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언젠가 멋진 퍼즐, 작은 조각들이 맞추어져서 완성된 멋진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퍼즐은 한 조각씩 떨어져 있을 때에는 색채나 모양이 뚜렷하지 않아 그 조그만 조각 하나 하나는 별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로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작은 조각들이 하나씩 모여져 그 큰 그림의 모양과 색채와 성격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많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의식 속에서든 무의식 속에서든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많은 추억과 생각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루듯 우리의 작은 생각과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우리 영혼의 색깔을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사람의 색채는 파릇파릇 봄 새싹이 돋듯 활기찬 연두빛이지만, 어떤 사람의 색채는 가을 낙엽의 시든 빛처럼 음울한 갈색이고 어떤 사람의 색채는 선명한 빛깔인 듯 하나 영혼에 깃든 안정과 우아함이 없는 경박한 원색처럼 언뜻 비쳐지고 어떤 사람의 색채는 정말 흠모할 만큼 아름답고 조화로워 신비한 무지개 빛으로 빛나기도 합니다.
당신의 영혼의 빛깔은 어떤 색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기억의 조각들은 어떤 것입니까? 밝고 유쾌하고 감사한 것들입니까? 슬픔과 분노와 원망의 것들입니까? 그리고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맞추어져 완성되는 여러분의 그림은 밝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아니면 암울한 색채를 띤 어두운 그림입니까?
심리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마음의 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보실까요? 늘 그래왔듯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슬프시게 하는 우리들을 의심하고 믿지 못해 까만 색안경을 쓰고 보실까요? 쓰디쓴 배반의 기억을 간직하신 채로....
아니면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가 머지않아 완전히 변화되어 끊임없는 사랑과 순종을 보이며 하나님을 세상에 잘 증거하며 살리라는 초록색 믿음의 안경을 쓰고 우리를 보실까요?
쓴 잔을 달게 하는 방법
우리는 고통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려움과 시련과 슬픔이 하늘 본향으로 가는 길에 내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마음은 고통으로 구름이 낄 수도 있고, 또 유혹이 엄습하여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이 영혼을 둘러쌀 때가 있으며, 죄책감이 심령을 억압하고 양심을 억누르며, 불신이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듯 어둡게 느껴질 때가 있고, 불안과 염려로 마음이 초조하고 우울해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닥칠, 혹은 느껴지는 어려움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그 우울한 그늘 속에 머물러 있기로 작정한다면, 또 어려운 문제들과 불안하게 예상되는 미래를 계속 생각하며 마음이 괴롭고 기운이 빠지도록 방치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의 안식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질 것이 없는 상태를 한탄하고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의 사상은 우리의 말의 영향을 받아 더욱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경향을 바꾸는 일은 단호한 노력이 필요되지만, 바꾸는 일은 가능합니다.
'이생과 내생을 위한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마음을 즐거운 것에 고정시키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상상에 불과할 뿐인 어두운 장면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서 앞길에 뿌려 놓으신 은혜와 축복의 꽃잎들을 모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즐겁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어려움에 대비하여 도움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쓴 물가에 왔을 때,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어떤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그분께서는 바로 곁에 있는 것에 그들의 주의를 돌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나뭇가지 하나를 샘에 던져 넣게 하심으로 그 물을 깨끗하고 달게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였습니다.
온갖 시련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그분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치료의 약속을 보게 하실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슬픔을 제거해 줄 모든 축복을 이용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 닿아있는 쓴 잔을 달게 할 치료의 나뭇가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햇빛이 비출 때
하나님의 사랑의 햇빛이 어두운 영혼의 밀실을 비출 때 불안과 염려와 불만은 사라지고 흡족한 기쁨이 정신에 활력을 주어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건강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세어보면서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시를 보지 말고 달콤한 장미꽃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즐기라고 하십니다. 그 가시들은 다만 우리를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우울하고 불만스러운 사상과 감정을 물리치는 것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탄식하고 불평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만에 쌓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광명한 빛 곧 치료하는 광선을 가지고 떠오르는 의의 태양을 소유하고 기뻐할 수 있지만 우울한 것과 어두운 것만을 스스로 모으고 있는, 마음이 닫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용서, 놀라운 성육신의 신비와 사랑, 성령의 끊임없는 위로와 깨우치심을 명상하고 감사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애틋한 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땅과 공중과 하늘에 채워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바라보면서 즐기십시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백합화 꽃잎 위에 우리가 불신과 이기심과 해로운 근심을 버릴 때에만 읽을 수 있는 말로 기록해 놓으신 사랑의 기별과, 우리 생애의 여정을 밝고 즐겁게 해주는, 아무런 근심없이 날아다니며 부르는 새들의 즐거운 노래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아직도 돌며 반짝이는 밤 하늘의 별들을 보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누군가에 대한 유쾌한 기억, 우리를 도와주고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에 대한 뿌듯한 감사, 생애의 밝은 면을 장식했던 기쁨으로 충만했던 시간들을 회상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곳일 뿐, 행복과 기쁨이 용솟음치는 그 영원한 하늘 본향이 우리가 끝내 돌아가서 영원히 살 곳이라는 소망을 인해 기뻐하십시오.
당신의 기억의 방에는
당신의 기억의 방에는 어떤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까? 온갖 불쾌한 그림들 - 즉 범죄와 타락과 실망, 사단의 세력에 대한 증거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한 씁쓸한 기억, 실패와 원망, 후회스러웠던 순간들 - 을 함께 모아서 우리의 기억의 방에 걸어두고 그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탄식하기를 마침내 우리의 심령이 실망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의 방들을 유쾌하게 꾸미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모으기를 원하시는 더 밝고 유쾌한 그림들, 복스러운 그분의 사랑의 그림을 귀중한 보배처럼 함께 모아서 걸어두고 그것들을 우리가 끊임없이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방을 하나님께서 주신 더 밝고 유쾌한 그림들로 꾸미고 싶지 않으십니까? 감사한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된, 그래서 더욱 색채가 곱고 빛나는 것이 된 그런 그림들로 말입니다.
2.권두언
강병국 목사
우리는 전쟁으로 얼룩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전쟁에 대한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락 다음에는 과연 어느 나라가 표적이 될까요? 이란일까요? 아니면 북한일까요?
다음 번 전쟁에는 과연 몇 명이나 더 희생을 당하게 될까요? 만약에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 하게 된다면 북한은 물론 남한에게 미칠 그 피해가 과연 어느 정도나 될까요? 다시는 회생 불가능하도록 경제가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은 과연 어떠한 전쟁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화학 폭탄, 아니면 핵 폭탄? 이러한 질문들을 하고 나면 정말 참담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가지 놀라운 희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러한 전쟁 때문에 끝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공할 무기들 때문에 종말이 오게 될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을 데리러 두번째 오심으로 이 세상의 역사는 끝마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전쟁은, 전쟁 중의 전쟁인 우주 전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전쟁입니다. 바로 이 전쟁의 잇슈가 마무리 지어지고 이해 될 때에 이 세상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르러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를 이번 호가 다루고 있습니다.
3.행복한 가정을 지키는 비결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늘의 상징이 되어야 하고 하늘을 대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기 원하여 성소를 지으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현대의 작은 성소인 우리의 가정에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성소는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거룩한 곳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으며 성공적인 가정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성소는 아름다운 휘장에 의하여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졌는데 특히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빛이 가득 채워 비추고 있었으며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그 휘장 너머 지성소 안의 영광을 본 사람이 없었고 아무나 근접하여 그곳의 신비스러운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가정이란 성소에는 긴밀한 관계를 나누며 살아가도록 묶어진 가족 구성원들 간의 사랑이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 형제와 자매들 혹은 친척들 간의 사랑이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랑의 기초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은밀하고, 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될 부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래의 계획에 따라 결혼한 남녀들만이 누리게 되는 독점적이고 전매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마치 지성소가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듯이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휘장을 들치고 들어갈 수 없는 비밀스럽고 신성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부 간의 사랑을 지성소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며 어떤 것이든지 오직 결혼한 남편과 아내에게만 속한 지성소를 가린 휘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애석하게도 이 신비로운 지성소의 휘장이 들어올려지고 침범되어 많은 신성한 사랑의 서약들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단이 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매혹적인 유혹들을 널어놓아 각 가정의 진실된 사랑을 파괴하고자 노력하는 이때에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로써 어떻게 현명하게 처신하여야 많은 파멸로부터 자신과 가정을 지킬 수 있는지 남편과 아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충고를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남편에게 주는 충고
1. 최고의 애정과 친절의 표현을 그대의 아내에게 하라.
많은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자기가 사는 날 동안 사랑하고 위하고 존경하겠다고 약속한 자기 아내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친절하고 온유하고 예모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반면에 평생을 같이 할 귀한 반려자에게만 주어야 할 찬사와 친밀한 표현들이 가정 밖이나 직장에서 또는 자기가 고용한 다른 여성에게 베풀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아내는 늘 옆에 있는 허물 없는 사람이므로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다는 명분 아래 이런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친절하고 관심 있고 애정 어린 표현이야말로 평생 그대를 따르기로 선택하고 그대의 곁에 있는 그대의 아내가 얼마나 듣기 원하는 대화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남편들이여, 그대의 아내로 하여금 그대의 애정어린 칭찬에 굶주려 있도록 하지 말라. 그대의 존경과 애정을 마땅히 바쳐야 할 사람, 곧 그대의 아내에게 주도록 하라. 남편의 애정어린 표현은 햇빛과 같이 아내의 마음을 비춰 더 큰 애정의 보답이 아내로부터 오도록 만들 것이다.
결혼 초기의 정성을 계속 유지하며 경건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아내의 행복의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며 기도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2. 다른 여성에게 가정의 비밀이나 아내의 결점을 말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각 가족의 사사로운 비밀을 둘러싸는 벽, 순결함과 존엄성을 보존하여 주는 벽을 무너뜨림으로 쓰라린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편이 제 삼자인 다른 여성에게 아내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 아내의 사사로운 문제가 어떤 특정한 친구 앞에 공개되고 만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마음을 멀리 떼어놓으려는 사단의 계략이다.
