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장비가 태어났던 당시 연나라 / 옛 조선 근역 / 패수(난하) 상류 사수 / 지도
사수대첩 / 고구려의3대첩 중 잘 알려지지 않은 대첩
살수대첩-을지문덕
안시성대첩-양만춘
사수대첩-연개소문
649년,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 당의 내정은 여러움이 많았다. 한편 고구려도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당을 정복하지 못했고 많은 재정을 소진했다. 게다가 장안의 공격과정에서 연개소문은 중병을 입어 철군함으로써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로부터 5년후인 654년,백제의 공격을 받던 신라는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향후,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로부터 1년후 655년 신라의 새로운 왕이 된 김춘추는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보다는 많은 뇌물을 써 고구려 내분을 유도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고구려를 정복한다는 소위 '우회협공' 전략이었다.
6년 후인 660년 여름,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군과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토록 하였는바, 불시에 대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의 의자왕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저번(왜=저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는 당시 연개소문이 병중에 있어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은 장안성 공격때 독화살에 저격된 원인으로 중병상태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인 저번군은 백제성이 함락된 뒤에 도착하여 3일간 전투를 치르다가 돌아갔다고 일본서에 전해진다.
660년 10월, 당군 20만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달랐다. 일주일을 밤낮을 가리지않고 공격했으나 성은 도저히 함락될 것 같지 않았고 660년 12월부터는 큰 눈이 내려 소정방군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되었다, 기진맥진한 당군 소정방의20만군은 살수대첩때 전멸했던 악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급해진 소정방은 이러한 처지를 본국과 동맹국인 신라에 파발말을 보내 급히 지원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의 황제였던 측천무후는, 이번에야 말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별동대 20만을 새로 편성하여 자신의 오른팔인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주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토록 하라"고 명 하였는바, 방효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모두 자결하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13명 모두를 데리고 고구려를 향해 대대적으로 출발하였다.
신라역시 백전노장의 김유신에게 5만의 대병력을 주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명 하였다.
[풍전등화] 고구려는 이대로 멸망하는가 ?
당과 신라에 파견되어있던 밀정으로부터 이러한 소식은 속속 평양성으로 전해졌다. 고구려의 조야에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장칸은 곧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여한 30여명의 대신들중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침묵만 계속 흘렀다.
암울한 영양황제로 인해 이미 국력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버린 고구려는 이미 당나라에 비해 양국간의 국력차이나, 병력차이가 너무 심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병석에있어야 할 연개소문이 무장을 하고 어전회의에 들어왔다. 병색이 완연한 연개소문은 칸에게 절한후,천천히 말했다.... 연개소문은 이 새로운 위기상황에 대하여 작전의 포커스를 지원군인 방효태의 별동대20만에게 맞추었다.
"지금 평양성에 와있는 소정방군은 이미 사기를 잃어 이빨빠진 호랑이 상태이고, 노련한 김유신의 5만지원군은 전선의 상황을 보아 전투에 임할것이므로, 문제는 새로 편성되어 투입되는 방효태의 별동대 20만으로써, 욕망이 높은 방효태는 소정방군과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평양성을 공격,점령하려 할 것이며, 그러기위해서는 가급적 빨리 평양성 동쪽에 도달하기 위해 진로를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잡고 통과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라군은 서라벌을 서둘러출발하기는 했으나 도성을 벗어나자 곧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과 남산에게 각 기병 오천기씩을 주어 한밤중에 소정방군을 좌우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불시에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소정방군은 지리멸렬하여 많은 군수물품을 내버린채 평양성 서북쪽 20리밖으로 후퇴한 후, 지원군인 방효태군 및 신라군을 기다리며, 혹시 또 있을지 모를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경계하는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한편, 구련성(지금의 북중국 러시아지방)의 고선나와 대진성(지금의 만주,연해주지방)의 연정토에게 파발말을 보내 각1만을 인솔하여 사수로 오도록 명하고, 중병중임에도 자신의 아들 모두를 데리고 1만의 정예군을 인솔하여 눈보라를 뚫고, 2일 동안 주야겸행으로 강행군하여 전략지인 패수 상류인 사수에 도착하여 고선나,연정토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대형석거(바위나 큰돌을 쏘아 올리는 기계)를 대규모로 제작하여 사수강 양쪽 10여리에 거쳐 병사들과함께 위장 배치시켜놓고 방효태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사수는 강폭이 비교적 좁고, 때는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설마..."
