓아 나왔다. 대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모든 시민들이 닥치는 대로 각목이며 식칼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또다시 공수의 칼에 쓰러져 갔다. '화려한 휴가'를 피로 즐기며 공수들의 광란은 밤새도록 계속됐다.들불의 「투사 회보」
마지막 시위대가 눈물을 삼키며 헤어지는 것을 보고 상원은 녹두로 돌아왔다.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녹두로 전달되고 있었다. 상집 에게 다른 데서 들어온 상황을 전달받고 상원은 밤 늦 게야 광천 시민 아파트로 돌아왔다. 야구 대회를 일찌감치 끝마치고 시위에 참가했던 강학과 야학생들이 초조하게 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원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투쟁 속보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상원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무장 투쟁을 고조,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정학한 전황 파악에 기초한 구체적 투쟁 지침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선전, 선동의 역할을 들불 팀이 맡기로 하고 상원은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들불의 불빛이 밤새 광천동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상원과 전용호는 오늘의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 싸움의 지침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이 보급을 맡은 서대석과 김정국은 이미 통행금지가 내린 밤거리로 나갔다. 시내 중심 가의 집집마다 계엄군의 군화 발소리가 울렸고 숨어 있던 젊은이가 머리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거나 대검에 찔렸다. 둘은 계엄군의 거친 말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식은땀을 흘리며 담벼락에 바싹 붙어 있었다. 간신히 종이를 구해 광천동 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입술은 다 말라 있었다. 글씨를 잘 써서 필경 담담 임무를 맡은 박용준은 글씨 한자 한자에 분노를 불태웠다. 야학 졸업생 나명관과 김성섭은 등사 담당이었다. 아직 쌀쌀한 밤날씨에도 땀을 줄줄 흘리며 둘은 온몸이 잉크로 범벅이 되는 지도 모르고 손에 쥐가 나도록 낡은 등사기를 밀어 댔다.
다음날 아침, 거리로 몰려나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민중들에게 '민중 시민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투쟁 속보가 뿌려졌다. 몇 마디 안 되는 글을 시민들은 읽고 또 읽으며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송곳이나 칼을 소지합시다."
"가능한 모든 것으로 무장합시다 !"
"다 같이 화염병을 만듭시다!"
그들은 유인물의 이름을 「투사 회보」로 정하고 봉기 기간 내내 선전 작업에 몰두했다. 나중에 '대학의 소리', 극단 '광대'등 몇 군데서 나오던 지하 유인물은 도청을 장악한22일부터 상원의 지도하에 장소를 YMCA로 옮겨 하나로 통합하여 발행되었다. 고속 등사기로 하루에 2만장씩 찍어 뿌려진 투사 회보는 일체의 소식이 단절된 광주 시민에게 유일한 언론이자 행동 지침서였다.
방송도 신문도 싸움을 이끌어 갈 지도부도 없는 상태에서, 상원의 선전 작업은 싸움의 열기를 지속시키고 분노로 치를 떨며 무력감과 비통에 잠긴 민중들의 행동 방침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살인공수 한놈을 처치하다
아침이 밝아 왔다. 밤을 새운 들불팀은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할 일을 정리했다.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시로 녹두 서점에 다니면서 접수된 상황을 정리해야 하고 종이 보급조는 미리 가능한 한 많은 종이를 확보해야 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대검에 찔려 죽을 판에 유인물을 돌리다가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들 서로 하겠다며 덤벼들었다.
상원은 서점부터 들렀다. 꼬박 밤을 세운 상원의 얼굴에서는 이글거리는 눈빛만 살아 움직였다. 상원은 녹두로 연락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상황을 보고하도록 할 것과 칼이나 송곳, 무엇으로든 무장할 것을 촉구하라고 상집에게 전했다. 갑자기 상원이 상집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집이 너. 사람 죽여 본 일 있어?"
갑자기 묻는 말에 놀란 상집이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내가 언제 사람을 죽여라."
"공수가 대검으로 찔러 들어오면 어쩔래?"
"같이 싸와야제라."
"어떻게?"
상집은 공수를 죽이는 흉내를 내보였다.
"이놈아! 어제 공수가 사람 죽이는 것도 못 봤냐? 잘 훈련된 공수가 그렇게 하면 죽을 것 같으냐? 그랬다가는 네 목이 이미 공수의 대검에 꿰어 있을 것이다. 자! 잘 봐!"
상원은 송곳을 들고 한 손으로는 공수의 칼을 막으며 공수를 찌르는 시범을 해 보였다. 상원의 얼굴은 아주 진지하고 결연해 보였다. 아니 얼핏 진한 살기가 흘렀다. 상집은 흠칫 소름이 끼쳤다. 아! 그렇다!
이제부터 숨가쁘게 다가오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다. 피를 쏟고 쓰러지는 것은 분장한 배우가 아니라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다.
그들이 흘리는 피는 살아 있는 인간의 피다.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렇다! 무기를 들자!
두 명의 공수에게 끌려온 여인은 만삭이 가까운 임산부였다. 여자가 반항할 틈도 없이 옷을 한 나꿔채 듯이 대검으로 여자의 배를 푹질렀다. 단 한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희끄무레한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다시 여자의 아랫배를 가르고 손을 쑥 집어넣더니 피에 싸인 태아를 끄집어내어서 아직까지 숨을 헐떡거리는 여자에게 집어던졌다. 눈을 부릅뜬 채 여자의 경련이 멎자 공수는 시체를 가마니에 집어넣고 쓰레기차에 던졌다.
"아이구, 하느님 !"
골목에 숨은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푸들푸들 떨고만 있었다.
아! 저 살인마들이 같은 동포인가!
저 공수들이 국민의 군대인가!
지금까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느라 고생한다고 위문편지를 보내고 방위 성금을 바쳐오던 '신성한 군대'의 본질이 저것이란 말인가!
민중의 피땀을 거두어, 민중의 아들들을 데려가, 이 나라 청춘 혈기를 끌어 모아, 가공스러운 무장으로 통제하여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 지배의 도구인 저 군대!
이 땅의 탐욕스런 착취자와 폭압 적인 파쇼 권력을 수호하고 지탱해 온 밑받침, 그 피에 굶주린 살인 군대가 광주 민중을 참혹하고 처참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시뻘건 선혈로 물들이며, 그 거리를 뛰고 쓰러지고 내달리는 민중들의 가슴 팎에 혁명의 불길을 내지르며, 광란의 살육 작전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때였다. 흩어져서 달아나던 시민 중의 하나가 외쳤다.
"시민들 이여! 모두 일어섭 시다! 공구든 곡괭이든 닥치는 대로 가지고 싸웁시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근방 목재소의 각목을 송두리째 긁어다가 싸우는 자세로 돌변했다.
이전까지와 달리 대학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시위를 주동하는 것도 대학생이 아니었다. 허름한 작업복의 노동자, 구두를 닦으러 나왔던 어린 소년, 기름때 묻은 손으로 각목을 치켜든 정비공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고 그들이 앞장서서 시민들을 움직여 갔다.
오후 3시쯤 상원은 가톨릭 센타 앞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가톨릭 센타를 습격한 시위대가 공수를 인질로 잡고 옥상에서 무전 연락 중이던 공수를 때려 죽였다. 상원은 시민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옥상을 바라보았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환하게 웃으며 공수에게서 뺏은 M16과 철모를 흔들었다. 소년의 머리에 하얗게 햇살이 부서졌다.
이제 시위대는 공수의 대검 앞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들의 시체를 넘어 시위대는 돌격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가고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각목으로 식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때르르릉―"
상집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나다 !"
"아, 형이요?"
"거기 어떠냐?"
공용 터미날 지하도에서 수 십 명이나 죽었 다요. 들었소?"
"개새씨들!"
"형은 괜찮소?"
"나 골목길에서 공수 한 놈 해치웠다."
"예? 어떻 게요? 형은 다친 데 없소?"
상집은 깜짝 놀라 물었다.
"응 , 송곳으로 봐 버렸다."
아니 ,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던 상원이 형이 사람을 죽이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상집은 송곳을 들고 나가며 시범을 해 보일 때의 단호하고 결연했던 상원을 떠올렸다.
혁명 투쟁은 이론이나 당위가 아닌 실제적 행동을 요구한다. 상원은 민중을 무참히 살육하는 공수를 직접 찔러 죽임으로 써, 파쇼의 무장력에 적극적으로 맞서 나갔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비폭력, 평화 , 인도주의, 생명 존중 등으로 덮 씌어진 부르주아적 도덕과 윤리의 추악한 본질을 찔러 댄 것이었다. 상원은 투사 회보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무장 투쟁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먼저 공수를 찔러 죽이는 모범적 투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야, 상집아. 사람들. 사람들한테서는 연락 없냐?"
상집은 상원의 노기 띤 음성에 벌떡 정신이 들었다.
"예, 아무 연락도 없소."
"이럴 때 어디서 뭣들 하고 있다냐?"
상원은 민중들의 절박한 부름을 생각하며 애가 탔다.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민중들이 처절하게 갈구하는 것은 바로 전투 지도 ! 조직적인 무장 전투 지도였다. 민중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목숨을 던져 싸우고 있는 데 지도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총! 총이 있어야 한다
사흘째, 오전의 거리는 모처럼 한가로웠다. 그러나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평화로움은 아니었다. 비에 젖은 거리 여기저기에서 털썩 주저앉아 사람들은 통곡했다.
"개도 그렇게 죽이진 않아!"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놈들! 운전 기사의 두 손목을 잘라 내는 놈들! 공용 터미날 바닥에 굴러다니던 임자 잃은 귓바퀴들, 어제의 그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몸서리 처지는 분노와 적개심도 공수의 막강한 무장력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사람들 무리를 비집고 투쟁 속보가 뿌려졌다.
"시민들이여 !무장합시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장이다. 각목 따위가 아니라 공수의 머리통을 박살낼 무기를 찾자!
시민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드럼통이나 대형 화분을 앞세우고 계엄군을 향해 돌격했다. 밀고 당기는 접전이 계속됐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갑자기 차의 경적 소리가 금남로를 뒤엎었다. 깨진 머리에 핏물 배인 붕대를 두르고 영업용 택시 노동자 2백 여명이 차를 앞세우고 금남로로 진격해 들어왔다. 선두에 선 버스 몇 대에는 각목을 든 청년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와아 ! 박수와 환호가 하늘을 울렸다.
차들은 빗발치는 최루탄을 뚫고 도청 앞을 막아선 계엄군의 바리케이드로 달려들었지만 페퍼 포그에 앞이 가려 멈춰서고 말았다.
이때 광천 교통 소속 버스 한 대가 군 저지선을 돌파하여 경찰 4명을 깔아뭉갠 후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군인들이 재빨리 차를 부수고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시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화약 연기 너머로 개처럼 찢겨 죽어 가는 그들을 우우 ―비명을 지르며 지켜보았다.
시민들의 일부는 MBC로KBS로 달려가 진실 보도를 요구했다. 텅 빈 스튜디오로 들어가 작동을 해보았지만 방송은 이미 중단된 뒤였다.
비겁한 자들, 파쇼 권력의 앞잡이!
방송국은 곧 불길에 휩싸 였다. 진실 앞에 눈감는 자들은 모두 불태우리라! 민중을 배반하는 자들은 모조리 불사르리라!