여자나 남자가 자기 가족의 어려움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내에 대한 불평을 다른 남자에게 혹은 다른 여자에게 이야기할 때 그는 자기의 결혼 서약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배우자를 모욕하고 결혼 관계의 신성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진 벽을 무너뜨리고 문을 활짝 열어 사단이 음험한 시험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초청한다. 만일 어떤 여인이 자기의 재난과 실망과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 남자에게 온다면 그 그리스도인 남자는 그녀에게 충고하여 주기를 만일 그 여자의 어려움을 어떤 사람에게 반드시 고백하여야 한다면 자기의 비밀을 나눌 만한 극진한 친구로서 여자 친구들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자기 가정에 비난을 받게 할 기회를 피할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십중팔구 부부가 아닌 다른 이성 간의 깊은 공감어린 대화나 동정은 적당하지 못한 관계로 빠져들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부부 상호간의 실수에 대해 아는 것을 그대 마음 속에만 잠가두고 그대의 어려움을 하나님께만 고하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올바른 권면과 깨끗하고도 확실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
3. 아내 외의 다른 이성의 지나친 접근을 허용하지 말라.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남성들도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감언이설이나 칭찬의 말에 의외로 약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여성으로부터의 지나친 칭찬이나 선망의 찬사를 들을 때야말로 남성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많은 적절하지 못한 관계가 서로에게 찬사를 던지며 호감을 갖는 감정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친절이나 부적절한 호의를 베풀거나 부정한 암시를 풍기며 다가오는 이성에게 지나친 접근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중한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라.
그대는 한 순간이라도 부정하고 은밀한 암시에 양보를 하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불결한 물이 그 지나는 수로를 더럽게 하는 것과 같이 영혼을 부정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가 그대의 앞에서 관능적인 말이나 암시를 하도록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남성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 곧 “젊은 여자를 대할 때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5:2)는 말씀을 마음에 잘 간직하도록 해야 한다.
아내에게 주는 충고
1. 유혹을 주는 위치에 서지 않도록 주의하라.
때때로 많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 필요되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므로 많은 시험을 자초하는 경우가 빈번히 있다. 만일 여성이 겸손과 존절함으로 자기 분수를 지켰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생각들이 깨우침을 받는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서 행동으로서 유혹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여인들은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미혼, 또는 기혼 남성들의 주목을 끌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들의 영혼이 위험에 빠지기까지 하게 한다. 여성들은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여자들로서의 정숙한 품행을 보여야 하며 그들의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성들로서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고르고 잘 선택된 말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단정하고 아담한 의복을 입음으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순결하고 거룩한 감화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 여성으로서의 적합한 태도를 유지하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과 교회 일이나 사업상으로 여러 다른 활동들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대가 참된 그리스도인 여성이라면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깨어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부터의 순결을 지키며 결혼 서약과 남편에게 충실할 것을 늘 염두에 두면서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남자들과 너무 친숙하게 굴거나 농담을 주고 받거나 희희덕거리며 웃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서 고상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온유하며 건방지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입이 무겁고, 농담이나 희롱의 말을 즐기지 않으며 예절을 지키고 친절하고 유순하며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부당한 방자함에서 막아주는 순결의 신성한 분위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여인의 주위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3. 부당한 친교를 사양하라.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부당한 친교에 빠지지 않도록 엄밀히 자신을 지켜야 한다.
남자들과 너무 가까워지거나 남자 형제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만족히 여기지 말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하며 부당한 도움의 손길이나 보호를 자청하여 오는 유혹이 될 만한 끄나풀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온유하고 친절하지만 신중하고 견제하며 마음에 없는 친밀을 보이지 않으며 인정할 수 없는 관심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고상한 도덕적 품격을 보존하여 품위를 지키면 많은 불행에서 자신과 가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31:10.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을 대략 살펴보았다. 그러나 위의 모든 충고를 다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의지로는 실천하기 쉽지 않은 경우들이 종종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그리스도인 남녀들이 마음에 새길 서원은 요셉처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막았느니라’(갈5:24) 는 간증을 늘 가슴에 담고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며 하늘에서 오는 능력으로 매일 살아야 할 것이다.
남성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남성들이시여, 남자답고 곧바르며 정직한 말을 해봅시다. 우리 남성들은 모든 여성들의 고결함과 정숙함을 존중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한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여인들이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던지는 성적인 유혹과 압력에 의해서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
한 때, 정숙과 순결이 매우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남성들이시여, 그대들이 여인들을 유혹하고자 하는 본성을 극복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한다면, 그대들의 인생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여자들을 유혹한 부도덕한 성공담을 허풍을 떨면서 자랑하거든,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그 자리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를 사단에게 인도하는 친구들을 피하고, 영적인 감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아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여인들에게 경박하거나 순결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불순하게 손을 대는 일, 그리고 더러운 눈으로 다른 여인을 쳐다보는 일에서부터 사단의 시험은 시작됩니다. 사단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제어되지 않은채 나타나고 표현될 때,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여인들이시여, 그대들의 품위를 잘 보존하시요. 남자가 그대를 유혹하도록 자극받을 만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 그대 자신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남자를 무뢰하거나 예의없이 대해서는 안되며, 결코 육체적인 애정을 허용해서도 안됩니다. 그대에게 접근해 오는 남자들에게 그대가 가볍거나 천박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대에게 순결하지 못한 방법으로 농담하는 남자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마십시요.
이제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비록 그렇게 할 의도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너무도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의 위험한 감정과 욕구를 자극하는 옷을 입으며, 자극적인 태도와 자세를 취하고, 자극적인 말을 하며, 자극적인 화장을 합니다.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남자들을 유혹하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여인들로부터 나오는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인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남자들은 그리스도께 얼마나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되겠습니까?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베드로후서 2:9
4.콜레스테롤의 역사
지방에 대한 이해
옛날에는 지방이 음식을 먹기 좋고, 맛있게?만들어 주는 역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Lard(돼지기름)나 쇼트닝으로 부드럽고 먹기 좋고 보기 좋게 요리를 하고, 토스트에 버터를 듬뿍 발라 먹기도 하며 기름에 튀긴 감자를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이 풍부한 우유와 살코기 속에 기름기가 군데 군데 박힌 소위 차돌박이 - meat “marbled” with fat - 부분을 선호하므로 축산업자들은 앞다투어 그런 제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가축을 기르고 있다.
미국 사람들의 매일의 식사에서 지방질의 섭취는 금세기에 125gm에서부터 1990년대까지는 175gm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지방이 풍부한 식단이 심장 질환과 관련이 있음이 알려진 이후 지방에 대한 논란이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떤 지방은 해롭고 어떤 지방은 이로우며 또한 그 종류도 한 두 가지가 아니고,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건강 정보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어떤 것이 정말 좋고 나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이번에는 지방과 콜레스테롤, 그리고 변형된 지방산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 몸과 우리 가족들에게 어떤 것이 좋은지 올바른 선택을 하자.
지방과 지방산
지방은 여러 지방산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복합물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몸 속에 에너지 저축 수단으로 주로 피하에 저장된다. 우리 몸 속에서 자체 생산되지 않는, 그러나 인체에 꼭 필요한 몇몇 지방이 있는데 이는?음식으로부터 보충해주어야 하며 이를 필수 지방산이라고 한다.
지방산은 우리 몸의 생화학적 신진대사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자동면역 장애의 전체영역, 내분비선의 불균형, 내장장애, 심장혈관장애, 그리고 신경계의 장애는 지방산의 신진대사의 교란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Kane,1977).
지방산에는 포화지방산, 단일 불포화지방산, 그리고 다중 불포화지방산의 3가지 타입이 있으며 대부분의 지방산은 탄소와 수소원자로 구성된 분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탄소원자에 최대한(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상태)으로 수소원자가 결합된 지방산을 포화지방산이라 하는데 이것은 탄소원자가 수소원자로 완전히 채워진 상태의 지방산을 의미한다.
어떤 지방산은 각 분자 속에서 한쌍의 수소원자를 잃어버린 상태로 존재하는데 이를 불포화지방산, 또는 단일 불포화지방산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쌍의 수소원자가 달라 붙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쌍 이상의 수소원자를 잃어버린 상태의 지방산을 다중 불포화지방산이라 부른다.
포화지방산은 동물성 식품에, 불포화지방산은 식물성 식품과 생선에 주로 많이 들어있다. 다중 불포화지방산은 omega-3 와 omega-6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또한 포화지방산은 혈관 내에 끼어있는 지방산이고 불포화지방산은 혈관 내 포화지방산을 제거하는 지방산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변형된 지방산(Trans Fatty Acids)이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가 추가되었다. 다중 불포화지방산에 인위적으로 잃어버린 수소원자를 결합시켜 만든 지방산으로 식물성 쇼트닝과 마가린처럼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결합시켜 상온에서 고체 형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지방산이다.
콜레스테롤
콜레스테롤은 지방의 사촌쯤 되는 물질이다. 지방과 콜레스테롤은 지질이라고 불리는 복합화학물질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 몸에 필요한 콜레스테롤은 간에서 생산되어지며 세포막, 뇌와 신경 조직을 형성하는데 쓰여지기 때문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물질이다. 우리는 흔히 콜레스테롤하면 무조건 아주 나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질이 콜레스테롤이다. ?신체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정량의 콜레스테롤이 필요하다.
콜레스테롤은 필요한 양을 우리 몸에서 충분히 생산할 수 있으므로 식품에서 보충해 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계란, 동물의 간, 일부해산물)에 상당량의 콜레스테롤이 함유되어 있다. 콜레스테롤은 오직 동물성 식품에만 포함되어 있다.
