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계몽운동] 및 [의병]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뒤에 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하얼빈역(哈尔滨站)Haerbin station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면서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된곳 .인구900만에 달하는 하얼빈은 중국의 최북단 헤이룽장성의 성도이자 동북지역의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동북3성에서 가장큰도시다.중국같지않은 하얼빈이라는 도시명은 '그물을 말리는곳'을 뜻하는 만주어에서 비롯됐다한다.
110년 전만해도 쑹화강변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하얼빈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세기 말 러시아가 청으로 부터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중동철도(中东铁道)를 건설하면서 부터다.이후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쫓겨온 왕당파들이 하얼빈에 머물며 대도시로 급성장한다.오늘날 하얼빈에서 볼수있는 러시아식 건물과 문화는 바로 이때만들어진것이다.
조린공원(兆麟公园)
항일 운동가 이조린(李兆麟)을 기념하기위해 만든공원 , 유명한 하얼빈 빙등제의 무대이기도하다.
중앙대가(中央大街)러시아와 인접한 하얼빈 한때 제정 러시아 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풍 의 건물을
많이 찾아볼수있다. Haerbin was a colony of czarist Russia so that you can easily find Russian style architecture.
중앙대가는 다오리취(道里区)에 있는 하얼빈 최대의 번화가이자 보행자천국 ,스탈린공원에서 신양광장에 이르는 1km 구간을 말한다.
매년 겨울철에 한달간 열리는 빙등제(冰灯节)와 빙설제(冰雪节) 때문에 눈과 얼음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빙등제와 빙설제가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동북최고의 볼거리로 자리매김하며 '관광도시 하얼빈'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sopia sanctuary) 圣素菲亚教堂
초록색의 돔과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성당 .1907년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 건립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32년에 재건되었다.높이53미터 ,총면적 721제곱미터에달해 동시에 2000명이 미사를 드릴수 있는 규모라한다.
하얼빈 빙등제 (哈尔滨 冰灯节)
매년 1월 열리는 빙등제는 전 세계에서 모인 얼음조각가들의향연으로 최근에는 국내에도 널리알려져있다.
얼음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저녁에 펼쳐진다.화려한 조명을 받은 조형물과 폭죽까지 터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posted by kj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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