시위대는 불타는 방송국을 보며 박수를 쳤다. 그때였다. 노동청 쪽에서 계엄군의 탱크가 시위대를 향하여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탱크가 지나간 보도에는 걸음이 느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애와 노인들이 고기 덩어리처럼 캐터 필러에 산산히 으깨진 채널 부러져 있었다.
"우리의 아들딸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끝까지 물러나지 맙시다.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밤새도록 광주를 돌았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방송 목소리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집을 뛰쳐나왔다.
두려움에 띠는 사람까지 떨쳐나서게 한 방송의 주인공은 마산에서 무용 학원을 한다는 서른 두 살의 전옥주 였다. 고향 보성에 가려던 전옥주는 광주의 시외버스가 모두 운행을 중단하는 바람에 광주 부근에서 내렸다. 고향 보성 까지 걸어가려던 전옥주는 공수들의 학살극에 치를 떨며 계속 걷다가 시위대를 만났다. 마침 시위대는 방송 기재를 설치해 놓고 작동 법이 서툴러 쩔쩔 매고 있었다.
"제가 한번 해보죠."
웅변을 했던 터라 마이크를 만질 줄 알던 전옥주가 나섰다.
"아―아―마이크 테스팅. 들립니까?"
"아, 거 아줌마 목소리 참 좋네. 아줌마가 방송 좀 하씨요,"
시위대의 부탁에 격려하며, 숨어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봉기의 또 하나의 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땅의 민중 누구도 무장봉기 속에서 민중이 부르고 혁명이 부르면 물러서거나 등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투쟁이기에 ! 자신의 해방을 위한 봉기였기에!
시위대는 도청으로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시위대가 굴린 휘발유 드럼통이 터지면서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차들이 불탔다. 불타는 차량 사이를 뚫고 돌을 든 청년들이 뛰어나갔다.
"탕탕탕탕!"
"드르드득!"
M16 자동소총의 연발 사격 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울러 펴졌다.
돌을 들고 뛰어나갔던 청년들이 피시식 힘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예광 탄이 줄을 그으며 밤하늘로 날아갔다. 시위대가 일제히 좍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었다.
도로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손톱으로 아스팔트를 북북 긁으며 참혹한 비명을 질러 댔다. 골목으로 숨었던 사람 하나가 그 소리를 듣다못해 부상자들을 구하러 도로로 달려나갔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렸다. 꼬꾸라진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골목골목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발을 구르며 외쳤다.
"총! 총이 있어야 한다!"
"총을 가지러 가자 ! 무기고를 찾아라 !"아 살았다. 무기고다!
21일 오전, 시위대의 일부는 군납 업체인 아시아 자동차로 달려갔다. 관리자들이 출입을 막았지만 선발대가 뚫고 들어갔다. 아시아 자동차 노동자들이 선발대를 도왔다. 차마다 휘발유를 가득 채운 뒤 선발대는 함성으로 차를 맞았다.
또 다를 시위대는 총을 구하러 여기저기서 징발한 차량을 타고 나주로, 화순으로, 목포로 미친 듯이 내달 았다.
나주 시내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박수를 치며 빵과 음료수를 버스 가득히 실어 주었다. 광주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을 통해서 광주 소식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그곳 청년 둘이 올라타더니 경찰서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저기 무기고가 있다!"
와―무기고로 달려갔다. 이제 살았다."
MI소총과 AR 소총, 그리고 카빈 소총과 실탄을 가득 싣고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로 달려갔다. 무기와 실탄을 실은 시위대의 차량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살해한 총으로 이제는 네놈들 가슴팍을 뚫어 주리라!
총을 구하고 TNT를 구한 시위대는 총을 하는 높이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광주로 돌아왔다.
유동3거리는 아시아 자동차에서 가져온 APC 장갑차 2대와 군용 트럭, 각지에서 무기와 시민을 싣고 온 차량들로 가득 찼다. 총은 모두에게 전달됐다. 열 여섯, 열 일곱, 어린 소년들도 싸우겠다며 어린 손으로 총을 잡았다.
어떤 청년 하나가 장갑차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스물 여섯의 청년 박남선 이었다. 이후 무장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광주 민중 봉기 주역으로 떠오른 영웅의 등장이었다.
"무기 조작법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젊은이들은 박남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의 총으로 총기 조작을 배웠다.
"오늘밤은 전면전이 시작될 테니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지금이라도 돌아 사십시오."
그렇게 말을 꺼낸 박남선은 오늘의 전투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방침과 방법들을 설명했다. 편제도 없던 혁명군은 박남선의 지도에 의해 조직 대오를 갖추고 중요 지점에 분산 배치 됐다. 총을 치켜든 혁명군은 박남선의 말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총을 들고 마지막 저지선 도청으로 달려갔다. 장갑차를 선두에 세우고 민중의 살육자! 살인 군대의 심장을 박살내려 혁명군들은 타오르는 불덩어리로 그렇게 달려갔다.
살았다 무기다!
아! 살았다
무기다! 무기고다
이젠 인간이다
이젠 투쟁할 수 있다
힘이 있는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다
등짝을 유방을 퍽퍽 찔러 대는
시퍼런 대검의 난무 앞에서
미친 듯이 드르르륵―
피를 뿜는 M16앞에서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짓이겨지는
탱크의 캐터 필러 앞에서
누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가
누가 민중의 주권을 말하는가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부들부들 떨며 발을 구르다
제풀에 허물어지고 마는
돌을 들고 각목을 들고 돌진하다가
단 한번 탕탕 드르르륵 ― 긁어 대면
우수수 쓰러져 나뒹굴고 마는
이 터질 듯한 통분을 어쩌지 못해
이 미칠듯한 무력감을 어쩌지 못해
우― 우 ―미친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인간이 죽어 버린 거리
죽어 모든 가치와 생명이 죽어
인간 존엄과 주권이 죽어
짐승으로 살아야만 하는 거리에서
광란의 몸짓으로 갈망한다
참혹한 아우성으로 내어 뻗는다
인간이고자 생명이고자
힘으로만 지켜지는 주인이고자
아 무기다! 무기고다
이제 인간일 수 있다
이제 투쟁할 수 있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생명
우리 민중의 해방
아 민중 권력의 산모인 무기를 들어라 총을 들어라
인간으로 살려고 하는 자
힘이 있는 주인으로 일떠서려 하는 자
무장봉기의 지도자로민중의 투사들
혁명군들은 해방된 광주를 차를 타고 질주했다. 막대기나 쇠파이프로 차량을 두드리고 노래을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마음껏 해방의 거리를 질주했다.
혁명군은 개선 병사처럼 의기양양했고 해방된 거리마다 늘어선 시민들은 '우리편'을 위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해방된 광주는 젊음과 정열 그 자체였다.
아낙네들은 차를 세워 급히 만든 김밥이며 주먹밥을 혁명군의 손에 쥐어 주었고 문을 닫았던 상점들은 오랜만에 문을 열면서 빵이며 음료수, 담배등을 차에 올려 주었다. 차안은 온갖 먹을 것으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몇 끼나 굶어 왔던 혁명군들이 허겁지겁 먹을 것에 달려들면 시민들은 흐뭇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계엄군들이 '폭도'라고 밝힌 혁명군들은 때에 절고 퀭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해방 광주의 수십만 민중이 흔드는 하얀 손의 물결 속에 안겨 있었다.
누가 우리를 폭도라 하는가!
해방을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자랑스러운 용사들.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해방을 쟁취한 전사들. 파쇼 권력을 부수고 민중 권력을 수립하려는 봉기 자들, 이들이야말로 민주의 투사가 아닌가!
해방 광주에 펄럭이는 태극기. 오,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이여!
혁명군의 핏자국이 아직도 선언한 금남로가 마주 보이는 도청 회의실에서 광주의 유지들로 구성된「5•18수습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곧바로 계엄사와의 협상에 들어갔고 협상을 위해서 무기를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무기 회수라니!"
상원과 박남선은 분통을 터트렸다.
박남선은 수습 위와는 별도로 일단 혁명군의 지휘 계통부터 잡기로 결정하고 혁명군 재조직에 착수했다.
상원은 수습위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민중의 투쟁 의지를 담아 낼 수 있는 시민 궐기대회를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한편 분산된 유인물 팀들을 단일화시켰다. 그리고 차량을 임무에 따라 분류하고 보급과 주장을 싣도록 했다.
오후 3시경 화순으로 가던 차에 계엄군의 집중사격이 퍼부어졌다. 그 차는 '헌혈 및 환자 수송차' 라고 쓰인 대형 플래카드를 달고 있었다.
30명 중에 단 한사람만 살아남았다. 차도 플래카드도 온통 핏물이었다. 잘려진 다리, 날아간 머리통, 떨어진 살점들이 버스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날 광주 진상 조사 단장으로 내려온 박충훈 국무 총리서리는 광주에 들어오지도 않고 송정리 에서 호소문을 발표했다.
"무법의 도시, 폭도의 도시…… 선량한 시민들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십시오."다시 나타난 운동권
23일 3시, 보성 기업 회의 후 잠적해 있던 정상용과 이양현 등이 녹두 서점문을 열고 들어섰다. 함평에 숨어 있다가 도청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상원은 하던 일도 제쳐 두고 황급히 녹두로 뛰어왔다. '같이 싸우러 왔구나 ' 상원은 신바람이 절로 나서 머리 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죽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반가워서 손을 붙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전과 똑같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분명히 패할 싸움인데 우리가 나서서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우리, 비겁해지지 맙시다!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이 될 것이오!"
상원은 온몸의 핏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민중들의 투쟁 의지를 결집시켜 현 수습 위의 투항 주의에 대항할 수 있도록 시민 궐기 대회를 조직하자는 상원의 말에도 사람들은 궐기대회에 연사로 참석했다가는 운동권이 초토화될 거라며 반대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투항파 들은 무기를 반납하라고 외치고 다닙니다. 프락치들은 또 어떤 줄 아십니까? 도청 안에 쫙 풀린 놈들은 간첩이 있다며 혁명군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민중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목이 쉴 만큼 열변을 토하다 상원은 끝내 혼자 도청으로 돌아갔다.
이미 시작되고 있는 무장봉기에의 부름에 목숨을 내걸고 달려나갈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게 등을 돌리고 도망칠 것인가?
상원은 여기에서의 양보는 곧 혁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의 결전의 올바름 여부가 장차의 남한 혁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비타협적으로 지금 당장 봉기에 떨쳐나설 것을 격렬하게 주장하였다.
혁명 운동가는 계급투쟁의 정점인 이 무장봉기의 순간을 위하여 존재하고 훈련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무장봉기에 직면하여 혁명 운동가가 내리는 결정이 올바른가에 따라서 혁명의 진로는 물론 한 혁명가의 일생도 좌우된다.
평상시의 잘못된 결정과 무장봉기에서의 순간의 잘못된 결정은 질적으로 다르다.
혁명 운동가는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다가올 무장봉기의 그 결정적 순간의 올바른 결단을 앞두고 지금, 책임 있는 전술 논쟁과 이론투쟁을 그토록 가열 차게 전개하는 것이다. 무장봉기의 그 숨막히는 순간의 가장 올바른 결정을 위하여!
이날 회의에 대한 증언도 엇갈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상원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이날부터 싸움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한 증언자는 이날의 회의에서도 합의를 못보고 다음날까지 끄는 바람에 투쟁 지도부의 결성이 늦어졌다고 자책하듯 증언했다.