콜레스테롤은 지단백이라 불리는?큰 분자 형태로 혈류 속으로 운반된다. 저밀도 지단백(low-density lipoproteins)으로 운반되는 콜레스테롤을 LDL-cholesterol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콜레스테롤 타입은 LDL-cholesterol이다. LDL 콜레스테롤은 혈관 벽에 쌓여서 혈관 벽을 딱딱하게 만들어(경화) 심하면 혈관이 터지거나 혈관에 괴사를 일으켜 중요한 장기들이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쁜 콜레스테롤이다. 한편 고밀도 지단백(high-density lipoproteins)으로 운반되는 콜레스테롤을 HDL-cholesterol이라고 부른다. HDL 콜레스테롤은 혈관 내에 쌓여 혈관을 망가뜨리는 나쁜 LDL 콜레스테롤을 거두어 내, 간으로 보내서 몸 밖으로 배설시키는 좋은 일을 하는 콜레스테롤이다.
식품과 콜레스테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과 콜레스테롤 수치의 연관성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하고?있다.? 콜레스테롤이 적게 함유된 식품을 섭취하면 개인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다. 혈관 속에 있는 콜레스테롤은 식품 중에 있는 콜레스테롤보다는 오히려 포화지방산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콜레스테롤이 많이 함유된 식사를 계속하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지 않더라도 심장질환의 발생 빈도가 증가된다는 보고도 있다.
그렇다면 콜레스테롤이 함유된 식품일지라도 좋은 콜레스테롤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하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식품 속에 함유된 콜레스테롤은 콜레스테롤 그 자체일 뿐 좋고 나쁜 것 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혈중에서만 어떤 타입의 지단백에 의해서 운반되느냐에 따라서 좋고 나쁜 콜레스테롤로 나뉘어지고 있다.
다중 불포화지방산과 단일 불포화지방산은 포화지방산이 하는 것처럼 동맥 안쪽에 지방찌꺼기를 형성하는 것을 촉진시키지 않으며 이들은 혈중?LDL-cholesterol 수치를 내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수수기름과 같은 다중 불포화지방은 혈중 HDL 과 LDL 수치를 동시에 낮추는 경향이 있고 올리브유와 같은 단일 불포화지방은 HDL 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으며 LDL 수치를 낮추어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포화지방산의 섭취를 줄이려면 삼겹살, 갈비, 베이컨, 닭 껍질 등의 동물성 기름을 피하고 버터 치즈, 생크림, 아이스크림 등 동물성 기름으로 만든 가공식품의 섭취를 제한해야 한다. 또 커피프림, 라면이나 과자를 튀길 때 사용하는 기름(팜유, 코코넛유)도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증가시키므로 제한한다.
불포화지방산은 식물성 기름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포화지방산과 대체하여 사용할 경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불포화지방산도 엄연한 기름이니만큼 하루 3~4 작은 술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콜레스테롤이 높은 음식: 동물의 내장(간, 곱창 등), 생선의 내장(명란젓, 창란젓 등), 알류(계란 노른자, 메추리알), 오징어, 문어, 장어, 미꾸라지 등 불포화지방산이 많이 함유된 식품: 식물성 기름(옥수수유, 참기름, 들기름, 올리브유, 카놀라유, 땅콩, 호두, 잣 등) 참조 FDA Consumer magazine May 1994
예전에는 식용유라고 하면 콩이나 옥수수 기름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전자변형 농산물로 옥수수와 콩이 자주 거론되면서 좀 비싸더라도 올리브유나 홍화유ㆍ해바라기유ㆍ채종유(유채꽃씨로 만든 기름) 등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특히 얼마 전부터는 다이어트와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올리브유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지방산 종류에 따른 식물성 식용유의 종류
▲포화지방산함량이 높은 코코넛유와 팜유
▲다중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은 콩기름ㆍ옥수수유ㆍ홍화유ㆍ해바라기유
▲단일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은 올리브유 등이 있다.
포화지방이 많은 코코넛유와 팜유는 맛과 향이 좋고 고온에서 변질되지 않으므로 튀김 등 고온 조리에 적합하며, 기름의 산화가 더뎌 조리한 음식을 오래 보관해야 할 때 좋다. 그러나 나쁜 콜레스테롤(LDL)을 증가시켜 심장질환 등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가급적 섭취량을 줄여야 한다.
다중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옥수수유ㆍ콩기름은 콜레스테롤이 혈관 벽에 달라붙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반면 산화가 빨리 되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하는 음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 고온 조리시 변질될 수 있어 튀김보다는 부침개 등 저온 조리를 할 때 사용하는 게 좋다.
특히 여러번 사용하면 심장병과 암을 일으키는‘변형 지방산’으로 변질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홍화유ㆍ채종유는 고소하고 깔끔한 맛이나 샐러드 드레싱이나 무침용으로 좋다.
단일 불포화지방산이 80% 가까이 들어 있는 올리브유는 심장병 예방 효과가 가장 뛰어나고 결장암 등 각종 암을 예방한다. 기름에 포함된 폴리페놀 성분은 세포의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화 정도는 포화지방산과 다중 불포화지방산의 중간 정도이므로 모든 종류의 조리법에 사용할 수 있다.
기름을 사용할 때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
1. 가장 나쁜 것은 냉동 피자와 전자 레인지용 팝콘
변형된 지방산은 혈관 속에 지방을 축적시키고 혈액을 탁하게 만든다. 정제된 식용유나 가공식품 대부분에 변형된 지방산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냉동피자와 전자레인지용 팝콘.
2. 튀김이나 볶는 요리는 피한다
일단 한 번 사용한 기름은 산화된 것으로 지방산이 변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기름을 뜨겁게 하는 튀김이나 볶음요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3. 견과류는 오래 보관하지 않는다
식물성 유지에 많은 불포화지방산은 산소와 결합해 과산화지질이 되기 쉽다. 따라서 참깨나 들깨, 땅콩, 호박씨 등은 자주 이용하되 오래 묵은 것을 쓰지 않는다.
4. 양파와 마늘을 같이 볶는다
볶음요리라 해도 프라이팬에 기름과 함께 잘게 썬 양파나 마늘을 볶아내면 지방이 산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름 역시 재래식 참기름과 들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상식 한 토막 - 마가린, 부드러울수록 인체에 유익
더 부드러운 마가린을 섭취할 경우 인체의 콜레스테롤 수준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의학 전문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 최근호가 밝혔다. 미국 보스턴 소재 터프츠대학 연구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반(半) 액체상태의 부드러운 마가린을 섭취할 경우 연성 마가린이나 딱딱한 마가린에 비해 인체내 콜레스테롤 수준을 많이 낮춰주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반면 딱딱한 마가린의 경우 오히려 버터보다 콜레스테롤 수준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지적됐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포화지방이나 변형 지방산 함유량이 낮은 식품들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키는데 유리하다는 종래의 믿음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이 잡지는 지적했다.
터프츠 대학 연구진은 50세 이상의 성인 36명(남녀 각 18명)을 대상으로 소요 열량(칼로리)의 30%를 지방으로부터 충당하는 식단을 제공하는 실험을 실시했으며 공급 지방은 콩기름과 반액체 마가린, 연성 마가린, 쇼트닝 마가린 및 딱딱한(硬性) 마가린, 버터 등으로 구성했다.
35일간에 걸친 실험 후 대상자들의 `유익한 콜레스테롤(HDL)과 해로운 콜레스테롤(LDL) 수준을 측정한 결과 버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방들이 HDL과 LDL 수준을 동시에 낮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딱딱한 마가린의 경우 HDL 수준을 대폭 감소시켜 건강면에서 버터보다도 덜 유익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인체의 콜레스테롤 수준을 낮추는 유익한 지방으로는 콩기름-반액체 마가린-연성 마가린-고체 마가린 순으로 나타났다.
역사 한 토막 - 콜레스테롤의 역사
1908년 과학자들은 토끼에게 고기와 우유, 달걀을 먹여 사육한 결과 동맥에 지방 찌꺼기가 쌓여 피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맥이 좁아져 피의 흐름이 방해받는 현상을 동맥경화증이라 부르며 이런 현상은 어려서부터 서서히 진행되며 수년 동안은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후 1913년에 토끼의 동맥 내에 지방 찌꺼기를 쌓이게 하는 원인 물질이 콜레스테롤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1916년 자바섬과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던 Cornelius de Langen이라는 독일 의사는 서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이 독일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들보다 심장병 발병율이 낮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의 심장병 발생율이 낮은 것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 의학지에 발표했다.
그는 또 주로 채식으로 구성된 원주민 고유의 식단을 버리고 고기와 유제품이 풍부한 전형적인 독일 식단을 따른 인도네시아인들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고 심장병 발생비율도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식단과 콜레스테롤이 심장병 발생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첫 보고서였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40여년 동안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에 있는 의학자들은 전쟁 중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극적으로 감소한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나 유제품, 계란 같은 동물성 식품이 부족하여 정부에서 나누어주는 배급 식량으로 끼니를 이어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무렵 또 다른 연구자들은 심장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그 이후 혈중 콜레스테롤과 동물성 지방이 풍부한 식단은 심장질환의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180 mg/dl 보다 낮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동맥경화나 심장질환의 발생이 극히 적게 나타났다.
포화지방산이 많이 함유된 육류와 유제품의 식단을 따르는 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심장질환 발생율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 알려졌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Greek Island에 사는 사람들은 고지방식을 해도 심장질환 발생빈도가 극히 적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식단은 주로 LDL을 낮추어주는 올리브유를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때는 많은 영양학자들이 단일 불포화지방산과 다중 불포화지방산 식품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준다 하여 많이 섭취할 것을 권장하였으나 지금은 지방 섭취량 그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유아나 어린이는 지방 섭취를 제한해서는 안된다)
5.승리의 비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
사단은 우리의 타락하고 죗된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접근한다. 우리의 본능이 자극(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본능의 요구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거절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본능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요구에 굴복하면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베드로후서 2:19.
