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强顔男子]
사업(事業) 확장(擴張) 1
조철봉이 서울을 떠난 것은 이틀 후였으니 전세현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갑자기 칭다오에서 김성산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칭다오의 로얄호텔 라운지에서 김성산과 만났을 때는 오후 3시였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인데다 시간이 한시간 빠른 지역이어서 언제나 서쪽으로 날아올 때는 제자리 걸음을 한 기분이 든다.
라운지의 커피숍에는 김성산과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철봉과 최갑중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김성산은 그들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북한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의 경제담당 비서 김기복이라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조직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조철봉이 눈만 껌벅이자 성산이 설명했다.
“비서국은 당의 모든 부서를 지도, 감독하는 기관이고 각 분야에 책임 비서가 있소. 김기복 비서는 경제사업에 대한 책임자로 직접 지도자 동지의 지시를 받는 분이시오.”
“아, 그러십니까?”
조철봉이 다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곧 성산을 향해 묻는듯한 시선을 주었다. 아직 성산으로부터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산과의 합작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일은 없다. 그때 김기복이 입을 열었다.
“조 선생은 아주 유능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조철봉이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슬슬 불편해졌다.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김기복은 피부가 매끈했고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셔츠와 넥타이는 파리의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다. 조철봉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성산이 끼어들었다.
“조 사장, 좋은 일이니까 마음 편하게 들으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때 김기복이 안경테를 손끝으로 올리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조 선생, 연태에 있는 공장을 증설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조철봉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부도난 공장을 인수했던 연태의 공장은 이제 5천명의 근로자가 연간 1억불의 제품을 수출하는 우량기업이 되었고 곧 생산시설을 2배로 증설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인수한지 1년반 만에 이룬 성과였는데 그 원인은 간단했다. 조철봉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영자는 물론 한국인 간부사원 전원에게 성과급 제도를 적용해서 내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성공했다. 그러고는 자금만 댄 것이다. 김기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 선생, 북한에다 공장을 증설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적극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김기복의 말투에 열기가 섞였다.
“평양 외곽의 공단부지를 무상으로 드리고 건물도 지어 드리지요. 원부자재, 기계 통관은 당연히 무료이며 송금 규제도 없습니다. 전기료, 세금도 가동후 5년간 무료이며 5년 후부터는 한국과 비교해서 30프로만 받겠습니다. 기타 사항도 북한 정부가 보장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해 드리지요.”
놀란 조철봉이 시선을 돌려 성산을 보았다. 그러자 성산이 빙그레 웃었다.
“조 사장이 시범 케이스로 선정이 되신 것이오. 영광으로 생각하시오.”
“그렇습니까?”
아직 얼떨떨한 조철봉이 옆에 앉은 최갑중을 보았다. 대단한 특전이긴 했다.
최갑중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크게 뜨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김기복에게 물었다.
“저만 선정된 것입니까?”
“10여개 업체가 일차로 선정되었는데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기복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직 거절한 업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승낙을 했지요.”
“그렇습니까?”
조철봉의 시선이 이제는 김성산에게로 옮아갔다. 김성산은 자신에게 해로울 일을 권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며칠만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조철봉이 말하자 기복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해 드릴테니까 회사측에서 보면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기복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철봉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김성산 동지를 통해 연락을 주시오.”
“예, 비서님.”
인사를 마친 김기복이 바쁜듯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라운지 입구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온 김성산이 다시 자리에 앉더니 차분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번 평양외곽 공단의 입주업체는 모두 엄격하게 선정된 것이오. 섬유류로는 오성산업이 유일합니다.”
동방산업을 인수하여 다시 오성산업으로 회사명을 바꾼 것이다. 목소리를 낮춘 김성산이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가 조 사장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겁니다. 추진하시오.”
보통 때와는 다르게 김성산이 정중하게 권했고 이윽고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 투자 열풍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지만 차츰 후유증도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좋은 조건이건 간에 한 번 투자를 해놓고 나면 이미 발을 적신 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맑은 물이건 오물이건 간에 같이 뒹굴어야 되며 그때서야 현실이 제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좋습니다. 하지요.”
결심한 듯 분명하게 말한 조철봉이 정색한 얼굴로 김성산을 보았다.
