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st planting zone in the world.
― Original area in the Korea for growth zone of the Dendropanax morbifera Nakai.
黃漆硏究家 鄭淳泰
歷史로 본 黃漆
1)史記 : B.C 2700
① 中國 漢나라의 司馬遷이 적은 역사책. 黃帝로 前漢의 武帝까지의 역대왕조의 史籍을 紀傳體로 기술한 것임. 史書 및 문학적 가치로 높이 평가되어 中國 正史와 기전체의 시초로 일컬어짐.
② 五帝 : ․中國 古代 시대의 다섯 성군.
- 伏羲, 神農, 黃帝, 堯, 舜
․민속에서 오방(五方)을 맡은 다섯 神
동쪽-靑帝
서쪽-白帝
남쪽-赤帝
북쪽-黑帝
중앙-黃帝
③三皇 : ․中國 上古시대의 세 임금
伏羲 : 三皇중 한 임금. 백성에게 처음으로 고기잡이, 사냥, 목축등 을 가르치고 八卦(주역의 근본)와 文字를 만들었다고 함
神農 : 中國上古 시대 三皇의 한 분. 농사를 가르침. 경제, 의학, 음악, 점서 등의 祖神임. 炎帝
黃帝 : 古帝의 이름. 少典의 아들. 성은 公孫. 幹轅의 언덕에서 출생 하였다 하여 幹轅氏 라고도 함. 복희씨, 신농씨와 더불어 삼 황이라 일컬어짐. 기원전 2700년경에 천하를 통일하여 문자, 수레, 배, 등을 만들고 度量衡, 藥法, 曆法, 音樂, 蠶業등 많은 문물과 제도를 확립함. 제위 백년에 崩함.
④黃精草 : 黃帝問天老曰, “天地所生, 豈有食之令人不死者乎?” 天老曰, “太陽之草, 名曰黃精, 餌而食之, 可以長生, 太陰之草, 名曰鉤吻, 不可食, 入口立死, 人信鉤吻之殺人, 不信黃精之益壽, 不亦惑乎?
황제가 신하인 천노에게 물었다. 하늘과 땅이 자라게 해준 식물 가운데서, 그걸 먹어서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설마 있겠소?
천노가 말했다. 태양의 풀, 즉 양기가 극히 많은 풀을 이름하여 황정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길이길이 살수 있습니다. 태음의 풀, 즉, 음기가 극히 많은 풀을 이름하여 구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을수 없는데, 입에 들어가면 즉시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들은 구문초가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황정초가 수명을 늘려 준다는 것을 믿지 않으니, 이 또한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⑤黃 : ․中央土色 - 누를 황(君子黃中通理)
․倉 - 급히 서두를 황
․耆 - 늙은이 황
․小兒之稱 - 어린이 황
⑥사기에 초대 황제의 칭호를 黃帝라 함.
․黃漆 - 황칠의 근본을 동양적 사고로 이해 가능함
- 太陽
- 陽明
- 생명의 중심, 태어남과 죽음
- 흙의 근본
2)周書 : B.C 1200
①周易 - 주나라 문왕과 주공, 공자에 의하여 대성된 역학 또는 그 책
- 筮儀․黃漆板,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周易의 筮儀를 서술함.
②孔子 - 韋編三絶,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서 책의 가죽줄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에서 따옴.(B.C 552-479, 공자)
③黃漆과 周易 - 황칠의 기능, 정신세계와의 밀접한 관계
3)新唐書 : 618-907년
①新唐書 - 有三島 生黃漆 六月刺取 藩色若金
백제에 세 섬이 있다. 황칠이 나온다. 6월에 상처를 내면 금과 같
은 액이 나온다.
②通典 - 國 西 南 海 中 有 三 島, 出 黃 漆 樹 ,似 小 ? 樹 而 大 . 六 月 取 汁 . 漆 器 物 若 黃 金 ,
백제 서남해안에 세 섬이 있다. 나무에서 황칠이 나온다. 종수는 작
으나 큰 편이다. 6월에 칠을 딴다. 칠을 하면 황금색이 난다.
③冊府元鬼 - 당나라 태종은 백제 의자왕 9년에 사신을 보내서 백제에서 채취
한 금칠인 황칠을 수입하여 이를 철갑에 칠하였던바 모두 황자 색을 띄고 있으며 햇빛에 비치면 금색이 찬란, 또한 오채와 양현 금으로 삼문갑을 만들었다. 산문갑은 오채와 현금을 가지고 단청을 그린 후 그위에 황칠을함.
