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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병사
중앙군의 구성
고려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분된다. 중앙군은 2군 6위로 구성되었다. 2군은 국왕의 친위부대인 용양군, 용호군으로 구성되었고, 6위는 전투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홍위위와, 경찰부대인 금오위, 왕의 의장대인 천우위, 경비부대인 김문위로 구성되었다. 용양군, 용호군과 굼오위, 천우위, 김문위는 전업군인으로 구성된 반면에 좌우위, 신호위, 홍위위는 농민군으로 구성되었다. 전업군인은 군인전을 받았고, 농민군을 부역의 일환으로 근무했기에 토지를 받지는 않았따. 대신 근무를 하는 동안 양호(養戶)라고 불리는 사람을 붙여 그 가족을 생계를 돕게 하였다.
지방군의 구성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으로 구분되었다. 주현군은 전투부대인 보승군, 정용군과 노동부대인 일품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이 상비군이라면 노동부대이면서 예비군 성격의 이품군, 삼품군도 있었다. 이들 중에 보승군, 정용군은 전쟁 시에 전투에 동원되었고 평시에는 지역의 치안 유지와 변방의 수비를 맡았으며,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양계의 주진군은 이 지역이 국경인 관계로 지역 주민은 기본적으로 주진군의 군인이 되었다. 주진군은 핵심부대인 초군, 좌군, 우군과 보창군, 영세군 등의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 중에 초군, 좌군, 우군에는 기병 부대와 쇠뇌[노(擄)]부대가 일부 속해 있는 정예부대였고, 보창군과 영세군은 보병부대였다. 이들 외에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를 경작하는 백정군 등의 예비군도 있었다. 주진군의 임무는 전쟁 시에 전투에 참여하는 것과 국경 수비였다. 한편 양계에는 주진군 외에 중앙군과 주현군 중에 교대로 수자리를 오는 방수군도 있었다.
신기군
마군과 보군
고려의 군대의 병종(兵種)에는 기병 부대인 마군(馬軍)과 보병부대인 보군(步軍)이 있었다.
마군의 와해
숙종이 여진을 정벌할 무렵에는 이러한 기병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면서 군대에서 이탈하는 군인이 많아지면서 미군이 제대로 구성되지 못한 ?문이었다.
기병부대, 신기군
이후 고려는 보병이 중심인데 여진의 기병이 강성하여 고려군이 패전했다는 윤관의 분석이 있었기 ?문에 고려군은 기병을 강화하였고, 여진을 정벌하기 위하여 편성한 별무반에 소속된 기병부대가 바로 신기군이었다.
이렇게 설립된 신기군은 국가에서 말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각자 준비해야 했으므로, 그럴만한 재정적 능력이 되는 계층에서 선발하였다.
기병의 역할
전투에서 기병의 역할은 매우 컸다. 강감찬이 기병 1만 2천명을 산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강을 막고 기다리다가 거란군이 이르자 막았던 것을 트고 그들을 수장(水漿)시키고 복병을 출동하여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는 것은...more
신보군
우리는 보병이로소이다
궁궐문을 수비하거나 국왕의 친위부대 그리고 노동부대와 같은 특수 목적의 부대를 제외한 일반적인 전투부대의 군인 중에 보병을 말한다.
보병의 역할과 근무환경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투에 참여하였고,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거나, 국가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기들은 무기, 의복을 스스로 부담했으며, 식량만 지급받았다.
복무기간
군인의 복무기간은 16세에서 59세까지였다.
1인2역
이들은 기본적으로 농민군으로서 3년에 한 번씩 개경에 올라가 군역을 지거나 국경에서 수비를 담당하면 되었따. 그래서 1년 복무하고 2년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근무하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374&mode=content&query=%C1%D6%C1%F8%B1%BA&dircode=0
2.향교의 유래
<유래>
향교는 인재를 양성하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전국의 각 주, 부, 군, 현 마다 설립했던 관학을 의미한다. 향교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설립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고려 시대인 1127년(인종 5년)에 각 주에 학교의 설립을 명하고 있어 고려 중기에는 향교가 설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후 어느 정도 발전을 보이다가 고려 말기에 이르러 병란과 각종 내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쇠퇴하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0629&mode=title&query=%C7%E2%B1%B3&dircode=0
3.소격서
조선시대 도교의 재초(齋醮)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이다. 하늘, 땅, 별 등에 제사하는 기관으로서, 조선초기에는 유지되었으나 유교가 국시(國是)인 관계로 선조대에 와서 폐지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7032&mode=title&query=%BC%D2%B0%DD%BC%AD&dircode=0
4.월정사
위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번지 오대산 동쪽 계곡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는 당나라로 들어간 자장율사가 기도하던 중 신라 땅의 오대산이 문수보살이 머물러 계신다는 꿈 속의 계시를 듣고 귀국하여 터를 잡아 643년(선덕여왕 12)에 세우게 되었다. 그 뒤 수다사(水多寺: 지금의 명주군 낙가사)의 장로 유연(有緣)스님이 암자를 다시 짓고 머무르면서 절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다.
