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淸安)이란 지명은 현재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지명으로
청당과 도안의 양현(兩縣)을 합한 이름이다.이 지방은 원래 고구려
영토 였으나 신라 경덕왕때는 도서현,고려 초에는 도안현,조선조
태종 5년에는 청안현,고종32년에 군으로 승격,1914년 왜정때 서면은
청주에,나머지는 괴산에 합해졌다.
이씨(李氏)는 전주 이씨를 비롯하여 경주,여주,등 허다한명문
거족이 있으나, 특별히 청안 이씨를 소개 하는대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안 이씨는 명문거족은 아니라 할지라도 깨끗한 씨족이고, 진실로
충과 효를 지키는 가문으로 알려진 때문이다.
대부분의 명문 대가는 우선 압도적으로 씨족의 인구수가 많다는
것이고,인구수에 비례하여 고관대작,학자,예술가,장군,충신,열사등,,,
내세울 만한 인물이 많은 반면에,크게 부끄러운 인물도 상대적으로
많다.
또한 명문거족 일수록 자손이 많다는 것은 세도가의 일부다처
풍속에서 그 이유를 우선 찾을수 있으며, 또한 왜(倭)의 식민통치
초기에 호적법이 생기고 난후, 그때까지 족보에 이름이 없었던 많은
상민이나 노비 등이 호적을 처음 만들때, 쉽게 알기 쉬운 본관명으로
임의 신고한 것에도 기인 한다고 생각된다.
예로서 김씨는 안동 또는,김해로,,,이씨는 전주 또는 경주로,,,
박씨는 밀양,,, 등으로, 호적에 올린 것이다.
청안 이씨는 현재 10.000여명의 씨족으로 영남 파조와 호남
파조가 있으나, 대부분이 경상북도(경주문화권)에 살고 있다.
충과 효를 기본으로 여기는 유림(儒林)사회 에서는 한마디로
청안인을 께끗하고,충의를 지키는 집으로 대접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적(國亂克服史的)측면에서 고찰하여 보면
더욱 확실하다. 청안 이씨는 고려 광종(949-975)때, 이학년(李學年)이
예부상서를 지내고 청안군에 봉해진 것이 씨족사의 시작이다.
그의 14세손으로,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홍건적을 격파한
공으로 청안군에 봉해진 이한번(李漢蕃) 이후에, 관향을 청안으로
삼았다.이한번(李漢藩)은 광경(光慶),항상(恒相) 두아들을 두었고,
광경은 조선 태종14년(1414년)에 전라. 충청병마절도사에 이어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항상(恒相)의 아들은 양길(陽吉)이라는 분이다.
양길은 예빈사동정(禮賓寺同正)으로 직간(直諫)하다가 제주
판관으로 좌천
되어 갔는데, 공민왕 5년(1356년) 탐라에 설치되어 있던 몽고의
총관부가을적홀고탁(加乙赤忽古托)이 반란을 이르키자 진압중
순절 하여,왕은 그를 청안군에 봉하고 충원(忠元)공이라 했다.
선조 25년(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때, 양길의 7대손으로,
이응춘(應春:병조판서 추증), 우춘(遇春), 봉춘(逢春) 삼형제와
응춘의 아들인 승금(承金:승정원 좌승지 추증), 조카인 팽수(彭壽:
병조참판 추증), 눌(訥:)등은 왜적이 동래에 상륙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향리(경주,안강,산대리)에서 문중의 전장정 25명과 노비를
이끌고 울산(반구정)으로 달려가, 청안이씨 문중 기치를 걸고 특수
전투단를 편성하여 싸웠고,그후 경주성과, 울산성을 탈환 하는데
선봉을 담당 하였다.
의병장 이응춘의 부대는, 근친 일족과 그들의 노비만으로
편성한 문중 단위의 특수 전투단이라,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전투력으로 100여회의 대소 전투에 참가 하였다.
1594년 음10월 5일 의병장 이응춘은 울산양포(兩浦:개운포와
서생포)전투에서 근친인 다섯집 장정과 함께 장열히 전사 하였다.
이 전투에서 2명만이 살아 향리로 귀향 하였다.
고향 사람들이 시체더미 속에서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입었던 옷으로 향리에서 장사 지냈다.
이때 전사한 이팽수(두촌공:杜村公)의 아들은 아직 강보에 있는
어린아이로 후일 병자호란(1636년)때 경기도 용인부근 금천전투에서
전사 하였으니 참으로 존경받을 충의의 가문이라 할수 있다.
우리 역사를 도리켜 보면 외침에 대항한 전쟁의 역사이며,
그때에 빛나는 공을 세워 역사에 기록되고 그 명예와 부를 대대로
누리는 집이 있는가 하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와 국민을 살리고도
아무런 불평없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숭상하고 충과 효를 근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임란시의 기록을 더듬어 볼때면 참으로 한심 하다 중앙정부와
관군은 도주하여도, 평소에 정부로부터 핍박만 받던 민초들은 일어
섰다.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요구 한일도 할줄도 몰랐다.
호남의 고제봉 삼부자와,영남의 홍의장군 곽재우 같은 집안이야
처음부터 잘 알려진 문중이었지만,청안 이씨 처럼 작은 문중에서
일족이 모두 거병하여 최후까지 항전, 부자형제숙질 등 근친 13명이
모두 전사한 기록은 아직 청안 이씨 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 역사를 통하여 가장 부끄럽고 처절했던 임란과 정유재란,그리고
고려때로 거슬러 올라가 38년간의 대몽항쟁 기간에 나타난 민초들의
끈질긴 저항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청안 이씨들의 항쟁사는 그들 13인의 의사가 순절한 이후 무려
187년의 세월이 흘러간 정조 7년(1783년)에 와서, 경주 유림의 상주에
의하여 비로서 세상에 그 미거가 밝혀지고, 늦게나마 임금은 눈물 흘리고
제문을 내려 충신들의 넋을 달랬다. 이게 바로 역사 바로 세우기다.
*13명의 의사들에게 각각 내린 조정의 재문은 다 소개 할수 없어
그중에 필자가 가장 마음에 드는 제문 한편(두촌공 이팽수)만을 골라 적어본다.
이 초혼사는 3장으로 되었으나 제1장만 소개한다.
원문은 어려운 한자가 많아 국역한 것으로 대치 하오니 양해를 구합니다.
초 혼 사(招魂辭)
울주(울산과 경주)의 산이여! 가파르기 칼날같고,
울주의 물이여! 뜨겁기 열탕 같도다.
서생포의 동쪽 바다는 미친듯 파도 날뛰고,
그 가운데 큰 물고기 있어 사람을 물어 죽이나니,
고래는 삼키고 상어는 횡횡 하는도다.
고래와 상어를 쏘아 창자를 도려내지 못한채,
내 활은 꺽어지고 전통은 비었도다.
---------------------------------------------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아득 하여라!
바람 쓸쓸이 불고 빗소리도 신음 하는데,
외로운 귀신 상(傷)한 영혼이여!
돌아 오소서 계림인(鷄林人:경주인)이여!
이 당신을 위한 유택(幽宅) 규수비(圭首碑) 서 있는, │
마렵봉 무덤으로,,,
날 받아 제향 받드니 제물도 향기 롭도다.
-------------------------------------------
정조7년 (1783년) 좌승지 이 헌 경 지음
1998년 1월 13일 씀 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