④高麗圖經 - 황칠이 나주의 조공품
⑤海東繹史 - 중국 황칠의 기록들을 모은 책
⑥林園經濟誌 - 안식향
⑦鷄林類事 - ‘절강성 사람들은 신라금칠이라고 부른다’
4)長保皐 대사 : 840년
신라의 무장. 일명 궁복, 궁파. 일찍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 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 (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저략적 거 점을 마련. 청해진 대사가 되고나서는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함. 937년(희강왕3)년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이 됨. 840년(문성왕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함. 845년(문성왕7) 딸을 왕의 차비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 로 좌절. 846년(문성왕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 長)에게 살해 됨.
절강성 영파사지 기록 : 주 교역품 - 신라황칠
弓福山 滿山黃
5)黃金部隊 ; 黃金宮殿 ; 黃金血統 : 黃漆 :1227
①칭키스칸 승천
오르도스 유역에서 운구행렬은 진흙 속에 빠지다.
“여기 이땅이 따스하여 여기 이땅에 당신의 죽인 적들이 그리도 많이 묻혀있기에 당신은 당신의 옛 부족을 잊으셨습니까? 당신의 오르도(ORDO) 당신의 황금 천막과 당신의 왕관, 훌륭한 민족, 당신의 영주들과 귀족들, 이 모두가 당신이 태어난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옥처럼 귀한 당신에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려 합니다. 당신의 부인, 버르테에게 보이고 당신의 민족 모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②칭키스칸오르도 : 1196 톨라강변
전투중에 타타르의 지도자 메구진을 죽였다. 족장의 천막에서는 황금 저울과 자수로 장식된 이불이 발견되었다. 중국인들에게서 약탈한 물건들 이었다. 칭키스칸은 이 진귀한 물건들을 자신의 본영 오르도로 보냈다.
③칭키스칸 오르도 : 1226
1225년 초엽, 이 지배자는 다시 몽골로 돌아왔다. 그는 톨라강변 의 자신 의 오르도에서 새로운 규정돠 법을 발표했다. “자만심에 가득차 제멋대 로 황제(KHAN)의 권위를 해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등의 관용과 용서없이 처형되어야 한다.”
④바트칸오르도 : 1243년 볼라강변-칭키스 손자
불라디미르의 대영주 야로슬라프 브제볼로도비치가 러시아의 절망적인 굴복의 첫 장을 열었다. 그는 바트칸의 오르도에 나타나 ‘지를리크(칸의 서신)을 받아들였다.
⑤바트칸오르도 : 1246
새로이 러시아의 영주들 중 한 사람인 미하일이 왔을대 그는 칭키스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우리는 물론 몽골인들이 자기들의 첫 번째 황제를 숭배해야될 우상으로 만드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들은 그 우상을 오르도 앞에 있는 마차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바쳤다.
⑥황금천막, 궁전
○ GOLDEN HORDE = 킵착한국
○ ALTAN ORDO = 金帳
○ YEKE ORDO = 대오르도
○ JOCHI ORDO = 칭키스 조카
○ SIRA ORDO
○ ZOLOTAYA ORDO
6)高麗史 (北譯) : 1271년
#高麗史27卷-世家27-元宗3-12-64-1271
乙卯蒙古遣必闍赤黑狗李樞等七人來索宮室之材又以省旨求金漆靑藤 八郞虫 榧木奴台木烏梅華梨藤席等物. 王報中書省曰: “今奉省旨云: ‘王國未平聖慮憐憫今歲朝幣不須進奉所用金漆良多今遣必闍赤往取.’ 竊念小邦所貯金漆就陸時散盡且其所産南方海島比爲逆賊往來之所當 更乘*閒往取奉獻先將所有十缸以進其瀝汁之匠當就産地徵來起遣又 黑狗口宣榧木土人謂之白木問其産地於樞則云昇天府之今要島也其靑 藤八郞虫亦出於此又於珍島南海等處皆産焉其榧實桐栢實亦産此地距 王京千餘里難以立致樞不自往見而返玆與達魯花赤並差人視其 有無待還具奏先以收取色狀榧木若*千{干}片奉獻八郞虫則樞初言産於 喬桐郡今使人往取則無有也又云: ‘出於今要島.’ 當復遣人就審其奴台 木海竹冬栢竹簟輒隨所有以進烏梅華梨藤席元非所産昔於西宋商舶得 之粗有若干並此進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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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궁실을 지을 재목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또 중서성의 지시 로 금칠, 비자나무, 노태목, 오매등의 물품들을 요구하였다. 왕이 중 서성에 회보하기를 우리나라가 저축하였던 금칠을 육지에 나올 때 모두 잃어버렸는데 그 산지는남해 바다의 섬들이다. 그런데 요사이 역적들이 왕래하는 곳으로 되었으니 앞으로 틈을 보아서 가져다가 보내겠다.
