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학 - 국립학교
● 국자감 - 종합대학의 성격을 띤 고려의 관학.
유교과, 잡학과 양현고를 둬 유학생을 길러냄.
※ 양현고 - 국자감에 입학한 학생에 수업료, 숙식등 필요경비 일체를 부담하는 장학재단.
※ 섬학전 - 안향이 건의하여 만든 교육의 연금제도. 고려말 양현고의 재원고갈로 문무관리로부터 기부금을 모집하여 그것을 원금으로하고 나오는 이자로 양현고의 재원을 충당하였음.
● 향교 - 인종5년에 세워진 중등교육수준의 관학.
교육목적은 유학전파와 지방민 교화.
성적우수자는 국자감에 입학가능.
문묘가 설치되어 국자감의 축소라고도 함.
※문묘 - 공자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제사를 지냄. (유교사상)
● 학당(동서학당) - 고려후기 개경에 세워진 중등교육수준의 관학.
국자감의 교육을 받지 못하는 개경의 학도들을 모아 유교중심
의 교육을 함.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동, 서, 중, 남, 북 5부학당이 세워짐.
◎ 사학 - 사립학교
◎ 십이도 - 고려중기 국자감이 부진하자, 최충이 사설 교육기관으로 구재학당을
열어 학생을 교육.
목적 : 과거준비와 일반교양
내용 : 국자감의 유학교육과 동일
◎ 서당 - 지방 서민계급의 자제를 대상으로 하는 초등정도의 교육기관.
● 유 학 (유교사상)
중국 춘추시대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사상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
핵심 사상 :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개인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유교에서는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여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치자(治者)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까를 말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 성리학 (주자학, 정주학, 도학, 심학등으로도 불림)
유학의 한 분류. 송명시대(宋明時代)의 유학을 말한다. 성리학의 사상 : 효(孝) 충(忠) 예(禮) 신(信) 성(誠) 경(敬) 아들이 되어 효도(孝)해야 되고, 신하가 되어 충성(忠)해야 하며, 예(禮)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믿음(信)으로써 벗과 사귀며, 자기를 닦는 데 경(敬)으로써 하고, 일을 실천하는 데는 반드시 정성(誠)으로 할 뿐이다.
- 고려의 성리학
저 불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하여 윤리를 업신여기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니 곧 오랑캐의 무리이다.- 안향, "회헌집" 고려의 국교는 불교. 성리학은 국교인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어 고려광종때 시험과목으로 도입은 되었으나 완전하게 국가의 규범과 백성을 다스리는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안향은 이러한 불교의 편협함을 꼬집어 주장했던 것이다. 성리학이 한국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조선건국 이후의 일이다. 정도전, 권근 등이 성리학에 입각하며 조선건국의 합리화를 위한 이론을 세움으로써, 성리학은 조선 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 관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양명학
명나라 유학자 왕수인에 의해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
성리학이 사물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품을 理(또는 天理)라고 주장하는 학문
이라면 양명학은 마음(心)이 주체적인 자각의 중심이고 이것이 바로 理(天理)라 주장했던 학문.
성리학 性學, 양명학 心學으로 구분.
● 교육 사상가
◎ 최 충 (984 - 1068)
해동공자로 칭송받던 고려중기 학자. 학교 교육의 아버지. 9재 학당 설립.
스무 살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 벼슬길에 오름. 관료생활동안 현종, 덕종, 정종, 문종에 이르는 네 명의 왕을 섬김. 재상이 되어 율령을 개정, 형법을 정비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 문종때 70세의 나이로 은퇴. 은퇴 후 고려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유명무실 상태. 새로운 교육이 절실하던때 9재학당을 설립. 최충은 학도들의 최대희망이기도 한 과거시험 교육에 매진하고, 시와 문장
교육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최충의 교육 사업은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 볼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학도가 되기를 원하였다. 사학발전에 온 힘을 기울인 최충 86세를 일기로 사망. 그가 해동공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많은 인재양성에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그를 단지 과거시험 교육에만 전념한 학자로 이해하였고 불교문자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거부함.
◎ 김부식 (1075 - 1151)
고려중기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
편모슬하에서도 그의 형제4인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박학하여 과거에 합격.
스물두 살 때 벼슬길에 올라 최고의 문장가로 입신양명. 김부식의 학문이 빛을 낸 것은 예종때 송나라 사신으로 여섯달동안 머물며 송나라 휘종에게 사마광의 자치통감 한 질은 선물받고, 이 책에 버금가는 우리의 역사서를 써보리라 결심. 그가 나중에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
정치적 난관이던 묘청의 난과 이자겸의 난을 물리치고 왕 아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게됨.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편찬하게 됨. 영원한 라이벌 정지상을 죽이고 정지상의 손에 불알이 잡혀 죽었다는 설화는 김부식과 정지상을 견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고든 이야기이다.
◎ 안 향 (1243 - 1306)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
주자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옴.
안향, 백이정, 권보등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며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얀향을 비롯한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은 대부분 과거급제자들.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학문 실력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 무신정권 붕괴후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 출신.
◎ 정몽주 (1337 - 1392)
한국 성리학의 창시자.
어릴적 이름 몽란 - 몽룡 - 몽주 (어머니 꿈 때문에 이름이 여러번 바뀜)
과거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은 문하에서
정도전등과 수학함.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성균관 박사 - 성균관 대사성에 오름. 스승 이색은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뛰어나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고 극찬. 성리학의 창시자라 평가함.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유능한 외교가였으며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적 성향으로 이성계, 정도전과 뜻을 같이 했으나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의 정적이 됨. 고려사직을 보존해야했던 정몽주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 (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된 정몽주. 정몽주의 마음을 알게 된 이방원은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에서 그를 제거하고 정몽주 일파를 완전히 제거한 후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 후 이방원은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이라는 이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