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
|
배경 |
사적 108호 문익점 목면 시배지가 정씨들의 민원으로 목면시배유지로 변경된후 |
발단 |
2000년 3월 18일 배양마을 입구에 정천익선생 자손들이 세운 비문 내용이 역사사실과 다르게 왜곡 과장하고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가로채는 내용을 밤중에 세움 |
문씨대책 |
2000년 6월 15일경 정천익선생 사적보전회에 비문내용중 역사 사실에 맞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항의의 통고문을 보내었고 시정을 촉구하는 2차통고문을 보냄 |
주민반응 |
단성 향교, 유도회에서 "단성면 배양마을 앞에 세운 퇴헌 정천익선생 신도비 비문 내용 가운데 이곳의 옛날 역사사실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역사 기록 문헌 및 고증자료가 있으면 빠른 시일내로 보내주시면 좋겠다"는 내용의 통고문을 정씨문중에 발송함 |
양 문중의 주장과 반박 |
문씨요구 |
문씨문중에서는 본 비석 비문을 지워주신 김황선생과의 앞날에 발생한 모든 관계를 비롯하여 옛 역사 실록까지 대조시키면서 왜곡 날조된 이신도비석을 이곳 배양 마을입구에 그냥두지 말고 하루속히 철거하라고 촉구함 |
정씨대응 |
2000년 10월 26일경 정천익선생 사적보존회에서 본 통고문에 대한 답변식 회신문을 보냈는데 35년간 동안 문씨문중과 정씨문중들간의 서로 생긴 여러 가지 내용과 단성향교를 반박한 유인물과 소책자로 된 해명서를 산청군내의 여러분들께 아래의 내용을 우송하였습니다. ②봉작시호는 1785년 을사년에 간행한 진양정씨들 구족보책에 진양군 문충공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 류치명 선생이 찬한 청계서원 기문에도 기록이 있으며 청계서원을 세울 당시에 여러 유림들이 각처에 있는 서원 및 향교 등에 보낸 통문에도 봉작 봉군 시호를 용어로 기록하였다 ③목면을 처음 심어 성공시킨 사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는 부분은 배양동(培養洞)이란 글자 그대로 재배해서 길러낸 마을이라함 ④자기들 선조를 극구 찬양하고 문익점의 사적들은 모두 거짓이며 허위라고 말함 |
문씨지적 |
①배양마을은 문익점 선조의 시배지 입니다. |
정천익선생 신도비의 잘못된 내용과 반박 |
| |
비문 |
우리동방에 목면을 처음 심어 온 나라에 펴고 만백성에게 옷을 입힌 큰공을 세운분은 고려 공민왕때 판부사를 지내시다 치사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이시다" |
반박 |
고려 공민왕때에 문익점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목면씨를 정천익선생이 얻어 단성면 소남리 관정마을에 처음 심어 3년만에 번식시켜 온 나라에 퍼지게하여 만백성에서 옷을 입힌 큰공을 세운 분은 퇴헌 정천익 선생이시다 |
비문 |
배양동에 받들어 세우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일찍이 선생의 조부때부터 사시던 곳이고 또한 선생께서 목면을 처음 심어 성공시킨 사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곳이기 때문이라 |
반박 |
정천익선생이나 조부가 배양에 살았다는 것은 단성향지등 역사 기록에 없음에도 거짓이며 |
비문 |
원나라 수도에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마땅한 땅가려 처음으로 심었다네 |
반박 |
원나라에 갔다온 사실이 없는 정선생이 목화씨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훔치려는 것인데 훔치지도 못하고 만사람에게 웃음거리이니 조상에 대한 욕입니다. |
비문 |
선생의 봉작과 시호는 조선태종조에서 추록했으니... |
반박 |
시호 일람표와 역대 역사서에도 태종조에서 추증한 사실은 커녕 정천익선생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문충공의 시호는 고려충신이신 포은 정몽주 선생님의 시호입니다. |
산청에는 이런일도 있다 -문영환(경남종친회장) 삼가씀- |
|||||||||||||
정천익 선생 신도비를 왜 밤중에 단성면 배양마을에 세웠을까? | |||||||||||||
역사의 고장 이곳 산청은 예부터 위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빛난 업적을 남기시고 영원히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이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라성같이 산청을 빛낸 위인들 중에서 문익점의 목면 전래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며 최근에 단성면 배양마을 앞에 세운 정천익 선생 신도비 비문내용과 또 비석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세운데 대하여 정천익 후손들의 그 속셈을 공개합니다.