지금 가지고 있는 열항아리를 먼저 보낸다. 그 역즙 만드는 장인은 금 칠이 산출되는 지방에서 징발하여 보내겠다.
․삼별초 : 고려 무신정권때의 특수부대
①夜別抄 : 1219(고종6)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방도등 치안 유지를 해 조직한 선발대
②삼별초 : 야별초 군대의 증가로 좌별초, 우별초로 나눔. 몽골병과 싸움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神義軍을 조직, 통합.
③삼별초의 난 : 강화도의 삼별초가 몽골 세력에 반항하여 일으킨 싸움(1270-1273)
④開京環都 - 出陸問題
최씨 일파의 무인정권(武人政權)이 무너지자, 강화도의 고려조정에 서는 출륙문제, 즉 개경환도 문제가 제기 되었는데, 원종(元宗)을 중심으로한 문신들은 대개 출륙을 찬성하고, 삼별초에 속한 무신 들은 출륙은 곧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 그러나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하고 환도기일을 공고하기 에 이르자 삼별초의 태도는 더욱 경화됨. 당시 원종은 몽골에 들 어갔다가 나오는 중이었는데, 삼별초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 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 지 못함. 1270년(원종11)5월27일 원종이 개경에 귀환했을 때 비빈 과 조정의 백관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왕을 맞이하여 출륙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자 고려조정에서는 출륙환도에 불응하는 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그 해 5월29일 장 군 김지저(金之底)를 강화도에 파송하여 이를 통고하는 동시에 삼 별초의 명부를 압수.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겨져 자신 들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6월1일 반란을 일으킴. 반란군의 지 휘자 배중손(裵仲孫)은 왕족인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은 후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연안 경비를 철 저히 함.
⑤海上王國
도내(島內)의 인심은 동요되고 , 문무관 중에서 강화도를 탈출하 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배중손은 1000여척의 배에 공사(公私)재 물과 도내의 자녀들을 싣고 전라도 진도(珍島)에 들어가 그곳을 대몽항쟁(對蒙抗爭)의 근거지로 삼음.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 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巨濟)․탐라(耽羅)등의 30여 도서를 지배하 여 하나의 해상왕국을 이루었으나 김방경(金方慶)등이 거느린 고 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꺽임. 이렇게 되자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 대몽항전을 계속함. 이에 고려 조정에 서는 여러 가지로 회유액을 썻으나 삼별초가 끝까지 이에 불응하 므로, 1273년(원종14)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공격으로 삼 별초는 패망.
7)紫禁城 : 1420년
①太和殿 : 태화전은 황제가 등극하고 조서를 반포하고 대권을 거행하 는 장소이다. 궁전 안에는 6개의 용이 새겨지고 금박이 입 혀진 기둥이 있고 천장 중앙에는 몸을 도사린 용과 금봉황 이 새겨져 있으며 헌원보경도 드리워져 있다. 중앙평대 위 에는 학, 향로 등이 진열되있다.
②皇帝寶座
․明朝制作, 金漆九龍, 座后是雕龍, 髹金屛風
③中和殿 : 황금색의 유리기와와 사각형의 전당 네모서리에는 금으로
된 뾰족한 보탑이 있다. 궁정 안에는 보좌가 설치되어 있고 황제가 태화전에 가기전 잠시 휴식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서 내각과 예복 및 신하들의 조배를 받거나 상주문을 열람 하기도 하였다.
④乾淸宮 : 명조와 청조 초기에는 황제의 침궁이었고 그후에는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기도하고 관리와 외국사신을 접견 하기도 한 곳이다.
⑤金殿 : 건청궁 앞에 있고 금박이 동으로 제조 되었는데 이는 ‘국토의 강산’ 과 국가를 상징하는 곳이다.
⑥交泰殿 : 장방형의 네 모서리에 뾰쪽한 금탑이 있는 궁전으로 청조때 황후 를 책봉하거나 생일 잔치를 치르는 등의 의식을 모두 이곳에서 거 행하였다.
⑦交泰殿內 : 보좌가 설치되고 여기에 25개의 보석으로 된 청조 황제의 옥새가 보관된다.