만일 우리가 가정에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싶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생애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돈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를 바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원칙과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강요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호소하심으로써, 우리를 시험과 사단의 덫에서 건져내고자 하신다. 우리가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우리는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순한 가르침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6:16.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형태의 삶이든지 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넓은 길을 걸으면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만족을 취하면서 살아갈지라도,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우리의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한채, 자신의 죗된 본능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러한 삶의 끝에는 하늘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길을 걸으면서도,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고, 교회를 갈 수 있으며, 기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선적인 행위들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굴복되기만 하면,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도 남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은 자녀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가지 길만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넓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길이다. 하나는 우리의 죗된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걸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대로 걸어가는 길이다. 이 두가지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게 된다. 어떤 음성에 굴복할 것인가? 마음 속에서 들리는 두가지 음성, 즉 그리스도의 음성과 육체의 음성은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음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결코 중간은 없다.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된다. 지구 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사단 중 어느 한 존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를 상관하지 않은채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경주의 승부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너무도 낮기 때문에, 경주 도중에 나타나는 사건과 사물에 너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영원을 위한 경주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을 신뢰하는 가운데 전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전투에서 최전방에 서게 된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대쟁투에서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사단의 음성에 따라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에 따르기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충동에 의해서 살아가든지, 원칙을 따라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6.전쟁 중의 전쟁, 우주 전쟁
서론-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지체시키시는 이유
강병국 목사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항상 내 마음에 무한한 동정심을 자아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40대 중반의 남자였으면서 10살짜리 보다 더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그 집 부근에서 집회를 할 때면 늘 그의 13살난 아들의 품에 안겨서 집회 장소에 온 다음, 맨 뒤에 있는 긴 의자에 누운채 설교를 듣곤 하였다.
그는 Muscular Disrophy(머스큘라 디스트로피 : 근육이 축소되어 오그라드는 질병)라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등이 위로 비스듬히 굽어서 베개가 없이도 항상 머리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 있었으며, 또 눈은 얼마나 나빴던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이 항상 코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래도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터라 안경을 바로 잡아 줄 수도 없었다. 내가 말씀을 마치고 나면 그는 아들을 시켜서 나를 불렀고 그리고는 이렇게 항상 질문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예수께서 정말 속히 오시는 것이지요?! 정말 곧 오시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오실 때에 저는 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이 두 다리로 사슴처럼 뛰어 가면서 왜 이제 오시느냐고 소리치며 주님께 달려 갈 것이예요! 목사님! 제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 강림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 모든 슬픔과 고통이 끝나게 되겠지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렇게 오래 지체되어 오는 것일까? 예수의 오심이 지체되면 될 수록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의 크기가 점점 더 심해만 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더 악해져만 가게 되지 않는가! 거기에 비례하여 죗된 환경에 희생당하는 자들의 엄청난 숫자들이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코소보의 난민들을 보자!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고통들을 당하고 있는가! 조상들의 잘못된 과거의 역사 때문에, 그리고 복수 하려는 다른 한 민족의 분노 때문에 애꿋은 알바니안 민족들이 큰 수난을 겪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의 죄의 역사를 빨리 끝내시지 않는가? 도데체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언제쯤이나, 아니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가 끝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심각한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왜,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고통이 들어 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 죄의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이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계획으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는 특집으로 꾸며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계획과 그 이유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이 잇슈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전에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이유에 대하여 잠시만 상기해 보도록 하자.
구속의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타락하여 죗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사랑으로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서 오셨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알려 주셨으며 또한 실제 당신의 생활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인간이 너무 감동되어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악한 죄에서 돌아서서, 사랑의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게 되도록 인간을 변화시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었다. 물론 범죄한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법과 동일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만이 법을 범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속죄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지마는 아울러,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대한 이해를 깊이 심어주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도 큰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섬기는 자들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을 알므로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오해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에덴 동산에서 해와를 꼬일 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흥미 진진한,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살아야 할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그리고 조목 조목 연구해 나가보도록 하자!
1부-하늘에서 시작된 첫 번째 전쟁
지구의 역사에 항상 존재하는 전쟁
갑자기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가르며 날카로운 금속성 굉음이 들렸다. 곧이어 푸른 창공을 가로지르며 밝게 번뜩이는 섬광이 보이는 듯 싶더니 하늘을 찢을 듯한 연이은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오르는 불덩어리. 하늘을 가득 메운 버섯구름, 그리고 마치 우뢰가 울 듯 천둥소리 같은 굉장한 소리가 온 시가지를 울린다. 시내는 불바다로 변해 있었고 바로 건너편 대통령 궁에는 시커먼 연기가 솟고 있었다. 이것은 공포에 질려 눈을 뜬 바그다드 시민의 눈에 비쳐진 근래의 이라크 전쟁의 모습이다.
이 세상 역사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온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간 제1차 세계대전, 한가한 휴일 아침 단잠에 빠져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을 깨운, 갑작스런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시점으로 하여 비롯된 태평양 전쟁을 위시하여, 제2차 세계대전, 그 외의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 있어온 민족간의 크고 작은 전쟁들, 또 가깝게는 우리 한민족의 최대의 한이자 분단의 비극을 몰고 온 한국 6.25 전쟁 등, 이 세상에 처참한 황폐와 고통과 엄청난 비극을 몰고온 주범인 전쟁은 항상 이 세상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대는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있어온 그 어느 전쟁보다 가장 치열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무서운 전쟁이, 아직까지 한번도 그쳐본 적이 없는 아주 맹렬한 전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그 전쟁은 바로 우주 전쟁이다. 그것이 바로 우주에서 지금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선과 악의 대쟁투인 것이다.
전쟁이 있기 전에 있던 하늘의 평화
이 우주가 태동했을 때, 그것이 언제였는지 모르지만그 태초에 하늘에는 완전한 조화와 평화가 있었다. 하늘에 있는 존재인 모든 천사들은 아름다움과 사랑이 조화를 이룬 완전한 기쁨을 만끽하며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어느 곳에나 행복과 기쁨이 넘쳐 흘렀으며 완전한 평화와 질서 속에서 모든 존재들은 그렇게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았다.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긴 세월동안 지속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우주의 평화와 질서는 유지되었다. 적어도 인류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천사들은 완전한 평화 속에 존재하였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 그 때에(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말함 - 편집실),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을 뜻함 - 편집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욥기 38:1,4,7.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존재자들과 또 모든 만물을 창조 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은혜로우신 사업을 홀로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모든 존재들에게 행복을 주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고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역자 곧 동료 한 분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 1:1, 2).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협의와 의도(意圖)에 참여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셨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잠 8:22-30)다. 또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골1:16)다. 이와 같이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창조 사업에 동참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그 본체의 형상이시”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모든 천사들 위에 최상권을 가지셨다. 천사들은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최상권을 인정하였으며 그들의 마음을 다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였다. 어디에나 기쁨과 행복의 찬양이 넘쳐 흘렀다.
죄의 기원
그런데 이 기쁨의 소리를 깨뜨리는 불협화음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를 악용한 자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사랑의 봉사 곧 당신의 품성을 인식함으로 솟아나는 봉사를 원하신다. 그분은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충성을 인정하는 동안 온 우주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호간의 사랑도 믿을 만 하였고 무아적이었다. 하늘의 조화들을 파괴할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상태에 한 변화가 일어났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 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오 아침의 아들 계명성(루시퍼,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느뇨!... (이사야 14:12). “아침의 아들” 루시퍼는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印)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아름답던 루시퍼는 차츰차츰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그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힘센 천사는 그것을 자기 자신의 소유인 양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 무리들 중에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그는 자기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창조주만이 받으실 수 있는 존경을 탐냈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애정과 충성에 하나님을 최고로 삼도록 노력하는 대신에 그들의 봉사와 충절을 자기 자신이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 천사장은 무한하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탐내고 그리스도만이 가지신 대권(大權)을 갈망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와 모든 계획에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만을 포함시킨 것에 시기하고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강한 천사는 “왜 그리스도가 최상권을 가져야 하는가? 왜 그가 루시퍼보다 더 영광을 받는가?”라고 자문하였다. 그리하여 천사들을 지휘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하던 이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의 아들의 최상권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고 창조주의 지혜와 사랑을 비난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루시퍼의 계책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공격
그는 아버지의 바로 앞에 있는 자기의 자리를 떠나 천사들 가운데 불만의 정신을 퍼뜨리려고 나갔다. 루시퍼의 시기와 그릇된 설명, 그리스도와 동등하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천사들 중에 루시퍼의 기만으로 말미암아 눈멀게 된 자들이 많았다. 루시퍼는 자기의 지휘하에 있는 거룩한 존재자들이 자기를 신뢰하는 사랑스럽고 충성스러운 신임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불신과 불만을 매우 교묘하게 불어넣었다. 그는 하늘의 존재자들을 다스리는 율법에 관하여 의심을 심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세계들의 거민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천사들은 더 높은 존재자들이므로 그와 같은 속박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지혜가 충분한 안내자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암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며, 그들의 모든 생각이 거룩하며, 하나님 자신이 죄를 범하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와 동등의 지위로 높이는 처사는 천사 루시퍼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이며 루시퍼 역시 그와 같은 존경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이 천사장은 말하기를 “내가 가져야 할 진정한 높은 지위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온 하늘 천사들은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에게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 전제적(專制的) 통치자가 우리에게 임명되었고, 그분의 권위에 모두가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우리들이 지금까지 누려 오던 자유가 이제는 끝장났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정부의 안정을 위해 하늘의 질서와 율법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불공평하며 그분의 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교활한 기만은 루시퍼의 간계(奸計)를 통하여 신속히 하늘 궁정에서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과 충성스런 천사들은 루시퍼에게 간청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루시퍼에게 나타내시고 또한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질서를 세우셨으므로, 이 질서를 벗어남으로 그는 창조주를 멸시하고 자신에게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 주어진 경고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루시퍼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주의 왕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존재들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의 아들의 참된 지위를 드러내시고 모든 피조물들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리스도에 대한 루시퍼의 질투심은 더욱 굳어 갔다.이렇듯 불붙은 불만의 정신은 무서운 죄로 잉태되었다.