그 사이에도 도청에서는 질서를 찾자는 수습 위원들의 끈질긴 설득에 혁명군 전체 총기의 절반이 도청과 광주 공원에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혁명군들의 마지막 위협 카드였던 다이나 마이트 마저 계엄군 첩자의 손에 뇌관이 뽑히고 말았다.이제 민중은 믿지 않는다
해방 사흘째, 투항적 수습 위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이제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도청 담벼락에는 어제 밤 내내 여공들이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써댄 대자보가 시민들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수습 위의 무기 회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궐기대회를 위해 도청 앞에 모인 10만 여명의 시민들은 무기 회수 문제로 술렁거렸다. 상무관에서는 시체가 썩느라 곧 구역질이 날것처럼 역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상원이 주축이 된 운동권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궐기대회에 수습 위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청년들이 땀을 쏟으며 대회에 쓸 앰프를 구하러 다니는데도 수습 위는 도청 안에 있던 앰프를 못 쓰게 만들고 행사장의 전기마저 끊어 버렸다. 전기기술자가 자발적으로 튀어나와 손을 본 끝에 간신히 대회가 진행됐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가 동료들의 피에 대한 보상이 있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며 울음을 터뜨렸고 '총만 있다면 공수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쏴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 소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수습 위원장 이종기가 계엄군과의 협상 내용을 발표했다. 무기를 회수하는 대신 군은 진주하지 않고 연행 자를 당국의 주장대로 선별 석방하고 제발 사후 보복만은 하지 말라는 거지 동냥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집어 치워라."
"죽여 버려라."
먹이를 뺏긴 맹수처럼 시민들은 으르렁거렸다. 수습 위들은 시민들의 함성에 등 떠밀려 궐기대회에서 쫓겨났다.
수습위 중의 한 사람은 시민들이 외치는 불신의 함성을 들으며 회한과 슬픔에 잠겼다. 신회 받지 못하는 수습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기야 신회 받지 못하는 것이 어디 수습 위뿐인가? 학생은 교수를 믿지 않았으며 민중은 단 한 사람의 관료도 믿지 않았다.
그렇다. 민중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국군도 , 민중을 잡아 가두는 법도, 민중을 폭도로 몰아붙이는 언론도! 너희들은 모두 파쇼 권력의 개들이다!
모두 필요 없다. 민중은 오직 싸웠던 사람, 함께 총을 들었던 사람만을 신뢰한다. 총을 치켜든 사람끼리 어깨를 붙들고 나가리라! 나가서 산산히 부숴 주리라!
파쇼 권력에 꼬리치는 개들! 너희들도 민중의 단단한 주먹으로 박살내리라!
제대로 눈감지 못한 넋들의 눈물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사람들은 대회를 진행시켰다. 밤을 새워 준비한 각계 대표들의 선언문이 낭독되었다.10만 민중 앞에 나선 노동자 대표
피로써 탈환한 도청 앞 광장에는 10만 명이 넘는 민중들로 가득 찼다.
민중들은 자진의 무장으로 쟁취한 해방 공간에 당당하게 두발을 내딛고 서서 단호한 혁명적 투쟁 결의를 표명하는 연사들에게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각계의 성명서와 결의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상원은 웅얼거리며 낭독 연습을 하고 있는 명관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사람이 워낙 많이 모여서 긴장되는 모양인지 손에 쥔 종이가 흔들거렸다.
어제 저녁에 '노동자 대표로 네가 나가라'고 했더니만 정색을 하고 고개를 휘휘 젓던 명관이었다.
상원도 정색을 하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장봉기가 무얼 목표로 하며, 노동자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용감하게 총을 들고 전투에 앞장서서 가장 많이 죽어간 노동자들이 침묵할 때 누가 설치는가를 잠시 토론했더니
"그럼 나가 해야 제라"하며 씨익 웃던 명관이었다.
"그라먼 형이 좀 써 줄라요? 나가 나서서 읽기만 하께."
"임마, 대한민국 8백만 노동자를 대표하는데 니가 직접 써야제."
명관이는 입술을 삐쭉하더니 밤새도록 성명서 문안을 짜내느라 끙끙거렸다. 방금 까지 떨린다고 엄살이던 명관이는 또랑또랑하게 선언문을 읽어 나갔다.
"저는 광주 공단에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우리들의 부모 형제가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우리들의 부모 형제가 검붉은 피를 흘리며 하나하나 쓰러져 갈 때 아무리 사회 정세를 모르는 노동자들이지만 어떻게 참고 모르는 척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새로 조직된 우리 광주 민병 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찾고 원수를 갚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관이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마지막으로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을 죽이자!"
"계엄령을 즉각 철폐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때마침 도착한 전두환의 허수아비에 명관은 '전 민중을 대신 하여 대신 하여 불을 붙인다'며 증오의 불을 당겼다. 빗속에서도 화르르르―불길이 타올랐다.
10만명의 민중들은 미친 듯이 발을 그르며 손뼉을 치고 환호성과 악을 질러 댔다. 증오와 복수심과 통쾌함으로 뒤범벅된 함성이었다.
상원은 명관이를 바라보며 눈시울이 시큰해 왔다. 엊그제 전투에서 죽은 노동자가 떠올랐다. 공장에서 바로 나왔는지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앞장서다 왼쪽 얼굴이 수박처럼 으깨어진 채 죽어 가던 노동자, 열심히 보도 블록을 깨 나르다 아악 ―하고 쓰러지던 가냘픈 여성 노동자, 무장 혁명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모습이 물기에 젖은 눈동자 위로 동시에 떠올랐다.
평소에 민주화 투쟁과 시위 투쟁의 전용 대명사와 같던 학생들은 무장봉기가 시작되자 모두들 사라져 버렸다. 평소에 민족 민주 운동의 지도자였던 재야 민주 인사와 운동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름도 존재도 없던 '잊혀진 계급'인 노동자와 근로 민중들만이 최전방의 무장 투쟁에서 영웅적으로 죽어 갔다.
상원은 도청을 피로써 탈환한 주역인 노동자계급이 오늘 궐기대회에서 반드시 전 민중 앞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당한 노동자 계급의 목소리를 통하여 이 무장봉기의 주체가 누구이며 노동자계급의 권력의지와 투쟁 태세가 무엇인가를 전 민중 앞에 떨쳐 보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개별적 참가를 점차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참여로 전환시키는 상징적인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제 막 꾸틀 거리고 있는 광주 지역 노동운동에 기폭제로 작용하고, 노동자들이 무장 투쟁 속에서 혁명의 산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아! 진실로 언젠가는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봉기에 떨쳐나설 것이다.
들러리가 아니라 주체로 ! 개별 개별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으로 !
일사불란한 조직성과 규율 성과 철저성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주저함도 없이 진군하는 혁명적 노동자 계급 군대가 나설 것이다,!
마침내 우리 노동자 계급 군대가 무장봉기에 나설 때, 단숨에 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저 헛된 명망 하나로 민중을 배신하고 신성한 무장 투쟁을 '수습'하려는 자들을 발도 못 붙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총탄 쏟아지는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과감하게 투쟁하면서도 , 정치에는 무능하여 '교수, 신부, 목사, 변호사, 학생'들의 ' 협상을 쳐다보며 불평이나 터트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계급이 10만이 운집한 이 연단 위를 사로잡고, 정치에서도 유능한 '전위 투사'가 되어 권력 탈취에 떨쳐나설 것이다.
명관아! 너는 이 나라 8백만 노동자계급을 대표하여 오늘 무장봉기의 한가운데서 노동자 계급의 첫 번째 목소리를 외친 것이다.
상원은 연단을 내려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명관을 보며 울컥 솟구치는 뜨거운 감동에 젖어 있었다.결국 함께 가는 길
궐기대회가 막 끝난 6시경YMCA 소 강당은 젊은 열기로 가득 찼다. 궐기대회를 주도했던 청년, 학생, 노동자 등 25명이 며칠간의 피로와 잠 부족으로 핼쑥해진 얼굴을 맞대고 앞으로의 임무와 역할을 애기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던 이양현과 정상용의 모습도 보였다.
"결국은 이렇게 함께 갈 것을……"
상원은 감격에 젖어 속으로 부르짖었다.
확실히 모임은 활기를 띄어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광주 운동권을 지도 해온 탁월한 경륜과 역량을 겸비한 중심 인자들이 참여하자, 지금까지 일해 왔던 사람들도 한결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집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많은지 발 냄새가 코를 찌려 왔지만 발냄새가 나는지 꽃향기가 나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먼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1.재야 민주 인사들을 항쟁 과정에 적극 참여시킬 것.
2.계속하여 시민 궐기대회를 적극 추진할 것.
3.현 수습 위에 적극 개입하여 투항 주의를 투쟁 노선으로 변화시킬 것.
상원은 정상용, 김영철, 정해직 등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도청 출입자는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지만 상원이 계속 도청 안에서 활동한 덕분에 이들은 별 문제 없이 정문을 통과했다.
마침 학생 수습 위가 무기 회수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부위원장 김종배를 유심히 보았다. 22일 일반 수습 위가 무기 회수를 주장하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마이크를 뺏아 들고 굴욕적인 협상에는 응할 수 없다고 시민들을 선동하던 바로 그 친구였다.
상원의 일행이 회의에 끼어 들어 수습 위의 투항 주의를 비판하자 갑자기 수습 위원 중의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찰칵 총의 노리쇠를 당기며 외쳤다.
"이 사람들 수상하다. 간첩 아니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회의실을 나가는 데 위원장 김창길과 장세균 목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궐기대회 따위로 시민들을 흥분시키지 말아 달라면서 이미 계엄사와 무기 회수 및 자체 수습에 대한 사전 약속이 되어 있다고 사정했다.
"시민들의 요구를 올바로 수용할 능력이 없다면 물러나시오?"
상원은 단호하게 소리쳤다.전술 방침을 수립하라
상원은 18일부터 시작된 무장봉기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투쟁의 구심체들의 현황과 역관계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파악하기 시작했다.
광주 봉기의 실질적 지도부는 점차 도청을 중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먼저 도청 지도부의 실세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장력을 관장하고 있는, 박남선을 중심 으로한 상황실이었다. 상원은 기존의 국가권력을 대체하고 새로운 민중 권력을 창출하며 강력한 봉기 지도를 수행할 실질적 힘인 무장 혁명군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박남선 상황 실장은 봉기한 광주 민중의 무장력을 출중한 혁명적 지도력에 의하여 점차 조직적으로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광주 운동권이 잠적 해 버린 지도의 공백 상태를 메꾸며 피어린 무장 투쟁의 한복판에서 박남선은 찬연하게 떠올랐다.
그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봉기의 최전선에서 며칠에 걸쳐 목숨건 전투를 수행하고, 전투상 황에 처하여 고도의 헌신성과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함으로써 무장 투사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무장 투쟁 속에서 익힌 '안면' 과 역동하는 봉기 상황 속에서 발휘한 '단호한 결단력'이 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
평범한 생을 살아오던 26세 청년인 그는 이 며칠의 무장 투쟁 속에서 몇 십년 간의 축적으로나 확보할 수 있는 혁명적 권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 권위는 혁명 투쟁의 최전선에서 피를 부어 투쟁하고 있는 민중들과 봉기 투사들로부터 부여된 그 누구도 부정 못할 신성한 혁명적 권위였다.