⑧양성전 문앞에 서있는 한쌍의 금박이 붙혀진 동사자
⑨물동이 : 건청궁의 양측에 늘어서 있는데 하나하나의 무게가 2톤, 금박이 200 냥이다. 철로 만든 물동이가 300여개가 있고 물을 담아 화재를 방 지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현재 물동이의 금박은 청 말기에 8국 연합군이 모두 긁어갔다.(미확인)
⑩천일문앞 금이 입혀진 동 해태상은 용의 머리, 사자의 꼬리, 용의 발을 가진 짐승으로 중국 고대전설 중의 신령스런 짐승으로 정의를 수호하고 영명한 황제를 상징한다.
⑪養心殿 : 청조때 황제가 여기에서 정무를 처리하기도 하고 대신을 접견하기 도 했었다. 中正仁和가 쓰여져 있는 현판은 옹제제를 위해 쓴 제사 이고 궁정 가운데는 황제의 보좌이다.
*우아한 궁전
*첩첩한 누각
*백옥난간
*황색기와
*붉은 성벽
금빛 찬란한 자금성. 1961년 세계중점문물 보호대상에 들어가게 되었고 1987년 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목록’에 올려 놓았다. 그 내용이 휘황하고 장려한 고대황궁 ‘자금성’ . 백제의 황칠이 빛나고 있다.
8)黃漆의 絶種 : 1607년
․황칠이 황금 솟듯 했단 말 들었지만 불시에 다 캐내어 지금은 절종이 라니
․삼별초. 1270년
․자금성. 1420
․임진왜란. 1600년
採參行
李春元 作 趙圭瑢 譯
대관령 동서(東西)로 천만 갈래 뻗은 산
영근(靈根) 선초(仙草)가 그 사이에 자라네
사람의 얼굴 닮고 더러는 양의 뿔 같은데
상품(上品) 좋은 것은 자단(紫團)이라 하네
이것을 캐내어 금비약(金匕藥)을 만들면
죽을 사람 살리는데 더 좋은 것 없다네
세 가장이에 잔뿌리 없는 것은 중국으로 팔려가는데
다투어 천금(千金)내고 값은 묻지도 않는다네
개성(開城)의 부상(富商) 서울의 장사꾼들은
관로(關路)에 헤아릴 수 없이 줄을 이어 오가는데
세마(細馬)에 경장(輕裝)하고 화살같이 찾아
바위 틈에 소 잡고 산호(山戶)를 반긴다네
손에 쥔 해당 관서 황지첩(黃紙帖)들이
어지럽게 뜰에 가득 단풍잎 쌓이듯 한다니
한번 열린 이원(利源)은 금지하기 어렵고
게다가 조사(詔使) 영접에 적당하다네
음삼(陰森)한 피나무 천겹 우거진 대관령
삼척(三尺)의 보습에 백목(白木) 자루 맞춰들면
가벼운 몸은 호표(虎豹)인듯 험한 곳 마다 않아
가끔은 낭떠러지 다니다 귀한 목숨 잃는다네
몰래 다니다가 막상 관리에게 알려지면
풀속으로 숨기를 놀란 사슴 같이 하는데도
광우리채 털고도 구멍찾아 쳐들어가
처자(妻子)를 구속하고 모진 매질한다네
요즘 식량 남고 교화(敎化)를 펴는데도
공산(空山) 벼랑속에서는 서글픈 바람이 부네
목민관(牧民官)의 위세 더욱 혹독한데
차마 병약한 그들을 위협토록 할수야
옛날엔 행여 전거골(專車骨) 얻었는데
오늘날 캐는 거란 머리털 같다네
지력(地力)도 다되고 인력(人力)도 다해
산신(山神)도 밤에 울고 자신도 노한다네
황칠(黃漆)이 황금 솟듯 했단 말 들었지만
불시에 다 캐내어 지금은 절종(絶種)이라니
이 물건도 얼마 남지 않았다면
종래로 보물이란 늘 쓰기 어려운 것
화수(禍首)인 신농씨(神農氏) 온갖 풀 맛봐
남의 집 부자(父子) 온전치 못하게 하니
아니 이 산 옮겨 바다를 메운다면
망망한 넓은 상전(桑田)을 일굴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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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원:
함평이씨.1571년(선조4)-1632년(인조2).
임진왜란이 일어난후 동래지방은 15년 동안 17명의 수령과 2인의 판관이 교체되어 평균재임기간이 1년도 못되는 형편이었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로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했던 동래가 평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이춘원 부사 시절부터다. 이 부사는 1607넌,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1608년, 2월까지 동래 부산의 곳곳을 답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본 것을 시로 적어 文風을 일으키다.