그리하여 완전하던 하늘의 조화는 파괴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품성을 따라 크신 자비를 베푸사 루시퍼에 대해 오래 참으셨다. 그에게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무한한 사랑과 지혜자께서만이 궁리해 낼 수 있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오해되었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자기 자신의 우월성의 증거로, 우주의 왕께서 자기의 요구 조건에 따르실 징후라고 가리키며 자기에게 동조하는 천사들에게 그와 함께 굳게 선다면 그들이 이길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우선권은 자기와 온 하늘의 천사들에게 불공평한 처사이며, 그와 그의 대열에 가담하는 자들에게는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더 나은 새 정부를 수립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자비로우신 창조주께서는 루시퍼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간절한 동정심으로 그들이 뛰어들려고 하는 멸망의 심연(深淵)에서 그들을 돌이키시려고 노력하셨다. 그의 불만은 이유 없는 것임이 판명되었으며, 루시퍼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거룩하)시”(시 145:17)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공의롭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온 하늘 앞에서 이것들을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그는 자신은 물론 많은 천사들을 구원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복종하든지, 공공연히 반역하든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시간이 이르렀다. 그에게는 충분히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넉넉한 은혜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거의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결정에 이르렀으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토록 큰 존경을 받던 자가 온 하늘 앞에서 자신이 그릇되었음과 그의 상상이 잘못되었음을 자복하고, 부당하다는 것을 밝히려고 힘써 오던 바로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그는 자기의 노선을 고집스럽게 옹호하였으며 자기의 창조주를 대항하는 대쟁투에 완전히 전념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가진 자요, 그의 보좌에서 수종들던 자요, “빛을 지닌 자”인 루시퍼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거룩한 존재자들의 “대적”사단이 되었으며, 하늘이 지도하며 보호하도록 그에게 맡긴 자들을 멸망시키는 자가 되었다.
전쟁의 시작
루시퍼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자, 하늘에서 하나님과 루시퍼(사단) 사이에 큰 전쟁이 생기게 되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사단)으로 더불어 싸울새.” 요한계시록 12:7. 사단은 자기를 높이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늘의 최고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에 복종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온 하늘의 무리는 각각 자기의 운명에 대한 결정을 받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호출되었다. 사단은 그분 앞에서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으시는 것에 대한 불만을 아주 거리낌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방자한 태도로 자기는 하나님과 동등되어야 할 것이며 아버지와 더불어 상의할 수 있고 또 아버지의 계획을 알아야 되겠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만 당신의 은밀한 계획을 알게 하실 것이며, 하늘에 있는 모든 가족들과 사단까지라도 아무 이의 없이 묵묵히 그분께 순복하여야 하며, 사단은 이미 하늘에 거하기에 부적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다고 알려 주셨다. 그 때에 사단은 기고 만장하여 모든 천사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자기의 동조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나의 편이다! 이들을 내쫓아 하늘을 그만큼 비게 만들 셈인가?”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항하고 하늘에서 자기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하여 힘에는 힘으로 맞설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들이 하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리하여 하늘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늘의 왕자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또 그의 충성된 천사들은 연합하여 반역자의 괴수와 및 그와 연합한 자들로 더불어 투쟁하였다. 하나님의 아들과 충성된 천사들이 이기었고 사단과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하늘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하늘에 있는 모든 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경모(敬慕)하였다. 하늘에는 이제 반역의 병독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전과 같이 다시 평화스러웠고 조화로웠다. 하늘에서 생긴 첫 번째 전쟁은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이 지구로 쫓겨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사단)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요한계시록12:7~9).
하늘에서 있었던 전쟁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되었을까?
하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루시퍼는 악(evil)이라는 무기와 거짓말과 아첨과 허위라는 무기를 사용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의에 모순되지 않는 그런 방법의 무기만을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진실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루시퍼는 거짓말과 사실을 왜곡시키는 악한 계략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됨을 입증하려고 힘썼으며 하나님의 정부의 계획을 허위로 대표하였고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율법을 부과하신 것은 불공평한 일이며, 당신의 피조물에게 굴복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이 단순히 자신을 높이고자 함이라고 왜곡시켜 말하였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실만을 사용하셨다.
우주 전쟁의 시작과 그 종말
1. 우주전쟁이 시작된 곳 - 하늘(계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계12:7)
2. 우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 사단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14:1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印)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3. 우주전쟁이 일어난 원인 :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부와 법, 십계명을 공격함으로 시작됨 (사14:13~14, 겔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14:13,14)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28:17)
4. 지구로 옮겨진 우주 전쟁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12:7~9)
5. 전쟁에 사용된 사단의 기만 :
1. 교묘한 거짓말과 그럴듯한 이론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법(계명)은 피조물이 지킬 수 없는 불공평한 법이라고 공격함. 2.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피조물을 구속하는, 사랑과 자비가 없는 분이라고 고소함. 3.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의 변장술과 아첨과 허위로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하고 파멸시킴.(창3:4, 고후11:3, 고후11;14, 요8:4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그리스도를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 하노라” (고후11:3)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6. 전쟁에 대처하신 하나님의 방법 :
1. 하나님의 법 곧 계명을 어긴 죄의 댓가인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마련하심. 2. 사랑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법에 대한 사단의 공격의 허위성을 증명하시고 공의와 자비를 충족시키심. 3. 십자가를 통해 계명은 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고 또한 십자가의 용서와 회복하시는 은혜로 계명을 지키는것이 가능하게 하심. (롬 6:23, 요 3:16, 롬 5:8, 시 89:14, 롬 6:22, 히 10:16, 겔 36:26~27)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10:16)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겔36:26~27)
7. 우주 전쟁으로 인해 하나님께 야기된 문제들 :
1. 사단의 고소와 음모에 휘말리신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음모의 실체와 참 모습이 온 우주에 들어날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셔야 함. 2.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고 증명해 줄 증인들과 시간이 필요하게 됨(벧후3:8~9, 살후2:8~12, 히11:39~4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8~9)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2:8~12)
8.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우주 전쟁 :
하나님을 믿으며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사단의 적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9.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마지막 시대의 주인공 :
하나님의 성품과 율법을 지키는 마지막 주자들이 출현하여 하나님을 변호하는 증인이 되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결국에 하나님께서 승리하심. (계14:12, 단7:25~27, 겔 36:22~23)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계14:12)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 (단7:25~27)
2부-지구로 옮겨진 두 번째 전쟁
인류를 향한 사단의 적의와 전쟁의 음모
성부와 성자께서는 이미 계획하신 대로 위대하고 경이로운 사업-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세상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언덕과 산과 매우 아름다운 평야는 각종 풀과 꽃과 거대하고 늠름한 나무들로 꾸며졌고 공기는 신선하고 맑았으며 땅은 훌륭한 궁전과 같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천사들은 매우 즐거워 하였다. 땅과 그리고 그 위에 모든 것들과 짐승들을 창조하신 후, 성부와 성자께서는 사단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계획하셨던 일, 즉 자기들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고자 했던 계획을 실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첫 인류 아담과 하와는 아름다운 용모와 또 균형지고 아름다운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에 조화되었고 그의 외모와 품성과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들을 위하여 동산을 만드셔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 거룩한 부부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아름다운 동산 에덴에서 매우 행복하게 지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물들에 둘러싸인 그들은 저희를 두른 사랑의 모든 표시들을 보면서 음성을 높여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사랑과 찬송과 존경의 노래를 불렀다.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어 더 이상 마음대로 반역을 선동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증오심은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올 또 다른 전쟁을 음모하는 가운데서 한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었다. 그는 에덴에 사는 경건한 부부의 행복과 평화 가운데서 자기가 영원히 잃어버린 행복의 환상을 보았다. 시기심에 동하여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도록 선동하여 죄의 형벌을 가져다 주려고 단호히 결심하였다. 사단은 분기하여 고상한 아담과 그의 반려자 하와를 하나님의 손에서 강탈해 낼 계획을 세웠다. 만일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세우셔서라도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타락한 천사인 자기들도 다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사람이 한번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기만 하면 그들도 범죄로 인하여 자기들처럼 반역자의 대열에 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희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을 소유하고 이 곳을 저희 본거지로 삼아 자기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힘은 거룩한 천사들과 같아져서 하나님께서라도 능히 내쫓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무죄한 인류를 자기 자신이 당하는 것과 동일한 비참함 가운데로 빠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 욕을 돌리게 하고 하늘에 슬픔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바야흐로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땅에서도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게 세워진 하나님의 법
천사들은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타락하게 된 이유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 또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음모를 미리 알려 주었으며 질서와 공평을 유지하는 유일의 방편인 하나님의 정부의 법, 십계명을 아담과 하와가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그들에게 계명을 주실 수가 없으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는 등등의 성문화된 계명은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살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짓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십계명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을 나누며 영원히 살 것이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안전을 얻을 수 있기 전에 그들의 충성은 시험을 받아야 했다.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곁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도록 허락되었지만, 이 나무의 실과를 맛보는 것은 금지되었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이 과일을 먹게 되면 죽음의 고통을 당할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사단의 유혹을 당할 것이었지만 그들이 시험에 견딘다면 마침내 그들은 사단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될 것이었으며 영원히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선악과를 주셨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함으로 그의 명령을 따라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이었다.