1377년(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而一) 스님이 중창하였고 1833년(순조 33)에 다시 불타버리자 1844(헌종 10)에 영담 정암(淨庵) 스님 등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해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한 10여동의 건물이 완전히 소각되었고, 이때에 1949년 발굴된 신라시대의 범종이 불타 버렸다. 폐허가 된 월정사는 1964년 탄허스님이 법당인 적광전을 중건한 이래 꾸준히 불사를 계속하여 오늘날의 월정사로 복원시켜 놓았으며 현 주지인 정념스님이 웰빙명상수행단지등 자연과 건강을 지향하는 현대인의 의식수준에 맞추어 새로운 수행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유물로는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 국보 제221호 상원사 목조문수좌상, 국보292호 제 140호 상원사 중창권선문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월정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울창한 전나무 숲을 활용한 1000년의 숲길 걷기대회 ,단기출가 등을 통하여 현대인과 함게 호흡하는 공간으로 현대인에게 인기가 높은 21세기형 웰빙 사찰이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5738&mode=title&query=%BF%F9%C1%A4%BB%E7+&dircode=0
5.왕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나, 임금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화랑세기』 24세 천광공 조에 천광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에게 전해주고 오로지 왕사에 힘써 출장입상하여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온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7896&mode=title&query=%BF%D5%BB%E7&dircode=0
6.김윤후
고려 후기에 용인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격파한 승장.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병이 침입하므로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용인)으로 피난하였다. 12월 중순 살리타(撒禮塔)의 몽고 주력부대가 수원의 속읍인 처인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당시 처인성에는 주변의 주민들이 고려군과 함께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김윤후는 몽고군을 진두 지휘하는 살리타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처인성의 고려 군민은 지휘관의 전사로 전의를 상실한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생포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에 임명되고, 뒤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그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주성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관노의 부적을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이 되었고, 그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고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6058&mode=title&query=%B1%E8%C0%B1%C8%C4&dircode=0
7.거란과 사대의관계
당이 멸망한 뒤(907) 중국은 5대 10국(五代十國)이 난립하는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중원의 분열을 틈타 흥기한 북방의 거란(契丹)족은 북방민족에 의한 최초의 정복국가를 건설하였다. 요의 태종 야율덕광은 중원 침략의 첫 단계로 후당을 위협하고 절도사 석경당(石敬入)을 후원하여 후진을 세우게 하였고, 그 대가로 연운 16주를 받았다. 요는 성종(成宗) 대(983-1031)에 이르러 대내적인 안정을 이루고 고려와 여진(女眞)에 대해 강경책을 쓰기 시작하여 고려 성종(成宗) 2년 10월에 소포녕(簫浦寧) 등으로 하여금 고려 토벌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요의 성종(成宗)은 고려 침략을 결정하고 8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의 지휘로 보주를 지나 침략하였다. 고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요는 화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고려의 강동 6주(江東六州)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고려는 요의 연호를 쓰고 조공(朝貢)을 바치는 등 사대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당시 동아시아는 고려, 송(宋), 거란(契丹), 서하(西夏) 등 여러 국가가 치열하게 전쟁과 연합을 거듭하면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는 국초부터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송을 압박하고 있던 요의 입장에서는 고려와 송과의 제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지역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요(遼)와의 친교관계를 맺어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190&mode=title&query=%BB%E7%B4%EB&dircode=0
8.고종
1192년(명종22)~1259년(고종46)
고려 23대 왕(재위 1213~1259). 이름은 철(?), 초명은 진(瞋), 질(?), 자는 대명(大命), (天祐)이다. 강종의 맏아들, 어머니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의 소생이며.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고종19년 사망)이다.
고종은 1192년(명종22) 22대 강종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강종의 장남이라 하니, 태자로서 이미 국왕의 지위가 태어나면서부터 약속받은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사정은 이와 퍽 달랐다. 어린 시절 그는 강화도로 내쳐진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에서 살았으며 정치적 상황에 의한 생명의 위협이 도사린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가 태자의 지명을 받은 것은 아버지 왕오(강종)가 뜻하지 않게 왕위에 즉위한 1212년의 일이었으니, 21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아버지 강종의 죽음으로 바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22대 강종은 19대 명종(재위 1170~1197)의 장남이었다. 국왕의 장남이었음에도 곧바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2대를 거른 후에 즉위한 것을 보면 당시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 왕철의 조부 명종이 왕위에 즉위한 1170년은 무신난의 정치적 쿠데타가 일어나 이른바 100년 무신정권의 막이 올랐던 때이다. 이 쿠데타에 의하여 당시 국왕과 의종과 효령(孝靈)태자는 축출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이에 대신하여 의종의 친동생을 왕위에 세웠는데, 그가 고종의 조부가 되는 명종이다. 1197년 최충헌에 의한 명종의 폐위에 의하여 강화도로 내쳐진 태자 도가 바로 고종의 아버지인 강종이다.