선생께선 죽음을 무릎쓰고 목면씨를 가져온 것은 오직 애국애족의 목민애정(衷情)이고 국가에 끼친 공로가 너무 크기에 이조(李朝)에서는 자기들의 역성혁명을 저지했던 문선생이 세상을 떠나시자 세종 22년(1440)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追贈)하고 부민후(富民侯)를 봉하였으며 상신 남지에게 명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세조7년(1461)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케 하였고 도천사에 사액(賜額)하면서 예관을 직접 내려보내 치제케 하였습니다.
|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려판부사 치사 진양군 퇴헌 정천익선생 신도비문이 역사문헌을 허위날조하여 문익점선생의 목면사적을 왜곡하여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에 즉각 철거할 것을 지난 6월 15일 정씨문중으로 통고 하였음에도 상당기간이 경과된 우금까지 철거하지 않음으로 별첨과 같이 재촉구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왕(태조)이 된 후 이성계의 충신인 정도전의 지시로 만든 것이 고려사열전 및 태조실록인데 자기들의 반대편인 고려충신(최영장군, 이색, 정몽주 등)들을 역적으로 처단하거나 주살하였는데 정몽주와 이색과 뜻을 같이하던 문익점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두문불출하시며 오직 목화재배에만 정성을 다하였는데 정몽주 선생의 참살소식을 듣고 앙천통곡하시었고 그후 태조3년 (1394) 이성계가 여러차례 사신을 내려보내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 나는 고려충신이다. 천무이일(天無二日;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이요 신무이왕(臣無二王;신하에게는 두 개의 왕이 없다)이라" 하시고 사신을 돌려보냈으니 역성혁명을 도운 조준 정도전등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니 공적이 될만한 것은 감추고 애매모호하게 기록하다보니 문익점 기록편 중에 정천익의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으나 여러 임금들이 정천익선생이 아닌 문익점 선생을 최고의 벼슬과 노비와 제전까지 내렸고 그의 자손들까지도 특별대우를 누누히 말한 교지들을 살피지 못하고 |
찬자 김황선생과 비석의 내용 |
|
배양리 정천익의 신도비문을 지워주신 분이 중재 김황선생으로 명기하였으나 김황선생님의 생전의 모든 문집을 확인하여 그런 비문을 찬하신 기록이 없음을 확인 한 바 배양에 세운 문선생 사적비 내용에 정천익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하여 문씨측에서 정씨들에게 사과하고 정천익선생 이름을 넣기로 합의하였으나, |
기타의 내용 |
|
이번에 정씨들이 이곳 단성. 신안등 관내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정씨들 회신문 책자에는 우왕1년에 춘추82세로 별세하시니 온나라 백성들이 옷깃에 동정을 달아 정선생에 대한 보은의 조의를 표했다고 하며 동정이란 동방의 정천익이라 뜻이고 이때부터 동정을 달게 되었다고 전한다. 라고 했는데 동정(同情)에 대한 기록이 한문이어서 번역하면 동정을 달게된 것은 이조세종원년 기해(己亥)에 임금님이 특별히 생각하여 강성군 문익점이 이나라에 대한 공덕이 막대하여 긴세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한 뜻으로 온백성이 높고 낮음이 없이 남녀모두 저고리 윗깃에 동정을 달게 한 것이다. 라는 자료 원본이 도천서원에 있습니다. |
정씨문중이 주장하는 목면유지로 명칭변경후 입간판의 내용(정씨문중이 보낸 책 32쪽) |
산청 권순영 군수에게 졸라대는 내용은 이곳은 고려 공민왕때 정천익이 목면을 처음 재배하여 온나라에 퍼뜨린 곳이다. 사위인 문익점이 공민왕 12년 3월에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목면씨를 전객령 치사로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사는 장인 정천익이 이듬해 봄에 처음 심어 배양에 성공하여 국민생활과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
배양리 거주여부에 대하여 |
1.정씨문중의 회신문 55쪽에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온 목화씨를 받아 파파지리에서 그 재배에 성공하다고 했는데 파파지리는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관정마을입니다. |
정씨들의 다른 비석들 |
진주시 상봉동 주택가에도 문익점선생 공적보다 정천익선생의 공적을 크게 꾸미고 고려사 및 태조 실록사실을 큰자랑인 듯 비석을 높게 세웠는데 그곳 주민들의 철거 종용을 받아 곧 철거하겠다고 정씨문중에서 각서까지 써 주었다고 합니다. |