지구의 첫 전쟁에 나타난 사단의 기만
천사들은 하와에게 동산에서 날마다의 즐거운 노동을 하는 동안에 남편을 떠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으나 하와는 자기의 즐거운 일에 몰두하여 무의식 중에 남편의 곁을 떠나 돌아다녔다. 얼마 후 그는 천사의 경고를 잊은 채 곧 호기심과 감탄이 뒤섞인 중에 금지된 나무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열매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과실을 금하셨을까 하고 자문하였다. 바로 이 때가 유혹자의 절호의 기회였다. 자기 기만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잘 맞는 변장물, 즉 뱀을 매개물로 사용하여 변장한 사단은 이 여인의 마음의 생각들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양 그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말을 걸었다. 하와는 자기 생각의 메아리를 듣는 것 같았으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뱀이 말하는 것임을 알자 더욱 놀랐다. 그는 매혹적인 그 뱀이 타락한 원수의 매개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유혹자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질문에 그 여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2~5).
뱀으로 변장한 사단은 이 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다면 그들은 더욱 더 높은 존재의 영역을 획득할 것이며 더욱 넓은 지식의 분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도 금단의 과실을 먹어 보았으며, 그 결과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분과 동등하게 높아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그것을 금하신 것이라고 교묘하게 암시하였다. 그는 이 나무의 실과는 지혜와 능력을 주는 놀라운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만지는 것까지도 금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경고는 사실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단순히 그들을 위협하려고 의도된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첫 인류의 패배
뱀은 금단의 과실을 따서 그것을 반쯤 싫어하는 하와의 손에 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과실을 만져도 아무 해가 없는 것처럼 그것을 먹어도 해가 없으리라고 단언하였다. 하와는 그것을 만졌지만 아무런 해로운 결과도 생기지 않는 것을 알자 더 대담해졌다. 여자는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 먹”었다. 그것은 맛이 좋았고, 먹는 순간 활력을 느끼는 것 같았으며, 그는 그것을 먹으면서 스스로 한층 더 고상한 생존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리고 이제 범죄한 그 여자는 자기 남편을 멸망시키는 일에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 이상스럽고 부자연스럽게 흥분된 상태에서 금단의 과실을 두 손에 들고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말하였다.
아담은 놀랐다. 그는 근심하였으며 그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떠올랐다. 하와의 말을 듣자 그는 그것이 그들이 경고를 받아왔던 원수 사단임에 틀림없으며 하나님의 선고대로 그 여자는 죽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아담은 그의 반려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었다는 것, 그들에게 충성과 사랑의 시금석으로 부과된 단 하나의 금령(禁令)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심중에는 무서운 투쟁이 있었다. 그는 이제 그렇게 큰 기쁨으로 교제하던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 여자는 아담 자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하와와 이별한다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었다. 창조주께 대한 사랑, 감사, 충성, 이 모든 것은 하와에 대한 사랑에 눌리어졌다. 그는 땅의 진토에서 자기를 활력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그를 사랑하사 그에게 반려자를 주신 무한하신 능력자께서 그 여자 대신 다른 반려자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그 여자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여자가 죽어야 한다면, 그도 그 여자와 함께 죽을 것이었다. 혹시 현명한 뱀의 말이 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그는 추론하였다. 그는 그 과실을 쥐고 급히 먹었다. 오! 아담이여, 선악의 전쟁에서 그리도 쉽게 지다니! 그리도 쉽게 타락하여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다니!...
사단은 그의 성공으로 기뻐 날뛰었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하고, 그분의 계명을 범하게 하였으며 그는 여자를 통하여 아담을 넘어뜨렸다. 드디어 이 땅에서 일어난 선과 악의 첫 번째 전쟁에서 사단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범죄한 후 아담은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엔 자기가 한층 더 높은 생존 상태에 들어가고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나 곧 죄에 대한 생각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공포심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이 누려 왔던 사랑과 평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그들은 죄에 대한 의식, 장래에 대한 공포, 영혼의 벌거벗음을 느꼈다. 그들의 몸을 두르고 있었던 빛의 두루마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막 죄의 그늘이 인류의 역사에 드리우고 사망과 파멸과 슬픔과 고통이 그들의 운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패배와 타락의 소식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게 되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계명을 범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피할 길은 없는것 같이 보였다. 천사들은 찬양의 노래를 그쳤다. 하늘 궁정 전체가 죄가 가져온 황폐 때문에 통곡하고 있었다.
에덴 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지금의 “흰색”은 무슨 색이라고 불릴까? 만약 흰색만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색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나무도 하얗고, 풀도 하얗고, 하늘도, 꽃도, 사람도.. 모든 것이 하얀 색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부르는 흰색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의 색”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은 색의 반대되는 것을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검정도, 빨강도, 초록도.... 모두 없어지고 흰색만 남는다면, 더 이상 색과 색을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흰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색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이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색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계 안에서도 흰색이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계속 흰색이지만, 단지 그것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 색”이라고 그 이름만 바꾸어 붙인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다. 이곳에서는 의로운 일들을 “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마땅하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또한 악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에덴 동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으며,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나 슬픔을 주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시 104:5).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모든 악을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들 마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을 통하여 완전하게 유지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다(창세기 2: 8-9).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이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참고).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규칙을 정한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법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세계는 완전하여 악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은 아무런 선택의 여지없이 단지 그들의 머리 속에 프로그램 된 무의식적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두셨던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심어 주신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신 요한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심어주신 그 자유 의지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법이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불법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에 대하여 어떤 의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법이 있다는 말은 불법도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만약 불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 라고 질문함으로써, 마치 하나님께서 불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라는 법은 있었으나, 이 법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불법을 알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창세기 2장 9절과 3장 22절에 설명하고 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였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악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선도 몰랐다. 왜냐하면 악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심으로 그들이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어떤 법이 주어졌다면 일반적으로 이 땅의 법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에덴에서도 법과 불법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측하에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듦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불법이 생겨났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완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셨으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법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불법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만드셨던 법은 이 땅의 법과는 달랐다. 에덴동산의 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었고, 그 법을 어긴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였다. 이 법을 나누어 보면 “먹지 말라”고 하는 규칙과, 선악과와, 그 규칙을 어긴 결과인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다른 과일 나무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나무였기 때문에 선악과 자체에는 어떤 종류의 악의 의미도 없었으며, “먹지 말라”라는 단어 자체에도 전혀 악의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법이 주어졌다면, 살인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었어야 하며, 그것은 곧 악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먹지 말라”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법을 만드신 것이다. 이 법은 지금의 법처럼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법이었다.
또한 이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진다고 했던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겁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번도 죽음을 본 경험이 없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가을 낙엽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영원한 삶”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언어인 것처럼, “죽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는데,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그 삯인 사망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 법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아담과 하와가 갖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의 법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흰색이라면 색의 개념이 없어진다. 더 이상 서로 반대되는 색들의 세계는 없어지고 자연 색 하나만 남게 된다. 장미는 있으나 거기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가시는 없고, 태양은 있으나 해로운 자외선은 없다. 사랑은 있으나 질투는 없고, 성공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는 그 반대의 뜻이 완전히 없도록 완전하게 만드셨다. 사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깊게 하다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를 의미하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야고보서 1:17)므로 그 말씀인 율법도 그림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그 완전한 세계로 복귀하게 될 때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대개념은 사라지게 되어, 악의 반대 의미로서의 선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흰색”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일들에 붙었던 “선”은 없어지게 되고 “자연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선한 행동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해야되는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흰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여전히 그 색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상태였으며 이 땅에서 성화를 통하여 마지막 세대가 얻어야 할 우리 마음의 최종적 목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에덴에 다른 색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그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에덴의 색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선악과는 단지 아담과 하와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서는 안될, 어떤 다른 세계(죄의 결과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만을 주었을 뿐이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요?
이제 선이라는 개념은 악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게 되고,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불법을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7:7절을 통하여 이러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죄와 율법의 다른 점을 몰라서 “율법이 죄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율법과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묻는 물음은 그 차이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갖고 있느냐” 또는 “율법이 죄를 만드는 것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히 반대한다. 율법이 죄를 포함하고 있거나, 죄를 만들지 않고, 단지 율법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이 죄를 어떻게 짓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를 알았다고 하여 그 거울이 자기 얼굴에 검정을 묻혔다거나 어떻게 묻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처럼 우리의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거울로서의 율법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악도, 선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세상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불법의 의미가 포함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락한 후에, 법의 거울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갖고 있는 악한 본성을 비추기 위하여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같은 불법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이 법이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는 율법이 오직 사랑을 완성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율법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몽학선생”(schoolmaster, 교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단지 당연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 나는 오늘 휴지를 버리지 않았어! 아 나는 오늘 내 아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아 나는 오늘 살인을 하지 않았어, 도둑질도 하지 않았다고! 아 나는 참 선한 일을 했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들에 나는 새들도 그들의 새끼를 양육한다. 그런데 만약 이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나타나 불법을 행하였다고 선언한다.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법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행하지 않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법을 나타내지 않는다. 법이 있지도 않는 불법을 가르치거나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법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얼마나 완벽히 반사하고 있으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창조받은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우리의 첫 조상은 비록 거룩하게 창조되었지만 범죄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품성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당신의 요구 사항의 공의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거역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가진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셨다. 즉 선택의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다. 하님께서는 인류가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감사함에 넘쳐 자원하는 순종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하셨는데 그 까닭은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3부-전쟁의 파멸로부터의 구원
패배한 인류에게 내려진 선고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인류의 운명은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고가 그들 위에 떨어져야 했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죄수로서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서 범죄가 초래한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 바로 그 때에 그들의 운명이 될 수 밖에 없는, 너희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고를 듣기 전에 그들은 그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주는, 이 세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복의 선언을 듣게 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것은 뱀에게 하신 말씀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단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었으며, 그의 최후의 패배와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부모가 듣는 데서 선언된 이 선고는 그들에게는 한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에서 일어난 최초의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사단에게 패배한 인류 즉, 당신의 계명을 범함으로 죽을 수 밖에 없게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하여 한 구원의 방법을 마련하셨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의 생명을 계명을 범한 자의 죄값을 대속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었다.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이유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실 수 없으셨을까? 여기에 그 답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결코 변경할 수 없는 법이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이 변경될 수 있었더라면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희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계명은 죄인을 율법의 요구에서 면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법을 어긴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하여 죄의 삯을 담당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또한 십자가가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사단과 싸우는 우주적인 전쟁의 관건이 달린 중요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주의 대쟁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법에 관한 것이었다. 사단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며, 그분의 계명에 결함이 있고, 우주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써왔다. 또한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자비가 없는 전제 군주 같은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분의 율법을 공격함으로 그는 그 법의 제정자의 권위를 뒤집어 엎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여 우주의 대쟁투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결함이 있어 변경해야 되는지 혹은 완전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인지 또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 없는 독재자 같은 분인지 등이 증명되어야 했다.