“마침 연태 공장을 두 배로 증설하기로 했으니 그 시설만큼 평양에 투자하기로 하지요. 하지만.”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기계 도입에 북한 정부에서 보증을 서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성산이 조철봉을 보았다.
“건의해보지요.”
그렇게 되면 이쪽은 오더만 쥐고 들어가 모든 것을 얻어내는 셈이었다. 공장부지에다 건물, 전기공급과 세금면제, 거기에다 생산시설 도입에도 북한정부의 보증을 받으면 외상으로 들여올 수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서울에 연락해서 사업팀을 불러들이고 연태의 김 사장하고 공장장, 관리부장한테도 연락을 해.”
“예, 사장님.”
긴장한 최갑중이 기운차게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갑중이 라운지를 나갔을 때 성산이 말했다.
“조 사장은 우리 북조선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가로 인정받고 있소.”
“모두 김 사장님 덕분입니다.”
“우리 둘이 서로 필요한 때 만난 것이지.”
“한국에서는 운이 맞았다고 합니다.”
“난 조 사장에 대해서 잘 압니다.”
김성산이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빙긋 웃었다.
“물론 조 사장도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말이요.”
*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간 한국 기업체의 절반만 북한 땅으로 옮겨 갔다고 해도 북한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른바 시너지 효과라는 것도 있다. 남북한이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나갔다면 중국이 20년 걸려서 이룩한 경제수준을 북한은 5년쯤에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조철봉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조철봉은 모른다. 10여년 전 대학 동기들이 민주화 투쟁으로 갖은 고생을 할 적에도 조철봉은 남의 일처럼 방관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죄지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동차 영업사원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금을 대한민국에 유통 시켰으며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데 몇백만 분의 일의 공헌을 했다. 그래서 경제활동은 눈곱만큼도 안한 민주화투쟁 동지들의 의식주 공급에 일조했다는 것까지는 안다.
지금 굶주리고 있다면 부처님이 정권을 잡고 있다고 해도 다시 반정부투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최갑중은 하루 만에 서울에서 프로젝트팀을 불러들였는데 이미 중국과 베트남에까지 해외사업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 터라 모두 노련했다. 외주팀이었지만 철저한 프로페셔널들인 것이다.
조철봉이 투자팀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사흘후였다. 투자 승낙을 하고나서 협상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이다.
평양시 서쪽의 공단부지까지 둘러본 조철봉이 일행과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방에서 쉴 때였다. 문의 벨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문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구요?”
“예, 안내원입니다.”
문을 열자 안내원 김종안이 서 있었다.
김종안은 30대 중반으로 용모가 수려했고 경제지식도 해박했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했는데 비서국에서 근무한다니 최고급 안내원일 것이다. 방으로 들어선 김종안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저녁에 비서동지께서 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지요.”
조철봉이 선선히 대답하자 김종안은 한걸음 더 다가섰다.
“조 사장님 혼자 가시는 겁니다. 제가 여섯 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예, 초대소에.”
“알겠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공단에 20개 라인이 들어가는 대규모의 공장을 가동시키기로 북한 당국과 합의했는데 근로자는 6천명이 되었다.
그리고 조철봉이 요구한대로 생산시설 일체는 북한 정부의 보증으로 한국의 공장에서 들여오기로 합의를 한데다 기숙사비까지 보조를 받게 되었다. 프로젝트팀이 가능한 한 최대로 유리하게 협상을 한 것인데 실제로 이쪽에서 내놓은 것은 오더뿐일 정도였다. 중국보다 월등하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긴장한 표정으로 김종안이 조철봉을 보았다. 김종안이 맨 넥타이는 프랑스제 유명 상표였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종안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때 위원장 동지께서 참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위원장이라면.”
되묻던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진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죄를 많이 지은 작자는 대개 이런 경우에 어지러운 법이다.
“그 양반이, 아니. 위원장께서 왜?”
김종안이 국방위원장의 흉중을 알리가 있겠는가?
*
방을 나갔던 김종안은 6시 정각에 다시 나타났고 호텔 정문 앞에 대기시킨 검정색 벤츠에 조철봉을 태우더니 평양시내를 달려 초대소에 도착했다.
