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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만행은 신마저 망각케 했다"
청문회서 "헬기기총소사목격" 증언 상무대영창 수감돼 갖은 곤횩 치러
수습위 참여 [총기회수] 앞장…내란죄연루 징역3년 선고 최후진술서 "무죄" 주장
항쟁초기 계엄군들의 잔혹한 진압행위를 설명할 때 빠지지않고 거론되는 한 인물이 있다.
현재 봉선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는 조철현 (비오)신부가 그 주인공.
지난 89년 국회 광주특위에서 진행됐던 조신부의 증언녹취록을 인용한다.
▲김광일의원=증인이 그가톨릭센터에서 밑을 내려다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채 묶어서 원산폭격하는 식으로 이렇게 머리와 땅바닥에 닿게하고 이렇게 엎어놓은 것처럼 해놓은 것을 보셨습니까?
▲조비오신부=예.
대로서 무자비한 폭행
▲김광일=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들면 발로 엉덩이를 차거나 또 질질 끄는 형식으로 해서 사람을 개 끌듯이 끌고가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조비오=예.
▲김광일=그런 모습을 보고 증인께서 느낀신 감정, 그걸 무엇으로 펴현했습니까?
▲조비오=제가 그 장면을 보고서 제가 보시다시피 인간구원을 위해서 생을 바치기로 한 성직자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 참경·참상을 보고서는 도저히 제 감정을 컨트롤할만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 인간본성 그대로 내가 아무리 성직자이지만 지금 나에게도 M16이 주어져있다면 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김광일=그것이 그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까?
▲조비오=그렇습니다.
▲김광일=증인은 살인자가 피해 오더라도 보호해 주어야 할 그런 성직자의 입장에서도 그 장면을 보고 내게 총이 있었으면은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단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비오=예.
심지어 가톨릭신부마저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었던 심정이었다]고 술회한 당시의 참상. 조신부의 이같은 [충격적 증언]은 헬기의 기총소사 증언과 함께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후 타지역 주민들이 광주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명언]이 된다.
80년 당시 조신부는 광주시내 계림동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다.
19일 아침 조신부는 일찍부터 수많은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의 절반은 신자들 이었고 절반은 일반시민들이다.
시민들은 [시내에서 군인들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데 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항의를 한다.
신자들로부터는 [군인들이 몽둥이로 젊은이들을 두들겨패고 칼로 찌르는 등 무서운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신부님도 조심하라]는 안부전화도 걸려온다.
그런 말을 들은 조신부는 도저히 집에 앉아있을수만은 없었다.
시내버스안까지 난입
[마침 감기기운이 있었던 터라 항상 약을 구입하던 월산약국으로 갔는데 문이 잠겨있었어요.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쪽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계엄군5,6명이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정차시켜 놓고 버스에 올라가서 젊은 사람들을 끌어내려 발길로 차고 방망이로 때리더군요. ]
공포에 질린 조신부는 차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걸어서 계림동으로 돌아온다.
오후 1시께, 전화가 왔는데 카톨릭센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가톨릭센터로 나갔더니 가톨릭센터 근처에 많은 시민들이 몰려있고 계엄군들이 골목마다 5,6명씩 짝을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어요. 교구청 박상수, 이영수신부님의 말로는 [7층기독교방송국에 파견나와 있던 31사단 군인들을 시민들이 발견하고 포악한 계엄군으로 오인, 가톨릭센터에 난입했다]는 것이었어요. 가톨릭센터 6층에 있던 교구사무실에서 얼마동안 머루르며 창 아래쪽 금남로에서 벌어지는 공수부대원들의 야만적 행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조신부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때가 아마 오전 11시쯤이었을 겁니다. 얼굴과 가슴에 피가 낭자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끌다시피 데려가곤 했어요. 때로는 두사람도 끌고갔고 세사람도 끌고갔습니다. 20∼30명 정도의 젊은이들을 금남로에서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긴 채 보도위에서 원산폭격 (머리를 땅에 댄 채로 두손을 등뒤고 가져가는 군대식 기합)을 시켜놓고 조금만 움직여도 군화발로 차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는 공수부대원들의 날뛰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당시의 다른 목격자들에 따르면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숙녀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길 복판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조신부와 함께 가톨릭센터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대주교는 후일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정황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옆길을 보니까 어떤 젋은이가 두 군인에게 붙들려 수없이 두들겨맞고 있었어요. ] 머리는 무엇으로 찍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피가 낭자했어요. 내가 보기에 그대로 놔두면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쫓아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
그 뒤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왜 내가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을까. 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아프고 또 두고두고 가슴이 메어지게하는 광경이었지요.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무튼 조신부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후 수습위원으로 참여, 시민군들의 설득해 무기를 회수했을 뿐 아니라 시민대표로 계엄분소에 가서 평화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도청내 시민군 지도부 내부의 의견대립을 중재하는 등의 활동도 한다.
이후 광주가 다시 계엄군에 함락당하자 조신부는 [내란중요임무 종사]등의 죄명으로 기소당해 보통군사법정에서 징역7년 구형에 3년을 선고받고 80년 10월30일 형면제로 석방된다.
조신부는 보통군사법정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역사에 남긴다.
[여기있는 법관들의 이름과 피고인 우리들의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될 것이다. 이법정의 재판이 오판이었는지 아닌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무죄다.] (80년 10월23일 오후5시 군법회의)
[저 사람들을 위해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중 나주 노안성당에서 한 한국인신부님을 보게됐습니다. 한국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 저는 불쌍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고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당시의 한국신부는 은퇴한 후 현재 노안 나환자정착촌에 살고있는 김안토니오신부. 조신부는 이후 광주신학대학 철학과 4년을 졸업하고 69년 신부서품을 받는다.
중학생, 계엄군에 희생
75년부터 80년 9월11일까지 광주시내 계림동성당 본당신부로 사목하다 대건신학교 교수와 순천 저전동성당 주임신부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회 시리즈 취재를 위한 조신부와의 인터뷰는 추석 직후인 지난 23일 진행됐다.
성전건립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있는 봉선동성당 사제관과 당시의 현장이었던 가톨릭센터 6층에서 잇따라 진행된 이날 인터뷰말미에 조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한 사람의 시야는 한정된것입니다. 5·18당시 제가 본것도 특정한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그때 신도들과 일반시민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물론 어떤 자리에서도 입밖에 내지 않았어요. 그러나 당시 [중학교 3학년학생이 어머니의 감기약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가다 계엄군의 곤봉에 그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동명동에 사는 한 신자의 증언은 그후 한 기록사진을 통해 확인이 됐습니다. 누가 어떻게 그 사진을 찍었는지… 당시 그 어머님은 [아이고 이놈아 내가 널 죽였구나]라며 통곡을 했다는 군요.]
조신부는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진상규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5.18민주항쟁은 대한민국의 큰변화를 가져온 사역사란걸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