퇴헌정천익선생 신도비 관계 통고서 |
발신일자 |
2000년 9월 |
수신자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8(진주성내)청계서원 |
발신자 |
1. 경남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교동 丹城鄕校 典校 李炳德 |
귀문중의 발전을 위하여 얼마나 勞苦가 많으십니까? |
아뢰올말씀 | |
일자 |
2000년 8월 |
발신 |
남평문씨종친회 재배 |
600년의 유구한 세월을 두고 온세상이 잘 알고 있는 목면유래사실을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바 입니다마는 최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입구에 高麗判府事致仕晋陽君文忠公退軒鄭天益先生神道碑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내용이 역사문헌을 허위날조하여 문익점선생의 목면사적을 왜곡하여 정천익 선생을 높이려는 계략으로 인하여 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세인의 이목을 현혹케 한 것을 묵과할 수 없어 별첨과 같이 역사문헌에 위배된 정천익선생신도비 철거를 촉구하는 통고서를 발송한바 있음을 아뢰옵니다. |
일가님께 보고 말씀드립니다. | |
발신일 |
2000년 8월 |
발신자 |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新安思齋 山下宗人一同 드립니다 |
성하지절에 일가님의 가정에 화평과 축복이 함께 하시고 하시고저 하는 모든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보고드릴 말씀은 사적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100m지점에 진양정씨 문중에서 퇴헌 정천익 선생 신도비를 세우면서 삼우당 선조님의 목면사실을 왜곡하고 정천익선생을 推尊할 目的으로 歷史文獻을 허위날조 하였기 때문에 별첨과 같이 역사문헌에 위배된 퇴헌 정천익 선생 신도비철거를 촉구하는 통고서를 내용증명으로 발송하였습니다. 郡內 有志님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셔서 현명한 판단과 協助를 받고 있음을 우선 보고 드립니다.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진양정씨 문중에서 임의로 發刊한 청계지를 보시고 신도비문을 瑕하신 김황선생께서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뒤에 아시고 1970년 2월 18일 정씨문중으로 자기가 찬하신 비문을 폐기 없애버리도록 통문한 비문을 버리지 않고 30년이 지나고 김황선생께서 작고하신 뒤에 死文化된 비문을 도용하여 그대로 비를 세운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40만 남평문씨 후손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허위날조된 이 신도비를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배양마을에 그대로 비를 세워둘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비를 세워둔다면 삼우당 선조님의 목면사실은 완전히 뒤바뀌고 맙니다. |
발신일자 |
서기 2000년 6월 |
수신자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8(진주성내) 청계서원 진양군 문충공 퇴헌정천익선생 사적보존회 |
발신자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5 신안사재 전국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장 문칠순 |
역사문헌에 위배된 고려판부사치사진양군문충공퇴헌 정천익선생신도비명 철거를 촉구합니다. |
1.중제(重齋) 김황선생 3. 문학박사 이병도선생
|
수신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8(진주성내) 청계서원 |
발신 |
2001년 1월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5 신안사재 |
역사 문헌에 위배된 고려판부사 치사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선생 신도비 철거를 재촉구 합니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상기 신도비문에 역사 문헌을 허위 날조하여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木棉史蹟이 왜곡되어 명예가 훼손되므로 즉각 철거하고 공식 사과할 것을 2000년 6월 15일 귀 문중으로 통고하였음에도 상당 기간이 경과된 于今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유감지사이며 비문 내용이 역사문헌을 위배된 곳이 너무 많아 다음 4가지 사항만 우선 지적하오니 조속히 철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晉陽誌 續篇 古蹟(권4-13페이지) 배양촌에는 삼우당 문선생이 사시던 옛터가 있고 문행 한 그루가 서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선생께서 손수 심으셨다는 것이다(柳汶龍 杏壇記文中) 경상남도지정보호수...老木樹令610년 孝子碑閣記에
