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작은 나무의 힘| 이상현
터벅터벅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따라갑니다.
손자처럼
지팡이가 할아버지를 따라갑니다.
한 그루, 작은 나무
그 편안하고 든든한 힘.
할아버지 곁을 맴도는
나무 지팡이
여름 한낮, 할아버지에게는
한 그루 큰 나무입니다.
쪽빛 바람이 모이는
시원한 그늘입니다.
<한국동시문학회, 『엄마 몸무게가 또 늘었겠다』, 대교출판, 2009. 2. 15.>
등꽃 | 손월향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
등나무 아래
혼자 서 보자.
등꽃
하나하나에
피어나는 얼굴
또르르 또르르
눈물방울로
떨어져 떨어져 내려
안기우는 얼굴
누군가 못 견디게 부르고 싶을 때
등나무 아래
혼자서
휘파람 불어 보자.
등꽃
하나하나에
켜지는 이름
뽀오얀
가슴밭에
굴렁쇠 되어
또르르
또르르
굴러가는 그 이름.
<손월향 동시집 『미술 시간』, 아동문예, 2004. 3. 15>
이 세상 끄떡없다 | 임길택
나는 텔레비전을 좋아하고
아버지는 담배 피우기를 좋아한다고
어머니는 불을 지피면서도
잔소리를 빠뜨리지 않으시지만
나뭇가지는 날마다 새로운 바람을 맞고
염소는 입 하나로 우리의 손일보다 재빠르고
내 친구 은미는 줄넘기를 잘하고
병인이는 늘 숙제가 밀리고
그래도 이 세상 끄떡없다.
다 다른 마음으로 살아도
이 세상 끄떡없다.
<‘오늘의 동시문학’ 엮음, 『한국 동시 100년에 빛나는 동시 100편』, 예림당, 2008. 12. 10>
한강물 속 그림자 동네 | 한상순
밤이 되면
강물 속에도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지
온종일 비어 있던 아파트도
물속으로 내려와
한 집, 두 집
불을 밝히지
심심하던 송사리 떼
가로등 아래 왁자그르
숨바꼭질 신이 나고
밤잠 안 오는
물새 몇 마리
초인종 눌러대며
아이들 불러낼 궁리를 하지
딩동딩동
초인종 소리에
나만 한 아이
"누구니?" 하고 달캉
현관문을 열어 줄 것 같은
강물 속 아파트 동네
<한상순 동시집『뻥튀기는 속상해』, 푸른책들, 2009. 4. 20.>
꿀벌과 돼지 | 이윤경
돼지야
너도 나처럼 꿀을 좋아하니?
하루 종일 ‘꿀꿀꿀꿀’
나눠 먹고 싶지만
네가 앉으면
꽃들이 다 망가질 거야.
꿀벌아
넌 소화도 안 되는 모양이구나.
하루 종일 ‘붕붕붕붕’
꿀만 많이 먹더니
가는 곳마다
소리 내며 방귀만 뀌니?
<혜암아동문학회, 『풍선껌 씹는 개구리』, 도서출판 그루, 2008.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