거리의 교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30분 가깝게 달린터라 꽤 멀리 왔다고 느껴졌을 때 강가의 대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담장이 높아서 안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넓은 잔디밭과 서너 동의 건물이 사방에 켜진 보안등 빛에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조철봉이 안내된 곳은 중앙 건물의 아래층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에는 이미 10여명의 손님이 모여 있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무거운 분위기였다. 조심스러운 분위기라고해도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여어, 조 사장님. 이쪽으로.”
안내원 김종안은 응접실입구에서 돌아간터라 혼자 주춤대며 들어선 조철봉을 김기복이 맞았다. 김기복이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리 오시지요. 식당으로 가기 전에 손님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조철봉은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을 소개받았는데 한국에서 온 대기업 경영자가 세 명이었고 나머지는 북한 고위층이었다. 소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옆쪽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에는 커다란 원탁에 이미 갖가지 음식이 놓여 있었고 각자의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지금 위원장동지께서 오십니다.”
문 옆쪽에 선 사내가 낮게 말했으므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렸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들어섰다. TV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지만 웃음 띤 얼굴이었다.
“자, 앉읍시다.”
위원장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조철봉은 참았던 숨을 소리죽여 내뿜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한국의 장관은커녕 무슨 부의 국장하고도 마주앉아 본적이 없는 조철봉이다. 그런데 오늘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한 테이블에서, 그것도 두 사람 건넌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산해진미가 눈앞에 놓여 있었지만 제대로 보일 리가 없고 입맛이 일어날 리도 없다. 그저 건성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시늉을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위원장은 옆에 앉은 한국의 대동건설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밝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차츰 긴장이 풀린 조철봉이 눈앞의 요리를 훑어보았을 때였다.
“거기, 조철봉 사장.”
위원장의 목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예, 위원장님.”
몸을 굳힌 조철봉이 대답하자 위원장은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조 사장은 놀새라고 들었는데, 놀새가 무슨 말인지 아시오?”
“예, 압니다.”
“그럼 말해보시오.”
위원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짙어졌고 주위의 사내들도 싱글거렸다. 조철봉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북한과의 교류가 많아진 덕분에 TV에서 들은 것이다.
“예, 바람둥이입니다.”
“뭐? 바람둥이?”
되물은 위원장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고 주위에서도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위원장이 머리를 젓고 말했다.
“바람둥이라는 뜻도 조금 있겠지만 남조선의 말로 바꾸면 한량이나 건달, 또는 멋쟁이라는 뜻도 포함되었을 거요.”
조철봉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듯 덧붙여준 위원장이 갑자기 풀썩 웃었다.
“조 사장이 진짜 바람둥이인 모양이군. 그래, 난 멋쟁이로 알았는데.”
조철봉도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두에서 무슨 운동을 이끌었고 매스컴을 많이 탔다고 말없이 호응해준 대중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 대해서 조철봉은 어떤 구체적 제재 수단을 구상한 적도 없었지만 어느 날 보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만일 조철봉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열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받들어 모시는 인민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조철봉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최상이라고 배워왔다. 세뇌되었다고 해도 좋다. 군사독재 정권과 민주화 투쟁 기간을 겪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기본은 확실하게 물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반대 체제의 최고 지도자가 바로 1미터 옆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분위기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되었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내가 그대에게 인간적으로 호의를 느끼고 있으니 나한테 충성하라고 한다면 거부할 확률은 1%도 안 되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할지는 모르지만 이런 영예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거부한다고 당장 나라가 뒤집힐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하고는 제의를 받아들일 확률이 99%였다. 그런 방법으로 간첩이 되고 국가정보가 유출된 경우도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위원장이 머리를 돌렸으므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일단 사라졌다. 저녁식사에 곁들여저 술이 나왔는데 북한산으로 여러 종류였다. 모두 난생 처음 마시는 술이었고 건배를 서너 번 하고 났을 때 조철봉의 몸은 취기가 배어 뜨거워졌다. 그 때였다.
앞쪽의 국제전자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위원장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술좌석이 무르익어가는 분위기였다.
“조 사장, 지금 분위기를 맛으로 친다면 국에 소금을 치지 않은 맛 같지 않소?”