그는 역동하는 혁명 상황이 배출한 걸출한 지도자이자 생동하는 무장 봉기 속에서 떠오른 진정한 민중의 영웅이었다. 박남선만이 아니라 혁명군의 정예부대인 기동 타격 대에 소속된 성원들 역시 민중의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노동자와 근로 민중 출신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이름 없이 죽어 가면서 단호한 혁명적 입장에 서서 광주 봉기를 이끌어 나간 주체였다.!
혁명군에는 중 소 영세 자본가나 '민족 자본가'는 한 놈도 없었다.
그러나 이 민중 봉기의 영웅들은 헌신적이고 용감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숙했다. 스스로를 권력의 주체로, 지배계급으로 훈련할 기회를 한번도 갖지 못하고 보수 야당의 그늘 아래 정치적 무능력을 강제 당해 온 때문이었다.
박남선은 봉기의 진로와 민중의 혁명 의지를 강력하게 좌우할 「수습 대책위」「시민 학생 투쟁 위원회 」의 정치적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은 탁월한 민중 봉기의 영웅이자 스타 였지마, 자신들을 새로운 혁명 정부 수립으로까지 이끌어 줄 감독이 필요했다.
상원은 박남선의 중요성과 혁명적 권위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또한 정치 적으로 미숙한 그의 한계까지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상원은 그가 비록 정치 의식에 있어 부족하고 조직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소위 운동권은 아니지만 역동적인 단 며칠간의 혁명 상황 속에서 몇십 년을 상회하는 정치의식과 지도력을 응축하여 체득한 혁명의 지도자임을 소중히 인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상원은 도청 지도부 내에서 기존에 확보한 대중적 명망 성을 밑천으로 혁명 투쟁을 약화시키고 있는 수습 대책위의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에 긴장된 주목을 하고 있었다.
박남선의 상황실이 '군사'의 중심이라면, 수습 대책위는 '정치'의 중심이었다.
무장봉기를 둘러싼 각 계급의 첨예한 입장이 여기에서 불붙어 대립하고 있었다.
상원은 이들의 기회주의적이고 투항 주의적 입장에 이를 갈고 있었지만. 민중 진영 내에 서 있기에 ,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입장에 동요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이고 무기 회수가 절반에 달할 만큼 이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민중 앞에 그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무력화시켜 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상원은 수습위 내에서 혁명적 입장에 서려는 김종배 부위원장을 견인함으로써 수습위를 타도하고 도청 봉기 지도부를 개편해야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또한 도청 지도부 내에는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굴러가고 있는 각종 부서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으로 상원은 파악하고 있었다.
'행정'업무에 해당되는 각종의 부서들을 유기적인 연관성 하에 재편하여 통일적인 집행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상원은 나름의 투쟁 방침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로, 이미 시작된 민중 봉기는 기조의 파쇼 권력이 타도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설사 패배하여 주더라도 다음 혁명의 불씨가 되기 위하여 결사 항전해야 한다.
둘째로, 고립 포위된 광주 봉기를 전국으로 확산시켜야만 이길 수 있다.
셋째로, 도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혁명군을 통일적인 전투 지휘 체계로 조직화해야 한다.
넷째로, 수습 위의 무기 반환으로 침체된 민중의 혁명 투쟁의 의지를 고양시키고 전 민중의 적극적 무장화를 촉진시켜야 한다.
다섯째,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김종배를 무자력 으로, 강화시켜 줌으로써 수습 위를 분열, 견인한 후 , 투항 주의자를 축출한다.
여섯째, 복귀한 운동권 인자를 도청 지도부 내의 간부로 입각시키고 의식 있는 학생들을 주요한 무장 부서에 대체시켜 적의 교란 작전을 봉쇄시킨다.
그리하여 혁명적이고 중앙 집권화된 실질적 집행력을 갖춘 대체 권력으로서의 봉기 지도부를 창출한다.
상원은 잠잘 수도 없고 쉴 틈도 없는 정황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이러한 요지의 전술방침을 마음속으로 정리하면서 하나하나 실행에 들어갔다.좋소, 함께 해 봅시다
상황실에서 상원은 외곽 순찰을 나간 박남선을 기다렸다. 또 어느 외곽에 선가 계엄군과 격돌하여 시민들이 살해당했는지, 박남선은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찡그린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원은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상원도 지금껏 상황실에서 통행증을 발급하고 차량 분류를 하는 등 함께 일을 해 왔지만 외각지 전투 연장을 주로 다니며 무장 혁명군을 재편성하느라 바빴던 박남선은 상원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상원은 옆 의자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풀어 나갔다. 박남선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습위 사람들은 시민들의 신성한 죽음을 출세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오, 일단 무장한 시민 군들을 제대로 조직해서 싸울 수 있게나 만들어 놓고 수습을 하든지 싸우든지 해야 할 것 아니겠어. 대책도 업이 발발 떨면서 무기를 회수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상원은 강한 동감의 뜻을 표명하면서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넌즈시 물었다.
"더 이상의 무기 회수를 막아야 합니다. 아직도 흩어져 있는 무장 시민을 한군데 집결시켜서 지휘 계통을 세워야 하구요. 전투 조직도 더 강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내용이든 협상은 그 후의 문제일 겁니다."
상원은 이제 스물 여섯이라는 박남선을 찬찬히 ㅤㅎㅜㅀ어 보았다. 그도 계속 잠을 못 잤는지 두 눈만 퀭하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상원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시작했다.
"그 동안 예비 검속을 피해서 숨어 있었던 운동권 출신들이 광주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상원은 박남선의 입가로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인제는 싸우겠답디까? 상황이 좋을 때는 시민의 선봉인 양 앞장서 데모를 하다가 그 동안 어디 가 있었 다요? 대여섯 살 먹은 애들이 공수들한테 '죽여죽여'하고 대들다가 갈가리 찢겨 죽은 얘기는 들었 다요?"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상원은 신중하게 그를 설득했다. 박남선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좋소 지금이라도 싸우겠다니 함께 해 봅시다. 어쨌든 무기 회수는 막아야 하고 당신들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둘은 눈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손이 으스러지도록 악수를 나눴다. 다른 곳에서 외롭게 싸워 왔던 사람들이 동지로 맺어 지는 순간이었다.
상원은 다시 김종배를 찾기 위해 회의실로 갔다. 김종배는 잠시 열을 식히러 나왔는지 복도에 서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힘드시죠? 그래도 지지 마십시오. 전 시민이 당신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나쁜 놈들! 총부터 거둬서 어쩌자는 거야?"
"당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면 말 가지고는 안돼요. 당장 수에서 밀리고 있지 않소. 지금 대학생 병력이 조직되고 있으니 내일부터는 그들을 동원합시다."
김종배는 흔쾌히 수락했다.
한참 후 회의실에서는 고성들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탕 의자 구르는 소리가 나더니'도청을 폭파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박남선의 성난 포효 소리가 도청을 뒤흔들었다.도청 봉기 지도부의 탄생
25일, 시장과 상점이 문을 열었다. 광주 근교에서 싱싱한 야채를 싣고 오는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아직 핏기 배인 도로를 달렸다. 무장 혁명군들에게 줄 먹을 것을 머리에 잔뜩 인 몸빼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도청으로 줄지어 갔다.
아주머니들은 수줍어서 고개를 돌리는 시민 군들을 붙잡고 '내 새끼 같은데 어뗘' 하며 세수도 못해 까마귀 사촌 같은 얼굴을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주었다.
노동으로 딱딱하고 까칠까칠한 아주머니들의 손바닥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혁명군들은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컥 눈물이 솟았다.
이제까지는 수습 위의 끈덕진 설득에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조직된 혁명군들은 목숨을 걸고 자기의 총을 지켰다. 수습 위가 '살려면 총을 버려야 한다'고 하자 혁명군은 총부리를 휙 수습 위원에게 돌리며 '우리를 적에게 팔아 넘기고 하는 놈은 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오전 10시 상원은 정상용과 함께 YMCA에서 그 동안 연락이 된 민주 인사들을 만났다. 민주 인사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쩌 겠는냐 . 아까운 시민의 피를 더 이상 막으려면 무기를 회수해야 되지 않겠느냐 '고 했다.
상원과 정상용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지금 싸우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이 될 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상원은 '싸우는 건 저희가 할 테니 어르신들은 뒤에서 지원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원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궐기대회에서 선생님들 이름으로 성명서라도 발표해 주실 랍니까?"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상원과 정상용은 참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떴다.
이들이 돌아간 뒤 민주 인사들은 지금 수습 위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며 자신들이 수습위에 참여하기로 하고 오후 5시 수습 위에 합류했다.
도청은 이날 아침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었다. 오전 중에 상원의 계획에 따라 YMCA에서 교육받고 조직된 대학생 병력이 최초로 도청에 들어왔다. 이들은 김종배와 박남선에 의해 학생 경비대로 배치되었다. 계속해서 학생 병력이 조직되고 있다고 말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상원은 이들에게 오후 궐기대회가 끝난 후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 하자며 그때까지 수습 위의 무기 회수를 어떻게든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말을 마치자 박남선이 꼬깃꼬깃한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윤형! 이것 좀 봐 주씨요. 이따 궐기대회 때 읽을 라고 한디 괜찮은가 어쩐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을 읽으며 상원은 눈시울을 붉힐 뻔했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외곽지역 곳곳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다니고 게다가 차량 통제하랴, 회의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일텐데 글은 또 언제 준비했을까.
스물 여섯, 아직 어린 나인데도 전쟁에 숙달된 노련한 장군처럼 혁명군을 조직하고 통솔해 내는 박남선 에게서 상원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힘을 보는 것 같았다.
서툰 문장 몇 개만 고친 뒤 상원은 원고를 돌려주었다. 문장은 서툴었지만 올바른 원칙이 있는 이상 오히려 그 서툼이 더 빛날 수도 있을 터였다.
광주 무장봉기의 결정적인 시기에 소위 운동권 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버렸다.
그러나 무장봉기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영웅들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들은 과학적인 인식이나 혁명 이론도 없었다. 조직 경험도 남을 지도 해본 경험도 없었다. 투쟁 경험과 전술 방침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 새로운 봉기의 영웅들은 지금까지 묻혀져 있던 노동자와 민중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봉기의 한 중심에 서서 놀라운 창발 성과 과감한 결단성과 눈물겨운 헌신성으로 스스로 지도력을 확보 해나간 사람들이었다. 짧은 봉기의 며칠 동안에 이들은 영웅적 투쟁과 죽음을 불사한 용감한 활약으로 대중의 깊은 신뢰를 획득하였던 것이다.
봉기의 영웅인 이들 노동자와 민중들은 혁명 투쟁 속에서 이전의 평범했던 생을 일거에 뛰어넘어 버렸다. 이들은 봉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과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로 질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마치 뜨겁게 단 모래가 단물을 빨아들이듯이 이들은 역동적인 혁명 투쟁의 와중에서 계급 투쟁의 진수를 체득하였던 것이다. 무장봉기는 평상시의 상식을 강타하며 이처럼 새로운 민중 봉기의 지도자들을 역동적으로 배출 해낸 것이다.
혁명 투쟁 속에서는 이들처럼 서슴없이 목숨을 내던진 헌신성과 정확한 결단력과 창발 적인 조직 능력만이 지도력을 인정받는다.