정말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계명이 폐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계명을 그렇게 쉽게 폐해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그렇게 폐해버리시고 그냥 슬쩍 눈감아서 죄인을 구원하시지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루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냥 쉽게 계명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십자가에 포함된 또 다른 구원의 경륜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다.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아니했다. 십자가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회복시켜서 다시 하늘로 데려오도록 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사단은 하늘에서 추방되었을 때 이 지구를 그의 나라로 삼으려고 단호히 결심하였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그들을 정복하였을 때 그는 이 세상이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나를 그들의 통치자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타락한 인류는 그의 합법적 백성이며 이 세상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동등이신 당신의 귀하신 아들을 주셔서 죄의 형벌을 담당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죄를 지은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여 새 마음과 새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셔서 그들이 그분의 은총을 회복하고 그들의 에덴 본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즉, 십자가는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의 범법자와 패배자들이 되었지만, 그분의 아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아버지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진실한 백성, “곧 마음에 그분의 율법이 있는 백성”(사 52:7)이 될 수 있게 되었다.
4부-우주 법정에 걸려 있는 최대 고소 사건
지금 하늘의 우주 법정에는 우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소송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법과 성품에 대하여 고소를 한 사건이다. 이 고소 사건에서 인간인 우리도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신은 릴레이 경주를 본 적이 있는가? 큰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 손에 땀을 쥐고 마지막 바톤을 이어 받아, 숨막히는 마지막 코스를 뛰는 마지막 주자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얼굴에 구슬같이 맺힌 땀이 줄줄 흘러내려도 닦을 겨를도 없이 이를 악물고 최후의 승리를 위해 뛰는 마지막 주자들... 성경에는 마지막 지구의 역사의 장을 최후의 승리로 장식할 마지막 주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마지막 주자들이야말로 우주 법정에 걸려 있는 소송 사건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성품에 대한 결정적인 증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마지막 주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어떤 관건 속에서 이 일을 이루어내야 하는지 상황을 진단해 보기로 한다.
상황 1. 우주 최대의 법정에 걸려 있는 고소사건
지금 하늘 우주 법정에는 아주 중요한 소송사건이 걸려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나님을 무고하게 걸어 고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 : 사단
피고 : 하나님
장소 : 우주 법정
사단의 고소 제1번
“하나님! 당신의 법은 불공평하고 결함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행복을 위해서 당신의 법을 변경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도 지키지 않는 법을 피조물에게 강요하면서, 우리를 노예로 얽어매어 당신을 섬기도록 구속하는 방편으로 삼는, 사랑과 자비가 없는 이기적인 분입니다.”
사단의 고소 제2번
“하나님! 우리 피조물들은 당신이 제정하신 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 중에서 제일 으뜸인 내 자신이 당신의 법을 지킬 수 없었는데 누가 과연 이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구 역사상 당신의 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네? 뭐라구요? 욥을 보라구요? 요셉과 엘리야와 다니엘을 보라구요?... 그 사람들은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어쩌다 당신의 큰 은혜 때문에 가끔 생겨난 사람들이죠. 지구의 역사를 보세요.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율법을 어기고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보더라도 당신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에게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리고 어차피 피조물들이 지킬 수 없어서 당신의 법을 어긴 사람들을 용서하여 하늘로 들이신다면 우리 타락한 천사들도 하늘에 다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상황 2. 하나님의 딜레마
위에 열거된 사단의 고소는 우주에 반드시 그 해답과 변호를 요하는 심각한 우주의 법정 투쟁이다. 사단이 던진 이 고소에 대한 증명과 변호가 공정하고 명백하게 온 우주 앞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단과의 그리고 죄와의 전쟁을 끝마치실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롭고 공의로운 분이시며 또한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이 우주에 걸려있는 소송사건은 하나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전쟁은 힘의 대결로 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시간과 증인이 요구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리고 온 우주의 영원한 행복과 질서가 달린 중대한 싸움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우주전체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하나님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딜레마 (1) : 하나님은 시간이 필요하심
하나님께서는 왜 사단을 반역한 그 즉시로 없애버리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만일 사단이 반역한 그 즉시로 멸망을 받았을 것 같으면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은 사랑으로보다는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봉사만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롭고 자비하신가에 대하여 확실히 알므로 그들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또 만일 하나님께서 반역의 시초에 급하게 사단을 벌하셨다면 하늘의 다른 많은 존재자들이 사단이 불공정하게 취급되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늘과 그 밖의 모든 다른 세계의 주민들은 아직 죄의 본질과 그 결과에 대하여 깨달을 단계가 못 되었으므로 사단을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은혜임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죄악이 충분히 성숙하여 드러날 시간이 허용되어야 했다. 그리고 사단의 기만이 너무 교묘하였으므로 그 찬탈자의 본성과 참 목적, 즉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증명되며 그가 시도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될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충분히 나타나기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다. 영원히 온 우주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사단의 비난의 진상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이 영구히 의문시되지 않을 위치에 놓여질 수 있도록, 그리고 전 우주가 그 기만자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을 봄으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필요하시다. 그리하여 하늘 주민과 온 세계들 앞에서 하나님의 정부가 공의롭고 그분의 율법이 완전하다는 것이 실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딜레마(2) :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는데 따랐던 큰 고통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같으며 온 우주의 기초는 사랑의 율법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하나님의 두 번째 딜레마는 범죄한 인류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었고 또한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당신의 크신 사랑을 보이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도록 이 세상에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었으며 큰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신비스런 의논-“평화의 의논”(슥 6:13)은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로 자원하셨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결정, 곧”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결정을 내리셨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인가!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온 우주가 경탄할 일이었다. 별에서 별로, 세계에서 세계로 다니시면서 만물을 감독하시고 그분의 섭리로 창조하신 광대한 우주의 각계 각층의 존재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분께서 당신의 영광을 떠나 몸소 인성을 취하시기로 동의하신 것은 죄없는 다른 세계들의 지적 존재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랑의 신비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온 우주는 그분께서 말구유에서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피 묻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으시며 가로지르시는 모습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하늘은 그분이 받으신 능욕과 멸시를 주목하였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고통 중에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실 때에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아버지와 아들이 정말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온전히 버리실 만큼 큰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받아야 할 범죄의 형벌을 그대로 대신 받으신 사실은 모든 창조된 지적 존재들에게, 바로 율법은 불변하며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자기를 부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그분의 정부의 통치에는 무한한 공의와 자비가 연합되어 있다는데 대한 강력한 논증이 되었다.
하나님의 딜레마 (3):하나님께서는 증인들이 필요하심
사단의 고소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하늘 거민들과 온 세계 앞에 하나님의 율법은 우주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공평한 법이며 또한 그 법은 피조물이 지킬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 혼자서는 해결하실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일단의 무리가 생기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서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이면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 어떻게 그렇게 악한 환경 가운데서, 또한 그렇게 연약해진 죄의 육신을 쓰시고도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악한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 일은 가능한 것일까?
상황 3 우리가 아니면....
인간의 증명이 필요한 이유
사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십자가는 온 우주에 사단의 고소가 잘못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율법의 정당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죄의 전쟁을 끝내실 수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하늘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모든 천사들과 하늘의 존재자들이 죄의 결과를 보았으며, 어느 편에 속하느냐 하는 개인의 선택이 다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선악간의 대쟁투에 대한 빛을 받고 선택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단의 고소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고소와 증명은 다 하신 셈이며 이제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며 그것만이 우주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일만이 남아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율법은 폐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율법에 합당한 품성을 소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과연 하늘에 합당한 자들인가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온 우주 앞에서 심판하고 조사할 필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 천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던 그 조그만 죄가 어떻게 이 큰 우주에 처참한 파멸과 불행과 전쟁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므로 하늘과 온 우주의 존재들과 심판대 주위에 있는 천사들은 또 다시 우주에 죄가 들어와 쓰라린 반역의 역사가 다시 반복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온전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 동기를 가지고 지키지 않는 사람을 은혜로만 덮어서 구원하신다면 우주의 배심원들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죄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율법을 범하는 자가 하늘과 땅에 끼친 엄청난 반역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도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 자가 하늘에 들여지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크게 항의하겠는가? 그럴 것이면 자기들도 다시 하늘에 받아 들여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자기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늘에서 쫓겨난 것인데...
마지막 주자의 나타남
그렇다면 과연 온 우주에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하며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들이 나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성경에는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사단과 싸워 마침내 승리할 마지막 무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그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으며(계7;2~3) 또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씌여 있으며(계14:1)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으며 사람가운데 구속을 받아 시온산에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계14:1~5)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인, 즉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새겨져 있다는 뜻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는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또 그들의 죄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죄가 얼마나 악하다는것을 알기 때문에, 정말 다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슬프시게 한 죄를 주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 속에 계속 내재하시므로 그 생애에서 죄를 그치는 사람들이다. 아니 적어도 마음 속에 알고 있는 죄를 버리지 않고 고집하거나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셔서 당신의 피로 그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능력을 주셔서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욥과 같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을 열어 범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환란, 즉 개국이래로 없던 마지막 큰 환란을 지날 때에도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성령의 충만하심과 능력을 받아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들!...그리하여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하나님께 승리를 가져오며 우주의 법정에서 하나님을 변호할 증인이 될 사람들!...지금 하늘에서는 이러한 증인들이 속히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마지막 역사의 밤은 깊어가고 세상 곳곳에 일어나는 재화들...선과 악의 대 쟁투는 점점 치열해지고 죄의 역사는 빨리 끝이 나야 하는데 마지막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하여 뛰어야 할 마지막 주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그러한 증인의 한 사람인가?...“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
5부-첫째 아담이 남긴 상처, 둘째 아담을 통해서 이루어진 회복
죠 크루스
지금 이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쟁투에서 예수께서 싸우신 싸움,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영적 눈이 열려서 그분의 희생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사단에게 협력하거나 굴복하는 비참한 일은 없게 될 것이며, 나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용감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되어 사단의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들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아담이 남긴 죄의 결과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깊이 있게 살펴 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을까? 성경은,“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히 2:9).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분은, 나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끝날에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신비와 경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첫번째 사망(일반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둘째 사망(영원한 멸망)을 대신 경험하셨던 것이다.