위원장이 불쑥 묻자 앞쪽의 북한군 대장이라고 소개받은 사복차림이 짧게 웃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조철봉에게 모여졌는데 웃음 띤 얼굴들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지만 조철봉이 그 말뜻을 모르겠는가?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고는 정색했다.
“예,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머리를 끄덕인 위원장이 문 쪽을 바라보았을 때 곧 문이 열리더니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미모의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는 터라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졌다. 오늘 주연은 공단에 입주할 기업체들의 환영식을 겸한 것이었다.
“전 유정심입니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여자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조 사장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니, 나를.”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는 흘끗 위원장을 보았다. 술잔을 든 위원장도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위원장이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조 사장, 즐기시라구. 한국의 카바레 분위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예? 예.”
조철봉의 볼이 금방 굳어졌다. 위원장은 자신이 신사동의 동궁 카바레에 자주 나갔다는 것도 보고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유정심이 손을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정신이 들었다.
“조 사장님이 좋다고 하시면 전 따라 나갈 수 있어요.”
유정심이 낮게 말했지만 주위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증거처럼 당당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은 유정심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홀쭉한 모양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볼의 살이 빠진 모습의 자신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연회가 파하고 같이 나가시겠어요?”
“그거야.”
헛기침을 하는 척 말을 그쳤지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닌가? 감히 청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진즉부터 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자 유정심이 흰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럼 따라 갈게요.”
“그런데 몇 살이야?”
그렇게 물으면서 조철봉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왜 항상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질문으로 대화를 터야만 한단 말인가? 왜 멋진 대사가 튀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때 유정심의 표정이 다소곳해졌다.
“스물다섯입니다.”
유정심은 둥근형의 얼굴에 눈이 컸지만 쌍꺼풀이 아니었다. 콧날은 반듯하게 섰고 콧망울 크기도 적당했으며 입술은 얇지도 도톰하지도 않고 적당했다. 한국 미인의 전형적 모습이 어떤 형상인지 조철봉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옛 그림을 보면 눈매가 가늘면서 끝이 솟은 데다 입술은 앵두와 같고 콧날이 상큼한 얼굴형이 자주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풍만한 여자를 미인의 첫째 조건으로 쳤던 것처럼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옛 그림의 미인은 미인축에 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유정심의 얼굴은 두번 보고 세번 보는 동안에 가슴의 고동이 더 커졌다. 유정심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방안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서 웃음소리가 커졌고 이제는 한국측 인사들의 긴장도 거의 풀어졌다. 그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연회가 끝났을 때는 밤 11시경이었다. 연회의 사회자격인 김기복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이미 위원장은 방에서 사라진 후였다.
“자, 여러분 안내원이 여러분을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김기복이 말하더니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잘 모시도록.”
그러고 보면 한국측 인사들은 모두 여자들과 같이 가게 된 모양이었다. 조철봉이 일행과 함께 식당을 나왔을 때 옆으로 다가온 유정심이 팔짱을 끼었다.
“이층입니다.”
유정심이 조철봉의 팔을 끌며 말했다. 어느덧 연회 참석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여자와 함께였다.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올라 이층 복도에 섰을 때 유정심이 복도 안쪽의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방입니다.”
푹신한 붉은색 양탄자가 덮여진 복도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유정심의 안내로 방에 들어선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방안은 얼핏 보아도 50평도 넘었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특급호텔의 특실보다 더 장식이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술이 깨어버린 조철봉이 신음처럼 말했다.
“멋있군.”
“장군님의 배려이십니다.”
“고맙군.”
조철봉이 지그시 유정심을 보았다. 유정심도 이 방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방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조철봉의 고맙다는 인사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먼저 샤워하고 나올 테니까….”
몸을 돌린 조철봉은 저고리를 벗어 소파 위에 걸치고 곧 셔츠와 넥타이도 차례로 벗었다. 유정심이 다가와 옷가지를 챙기다가 조철봉이 바지를 벗을 적에는 몸을 돌렸다. 욕실로 들어선 조철봉은 화려함에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욕조는 다섯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데다 안쪽에는 스팀 사우나까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욕조에 물을 채우는 동안 조철봉은 먼저 사우나를 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기운도 어느덧 사라졌다.