혁명 투쟁 속에서 대중은 생생한 교육과 단련을 받게 된다. 적의 무장력을 타도하려는 혁명 투쟁 속에서 민중은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재조직하게 된다.
혁명 투쟁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통치자가 되고 자기 행정가가 되고 지도자가 된다. 실로 혁명 투쟁의 하루는 평상시의 10년 동안과 비견할 만한 생생한 정치적 경험을 대중에게 전파한다.
운동권 인사들이 모조리 봉기의 현장에서 도망쳐 버린 지도의 공백 속에서 노동자와 민중들은 스스로 우뚝 서서 봉기를 주도해 나간 것이다.
오직 윤상원만이 고독하게 도청을 드나들며 봉기의 방향을 혁명적으로 지도해 나갔다. 만약 윤상원 열사마저 없엇더 라면 이 나라 운동권은 역사와 광주 봉기의 전사들 앞에 얼굴조차 들 수 없었으리라.
어제보다 사람이 반으로 줄기는 했지만 궐기대회의 열기는 더 높았다. 궐기 대회에 의해 수습 위의 영향력은 땅 끝까지 떨어졌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 상원이 상황실로 뛰어들어 왔다. 업무 보고를 받고 있던 박남선이 놀라서 휘둥그런 눈으로 상원을 쳐다보았다. 상원은 다짜고짜 그를 잡아끌었다.
"부지사 실로 갑시다. 지금 일반 수습 위가 무조건 무기 반환을 결정 하고, 시내 일원에서 벌써 무기 회수에 들어갔소.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해요."
박남선은 M16으로 무장한 20명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 앞에 배치한 후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사살하라고 명령하고 군화 발로 문을 차고 들어갔다.
박남선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천천히 총구를 하늘로 겨누자 수습 위원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남선은 서서히 총구를 그들에게로 돌리며 '누가 마음대로 무기 회수를 결정했느냐' 고 호통을 쳤다.
"앞으로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배신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으면 무조건 죽여 버리겠다."
한 사람에게로 총을 겨누자 수습 위원 중의 하나가 얼굴 색이 하얗게 변해
"그게 먼 소린가? 이제 그만 끝내세, 안 그러면 어찌 자는 건가?" 하고 말했다.
노리 쇠를 당길 듯하던 박남선이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권총의 손잡이로 그 사람의 등을 찍어 버렸다. 퍽 하고 고꾸라지는 그를 보면서 박남선은 타앙! 공포를 쏘고 난 후 다시 한번 단호하게 외쳤다. 하얗게 질린 수습 위원 대 여섯 명이 우르르르 빠져 나갔다.
"무기 회수 하자는 놈이 있으면 다 죽여 버릴 테니 당장 도청에서 나가라."
조금 후 김종배가 씩씩거리며 상황실로 돌아왔다.
"끝까지 무기 회수를 주장하는 김창길 같은 놈들하고 나 도저히 일 못 하것소 집에 갈라요. 차라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는 게 속 편하것소, 수고 허씨요."
박남선은 휭 하니 밖으로 나가는 김종배를 쫓아 나갔다. 박남선은 나도 당신을 지지하고 있고 오늘밤에는 윤상원 등이 새로운 집행부를 만드 다니까 같이 잘 해보자며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오늘밤까지만 잘 버텨 달라던 윤상원의 부탁도 있었던지라 김종배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총 한방에
타앙!
총 한방에
우르르 대 여섯 명이
봉기의 도청을 빠져나간다
무장으로 세워 나가던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미래
신성한 민중의 권력을 배반하고
적들에게 무기를 반납하여
'폭도'의 명예를 벗고
'노예'의 멍에를 쓰자고
감히'수습'을 나서는 자 누구인가
살려 하는 자는 떠나라
타앙!
총 한방에
짐승으로 한평생 살고자 하는
투항 주위자들이 도망쳐 간다
배신자들이 떠나간 그 자리에
아 아 저 어두운 도청 앞 광장에
잠시 후면 피에 젖어 죽어 갈 그 자리에
총을 달라고 우뚝 버티고 선 사람들
짐승의 생존보다
인간의 죽음을 택한 영웅들
타앙!
혁명의 총 한방에
대 여섯 명이 빠져나가고
2백 명이 들어왔다
혁명적 결단의 총 한방에
머뭇거림이 죽고
투항의 유혹이 죽고
무장 없이 살 수 없는 절실한 목숨들만
바위처럼 쇳물처럼 뜨겁게 엉기어
봉기의 광장 위에
우뚝 우뚝 서 있다
타앙!
단호한 총 한방에
단호한 혁명적 결단 앞에「임시 혁명정부」의 모태
밤9시 도청 식산 국장 실에서 운동권과 김종배, 허규정, 박남선 등이 긴장한 얼굴로 둘러앉았다. 실질적인 투쟁을 지도해 낼 봉기 지도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옆방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함께 들어온 무장한 대학생들이 대기 중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시뻘개진 얼굴로 김창길이 뛰어들어 왔다. 김창길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거냐'며 마구 삿대질을 해댔다. 한바탕 휘젓고 나더니 김창길은 다른 학생 수습위원과 함께 도청을 빠져나갔다.
밤 10시, 드디어 「민주 학생 투쟁 위원회」가 결성됐다. 일단 과도기적 인수 인계가 끝날때까지 김종배가 위원장직을 맡기로 했다.
상원은 대변인으로 뽑혔다. 봉기 지도부의 유일한 대외 창구를 관할하는 대변인은 무장봉기 지도부의 얼굴이자 봉기한 민중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대변인은 지도부 내에서도 상황판단이 가장 정확하고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집행부 내의 모든 일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봉기 지도부들은 지금까지의 투쟁 과정에서 무장봉기의 대의와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급박한 상황마다 정확한 대처 방안을 결정할 결단을 내려온 사람이 누구인가, 전체 부서의 상호 유기적 관계를 직시해서 봉기 지도부를 실제적으로 관장해 온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명쾌한 논증력과 유연한 대처 능력을 보여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판단했다.
봉기 지도부 성원들의 전체 의견의 일치에 따라 대변인의 적임자로 상원을 선임했다. 며칠 동안 함께 투쟁하면서 확인된 상원의 실질적인 지도력을 봉기 지도부 성원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봉기 지도부는 혁명군의 무장을 강화시키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킬 방법들을 토의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부시시한 얼굴에 눈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상원의 모습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신들리 사람'으로 남겨졌다. 사람들은 그날 밤, 아니 무장봉기 기간 내내 상원이 '광주 봉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죽음의 행진
26일 새벽 무전기에서 다급한 혁명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들이, 놈들이 쳐들어옵니다. 여기 농성동인데요 ……."
잠깐 단잠에 빠져 있던 박남선은 부실장이 등을 잡아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면서 부실장은 계엄군의 진입을 알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남선은 전 혁명군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기둥에 기대서거나 시멘트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로 짧은 단잠에 빠져 있던 시민 군들은 '계엄군 진입" 단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 차량으로 달려갔다.
박남선은 혁명군을 이끌고 부랴부랴 농성동으로 달려갔다. 계엄군의 탱크가 혁명군들의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고 한국 전력 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길게 뻗은 탱크의 기관포가 시민군을 향해 불을 뿜을 듯 웅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총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무력 진압하겠다는 계엄군의 위협에 박남선은 당당하게 '당신들이 그럴수록 혁명군은 더 단단해질 뿐' 이라며 강력하게 원 위치로 물러갈 것을 주장했다.
혁명군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추위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계엄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계엄군이 진압했다는 연락을 받은 수습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헤매기 시작했다. 이성학 장로가 무거운 분위기를 박차고 일어났다.
"젊은이들에게 맡길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도 일어납시다. 우리 어른들이 죽음으로 막읍시다."
20여명의 수습 위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보슬비 내리는 어두운 새벽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맨손으로 죽음을 맞으러 가는 수습 위원들의 뒤를 따르며 플래쉬를 터뜨렸다. 죽음의 소리인 양 음산하게 올리는 자신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이들은 농총 진흥원까지 계속 걸어갔다.
이미 무장 시민 군과 대치 중인 계엄군에게 이들은 계엄군이 철수하기 전에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잠시 후 계엄군은 원래의 자리로 철수했다.
외신 기자들에 의해 '죽음의 행진'으로 이름 붙여진 이날의 행진은 세계의 매스컴을 타고 광주 봉기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들 명망가들이 '죽음의 행진'을 할 때에 무장한 민중들은 '죽음의 행진'을 맹세하며 봉기의 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현 파쇼 체제를 전복학 민중 권력을 움켜쥐기 전까지는 한번 일어선 봉기의 총을 절대로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혁명의 사산이었다.
그러나 수습 대책 위원들은 저 살육 자들을 향하여 '구걸의 행진'을 하고 있었다. 기존 파쇼 권력을 타도하고 자신들의 무장으로 새로운 민중 권력을 수립 하고자하는 민중들을 두고서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적들과 타협하려는 이들의 행진은 전세계 매스컴의 각광을 받으며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행동으로 조명되어 왔다. 그러나 진실로 적들과 끝끝내 투쟁하다 총살당한 현신적 이고 영웅적인 민중 봉기의 전자들은 '극렬분자'이고 '폭도'에 불과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계급과 파쇼 권력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에게는 '폭력배'와 '과격분자'의 딱지가 붙여지고 있다.!
그리고 '파업을 중지' 시키고 치욕적인 '타협'을 강제하려는 보수 야당의 매춘 행위만이 '민주 질서'이고 '정치력의 발휘'로 조명 받고 있다.
지금도 '체제 개선' 주의자들은 민중의 영혼을 어지럽히며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고, '체제 전복'을 해야만 해방될 수 있는 민중의 결사 항전은 철저히 매도당하고 탄압 당하고 있는 것이다.외신 기자 회견
계엄군의 일시 진입으로 도청 안이 한때 술렁거렸지만 「시민 학생 투쟁 위원회」는 곧 부서별로 집행에 들어갔다.
기획부에서는 무기와 보급품의 관리를 비롯해서 서무와 총무 일반에 관계된 업무를 시작했고 민원부 에서는 피해자 명단 접수, 관공서 정상 가동등 대민 업무를 단계적으로 실행해 나갔다.
조사부는 기동 타격 대가 체포해 온 범죄자를 죄의 종류에 따라 분류, 처리했으며, 홍보 부에서는 전반적인 홍보 활동 강화를 위해 신문사와 방송국을 정상 운행하고 봉기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에 필요한 일체의 물품들을 준비해 나갔다.
상황 실장 박남선은 지금까지의 순찰대를 보강, 재편성하여 기동 타격대를 조직하고 계엄군과의 대치 지역을 점검하는 동시에 투항 파의 끈질긴 교란 작전을 직접 저지했다.
가장 강력한 전투부대인 기동 타격 대의 대장은 스무 살 짜리 자개공 노동자인 윤석루였다. 대원들 거의가 그만한 또래의 노동자들이었다. 가장 힘들 텐데도 그들은 상황만 생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전투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자주 상황이 벌어지는 탓에 하루 두끼도 먹지 못해 눈은 퀭하니 들어가고 아직 어린 수염이 부슬부슬 돋아난 그들의 모습은 계엄군의 발표처럼 겉보기에 '폭도' 같기도 했다.
