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의 거장 겸재가 76세 때인 1751년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국보 216호로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인왕(仁王)은 서울 인왕산을 말하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한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겸재는 진한 수묵으로 그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굵고 검은 선, 짙은색의 주조, 강렬한 농담의 대조, 그리고 물결치듯 굽이치는 산봉우리와 계곡, 안개 자욱한 화풍의 역동성은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강희언의 ‘인왕산도’를 낳게 했고, 현대에 이르러 이이남의 영상작품 ‘인왕제색도’ 등 한국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미술혼이 꿈틀대는 곳이 서울 부암동 인왕산 자락이다.
<국민일보 이광형 선임기자>
인왕산의 숨결, 겸재의 자취를 찾아서(1)
우리 고유의 산수를 그려보고자 우리 산천을 직접 찾아 나섰던 조선 후기의 대화가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라는 독창적 화풍을 형성하면서 우리 화단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물론 그의 화법은 문인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관념산수의 한계를 뛰어넘는 크나큰 업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몇 차례 인왕산 그림여행을 하면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대해 소개를 한 바 있으나, 인왕산 아래 겸재가 살았던 지역에 대해서는 다시금 관찰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는데, 바로 정수진 선생님의 <겸재 산수세계 체험을 위한 환경조성계획 - 종로구 청운동 일대를 중심으로>라는 석사학위논문이 그 발단이 되었다. 정수진 선생님은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연구과정에 있으며, 또한 나와는 서예와 수묵화를 함께 공부하고 있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던 편이다. 이런 인연덕에 요즘 인왕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나에게 선뜻 자신의 논문을 제공해 주었다.
정수진 선생님의 논문 <겸재 산수세계 체험을 위한 환경조성계획>
정수진 선생님의 논문은 막연히 겸재 정선의 흔적을 쫓는 것에만 국한되지않고 지역 문화사업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적 연구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특히 청운동이라는 특정지역을 대상으로 구체적 환경 조성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뚜렷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또한 청운동을 대상지로 선정한 이유로 '청운동의 장소성', '청운동의 역사성', '청운동의 연계성'을 거론하며, 겸재 정선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향유할 수 있는 실제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이 논문의 발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10여년 전인 1999년 2월이다보니 최근 인왕산 일대의 복원 및 개발 과정이 반영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지만 겸재의 작품을 중심으로 소재가 되었던 장소를 체험할 수 있는 방식과 그 루트를 직접적으로 제시한 점은 나의 작품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
논문에 거론된 겸재의 작품들은 <인곡정사>, <인왕제색>, <장안연우>, <청풍계>, <청송당>, <창의문> 등이 있으며, 이 그림들의 관찰 장소를 직접 탐방하는 체험코스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중 작품 <인왕제색>의 경우, 논문에서는 인왕산 관찰 위치로 청운중학교 정문을 꼽고 있는데, 이곳은 실제 풍경을 볼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지역을 선정한 결과이긴하지만 겸재 그림의 일부라는 점에서 2차, 3차 관찰 장소를 포함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논문에서 제시한 청운중학교에서 바라본 인왕산 풍경은 <인왕제색도>를 절반으로 갈라 우측면에 해당되는 구도와 너무도 닮아있다. 친구 이병연의 가옥을 중심으로 울창한 소나무를 배치한 지역과 그 위로 펼쳐진 인왕산의 준(峻)을 표현한 각도와 구성이 상당수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좌측의 인왕산 정상을 능선과 연결하여 표현한 인왕제색도와는 달리 실제 청운중학교에서 바라본 풍경은 인왕산 정상이 능선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인왕산을 대표할만한 정상의 널찍한 바위 표현에 있어서 그 준의 방향이 다르고, 아래에서도 계곡과 구릉지역의 표현 방향이 달라짐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인왕제색도>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정상 좌우측으로 흐르는 인왕천과 만수천은 청운중학교 정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곳들은 아직도 약수터로 존재하고 있으며, 하류 수성동계곡의 원천(源泉)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인왕제색도>가 한 지점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인왕산의 특색을 잘 나타내는 여러 지점의 시점에서 관찰한 결과물이라 지적하는 이가 제법 있는 편이다. 이러한 관찰 방식은 겸재만의 독특한 시방식(視方式)이 아니고 동양의 전통적 시방식인 이동시점(移動視點)과 다시점(多視點)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두고 서양의 관찰 방식인 원근법을 중시한 고정시점(固定視點)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은 모순을 안고 출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물론 동양의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과 같은 삼원법(三遠法)의 산수화 표현 방식이 존재하지만 실내 정물 등의 그림에서는 원근법과 대비되는 역원근법도 사용되었고, 또한 거리와는 상관없는 관찰 대상 중심의 시방식이 사용되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의 '관찰(觀察)'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서양과 동양의 시각차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대상에 대한 관찰은 이미 '나(我)'라고 하는 1인칭 관찰자가 등장하지만 동양에서는 '나'라는 존재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리기에 3인칭 시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서술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산수화에 점경인물(點景人物)로 그려 넣는 것인데, 과거에는 이러한 시방식이 너무도 보편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 동양적 시각 방식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방식의 다양성을 감안하여 창작과 감상에 일정부분 반영될 수 있도록 염두해 두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출처] 인왕산의 숨결, 겸재의 자취를 찾아서(1) : 인왕제색도 관찰방식|작성자 김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