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철들다
유형준
먼발치에서도 후배의 안부를 틈틈이 보살펴 주는 선배가 전화를 했다. “손자 봤다며, 축하하네. 그런데 혼자 지낼만해?” 명절 중간에 딸내미의 첫 출산을 돌보러 미국에 가있는 아내의 안부와 함께 물어왔다. “고맙습니다. 지낼만합니다. 밥도 잘 짓고.” 체온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그래, 철 한 번 더 들었군.”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송편은 맛보았는지를 물어본 뒤에 남자 혼자 지내는 생존 비법까지 전수 해주고 나서 통화는 그쳤다.
두 자녀가 출가하여 외국에 사는 까닭에 홀로 생활이 몸설지 않은 그로선 그런 처지를 처음 겪는 후배가 옹골차 보일 리 없었으리라. 전화기를 끊고 나니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철들었다니. 철? 이 나이에 무슨 철이 들었다는 뜻일까. 부쩍부쩍 커가던 어릴 적 듣던 말 아닌가. 추운 겨울밤 ‘호호’ 손으로 구두를 닦아 놓은 다음날 출근하시던 아버지가 머리 쓰다듬으시며 하시던 말, 동네 어른께 공손히 인사드렸을 때 칭찬과 함께 듣던 말. 그 말을 정년퇴직까지 한 이즈음에도 듣다니.
철 따라 밭을 갈고 씨 뿌리고 농기구를 챙기고 거두며 살아가는 농경사회에선 계절의 변화에 대한 넉넉한 지식과 안목이 있어야 나날이 편했다. 여기서 ‘철들다’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현대사회도 다르지 않다. 철 늦은 생각이나 철 지난 기술론 경쟁에서 뒤처지기 십상이다. 물론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져 난처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철마다 잘 지내려면 때맞추어 부지런한 마련이 필요하다. 김장철, 이사철처럼 한 해 중에도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은 때가 있고, 장마철처럼 어떤 현상이 으레 이루어지는 시기가 있다. 과실도 제철 기운이 가득해야 싱싱하고 건강하듯이. 이와 같이 때와 곳을 가려 일의 옳고 그름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을 ‘철’이라 하니 ‘철들었다’는 스스로 사리를 판단하여 할 일을 헤아리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가릴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철들다’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면, 축하와 생존비법과 동시에 전한 그의 ‘철들었군.’은 첫 손자를 얻어 생명 연속의 순리와 관심을 기쁘고 생생하게, 그것도 명절 중에 최초의 독거생활을 조금의 굴먹함도 없이 헤쳐 가며 한껏 느끼는 기쁨을 칭찬하는 말일게다.
“쉼 없이 생기고 생김이 하늘의 이치거늘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도다. 선조의 영혼들이 지하에서 많이 도와주셔서 앞으로 세상일이 더 잘 될 거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에 네가 커 감을 지켜보리라.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생겨 나 혼자 술 따라 마시며 경축하노라. 초 8일에 쓰다.” 「양아록(養兒錄)」
초산이어서 꼬박 하루 내내 산고를 견뎌낸 딸아이의 순산 소식에 밀려 솟치는 기쁨이 어찌 이문건의 감격을 앞서지 못하랴. 조선 중종에서 명종 시대 사화에 휘말려 몰락한 이문건이 쉰여덟 살이 되던 해 정월 초닷새, 손자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감격을 적었다.
자식을 낳고 키워 봐야만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부모의 처지가 되어 보아야만 비로소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첫 손자 보는 일이 감동과 왜 동의어인가? 어째서 할아버지가 되어야만 관심이 가는 또 다른 세상사가 보이는가? 세상에는 노력, 지식, 금전 등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알 수 없는 게 있다. 그래서 눈귀 동냥으로 받아들인 철보다 몸소 겪어 깨달아 들이는 철이 훨씬 더 절절하다.
계절이 낙엽을 떼어내며 비우는 하늘을 찬바람이 채우고 있다. 가을과 겨울 사이. 가을이 자리를 비워주니 겨울이 오는 걸까.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는 걸까. 매년 반복되는 환절이라지만 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간 삶 동안에 거쳐 온 가을들과 겨울들은 아니니 반복이란 표현은 온전히 정확하진 않다. 그래서인지 지난해에 겪었던 철들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오가는 철의 속내를 알아차릴 궁리가 서지 앉는다. 다만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이 궁리 끝에 생각해내어 쓰고 있는 대로 그 속내를‘섭리’, 자연의 섭리라 생각할 뿐이다. 계절의 변화를 알고 뿌리고 가꾸고 걷고 갈무리하는 철들임을 깨우치는 자연의 섭리. 손자의 탄생이 깨우쳐주고 철을 들여 놓아주는 그 속내평.
마침 휴대전화 사진이 바다 건너 먼 거리를 달려 올라오고 있다. 손자를 가슴에 꼭 안은 아내 양옆에 딸 부부가 서있는 실시간 모습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몇 번이나 더 철들임이 있을까. 철 모자란 채 나이든 철부지들이 적지 않은 세상에 자칫 철이 들지 않고 더 늙어갈 뻔했는데. 한 번이라도 더 철들게 해준 배냇저고리 입은 손자의 모습이 그저 앙증스레 고맙다. 철맞게 손자 농사 잘 지어준 딸 부부도 사진 속에 철 가득히 들어 있다.
≪에세이 문학≫ 2019 겨울호.
*약력: 수필가. 1992년(《문학예술》), 『가라앉지 못한 말들』, 『두근거리는 지금』, 『늙음 오디세이아』 , 시인(필명 유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