그러나 동지들과 장난을 치거나 음식을 건네주는 식사 조의 여성 노동자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될 때, 그들의 모습은 어리고 순박한 소년이었다. 주먹밥을 들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그들이 안쓰러워 '힘들지 않느냐' 고 물을 라치면 그들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마지막 날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 가장 용감하게 싸우다 총을 껴안고 죽어간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상원은 적의 기습 진압이 눈 압에 닥친 포위 상태에서, 더더욱 기존 언론 매체들의 반동적인 조작 보도로 전국 각 지역의 민중과 고립된 상태에서 광주 봉기의 상황을 전달하고 연대 행동을 전파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외신뿐이라는 판단으로 외신 기자 회견을 준비했다.
대변인인 상원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현재까지의 광주 상황을 일일이 차트로 준비했다. 1시간 동안 현재까지의 상황, 투쟁의 목적과 피해 등을 설명한 상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을 끝내면서 말했다.
"광주는 한국 사람들에게 응어리진 한으로 남을 것이다. 군부 독재가 종식되지 않는 한 광주의 한이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계속 싸움으로 내몰 것이다."
기자들이 승리에 대한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상원은 잠시 생각하다 '7일'이라고 대답했다. 7일만 버티면……그러자 외신 기자들은 승리의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죽음의 항전
26일 오후 5시에 계엄군의 최후 통첩이 전달되었다. 봉기 지도부는 이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하고 궐기 대회가 끝날 무렵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일시에 침묵이 깔렸다.
모두가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그늘처럼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광장 모퉁이에서 여학생의 맑은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하나둘씩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 소리가 광장에 가득 차면서 누가 선두를 섰는지 대열이 꿈틀거리며 금남로 쪽으로 움직였다. 계엄군과 대치해 있는 공단 앞에서 사람들은 외치고 또 외쳤다.
"계엄군 물러가라!"
"우리는 최후까지 싸운다!"
"광주를 지키자!"
도청 앞으로 돌아오면서 사람은 자꾸 줄어들었다. 누가 자기를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멈칫거리며 대열을 이탈했다. 아마도 스스로의 양심이 자진의 비겁을 잡아당기는 것일 터였다.
도청에 도착했다. 사회자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외쳤다.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분만 남으시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밤 계엄군이 진격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상원은 마이크 소리에 창가로 갔다. 어둠 속을 버티고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은 사회자의 말이 끝나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미동도 없이 그들은 서 있었다.
상원의 눈가에도 물기가 퍼졌다. 그는 사람들의 타오르는 눈빛을, 그보 다더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바로 당신들이 다음 세상의 주인들이다.
비겁하게 뒤 돌아서지 않는 자! 피로 찾은 우리들의 자유를 피로 지키려고 하는 자! 당신들만이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일반 수습 위와 봉기 지도부의 연석 회의가 열렸다. 수습위의 대부분은 여전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자고 우겼다. 다들 고개를 들고 마지막 힘을 죄다 짜내 열변을 토했다.
"물론 우리는 질 것입니다. 모두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찾은 광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자유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 값입니다. 그 피를 저버리 다니요? 이 엄청난 무장봉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도청을 지키다 죽어야 합니다! 함께 싸울 수 없다면 남은 우리라도 싸우다 죽겠습니다!"
궐기 대회에서 같이 죽기로 한 동지들의 어깨를 끼고 도청으로 몰려들면서 외치는 구호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무기 반납 결사 반대!"
"끝까지 싸우자!"
자리를 차고 나오면서 상원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 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재야 민주 인사들 중 누구 하나 일어나 손을 움켜쥐며 "그래, 같이 싸우세"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원은 박남선과 함께 YMCA에서 대기 중인 궐기대회 지원자들을 편제하러 갔다. 보름이 멀지 않은 밤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YMCA에 모인 사람 중에는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여고생이며 아직 총도 제대로 못 가눌 중학생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그들은 울음을 떠뜨 리며 상원과 박남선의 바지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우리에게도 총을 주세요. 우리도 싸울 수 있어요."
"총을 쏠 수 없다면 총알이라도 나를 랍니다."
"정 싸우고 싶거든 내일 아침 일찍 나오너라. 오늘밤에 우리가 다 죽으면 그때는 너희들이 싸워라."
아이들은 몸부림치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멀여 져갔다. 자꾸자꾸 뒤돌아보면서……최후의 만찬
그들에게 곧 식사가 지급되었다.
사람들은 여성부 에서 준비한 식사가 나오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입가에 밥풀이 달라붙는지도 모르고 먹는 데만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식사를 날라 온 여성 노동자가 피식 웃음을 떠뜨렸다. 어릴 때 먹을 것만 생기면 배가 동산만 해지도록 먹어대다가 짜구 나겠다고 핀잔 들었던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건지 몰랐다.
"음마? 남자들이 밥 묵는디 머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쌌소. 나 밥이나 좀 더 주씨요 살아서 마지막 밥 일란가도 모른디 많이 묵어 둬야제."
"그라고 본께 이것이 최후의 만찬 아니라고?"
그들은 내일 아침이면 영영 못 먹게 될 지도 모르는 밥을 그래도 열심히 먹었다. 옆에서 밥을 더 건네주며 여공은 목이 메었다. 먹어도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들의 갈증이 무엇인가를, 그 갈증 때문에 오늘밤 모른 척하고 편히 잠들 수 있었을 텐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만찬을 먹는 사람들의 불타는 가슴을 여공은 알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
이것이 지상에서 나누는
최후의 밥일지도 모른다
적의 탱크와 헬기가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이 밤 굴욕 스런 지상에서의 삶에 마지막 굵직한 종지부를 찍자
지상의 마지막 생명을 부어
죽음으로 새겨 넣는 혁명의 출발점을
우리 총을 치켜 내어 긁직히 찍자
피로에 지친 퀭한 얼굴들
수마에 시달려 시뻘개진 눈동자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 얼굴들로
우리 마지막 지상의 작별을 나누자
두려움에 고동치는 가슴으로
아 우리 죽음을 불사르고 싸우자
반란의 불꽃 되어 파쇼를 불사르자
동지여 숟가락을 들어라
지상의 마지막 밥을 먹어야 한다
먹어도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들
허기지고 쓰라린 민중의 위장으로
처절하게 타오르는 민주의 허기로
목숨을 주고 민중 권력을 먹어야 한다
이제 잠시 후 조명탄이 오르면
너와 나의 시체를 넘고 넘어
민중의 피바다를 철벅이면서
우리들의 새벽은 올 것이다
살아 동터 오는 저 푸르른 새벽
피투성이로 밝아 오는 민중의 나라
그 처절한 갈망의 새벽은 올 것이다
자 총을 들어라
총을 들어 학살의 밤을 찢어야 한다
지상 위의 마지막 밥
영원한 생명의 밥
미치게 허기진 민중의 위장으로
우리 최후의 만찬을 나누자
마지막 지상의 밥을 나누자
먹어도먹어도 배가 고픈 우리들
목숨을 주고 민중 권력을 먹기 위하여
허기진 밤을 찢는 결사 항전을 위하여
도청에서는 그 동안 식사를 해주던 여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꼭 살아 남으라'며 대부분의 여자들은 도청을 빠져나갔지만 여성 노동자 몇 명은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총을 달라고 버텼다. 아무리 가라고 달래도 기어이 가지 않고 남은 사람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 무기고 부근에서는 수류탄에 맞았는지 어깨가 떨어져 나가고 온몸이 갈가리 찢긴 여자의 시체가 눈부신 초여름의 햇살 속을 뒹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서로 격려하며 싸웠을 젊은 남자가 창자까지 남김없이 드러낸 채 여자의 옆을 지켰다.
때 이른 파리떼가 엉겨 붙은 핏자국 위로 꼬여 들었다.
누구였을까, 그 여자는.
항쟁 기간 내내 역겨운 피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를 맡으면서도 오빠 같고 동생 같은 혁명군들의 허기를 달래 주고 마지막엔 노동에 찌든 투박한 손으로 총을 움켜쥔 채 적의 심장에 총탄을 쏘아 대던 여자.
이제 다시는 잔업에도 시달리지 않고, 너무나 얇은 월급 봉투에 한숨 쉴 필요 없이, 아! 찢겨진 몸뚱이로 혁명의 불꽃 되어 타오른 그 여자는…….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정각 12시, 봉기 10일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간부 회의가 시작됐다. 상황 실장이 상황판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우리 병력은 5,6백, 적의 병력은 대충 4천 정도로 추상됩니다. 화력으로 따지면야…… 먼저 이 상태에서 싸울 것인지 부터 결정합시다. 저는 끝까지 싸우자는 쪽입니다."
부실장 양시영이 책상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아침 같지 않고 정말 쳐들어올까요?'
순찰 부장 정민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결정은 무슨 놈의 결정! 죽든가 살든가 끝까지 싸우는 것이지. 무서운 사람은 다 돌아가! 나는 내 동생의 원수를 갚을 테니까!"
다들 한마음이었다. 상황 실장에게 총지휘권이 주어졌다. 박남선의 지시로 양시영이 마이크를 잡았다.
"계엄군이 우리를 죽이려고 지금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 내의 모든 사람은 무기고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모두 힘을 합해 저 살인마들을 몰아 냅시다."
상원은 무기고 앞에서 총을 지급하고 있었다. 저 쪽에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투사 회보 팀이었다.
"어이 형! 뭐하고 있소."
뒷줄에서 들려 오는 소리였지만 상원은 안보고도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명관이 놈이었다. 이번 봉기 기간 내내 선전물 적업을 전담 해온 녀석들이 마지막이라고 하자 다들 총을 잡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너희들 웬지 선뜻 총이 내밀어지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럼요."
머뭇거리는 상원의 손에서 명관이가 총을 휙 낚아챘다.
"형! 조심하시오."
명관이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아 아 사랑하는 녀석들아. 이제 우리는 다시 볼 수 없다. 그 해맑은 웃음도, 삐딱선 타던 그 성질도, 짜증도, 슬픔도…….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싣고 선전 조의 여학생 박영순의 목소리가 이슬비에 젖은 거리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광주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혹은 슬픔 때문에…….끝내 죽어버린 새벽
아. 지금이 5월인가! 꽃마저 말라비틀어진 5월, 가로수도 잎을 떨궈 버린 5월!
조명탄의 창백한 불빛에 드러난 도청 화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상원은 민원실 2층 베란다에 엎드려 미친 듯이 총을 갈겨댔다. 계엄군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무수한 총탄만 날아들었다. 머리 위로 쌩쌩 총알이 날아다녔다.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 왔다.
총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탄알이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탄알이 떨어졌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개새끼들,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이야!"
누군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상원은 잠시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M16이 , 기관 포가, 헬기가 끊임없이 총탄을 쏟아 부었다. 저 엄청난 화력 앞에서 무수한 혁명군들이 퍽퍽 쓰러지고 있었다. 우리가 쏜 카빈은 과연 몇 명의 적을 꿰뚫었을까?
도저히 중과부적이었다. 민중의 아까운 피를 줄일 수 없다. 항복이란 앞서간 동지의 피를 팔아먹는 짓이다. 항복하면 파쇼 권력의 개가 될 뿐이다.
내 빈약한 총알이 적을 모두 피해 간다고 해도, 적의 총탄이 모두 내 몸뚱이에 박힌다 해도, 그래도 싸워야 한다. 비록 실패한 무장봉기일지라도 다음의 혁명에 위대한 교훈을 남겨 주기 위해서라도,
죽어서 민주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나는 혁명의 불꽃이 되어야 한다.