사우나에 들어간 조철봉이 5분짜리 모래시계를 한번 뒤집었을 때였다. 욕실문이 열리더니 유정심이 들어섰다. 그런데 유정심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었다. 욕실 안을 둘러보던 유정심이 곧 조철봉을 보더니 거침없이 다가와 사우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등 밀어 드리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선을 내린 유정심은 조철봉의 옆에 앉았다. 사우나는 한 평 정도의 넓이로 한쪽 벽에 길이 1미터 정도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조철봉은 짙은 안개처럼 덮인 스팀 사이로 뻗어있는 유정심의 몸을 보았다. 건강한 체격이었다. 허벅지는 단단했고 종아리도 튼튼했다. 그리고 대리석 바닥을 밟고 있는 두 발도 자연미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사우나 안까지는 대담하게 들어왔지만 그것이 유정심의 한계인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린 채 온몸을 굳히고 있어서 스팀의 더위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모래시계를 다시 한 번 뒤집은 조철봉이 유정심을 보았다.
“덥지 않아?”
“아닙니다.”
유정심이 바닥만 본 채 대답했지만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5분 더 있을까?”
“네.”
조철봉은 알몸이었다. 그렇지만 두 손을 나무의자에 짚은 채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하반신 부분도 다 드러났다. 다시 무겁고 열기 띤 시간이 흘러갔다.
초침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보는 것보다 가는 모래가 흘러 쌓이는 모래더미를 보는 것이 시간이 가는 것을 더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쌓인 모래는 흘러가 찌꺼기가 된 시간이었다. 찌꺼기가 절반쯤 채워졌을 때였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유정심을 보았다.
“사우나 안에서 해본 적 있어?”
“네?”
물었던 유정심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내렸다. 알아들은 것이다.
“스팀이 자욱한 곳에서 제법 분위기가 나겠구먼 그래.”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럼 내가 알려주지.”
조철봉이 손을 뻗어 유정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벗겨줄까?”
“제가 벗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정심이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내리자 곧 알몸이 드러났다. 건강한 알몸이다. 허리는 조금 굵은 편이었지만 군살이 늘어지지 않았고 보기만 해도 탄력이 느껴졌다. 육중한 엉덩이는 마르고 올라붙은 엉덩이보다 훨씬 육감적이었다. 조철봉은 어느덧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뒤 유정심의 엉덩이를 천천히 쓸었다.
“어떤 자세가 나을 것 같나?”
조철봉이 묻자 유정심이 돌아섰다. 그러자 앉은 자세의 조철봉은 유정심의 아랫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유정심의 짙은 숲과 붉은 계곡이 바로 눈앞에 떠있는 것이다. 그때 유정심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위에 앉을게요.”
폭이 30센티 정도에 길이가 1미터인 나무 벤치 하나만 달랑 놓여진 사우나 실이었으니 그 방법뿐이다. 그러고는 유정심이 다가섰는데 주춤거렸다. 스팀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므로 땀에 젖은 유정심의 나신은 마치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조철봉은 유정심의 팔을 끌어 무릎위에 앉혔다. 유정심이 조철봉 위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로 두 발을 벤치 위에 굳히더니 곧 몸을 붙여왔다. 조철봉은 거시기가 사우나 실내보다 더 뜨거운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유정심이 신음을 뱉더니 두 팔로 조철봉의 등을 껴안았다. 억센 힘이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상하운동을 시작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조철봉이 유정심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유정심의 몸놀림은 강하고 열정적이었다. 기교는 부족했지만 조철봉은 이렇게 힘차고 탄력적인 몸과 부딪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세구나.”
조철봉이 허리를 틀면서 말했을 때 리듬에 맞추듯이 몸을 흔들던 유정심이 신음처럼 말했다.
“좋아요.”
“나도 너같이 힘찬 여자는 처음이야.”
“더 세게 해드려요?”
“그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유정심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스팀열에 익은 등은 뜨거우면서도 미끈거렸다. 유정심의 움직임이 약해지더니 헐떡이며 조철봉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요?”
“날 즐겁게 해주겠다는 생각부터 버려.”
그러자 유정심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네? 무슨.”