문익점의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집은 사월리529번지로 현재 이병미 소유이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시사월간 려사인물탐구...정순태) 셋째, 상기비문에 원나라수도에서 목면씨를 가져왔고 마땅한 땅가려 처음으로 심었다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역사문헌에도 정천익선생께서 원나라에서 목면씨를 가지고 온 사실이 없는데도 목면사적을 왜곡하여 정천익선생이 직접가지고 온 것처럼 거짓으로 비문을 새겨 허위 조작한 것입니다. 넷째, 상기비문에 선생의 封爵과 諡號는 조선태종조에서 추록했으니..라고..되어있는데 귀회에서 보낸 回信 2頁에 귀회에서 보낸 回信 11頁에 -문학박사 이은상선생께서 1971년 5월... 문충공 정천익사 적비문을 瑕하였는데 史記와 위배되었음을 아시고...1972년 1월 13일 수문폐기통문(별첨) |
내용 |
문 익 점 선 생 |
정천익선생 |
세조실록 |
오동방에 예부터 목면종이 없더니 전조문익점이 사명을 받들어 원국에 유하다가 비로서 얻어와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두루 퍼지니 지금까지 귀천과 남녀의 구별없이 모두 면포를 입는지라 익점의 공은 만세의 민리를 일우웠으니 그 덕택이 생민에 피하였음이 어찌 적다 하오리까 사후를 세우고 춘추에 본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케하고 그 자손도 일컬어 공신이라 하여 죄도 유하고 녹용하라. |
기록이 없음 |
정종실록 |
일남에 귀향가서 3년만에 비로소 중조에 돌아올새 목면을 잠취하여 사람들에게 직조을 가르치니 그 백성에 리됨이 이와 같은지라 공정대왕이 그의 의민한 대공을 생각하시여 강성군을 추봉하시고 태조조에서는 명하여 서원을 세우고 세조조에서는 부민후를 봉하시고 시호를 사하여 충선이라 하시고 사전을 정취하셨으니 이제 이 은객의 청함은 다사의 공의로 나온것이라 조가숭상지도에 있어 마땅히 의시할지어라 종지하시다 |
기록이 없음 |
정종실록 |
강성군 문익점이 일찍 여조에서 도학과 풍저이 세상에 존경한바되고 국조유현이 거개 칭술하는데 면목상 내지사같은데 이르러서는 실로 동방에 옷입힌 대공이 되는지라 |
기록이 없음 |
정종실록 |
세상에 이와 같은 미물이 있어서 다행이 국내에 치종을 하였으니 마땅이 백성의 과종을 주어서 가르처 풍속을 이루어서 일국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미리을 힘있게 문씨의 면종과 같이 함이 가함이라 |
기록이 없음 |
수문쇠록(1권356편) |
고려말 진주인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귀로에 면종을 잠정하여 가져왔으며 또한 그는 취자차와 소사차까지 만들어 함께 가져왔음으로 인하여 면화제배와 면포직조법이 경전되어 미만백년에 전국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국인의 상하가다 면포를 전용하게 된 것은 그 효과가 마포에 비하여 오배가 되기 때문이다. |
기록이 없음 |
적 요 |
문 익 점 선 생 |
정 천 익 선 생 |
면화시배지 |
고려우왕9년계해(1383)여조에서 마을이름을 효자리라 명시하고 문익점선생이 살아계실 때 효자비를 세운곳으로 현재도 보존 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최초로 부동산등기령시행시(1913.11.15)부터 사손인 문택호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남평문씨 충선공파종친회 명의로 되어있음. |
정천익선생께서는 단성면 사월리배양동에는 아무 연고가 없는데후손들이 눈가림연고를 만들기위해1994년 10월 19일 단성면 사월리에 전542평방미터을 구입하여 2000년 3월 17일 퇴헌정천익선생신도비를 세움. 소유자...진양정씨은영공파대종회 진양지속편권4-13고적(16220) 정천익의 사위 문익점이 교지에서 목면화를 가지고 와서 퇴헌에게 주니 퇴헌은 파짖 관정평에서처음심어 온나라에 번식되었다...라고 기록...(파지지관정은...지금의 단성면 관정리) |
단성향지 (178) |
원에 갔다가 적교지에서 목면종을 구하여 국내에 널리 전파시켜 의피생민의 공을 남겼다. 효행으로 적려가 내려 효자리라 하였으며.... | |
행단기 |
배양촌에는 삼우당 문선생이 사시던 옛터가 있고 문행한그루가 서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선생께서 손수심으셨다는 것이다(유문용행당귀문중) 경상남도지정보호수...노목수령610년 | |