아직은 먼 새벽이지만 기어코 새벽은 온다. 오고야 만다.
살아 펄펄 뛰며 새벽은 온다.
성스런 피에 젖은 민주의 새벽이, 찬란한 해방의 새벽이 온다. 온다.
상원은 다시 총을 치켜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건너편 창가에 싸우던 고등 학생이 푹 무너졌다. 상원은 높은 포복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죽어도 적을 노려보듯 두 눈을 부릅뜨고,
새벽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새벽이 오면 싸우러 나올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소년은 어둠 속에서 죽어 갔다.
그때였다.
"어이쿠!"
제자리로 돌아와 거총 하려던 상원이 옆구리를 움켜쥐며 꼬꾸라졌다.
뻥 뚫린 구멍에서 뜨거운 창자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상원은 이빨을 앙 다물었다.
"윤형! 윤형!"
"상원아아!"
김영철과 이양현이 총탄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상원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적의 총탄에 뚫린 상처에서는 창자가 계속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이양현과 김영철은 근처에 있던 이불을 끌어다 상원을 눕혔다.
혁명기간 내내 잠 한숨 못 자던 상원은 이불 위에 눕혀 놓아도 잠들지 못했다.
죽어서도 잠들지 못 했다.
산사람보다 더 굳 세계 이빨을 앙 다물고 고개를 젖힌 채, 창자를 다 내놓고 상원은 숨을 멈췄다.
상원은 숨을 멈췄다.
상원은 그렇게 죽어 갔다.
최후의 순간조차 편히 숨을 거두지 못하고
그렇게 처절하게 죽어 갔다.
이 땅의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고통이 너무도 참담하기에
이빨을 악물며 고통 속에 죽어 갔다.
저 간악한 자본가계급과 파쇼 권력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최후의 순간까지 적개심에 가득 찬 이빨을 악물며 단호하게 죽어 갔다.
'죽기 위해 살자'던 그 맹세를 끝끝내 지키고자
혼신의 기력으로 이빨을 악물며 죽어 갔다.
적의 총탄이 옆구리를 후벼 뚫고 관통할지라도 절대로 '항복' 할 수 없다는
혁명가의 목숨건 결의로 이빨을 악물며 죽어 갔다.
피에 젖은 해방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죽어 썩어서도 풀릴 수 없는
비장한 혁명 정신의 이빨을 악물며
우리 상원은 그렇게그렇게 죽어 갔다.
사심 한점 없이 따뜻하고 해맑기만 하던 그의 창자조차
모조리 쏟아 내놓고 처참하게 그는 죽어 갔다.
상원이 죽는 순간까지 호주머니에 넣고 있던 것은 무기들이었다.
전국적 봉기의 확산과 전 세계 민중과의 뜨거운 연대를 위하여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주어졌던 무기인 외신 기자들의 명함이었다.
그리고 탄창 이었다! 희망의 총탄이었다.
총은 상원의 희망이었다. 봉기한 민중의 희망이었다.
총은 신성한 민중 권력을 출산하기 위한 산모였다.
저 몸서리치는 착취와 폭압 체제를 전복시켜 낼 해방의 무기였다.
파쇼 권력에 질식당하고 살육 당하는 민주의 수호자, 민주의 생명줄, 민중 해방의 열쇠였다.
수 십년 동안 사무치게 쌓여 온 민중의 분노와 탈권 의지를 총탄 한 알 한 알에 담아 차곡차곡 재여 넣은 소중한 탄창 이었다.
정확한 노선도, 피끓는 선동도, 명쾌한 이론도, 치열한 비판도, 이 순간에 는 총탄이 되어야 했다.
총탄이 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불과한 것이었다.
민중의 삶은 총구를 통하여 살육 당했기에, 민중 권력은 총구를 통해서만 탄생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민중의 권력 탈취를 가는 하게 하는 성스러운 도구인 탄창을 최후까지 호주머니에 담은 채 상원은 그렇게 죽어 갔다.
부끄럽게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가 다 쓰지 못한 탄창을 불쑥 넘겨주며, 죽어 가는 최후까지 품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없이 절규하며, 상원은 그렇게 죽어 갔다.
이빨을 악물고
창자를 쏟아 내놓은 채
시커멓게 불에 그슬려서
다 쏘지 못한 탄창을 품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광주 무장봉기를 이끌며
민중 권력 장악의 신들린 화신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혁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며
80년대 남한 혁명운동의 찬란한 새벽 별!
해파 윤상원은, 1980년 5월27일 새벽 4시 40분경
광주 무장 봉기의 한가운데서
서른 살의 장엄한 목숨을 거두다.
필자 후기
만 9년 동안 썩어 묻혀진 80년대의 새벽 별
두터운 망각의 흙무덤을 헤치고 우리 앞에 다시 서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이빨을 악물려, 한 손으로 창자를 부여잡고, 또 한 손엔 총을 움켜쥐고, 몸의 절반이 시커멓게 타 들어간 채, 혁명 투사 윤상원은 우리 앞에 우뚝 다시 서고 있습니다.
혁명 투사 윤상원 앞에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만 9년 동안이나 이토록 묻혀질 수가 있습니까?
이토록 완벽하게 썩어지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죽음보다 더 비통한 망각의 무덤 속에서 통곡하는 그를, '영혼 결혼식'으로 한 매듭 지워 저승으로 돌려보내 버릴 수 있습니까?
참으로 인간의 무지는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의 비겁은 이토록 어이없는 것입니다. 진정 자유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정치 지배력은 이토록 참담한 것입니다.
혁명 투사 윤상원!
그의 무덤은 탈권 의지로 불타오르는 민중의 가슴팍입니다.
그의 고향은 광주가 아닙니다.
그의 고향은 '노동 해방'의 기치 아래 힘차게 진군하는 천만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 바로 거기입니다.
혁명 투사 윤상원은 남한 사회에서 80년대의 모순의 한복판을 가장 철저하고 전진적으로 살다간 인물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남한 노동 운동의 새 장을 열어 제낀 '70년대의 새벽 별' 이었다면, 이제 윤상원은 남한 혁명 운동의 새 단계를 알리는 '80년대의 새벽 별'입니다. 이제 윤상원은 혁명적으로 복권되어야 합니다. 무장봉기의 화신으로! 민중 권력의 화신으로!광주 봉기는 '상황 끝'이 아니다
광주 무장봉기는 아직도 '상황 끝'이 아닙니다.
80년이나 89년이나 노동자와 민중의 살을 말리는 힘겨운 노동과 생존의 고통은 여전합니다. 민중의 희망과 진보의 걸음은 여전히 꺾여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반동 파쇼 권력의 폭력 실상은 여전합니다. 살인 공수의 대검 대신 식칼 테러로 찔러 대고, 총탄 대신 직격 최루탄이 머리통을 강타하고, 방패로 내리찍고 전자봉 으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날의 광란하는 공수 대처럼 백골단이 이리떼같이 달겨들어 물어뜯고 있습니다.
80년 당시 광주 무장 봉기를 '수습'하려던 민중의 배신자들이 지금도 광주 문제를 국회에서 '청산'하려 하고 있습니다. 무장 봉기한 민중들에게 '폭력 금지'와 '시위 자제'를 부르짖던 보수 야당들은 지금도 노동자를 '폭력배'로 매도하며 '파업 자제'를 소리치고 있습니다.
윤상원이 '죽기 위해 살자' 던 혁명적 의지는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는 노동자의 집단적인 결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상원 열사가 이미 시작된 무장봉기 앞에서 온몸을 내던져 이끌어 나갔듯이, 지금 이미 시작된 전투 앞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사 항전으로 맞서며 윤상원의 '혁명적 현실주의' 원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설 때가 아니다'며 무장봉기에 등을 돌리고 잠적했던 절대다수 운동권처럼, 지금도 '유리, 불리'를 따지고 '준비가 안됐다'며 위축되어 있는 다수의 동지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윤상원이 총을 들고 투쟁하다 죽어 가던 80년 그 상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노동자와 근로 민중의 고통의 뿌리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체계'와 이를 수호하는 반동 파쇼 권력이 그대로 온존하고 있기에, 상황은 점점 가열 차게 치달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우리 앞에 닥쳐올 봉기의 상황을 예고하면서……광주 봉기의 혁명적 복권과 '특별 재판소'
광주를 빛고을이라 합니다. 그 빛의 원천은 혁명성 입니다. 무장봉기입니다. 파쇼 권력을 향해 불을 총구입니다.
지난 9년 동안 묻혀져 있었던 것은 비단 윤상원 열사만이 아닙니다. 무장봉기의 주역이었던 그날의 영웅들은 제대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혁명성을 순화 당하고 있습니다.
과연 윤상원이 살아남이 있다면 그가 오늘날 '광주 항쟁의 영웅'으로 평민당 금 뺏지나 달고 있을 사람입니까? 광주 청무회 스타가 되어 '정당방위'와 '과잉 진압'을 들먹이고 있겠습니까?
이번 5월에도 광주 봉기는 정치권의 쟁점으로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 봉기는 국회에서는 절대로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국회 청문회 가지고는 절대로 정호용이나 노태우, 전두환의 입을 열지 못합니다.
저들은 '총'이 있었기에 ,조직된 무장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 우리 민중을 그토록 참혹하게 짐승 사냥 할 수가 있었습니다. 광주 학살 주범을 처단하는 길은 단하나 뿐입니다. 오직 '총'밖에 없습니다.
총 없는 국회 진상 조사와 청문회는 '참새들의 입 방앗간'에 불과합니다. 우리 민중은 '성난 독수리의 사냥터'에서 저 들쥐 놈들을 찢어발기려고 합니다.
그날의 광주에서처럼 수십만, 아니 수 백만 명이 운집한 도청 분수대 위에다 저놈들을 꿇려 놓고, 우리 무장 혁명군의 총부리를 들이대며 실토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 반동 파쇼 권력에 비하여 우리가 열세인 현재의 계급 역관계에서, 당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쟁취해야 할 최소한의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는, 광주 문제는 학살 주범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 보상으로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를, 광주 봉기를 피바다로 살육한 파쇼 권력과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고, 그 원흉들은 반드시 처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광주 문제는 파쇼의 총칼로 둘러싸인 현 국회에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광주 학살의 진상 조사와 그 주범들의 심판을 맡아 나갈 특별 재판소'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광주를 혁명적으로 복권하는 것은, 이를 통하여 그 기초를 닦아 나갈 수 있습니다. 광주 문제를 현재의 국회나 평민당에 맡기는 것은 광주 봉기의 투사들을 두 번 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가슴을 짓눌러온 나의 책무
윤상원 평전을 집필하면서 저는 분노와 오열을 짓씹었습니다.