설마.., 소정방군에게 포위되어있는 평양성의 고구려군이.. 그것도 이렇게 빨리 사수에 도착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효태와 아들13명이 이끄는 별동대 20만은 사수에 다다르자 얼어있는 강을 확인한 후, 12열 횡대(약10리에거쳐 12열의 횡대편제로 구보하는 군의 이동형태)를 갖추어 신속하게 도하하기 시작했다. 방효태군의 상당부분이 강위에 올라서자 연개소문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한놈도 살려두지 말라!"
강 양쪽에서 고구려군의 대형 발석거로부터 커다란 돌들이 비오듯 강을 향해 퍼부어졌다. 바위돌들이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굉음을 내면서 갈라졌고, 방효태군은 강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말그대로 생지옥이요, 아비규환이었다. 요행히 얼음물을 헤엄쳐 나온 당군은 대기해있던 고구려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 본국에서 보낸 지원군 20만이 중간에서 없어졌다 "
공격개시 반나절 후...,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지원군 20만대군은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 20만 지원군이 중간에서 증발하고 만 것이다. 연사에 당시의 현장 기록이 있다. " 당군의 시체가 얼음에 싸여 패수 50여리를 뒤덮었다"
이 전투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 이라고 한다.
병법전문가들은 살수대첩보다 이 사수대첩을 더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는 살수대첩 당시는 수양제가 113만 군을 동원할 정도로 고구려는 강대했고 안정되었으나 사수대첩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절반정도로 줄어있었다. 당시 당이 고구려를 정복코저 동원한 군대는 처음 소정방의 20만이었다가 다시 지원군 방효태의 20만과 신라지원군 5만까지 합해도 20+20+5 = 45만 이었다. 이와같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로써 당과 1:1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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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사수전투를 대승으로 끝낸 연개소문은 여기서 죽는데. 연개소문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할것을 명하고 당시 사수전투에 참여했던 구련성(거련=거란지역)의 왕(자사)인 아우 연정토와 대진성의 왕(자사) 고선나에게 "내 아들들이 부족하다면 그대들이 대막리지를 맡아서라도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고 말하고 아들들을 불러 아버지로 모시는 절을 하게 한 후, 아들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서로 화합하여 나라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대에 반드시 중국을 정복하도록 하라!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이 말을 잊고 중국인들의 이간질에 놀아나 서로 불신하게 된다면 너희들은 물론, 백두제국 고구려의 천년역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라" 하고 말하고는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당시 연개소문의 나이 아직 젊은 41세였다.
한편,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던 소정방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슴에도 보이지도 않고 연락도 없는, 방효태군의 행방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 사수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방효태군 20만 전원이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는... 도저히 믿을수없는 보고를 받았는 바, "앉아있는 상태에서 지휘봉을 떨어트리고 한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 한다. -연사-
충격을 받은 소정방은 뒤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김유신을 만나자, 본국으로의 철수의사를 밝히고 김유신에게 퇴각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수품을 요청하였는바, 이를 조달받자 즉시 철군하기 시작했고, 신라군 역시 소정방군과 동시에 고려땅에서 황급히 떠나갔다.
(자신의 병세가 위중했으나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운명을 눈앞에두고 그대로 죽을수는 없었던 연개소문은 몸소 3만의 대병을 편성하여 사수작전을 직접지휘하는 무리를 범하였다. 대막리지는 유언의 순간에도 전군의 행군을 계속 명 하였는바, 이는 연개소문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후일 소정방은 당시 연개소문이 사수전투를 마친후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아 아.. ! 연개소문이 죽었단 말이 사실인가 다시한번 확인해 보라! 그가 죽은것이 사실이라면 하늘은 우리 당나라를 돕는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자식은 보통 3명으로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4명이었다. -연사-
이 연개소문이 좀더 살아있었다면 중국은 정복당했을 것이라는데 한중사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는데, 그의 죽음은 영류황으로 인해 이미 국운이 기울어있던 고구려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고 보는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연개소문은 이점을 이미 알고 자식들에게 저런 각별한 유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국인(사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외국장군이 연개소문이다. 특히 중국인사학자들은 자신들을 정복했던 돌궐의 태무진이나 려진의 김누얼 보다 연개소문을 더 영웅으로 친다. 이러한 이유를 한 중국사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과 싸웠는데 흠씬 두들겨 맞아 죽을뻔한 경험을 겪은 사람많이 알수 있는 일"
그는 또 "중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병술은 후일 원나라, 금나라에 그대로 전수되어 실전에서 재현되었는데 이것이 중원을 정복하게 된 근본이었다" 돌궐 말갈 흑수말갈등은 한민족이 아닌가? 하자 이런대답을 했다
"周恩來, 周恩來!" (주은래의 비밀: 주은래는 원래 한국인 조상 周씨를 둔 중국 조선족으로써 모택동 정권의 구심점이었던 유명한 중국의 명재상이었는데, 중국사학계가 북중국의 피라밋을 발굴하면서 동북공정을 건의하자 피는 못속인다고 무척 화를내며 "고구려는 명백한 한민족사인데 그런식으로 역사왜곡을 하면 후대에 지탄을 받게될 일이다!" 하면서 당시 불허했던 인물이다. 중국인 학자인 그는 필자의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해 학자이전에 중국인으로써 또 사학자로써의 양심상 그렇게 우회적으로 대답할수밖에 없었던 재미있는 대답으로 기억되어 적어 보았다.