9)茶山과 黃漆의 復活 : 1800년
① 長鬐農歌 (제 4장)
新吐南瓜兩葉肥 夜來抽蔓絡柴扉
平生不種西瓜子 剛怕官奴惹是非
새로심은 호박에 떡잎나서 살찌더니
밤사이 덩굴뻗어 사립문에 얽혔어라
평생에 안 심을 건 맛 좋은 수박이라
관노들 몰려와서 시비걸까 걱정이네
*관노 : 지방관아에 소속된 노복들
*맛좋은 수박 : 黃漆
② 耽津村謠 (제 2수)
山茶接葉冷童童 雪裏花開鶴頂紅
一自甲寅鹽雨後 朱欒黃盡?枯叢
동백나무 잎사귀 싸늘하고 따박한데
눈속에 핀 꽃이 학 이마처럼 붉구나
갑인년 어느날 소금비 내린뒤로
등자나무 유자나무 모조리 말랐다네
*갑인년 : 연천 암행어사 시절-1794
*소금비 : 황칠 동백등 고사의 필연적 관계
③ 耽津村謠 (제 8수)
莞洲黃漆瀅琉璃 天下皆聞此樹奇
聖旨前年蠲貢額 春風곤柿又生枝
완주산 황칠은 빛나기가 유리같아
이 나무 진기하다 천하에 소문났네
지난해 임금께서 황칠공납 풀어준뒤
베어낸 밑둥치에서 새싹나고 가지 뻗네
*황칠 공납 면제-1800년
*천하에 소문났네
그대 아니 보았더냐 궁복산 가득한 황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받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정도
상자에 칠을하면 검붉은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나무 어찌 이와 견줄소냐
서예가의 경황지 이로하여 더 좋으니
납지,양각 모두 무색하여 물러나네
이 나무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서
박물지에 왕왕이 그 이름 올려있네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으로 옮기는데
서리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 악목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지난 봄 조정에서 공납면제 해준 후로
영릉의 석종유 신기하게 다시 나네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나고
나뭇가지 무성하여 푸른 하늘에 어울리네
*공납을 둘러싼 지방관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황칠, 유자, 귤등 산물이 생산된 지방의 백성들은 유자나무등에 구멍을 뚫고 호초를 넣어 말라 죽게 하기도 하고 밤 늦게 나무를 도끼로 베어버리기도 했다는 기록.
*黃漆나무=惡木
*황칠의 맥이 끊긴 현실을 찾아보는 대목이다.
10)黃漆의 親庭回復의 기회 : 1894년(고종31년)
開國五百三年十二月日 本島三邑各果園所在黃漆木株數成冊
濟州牧
各果園前裁植 黃漆木五十二萬五十五株內
枯損木十一萬一百六十三株除
時在木四十萬九千八百九十二株
加生木十一萬六十三株
大靜縣
各果園前裁植黃漆木三百九十六株內
枯損木一百三十三株
時在木二百六十三株
加生木一百八十三株
旌義縣
各果園前裁植黃漆木三百九十六株內
枯損木一百一株除
時在木二百九十五珠
加生木一百一株
濟州牧使
*1894년(고종31)12월 현재 제주도 3읍(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각 과원에 있는 황칠목에 대한 주수현황을 제주목에서 기록한 책이다. 황칠목 총 보유량은 50만주를 상회하고 있다.
*1894년에 시행된 황칠 조림을 살펴볼수 있는 문서
結論 : 2002년
역사로 본 黃漆은 21세기 한국 농민에게 몇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문제 1. 中國
①송대 의학자들의 양명학 속의 황칠은 무엇이었을까?
②천하통일의 위인 칭키스칸의 황금 부대의 정체는?
③황제들만의 전유물이 된 까닭은?
④21세기 중국 부유층이 황칠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까닭은?
문제 2. 日本
①九州中央山地國定公園내 照葉樹林文化館에 黃漆木이 없는 까닭은?
②임진왜란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③1878년 일본판화가 전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미친 까닭은?
④한국 유일의 황칠기록인 의방유취는 지금 어디에?
<빈센트 반 고흐 - 내영혼의 자서전>
뿐만 아니라 그는 저와 같이 다니면서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은 화풍이었습니다. 마침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선보인 일본 목판화와 장식 미술품들은 파리는 물론 전 유럽의 미술사진과 유럽인들의 일상 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략- 초기 인상파 화가들이 게이샤, 장식적 그림의 병풍, 목판화들을 소재로한 그림을 앞다투어 그렸고 특히 위슬러, 모네, 르누아르 등 많은 화가들은 기모노를 입힌 모델을 앉혀놓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문제 3. 韓國
①황칠은 왜 한반도 서남해안을 택하였나?
②漸移地帶
③潮境線
④背反事件(exclusive events)
⑤黃海
⑥티벳風下
첫댓글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