첫째 아담이 남긴 결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치루어야 하는가?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을 대표했다. 인류의 시조로서,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독자들도 아담 안에 있었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아담의 유전인자와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담의 몸과 본성을 이어받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이 받은 영향을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전수하였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며, 아담 안에는 세대마다 되풀이 되는 유전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한 시험을 두셨다. 그 시험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시험이었다.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아담이 계속해서 그 완전한 에덴 동산의 환경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것은, 그의 순종에 달려 있었다. 아담의 행복한 미래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경우, 형벌을 제하거나 가볍게 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없다. 시험은 분명했다. 순종하여 살든지, 불순종하여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담이 불순종하자, 아담의 나이 930세 때에 그 선고는 집행되었고, 그는 결국 죽어서 땅에 묻혔다.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연약해진 육체를 타고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처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유전법칙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는 본성(mortal nature)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퇴화된 육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 때부터 죄는 세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요지부동한 존재가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한 번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담의 생명은 그가 범죄했을 때에 이미 끝났다. 첫번째로 주어진 생명은 사단의 시험에 굴복하는 순간에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 즉,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영원한 죽음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그것이 영원한 끝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주어진 두번째 기회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창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을 통한 구속의 경륜을 발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시험을 주셨다. 이 두번째 기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두번째 배려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첫번째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한 질문을 던져준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존엄성과 율법의 권위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또 한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매우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또 한번의 영생의 기회를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사람이 자신의 수(나이)를 채우고 죽는 첫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두번째 시험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그들이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두번째로 주어진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는 더 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며, 둘째 사망(최종적인 영원한 죽음)이라는 죄의 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둘째 아담이 시험에 응함
지금까지는 첫째 죽음과 두번째 기회에 대하여 공부했으므로, 이제는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역할을 살펴보도록 하자.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신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를 범한 첫번째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창조주이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가족이 되셔서, 마치 그분 안에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셨다.
예수께서는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인류와 동일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죄를 저항하는 면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분의 형제들보다 어떤 유리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셨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단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으셨을 것이다. 사단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순종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고 비난해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하셨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단의 거짓 고소를 반박하실 수 있었는데, 이는 누구든지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와 유혹을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첫째 아담의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둘째 아담이 남긴 결과
첫째 아담은, 육체적인 출생을 통하여, 죄로 인해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영적인 출생(거듭남)을 통하여, 당신의 죄없고 순결한 경험인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영적인 출생 즉,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 재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을 희망 없고 속절 없는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자신이 속해 있는 족보가 바뀌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모든 아담의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이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된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태초에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창 5:1~3).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죄를 범한 아담을 닮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닮음일까? 아니면 상징적인 닮음일까? 이것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에게 찾아오는 필연적인 형벌인 둘째 죽음(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받게 된 형벌인 첫째 죽음을 취소시키지 않으시고 그대로 집행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둘째 시험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둘째 죽음을 폐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둘째 사망의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당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용서를 제공해 주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하늘 드라마의 또 다른 면을 살펴 보도록 하자. 어떻게 한 사람,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성경은,“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한다(히 9:22). 여기서 사함이란 물론 용서를 말한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모든 것들의 핵심이다. 죄인을 용서하는 권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당하게 되는 둘째 죽음(영원한 형벌의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다.
용서는 죄인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선고받은 기간만 감옥에서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고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의 행위로 죄의 댓가를 지불하였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선고된 형벌의 양이 1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100년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여전히 그에게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2~28.
바로 이것이 죄인이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죄의 값은 10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죽음을 정죄하였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일이 없이는 결코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 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를 오늘 내가 행하는 선한 행위로 지울 수 없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 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치루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려진 죽음의 선고를 대신 받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율법은 모든 범죄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댓가를 치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용서는 범죄자가 받아 마땅한 형벌로부터 그를 구해준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하여 죄의 댓가를 치르어야만 한다.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주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자. 살인자가 범법자로서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법이 살인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형벌인 사형을 자신이 떠맡아야만 한다.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살인자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충족시켜야 한다. 이 예증은 우리로 하여금 대속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죄에 대한 대속에는 항상 양편이 관련된다. 잘못을 당한 쪽과 잘못을 범한 쪽, 즉 잘못을 당한 쪽은 하나님이시고, 죄를 저지른 쪽은 인간이다. 공의는 죄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요구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법과 공의에 의해서 이미 규정된 형벌을 집행하든지, 아니면 피해자 쪽이 자비로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용서가 베풀어지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자가 상대방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대신하여 법이 정하고 있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율법이 정하고 있는 죄의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형벌인 둘째 사망의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당신의 몸으로 당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은 첫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인 둘째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깊은 고뇌를, 일반적인 죽음을 당하는 순교자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이 유황 불 못으로 던져지는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는 무서운 정죄를 경험하셨다. 그분의 예민한 본성은 더러운 강간, 살인, 흉악한 죄들을 대신 지심으로써, 심한 충격과 상처와 수치를 받았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이 멸망받을 자에게 내려지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댓가를 치루시기 위해서, 즉 율법의 두려운 진노가 당신 자신 위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죄 자체가 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는 인류가 쌓아놓은 죄를 당신의 찢어진 가슴으로 지셨다.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한 줄기의 빛도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닿을 수 없었다. 하늘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지시면서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죄인들을 위한 용서를 제공해 주시기 위해서, 죄인들의 죄과를 대신 취하시는 주님의 정신적인 고뇌와, 더 이상의 아무런 소망도 없이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죄인들이 느끼는 고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여야만 하였다. 우리를 법의 정죄 아래에 내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살리시든지, 아니면 당신의 아들을 법의 정죄 아래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분께서는 그밖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늘의 법이 범하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은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변경시키거나 폐지시킴으로써 인류도 구원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죽음의 고통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제공된 용서와 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적은 소수가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므로서 영생에 이를 것을 아셨다. 바로 이러한 진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으셨으며, 당신의 아들이 짓지도 않은 죄의 짐 아래 눌려서 두번째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죽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태양마저 그 무서운 장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워서 칠흙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에워쌌고, 땅도 저항하여 떨었지만, 예수께서는“다 이루었다”라고 크게 외치시며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요 19:3).
7.Somewhere out there....
태양계 너머 저곳에,
지구가 속해 있는 이 우주 저 너머에,
저쪽 별 세계 너머 저편에,
은하수 사이에 펼쳐져 있는 공간 너머,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저 우주 너머 저편, 오리온 성좌 너머 저편에
하늘이라 불리우는 실제의 장소가 있는데,
그곳은 천사들의 삶이 있고,
그들의 희망과 기대가 넘치는 곳입니다.
슬프게도 이 곳 지구의 수십억의 인구들은 그 실제적인 장소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채 땅만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모든 뉴스 미디어들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마치 서울이나 와싱턴 디씨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그 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의 수도인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비하면, 서울이나 와싱턴 디씨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매우 하잘 것 없는 사건들 뒤로, 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무시당한 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전쟁 놀이들 뒤로,
이 우주의 주인을 결정하는 대쟁투가
뉴스에 보도도 되지 않은 채 끝나가고 있습니다.
태양계와 별 세계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대쟁투,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마지막 대쟁투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잠자는 사이에 조용히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인 각 개인의 운명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쟁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전쟁은 누가 하늘의 보좌에 앉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이며, 누가 이 우주를 지배하는 진정한 왕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든지 모르던지 간에,
그리고 우리가 어느 편을 지지하기로 결정하던 간에, 우리 각자는 이 전쟁으로부터 피하여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많은 결정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 우주의 왕으로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모든 생명의 시여자 이신 하나님, 모든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모든 긍정적인 사고와 동정적인 마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기만의 시작이며,
모든 이기심의 원천이고,
모든 파괴의 조종자이며,
모든 부정적 사고와 생각과 감정의 조종자인 사단이 있습니다.
이 두 존재는 그 성품과 행동과 계획에 있어서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의도적인 선택이나 비의도적인 결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거나 사단의 편을 지지하게 됩니다.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스타 워즈 영화에 의하면, 오래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악을 대표하는 세력이 선을 대표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우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스타워즈 영화의 이야기가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주 전쟁의 두 세력은 괴물처럼 생긴 이상한 우주인들이 아니라, 하늘의 왕자 예수 그리스도와 루시퍼라 불리우는 천사장입니다.
우주 전쟁이 시작된지도 벌쩌 수천년이 흘러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6천년의 지구 역사 가운데 전쟁의 자취로 깊게 남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고통과 질병과 상처, 그리고 긴 전쟁으로 인하여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마침내 이 우주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 우주 전쟁의 종결을 가져오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과 이기심, 빛과 어둠,
진리와 오류, 진실과 거짓, 생명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 전쟁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존재하는 선악 간의 대쟁투입니다. 그대는 이 대쟁투에서 누구의 깃발 아래 서기로 선택할 것입니까? 그대는 이 우주 전쟁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칠 것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우주 전쟁에서 부디 살아남게 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59호를 그대에게 바칩니다.
[출처] 제59호-전쟁 중의 전쟁, 우주 전쟁 |작성자 isr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