세상에 ! 어떻게 지금까지 이토록 철저히 묻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저는 제 자신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색이 '노동자 시인' 이라고 불리는 제가 혁명 투사 윤상원 동지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고, 광주 봉기의 진실에 대하여도 이토록 몰랐다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고 비참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광주 봉기에 대한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올해만은 기어코 윤상원 열사를 뒤덮은 망각의 무덤을 파 제끼고 혁명적으로 복권시켜 내야겠다고 평전 집필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약된 수배 생활과 지난겨울부터 급격히 악화되어 버린 건강과 격무 때문에 저로서는 , 단 일주일간의 집필 시간밖에 투여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통 스러운 것은 제가 직접 광주 현장을 돌아보고 윤상원 동지와 함께 투쟁했던 분들을 만나서 증언과 자료를 수취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또 윤동지와 관련되시는 분들과 상세히 상의하고 협조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저는 이러한 한계를 헌신적인 몇 동지들의 도움으로 극복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집필 보조에 헌신하신 동지들은 광주를 오르내리며 수 십명의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봉기 현장을 샅샅이 밟아 다니며,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일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 동지들의 성실한 노력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윤상원 동지와 가장 가까이서 활동했던 분들이 명확한 증언을 회피하고 취재 요청을 꺼려하신다는 보고를 접하고, 또 한번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글에는 기존의 자료와 상이한 몇 가지 민감한 사실들과 지금의 평가와는 확연히 다른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필자가 가진 계급적 관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점이 어떠하건 간에 객관 사실은 정확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페이지의 자료를 비교 검토하고, 귀중한 증언의 객관성 여부를 확인 취재하게 하고, 사실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을 면밀하게 상호 비교 검토하여, 최대한의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도록 노력을 다했음을 자신 있게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7일간의 제한된 시간과 수배 상태인 저의 신분 조건에 의하여, 또 저의 무능력과 불철저함에 의하여, 혹시 틀린 사실이 있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이는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윤상원 열사와 광주 봉기를 혁명적 관점에서 되 살려내야 한다는, 지금껏 제 가슴을 짓눌러온 책무는 아직도 완전히 처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윤상원 동지를 혁명적으로 복권시키는 것은 우리 산 자들 공동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가칭[혁명 투사 윤상원 열사 기념 사업회]를 결성합시다.
윤열사의 혁명 혼과 신성한 봉기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번 광주 봉기 9주년을 맞이하여 반드시 결성합시다.
둘째, 윤열사가 80년 5월26일, 마지막으로 1시간에 걸쳐서 외신 기자 회견을 하였습니다. 이때 외신 기자들이 비디오로 촬영한 윤열사 생전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입수하여 상영하고 보급합시다.
셋째, 윤 열사와 함께 광주 무장봉기에서 끝까지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가장 철저하고 헌신적으로 투쟁한 노동자, 근로 민중들을 재조직합시다. 역동하는 혁명적 투쟁 속에서 배출된 박남선 무장 혁명군 총사령관을 위시한 봉기의 영웅들은 석방 후에 자신의 혁명성을 제대로 발전시키고 조직화할 조건과 계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껏 이를 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모든 동지들이 이 제안을 검토하시고 적극 실행해 주실 것을 감히 요청합시다.윤상원 정신과 90년대의 새벽 별
혁명 투사 윤상원의 빛나는 생은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남한의 신 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참으로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자, 진정 양심으로 살려고 하는 자, 진실로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자가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혁명 운동가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고 어떤 자세로 투쟁에 임해야 하는가를 그의 온 삶과 죽음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80년대의 삶을 가장 치열하고 혁명적으로 살다 죽은 윤사원 열사의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윤상원 열사의 혁명 혼을 이어 살려 이제 우리 스스로가 다가오는 '90년대의 새벽 별'이 되어야 합니다. 90년대는 지난40년간 '잊혀진 계급'이던 우리 노동자계급이 민족 민주혁명에 앞장서서 마침내 민중 해방을 이룩하는 가슴 벅찬 '승리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어 사려야 할 [윤상원 정신]은 무엇입니까?프롤레타리아트적 정신
윤열사의 생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뿐인, 그리하여 누구를 착취할 수도 억압할 수도 없는 우리 노동자계급의 맑고 성스러운 정신을 그대로 뿜어내고 있습니다.
신 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계급과 일치되지 않는 삶이란, 착취자의 삶이거나 기생적인 잉여가치의 삶에 다름 아닙니다. 진실로 도덕적이고 고상한 삶은 노동자의 피와 살과 신경을 쥐어짠 잉여가치 위의 삶이 아니라 이 사회 발전의 주역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헛된 욕망과 기득권과 야심을 다 버리고, 모든 희망과 모든 능력과 전 존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에 걸어 버리는 삶! 아무리 쌓고 늘려도 나날이 허물어지고 훼손 당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지켜 가려는 삶이 아니라 과감히 해체시켜 전진하는 해방 투쟁의 대오에 쏟아 붓는 삶!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진군과 함께 생기 차게 솟아오르는 삶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전진하지 않으면 살수 없기에,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그 삶은 혁명적이고 나날이 새롭게 거듭나는 삶입니다.혁명적 결단의 정신
윤상원 열사는 일상적인 삶에서조차 '죽기 위해 살자'며 결연한 각오를 닦아 왔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철저히 억압받고 비틀려진 이 사회에서 살기 위함을 목적으로 할 때 그 삶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반동적인 삶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윤상원 정신은 '보신'의 삶이 아니라 '투신'의 삶으로, '유지'의 삶이 아니라 '개혁'의 삶으로 살아가 는 것입니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순결한 속가슴으로 맞받아 상처 입고 나뒹굴면서도, 한 번 내 딛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는 삶입니다.
뚜렷한 생사 관을 세우고 언제든지 민중이 부르기만 하면, 역사가 부르기만 하면, 전선에 불이 붙기만 하면 즉각 불새처럼 뛰어들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리고 단련하는 결단의 삶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직면하는 모든 투쟁, 모든 전투, 모든 접전에 있어 불타는 적개심과 강력한 전투 의지로 맞서 나가는 삶입니다.
적에게 체포되어 수사를 받고 고문을 받을 때도, 테러와 협박을 당할 때도 , 구속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때도 '여기서 죽겠다'는 자세로 성실하고 철저하게 투쟁하는 삶입니다.
죽어도 적 앞에서 항복하지 않는 삶입니다.
작은 나날의 유혹과 머뭇거림 앞에서 단호한 혁명적 결단을 가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축적되고 단련된 강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정 죽음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순가 앞에서도 윤열사와 같은 혁명적 결단을 사는 삶입니다.무장봉기의 정신
첨예하게 대립하는 계급 사회의 생존은 굴종인가, 적대 인가로 구분되어 집니다. 윤상원 열사는 첨예한 계급투쟁의 전선에서 산화하였습니다. 분출의 시기만을 엿보며 이글이글거리는 휴화산 같은 남한의 계급투쟁 전선에서, 폭력 투쟁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윤열사의 죽음은 남한에서의 계급투쟁이 얼마나 첨예하게 폭발하는가, 계급투쟁의 본질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폭압 적인 파쇼 권력의 지배하에서는 민족 통일도, 민족 자주도, 민주주의도, 민중 생존도 끝내는 국가권력 탈취를 향한 첨예한 무장 투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체제 개선'과는 단호히 선을 긋게 됩니다. 계급투쟁의 극치인 무장 봉기 투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 도래할 현실입니다. 무장봉기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9년 전에 발생했고 지금도 점차 그 순간을 향해서 숨가쁘게 치달아 나가는 오늘 준비해야 할 과업입니다.
윤열사는 신 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성과 파쇼 권력의 살육 성의 본질을 투철히 자각하고,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인 무장봉기를 대비하고 과감하게 지도해 나가는 봉기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무장력으로 국가권력을 손에 움켜쥠으로써 민중이 스스로를 지배 계급으로 조직화하는 봉기(!)에 의해서만 오늘의 투쟁이 완성된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삶입니다.전위 투사의 정신
윤열사가 80년대의 새벽 별이라면 이제 우리는 90년대의 새벽 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윤열사가 간직한 전위 투사로서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윤열사가 90년대에 못다피운 고귀한 싹을 활짝 피워 내야 합니다. 전위 투사의 정신으로 다음과 같이 되고자 노력합시다.
첫째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정확히 숙지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노동 해방 사상에 대한 체계적 이해와 강령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또한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전술 원칙과 당면의 구체적 전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현실적 방침인 조직 노선과 규약 사상에 대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자신의 견해를 정식화하고 문제를 '비판 체계로 바라볼 수 있는 변증법적 사유 능력이 필요합니다. 얽혀 있는 문제의 범주를 구분하고 핵심 고리를 포착해 내는 사고 체계가 훈련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전위 조직원으로서의 안정성과 조직 지도 능력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개인의 발전과 조직의 발전을 통일적으로 도모하고, 실천 상 부딪히는 문제들을 조직의 기본 지침과 결부시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사람과 조건만을 탓하지 않고 조직 구조 및 체계와 연관 지워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끌어안고 하늘에서 땅 끝까지 뛰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배분하고 주어진 역량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짧은 시간에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도록 회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결의를 분명히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부의 문제 제기를 창조적으로 수렴하여 발전시키고, 각 부서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활력 있게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대중적 전위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전선의 상태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보고함으로써, 올바르고 통일적인 지도 지침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실제적인 사업의 추진 능력이 요구됩니다.
지침을 구체적인 세부 계획으로 입안하고 독자적으로 대중 속에서 활동하여 지도자로 인정받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고비가 닥칠 때면 일을 포기하여 지금까지의 성과를 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원과 각 부서가 쌓아 놓은 성과 위에서 전진적으로 발전시키는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일의 우선 순위를 정확히 가려내어 효율적으로 풀어 나가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대중 사업에서 끊임없이 창발 성을 발휘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넷째는, 비밀 활동 능력을 말합니다.
파쇼 체제하에서 비밀 활동에 소모되는 노력과 물자와 시간을 필수적 요건으로 인식하고 체화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변 조건과 신분에 걸 맞는 자기 변신 능력이 필요하며, 약속 시간과 기타 모든 비밀 활동사의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적의 미행 및 침탈 시에 침착하고 기민하며 치밀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적과의 수사 투쟁에서 결사 항전의 자세로 조직을 보위 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적과의 수사 투쟁에서 결사 항전의 자세로 조직을 보위 해내는 능력이 요구되며 보위를 개인과 한 부서의 안전이 아닌 조직 전체의 문제로 사고하는 자세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다섯째, 프롤레타리아트 당파성의 체현 정도가 철저해야 합니다.
착취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새 사회에 대한 열망과 승리의 확신이 가득 차야 합니다. 자신이 확보한 세계관과 개인적인 정서가 굳건히 결합되어야 동요하지 않고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혁명적 열정과 전투 성과 적에 대한 비 타협 성이 곳곳에서 철철 넘쳐야 합니다. 대중의 슬픔과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며 대중과 함께 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지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함께,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결점을 혼신의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일상생활 및 건강을 조직하고 감정과 활동의 기복에서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관계를 혁명운동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재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타파하고 현실적이고 혁명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끝으로,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전문적 능력을 조직 활동과 모순되지 않게 개발하고 고양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동지들의 인간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상호 이해와 상호 긍정으로 조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90년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되기 위한 피나는 단련과 노력을 가열 차게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면한 투쟁 전선 속에서, 개인이 아닌 조직 속에서, 분파적 경쟁이 아닌 전국적 통일 지향 속에서 줄기찬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윤상원 동지는 망각의 세월을 확 찢고 땀 냄새 피 냄새 화약 냄새 자욱한 혁명적 [윤상원 정신]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80년대 남한 혁명운동에 찬란한 '피에 젖은 새벽 별!' , 혁명 투사 윤상원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우리가 '90년대의 새벽 별'로 나섭시다.!
이 어둠의 장막을 찢고 다가오는 가슴 벅찬 승리의 시대를 향하여!
무장봉기의 화신으로! 민중 권력의 화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