어떻든, 연개소문이 우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써 중국인들의 후손들에게 존경받았슴을 뜻하는 동시에 고구려, 돌궐(몽고), 려진(만주)이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설명,입증하는 증거라 하겠다.
연개소문의 사생활을 기록한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연개소문의 집에서 밥 잘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 "연개소문의 집에 선물을 가져가지 말라 " 이말은 연개소문이 평소 검소하고 청렴하여 집안에 재물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공무에 있어서는 공사를 엄격히 하여 감히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풀이해도 좋을것이다. -102-11-
또 연개소문에 대한 성장기 기록도 있는데 "연개소문은 어려서부터 발음이 또렷하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또 기억력이 좋아 한번들은 말은 잊는 법이 없어 부모도 말조심을 했다", 연개소문이 18세되던 때 스승인 을지문덕 장군이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고 했다" , "연개소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나 그가 인재들을 좋아하고 사람들 또한 그 집안이나 그를 존경하여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로 해석함이 적절할것이다.
연개소문시대 그 대표적 인물로는 양만춘, 추정국,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후일 발해건국) 걸사비우, 고선나(섭나=야율아보기 8대조: 후일 거란건국)등이다.
[보장칸의 연개소문에 대한 신뢰]
연개소문에 의해 칸에 오른 장(보장)은 평소 연개소문을 신뢰해온 황손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어 여기에 몇가지 소개코저 한다. "장은 연개소문을 대막리지에 임명하면서 칸을 내렸는데(여기서 칸이란 황제의 상징인 칼이란 뜻) 칸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전적으로 신임했다란 뜻과 같이라고 할것이다.)
장은 개소문에게 황궁에 들때, 칸을 풀지 말고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래서 개소문은 칸의 앞에 와서야 칸을 풀고 절 한후에 앉았는데 개소문이 죽음을 앞두고 사수전투를 나가기전까지, 이를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당시 황궁내에서 모든 신하는 일체의 무기를 소지할수 없었슴)
칸은 연개소문이 사수전투에서 오는 길에 병사했슴을 통보받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의 편지를 같이 받았다. 이 편지에 " 신이 부덕하여 폐하를 더 보필치 못하게되어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사옵니다. 모쪼록 심기를 더욱 굳건히 하시어 당대에 구려제국의 대업을 꼭 이루시기를 저승에서나마 빌겠사옵니다. -불충자 대막리지 연개소문-",
"칸은 이 편지를 읽고는 즉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영대장 윤정하와 휘하 호위병력 단 20기만 데리고 50리를 마중나가 죽은 연개소문을 맞이하였는데, 가는동안 눈물이 마르질 아니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장이 연개소문을 아버지처럼 크게 믿고 신뢰하였다는 증명임과 동시에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신으로써 그의 황실과 조국 고구려에 대한 깊은 충정심을 잘 엿보게 해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 청 연사110-2 -, - 청연사 109-1,2 123-8,10,12,24, 124-4.6
"연개소문이 말에서 내릴때는 휘하장수를 엎드리게 하여 밟고 말에서 내렸다" 는 등의 속설들이 전해져 오는데 이러한 속설들은 모두 후대에 조직적으로 조작된것으로써 훌륭한 인물을 비하하기위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지어내 유포된 말임이 틀림없다. 역사에 기록으로 볼때 최소한, 연개소문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연개소문집안의 본적은 강화도로써 이곳에는 아직도 연씨 집안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강화도에 여행가는 분들은 이곳에 꼭 들러보기 바란다)
대대로 고구려의 고위관료로 대막리지(총리)를 지낸 고구려의 명문가문으로써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는 할아버지 연자유의 고구려 관직(대막리지)을 물려받았으며 연태조 대막리지가 을지문덕을 발탁하였고 을지문덕을 발탁한 이유로 을지문덕으로부터 연개소문이 병법을 전수받았다고 기록되어있는 고서인 이 "청연사"는 과거 만주족이었던 현 중국인이 소장하던 사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