효자비각기 |
강성현의 남녁에 있는 배양산리는 전의 왕조의 분인 좌사의대부문공이 살던 옛터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서있는데 홍무16년 계해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표창해서 세우게 명하신것이었다. 가정사십년계해립비지후백팔십유일년야. 가정사십이년계해삼월 일 진보 이 황기 | |
산청지명고 (배양동) (276페이지) |
삼우당의 처남되는 주판서경의 효자비문에 자호를 배양재라 한 이유가 지명에 유례하였다고 되어있다. 이조초 이태조 삼우당의 충성에 감복하여 문익점선생이 우거하던 동리라하여 효자리라 명하였던것인데 그리고 그때는 동명이 사동이었다. 삼우당선생의 증손녀되는 숙부인남평문씨께서 두아들을 데리고 이곳 친정마을로 와서부터 500년이 흘렀다. | |
려사인물탐구 |
문익점의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집은 사월리529번지로 현재 이병이소유이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시사월간려사인물탐구...정순태) |
사적108호(단성면 사월리) 문익점면화시배지 비교 | ||
적 요 |
문 익 점 선 생 |
정천익선생 |
생년월일 |
고려충혜왕 신미생 |
생년월일 미상 |
고려사 (111권46편) |
목면의 종자를 얻어와서 그장인 정천익에게 속하여 심었으나 처음에 배양기술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죽고 단한줄기가 살아나 3년만에 크게 번식하였다. |
문익점선생 |
이태조실록 (14권14편) |
원조에 갔닥 돌아올때에 길가에 있는 목면나무를 보고 그씨 십여개를 따서 필낭에 간직하여 와서 갑진년에 진주에 이르러 그씨앗반을 마을사람전객령치사정천익에게 주어 심어서 기르게하였더니 오직한개만 살게되었다. 천익이 가을에 이르러 그열매 백여개를 취해서 해마다 가종하였다. |
문익점선생과 |
태종실록 (1권20편) |
문익점이 처음으로 강남에 들어가서 목면을 발견하여 그 종자 두어개를 얻어와서 진양촌집에 보내어 비로서 목면베를 짜서 진상하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하여 널리 일국에 퍼져서 백성상하가 모두 얻어 입게되니 이것은 다 익점이 주는 베라 백성에게 큰 공덕이 있었다. |
기록이 없음 |
태종실록 (19권35편) |
사람이 힘입어 사는 것은 의식뿐인데 우리 동방에 본래 상과 파만 알고 목면이 무슨물건인지 알지 못하였더니 문익점이 사신으로 중원에 가서 씨를 얻어 돌아와서 우리 백성에게 은혜하니 상으로 경사대부로부터 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의을 모두 이것으로 하였으니 그 공이 백성에게 있음이 가히 크다하겠도다. |
기록이 없음 |
세종실록 (150권34편) |
동방에 본래목면이 없더니 문익점이 서장관으로써 경사에 조하였다가 그 종자와 경직기술을 구득하여와서 호분에 심어서 향곡에 전하여 드디어 일국에 편한지라 |
|
청계지(淸溪誌) |
진양정씨 은열공파 문중(청계서원)에서 70여년전에 역사문헌과 상관없이 임의로 만든 서원지 입니다. |
우리들의 바램 |
|
1.고려사(高麗史)에는 부탁하여 목화를 심게 하였고 外祖이신 정천익 선생의 生居地가 丹城面 官亭里이고 사위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종자를 얻어서 처음 심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으로 퍼트린 곳이 단성면 관정리이고(1622년에 발간 진양지4권 13페이지) |
사적108호 문익점면화시배지와 정천익의 면화시배와의 관계 |
|
1.사적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전138평, 106-2 전23평, 108-2 전54평 합계 215평을 문익점 면화시배지로 1963년 1월 21일 문교부 고시 제174호로 지정(토지소유자...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 2.위 사적지로 지정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고려우왕9년(癸亥1383)에 충선공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생전(53세)에 효자리비를 세웠던 곳으로 현재도 동효자리비는 보존되어 있으며 위 토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1913) 부동산 등기령이 시행되었을 때부터 충선공 문익점선생의 후손인 문택호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으며 현재도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 소유로 등기 되어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