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두려움이 분노로 또 좌절로 번져갈 때의 고통은 암세포가 온 몸을 휘감는 그것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아픔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때,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희망임을 기도할 때, 비로소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새로운 시작임을 깨닫게 된다.
11월 위령성월, 「이미 정해진」 죽음을 편안하고 존엄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안식처」 호스피스 병동을 찾았다. 병동에서의 짧은 하루였지만 이곳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 자원봉사자, 간호사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모으는 작은 공동체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 폐와 뇌까지 전이된 암세포
경기도 부천 성가병원 3층 호스피스 병동의 한 병실. 한 자원봉사자가 곽차복(아네스.42)씨의 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레지오 단원이셨군요. 4간부 중 서기가 제일 힘든 일인데요. 빨리 나아서 다시 활동해야지요』
『단원들에게 이야기 안했어요. 괜히 이런 모습 보이기도 싫고. 이제 조용히 보내고 싶어요』
자원봉사자와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곽씨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지난 96년 유방암 판정을 받은 곽씨는 암세포가 이미 폐와 뇌까지 전이돼 거동도 힘든 상태다. 묵주기도를 채 3단도 못한 채 숨이 가빠온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 문항박(빈첸시오)씨가 보기 안쓰러운지 병실을 나선다.
『집사람은 호스피스 교육도 받고 병원 자원봉사활동도 준비하던 차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다며 병원에서 퇴원을 권유하더군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아내가 이곳에 오기를 원했습니다』
언제 갑작스런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주치의의 말에 이제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인 두 아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곳이 아내가 지나온 삶을 정리하는 자리였으면 한다고 문씨는 말한다.
■ 가족과 함께 울어준 간호사
부천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김현수(50)씨는 장모의 삼우제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호스피스 병동을 찾았다. 지난 10월 17일 임종한 장모가 꼭 병실에 누워있는 것 같아 병실을 기웃거리길 서너 번.
『이곳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장모의 상태가 위독할 때 아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더군요. 간호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전하려고 찾았습니다』
위암 말기였던 장모를 병동에 모셨을 때 「죽음을 기다린다」는 말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잠도 못 이루던 장모가 가족들과 편안히 대화하고 평화롭게 임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가족들은 임종이 가까워 오면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 머문 지난 한달 동안 의사 선생님, 간호사, 자원봉사자들 모두 편히 대해 주셔서 우리 장모님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신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 성가병원 호스피스 병동
지난 95년 개원한 성가병원 호스피스 병동은 병상 수 총 11개의 작은 규모지만 그 동안 말기 암 환자들의 통증완화와 임종을 돕는 공간으로 꾸준히 활동해 왔다. 또한 통증조절을 위한 「아로마테라피」 요법과 환자와 가족간 대화를 돕는 「조각 맞추기」 프로그램은 성가병원 호스피스 병동만의 특징으로 환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 수녀, 간호사, 자원봉사자 등 병동의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적 고통의 완화와 조절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 마사지 해주고, 머리 감겨 주는 일은 봉사의 일부분입니다. 절망에 빠진 환자들에게 남은 삶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의 참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원봉사자 박계화(데레사.51), 장태희(마리안나.50)씨는 임종실인 「요셉의 방」에서 「사--랑--한--다」고 되 내이며 기도 속에 눈을 감는 환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지만 이들의 죽음을 볼 때마다 새삼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한번 더 기도실을 찾는다.
■병동을 거쳐가는 삽화들
3개월 전 사별한 아내의 체취라도 남아 있을까 술에 취해 병실을 찾는 남편,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딸의 모습을 보겠다고 끝까지 가는 숨을 놓지 않고 버티던 한 환자, 남편이 떠난 자리를 채우겠다며 자원봉사 조끼를 입은 아내의 모습, 임종이 임박한 옆 환자를 위해 기도를 바치며 눈물까지 흘리더니 결국은 그 이튿날 하느님 곁으로 먼저 간 한 신자의 모습들,….
주일 오후, 호스피스 병동을 거쳐가는 삽화들에서 죽은 이들이 남겨놓은 삶을 묵상하는 산 이들의 숭고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