1211년(신종7) 12월 돌연한 사건이 궁궐에서 발생하였다. 신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최충헌은 신종을 왕위에서 내쳐 강화도 쫓아내버렸다. 그리고 그에 대신하여 강화도에 내보냈던 명종의 아들 도를 다시 불러들여 즉각 왕위에 올렸다. 그가 강종이다. 신종의 최충헌 제거 기도라는 돌연한 사건에 의해 신종이 내쫓기면서, 고종의 아버지 왕도는 돌연 국왕에 오르게 되고, 이에 의하여 고종 역시 태자로 지명되고, 이듬해 강종이 사망하자 고종 왕철이 국왕의 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대략 20세 때의 일이다.
고종은 대몽항쟁기라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최씨정권과의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무려 46년을 재위하고,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고종의 이 같은 ‘능력’은 성장기 그가 겪었던 13세기 초반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체득한 것이었다. 그의 생존 비결은 절대 권력에 대한 순응, 현실과 운명에의 순응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수하는 것, 그는 그 선을 철저하게 지켰고, 그것이 그의 생존의 비결이었다고 할 것이다.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 년 간에 걸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 왔다.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골과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골군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 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골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 뒤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희종의 딸인 안혜왕후 유씨에게서 제24대 왕 원종과 안경공 창, 수흥궁주 등 2남1녀를 얻었다. 고종의 능은 홍릉(洪陵)이며 강화군 국수리의 고려산 중턱에 남아 있다.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이 증시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6535&mode=content&query=%B8%ED%C1%BE&dircode=0
9.나말여초 선종의 대두
선종(禪宗) 대두의 배경
*사회적으로는 통일신라사회의 모순의 격화 : 전장 발달, 왕위계승전, 농민 유망
*사상적으로 화엄종 중심의 교종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저항 : 이전 불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극복과 반성. 교종의 논리는 출가승(出家僧) 중심
선종(禪宗) 승려의 신분과 그 후원자
6두품 이하의 승려가 주류이고 후원자는 역시 같은 신분층의 호족이었다.
선종(禪宗)의 교리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자상승(師資相承) 즉 면수(面授)를 통한 법통의 계승을 중시함으로 같은 선종(禪宗) 안에서도 각파의 분파성이 보다 강하였다. 나말여초 선종(禪宗)의 분파는 무수히 많으나, 왕건이 통일 이후 대표적인 것을 9산선문으로 정리하였다.
왕건 태조(太祖)의 불교관
훈요십조(訓要十條) 의 제 1조에 우리의 국가 대업(大業)은 반드시 제불(諸佛)의 호위(護衛)하는 힘에 도움받은 것이다. 실제로 통일과정에서 승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361&mode=title&query=%B3%AA%B8%BB+%BF%A9%C3%CA&dircode=0
10.공복을 입은 공민왕
고려시대의 왕복은 제복, 조복, 공복, 상복, 평상복으로 구별되었다. 제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구성되며 하늘, 땅, 조상, 농신에 제사할 때 착용하였으며 조복은 왕이 백관과 사민을 접견할 때 착용하였다. 상복은 왕의 사무복인데 담황색의 소매통이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라(紫色羅)로 한 늑건을 띠었다. 평상복은 서민과 똑같이 백저포를 입었는데 남녀상하가 모두 입었던 옷이다.
고려시대 왕의 공복(公服)은 왕이 사신을 접견할 때 착용하던 복장이다. 자색 공복에 옥대(玉帶)를 띠고 상홀(象笏)을 들었다. 서울 종묘의 공민왕 사당에 있는 공민왕상을 보면 복두를 쓰고 둥근 깃에 소매가 매우 넓으며 옷깃과 수구에는 짙은색 선이 둘러져 있는 단령포를 착용한 채 홀을 들고 앉아있는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송나라풍의 복장이라 할 수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제 31대 왕으로서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숙위(宿衛)를 위해 원나라에 가서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몽골식이름이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고 전해진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1년) 변발, 호복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에는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에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을 폐지하고, 신돈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에만 전심하였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작품에 <천산대렵도>, <노국대장공주진> 등이 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364&mode=content&query=%C3%B5%BB%EA%B4%EB%B7%C6%B5%B5&dircode=0
소감:고려 사전 만들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 많습니다.이 프로젝트를하면서 힘들었던점은 주말의 마지막인 일요일에 하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이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단어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래도 검색을 해보면 이미 한 단어들이 많았던게 가장 힘들었습니다.미루지 말고 일찍했었더라면 시간이 적게걸렸을거라는게 아쉽긴 하지만 대신 다른아이들 보다 더 많은 단어를 찾을수 있었다 생각합니다.언제나 수업 열심히하는 송영심선생님 존경합니다 중복되는단어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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