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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역사 충의 지조의 시 스크랩 안창호 (한국 독립운동가) [安昌浩]
은하수 추천 0 조회 54 12.01.12 0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878(고종 15). 11. 9 평남 강서~1938. 3. 10 서울.
독립운동가.교육자.

한말에는 애국계몽 활동을 했으며, 이후 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호는 도산(島山). 아버지는 흥국(興國)이다.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읜 후로는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이무렵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몇 살 위의 필대은(畢大殷)과 국내외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1895년(고종 32) 17세가 되던 해 서울로 와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여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면서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 서당 훈장 이석보(李錫寶)의 딸 혜련(惠鍊)과 약혼을 한 뒤 1897년 서울로 다시 올라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로 열린 평양 쾌재정 연설회와 이해 11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 많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자 고향인 강서로 돌아와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학교로 남녀공학이었다. 그뒤 학교 운영을 형 치호(致浩)와 가까운 친지에게 맡기고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갔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이곳 교포들의 생활상을 개선하기 위해 1903년 친목회를 조직했으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교포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와 생활향상을 목표로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야학을 개설하여 교포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순한글 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이 공립협회는 1910년대 국민회의 창립으로 발전적 해체를 할 때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교포 사회의 영사관 구실을 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그는 공립협회 대표로 국내 사정을 살피는 한편, 국내의 유지들과 반대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 도중 도쿄[東京] 에 들러 재일한국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 연설 한 뒤 1907년 봄 서울에 도착했다. 귀국 후 그는 일본의 국력과 비교해볼 때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장 시급한 일은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물질문명을 이룩한 지식을 하루빨리 습득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실업사상을 기르며 산업을 경영할 신민(新民)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따라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독립 애국청년을 양성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평양에는 자기회사를 세워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1909년 청년운동의 핵심체로 청년학우회를 박중화·최남선·김좌진·이동녕 등과 함께 조직했다. 청년학우회의 목적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을 익히는 데 있으며 1가지 이상의 전문기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해 날마다 지(智)·덕(德)·체(體)에 대한 수양행사를 1가지씩 행해 수련에 힘쓸 것을 표방했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3개월간 개성헌병대에 갇혀 있다가 1910년 봄 대한제국 멸망 직전 베이징[北京]을 거쳐 칭다오[靑島]로 가서 해외망명인사들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협의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이갑과 함께 유동열(柳東說)과 김희선(金羲善)이 주장한 잡지 및 신문 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실력양성운동 방침에 찬성했으나, 급진파는 만주나 노령에서 안전지대를 택해 근거지를 정하고 군사운동을 준비하자고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어 연해주에서도 회합을 가졌는데 그는 이갑과 농촌개척을 주장했으나 의견이 분분하여 결론을 얻지 못했다. 2차례의 회합이 다 실패로 끝나자 1911년 미국으로 가서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초대 총회장에 취임했으며,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했다. 한편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및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그 후신으로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했다. 무실역행과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목적으로 한 흥사단은 지역 차별을 없애기 위해 창립위원을 8도를 대표하는 청년들로 구성했으며 25인의 발기인으로 발족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미실업주식회사를 경영하여 민족의 실력배양에 더 한층 치중했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1919년 4월 5일 정인과(鄭仁果)·황진남(黃鎭南)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떠나 5월에 도착했다. 6월 28일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취임하여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만 5,000달러를 지원받아 프랑스 조계에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 방략을 작성하는 한편, 대외선전 및 문화사업에도 착수하여 영자신문인 〈차이나 프레스〉에 한국의 진상을 연재하고, 임시정부 사료편찬회를 조직했으며 〈우리소식〉을 활판 인쇄로 발간하도록 했다.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안창호의 준비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이동휘의 무장독립론으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는 결국 이동휘가 1921년 1월 노령으로 떠나버림으로써 분열되었다. 임시정부가 운동노선에 따른 분열로 약화되어 독립운동의 영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자, 독립운동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극복하고 운동의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자는 요구가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국민대표대회주비회(國民代表大會籌備會)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 5인으로 구성된 주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그는 윤해(尹海)와 함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하면서부터 안창호의 소속단체인 북미국민회가 미국에 대하여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문제로 안창호의 대표권 불신임이 제기되었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조시키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결국 안창호가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개조파가 대회불참을 선언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한편 그는 1922년 1월과 1923년 10월 2번에 걸쳐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이광수를 만나 국내에서의 흥사단운동 전개에 관한 방략을 협의했다. 이에 따라 이광수는 수양동맹회를 조직했으며 평양에도 동우구락부를 설립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가 되었다. 수양동우회가 1927년 1월경 언론·집회의 자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의 개폐를 중심으로 한 합법적 정치투쟁을 주장하는 방향전환론과 수양단체로의 존속론으로 내부의견이 갈렸을 때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수양동우회 회원인 주요한(朱耀翰)과 조병옥을 만나 수양단체로 존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24년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해외에서 유학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준비교육과 민족관을 가르쳤으며, 그해 12월 미국에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상촌(理想村) 가입자와 투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2월 상하이로 다시 돌아온 그는 흥사단과는 별도로 북중국과 만주 일대를 여행한 뒤 이상촌 후보지를 마련하고 남·북만주에 흩어진 군사 활동을 통일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한 단결된 혁명세력인 대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해 8, 9월경에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원세훈과 협의하여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먼저 각지에 촉성회를 조직할 것 등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조직되는 것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촉성회가 조직되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이 통일되지 못한 가운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은 1928년에는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29년 각지의 촉성회가 해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그는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종래의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당을 결성한다는 명분하에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했다.

한편 이상촌 건설을 위해 1927년에는 만주지방에 이주한 한국농민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했고, 중국 화중[華中] 지방에도 10만 200호의 농촌을 건설하여 포도원(葡萄園)을 경영하고자 했다. 1930년말에는 생산, 신용의 합작운동을 보급시키기 위해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다음해에 공평사(公平社)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촌 건설계획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중국침략이 노골화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되어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2월 가출옥하여 서북지방 등 각지를 여행하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조선총독부 한인 고위관리와 대화도 가지는 한편 모범촌 계획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평양 근처 송태산장에서 은거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9일 전인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37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경성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듬해 죽었다. 망우리에 안장했다가 1973년 11월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실력양성론,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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