“즐기도록 해봐.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조철봉이 처음으로 유정심의 젖꼭지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유정심의 젖꼭지는 땅콩알 만 했다. 탱탱하게 곤두서 있었는데 혀로 굴리자 탄력 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아.”
유정심이 다시 조철봉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조철봉은 유정심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옆으로 돌려 눕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유정심이 엎드린 자세가 되었고 곧 다시 거시기가 머시기 안으로 찾아 들어섰다. 그 순간 유정심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음이 터져나왔다. 사우나 안에서 이런 자세가 되기에는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었다.
좁은데다가 나무벤치는 벽에 붙여져서 도무지 그렇게 될 여유가 없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철봉은 옆쪽 공간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자세를 만들었다. 유정심은 조철봉의 몸이 부딪쳐 올 때마다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스팀에 덮인 온몸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나무벤치를 움켜쥔 두 손등에 푸른 정맥이 돋아나 있다. 조철봉은 다시 힘을 늦추고는 마치 유정심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밀어붙였다. 그러자 유정심이 몸을 비틀면서 신음을 했다. 그러고는 안간힘을 쓰듯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줘요.”
조철봉은 유정심이 만족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온몸의 수만 개 신경세포가 오직 조철봉의 몸짓에 따라 일제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순간 조철봉은 거칠게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놀란 유정심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가 곧 리듬에 맞추면서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리고 신음이 더 격렬해졌다. 유정심이 이제 극락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
다음날 아침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침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는 이미 깨어 있었던 조철봉이 전화기를 들자 예상 했던 대로 김종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7시반 정각에 현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김종안이 잘 잤느냐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어젯밤에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조철봉이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 역시 깨어 있었던 유정심이 물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그럴 시간이 있을까?”
“옷 입으시는 동안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씻고 옷을 입는 사이에 유정심은 커피를 끓여 탁자 위에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물론 유정심도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차림이었다.
“거긴 어디로 가나?”
팔목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7시 15분이 되어 있었다.
“전 늦게 떠나도 됩니다.”
“그래?”
건성으로 물은터라 조철봉이 커피잔을 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진했으므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고 개운해졌다.
“사업이 잘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유정심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정색하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이 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조철봉이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어 세는 동안 앞에 앉은 유정심은 눈을 깜박이며 그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일어난 표정이었다. 이윽고 달러를 손에 쥔 조철봉이 유정심에게 말했다.
“내가 이걸 유정심씨한테 주고 싶은데, 인사로 말이지. 2천달러야.”
그순간 유정심의 두눈이 커졌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조철봉이 달러를 유정심에게 내밀었다.
“선물로 생각하고 받아주었으면 내 마음이 개운해지겠어.”
“아닙니다.”
유정심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지만 화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
“사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전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알아.”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달러를 유정심의 앞쪽 탁자위에 놓았다.
“난 어떻게든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싶어. 여기에다 놓고 갈 테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철봉이 방을 나올 적에 유정심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조 사장님.”
조철봉이 몸을 돌렸으나 유정심의 시선은 이미 내려진 후였다.
*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아래층 로비로 나왔을 때 조철봉은 현관 앞에 서있는 김종안을 보았다. 로비는 텅 비어 있었으므로 김종안이 멀찍이 선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종안의 목소리가 빈 로비를 울렸다.
조철봉은 김종안도 유정심처럼 자신과 시선을 부닥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현관 밖으로 나온 조철봉은 대기하고 있던 벤츠에 올랐다.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앞쪽 자리에 탄 김종안이 말했다.
“10시에는 김비서 동지께서 호텔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조철봉은 김종안의 뒤통수를 보면서 그때서야 깨달았다. 김종안은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유정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있다.
김기복은 어젯밤 잘 잤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눈인사만 하고는 업무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미 이쪽 조건을 다 받아들인 터라 시작만 하면 되었다.
근로자 6천명이 고용된 대규모 공장이 세워지게 될 것이었다. 조철봉도 만족했지만 김기복 또한 표정이 밝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조철봉이 중국으로 떠날 때였다. 호텔 로비에서 기복이 다가와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위원장동지께서 조 사장님을 높게 평가하고 계셨소. 아마 김성산 동지가 선전을 해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디.”
당황한 조철봉이 얼굴까지 붉혔다.
“다 과장된 것입니다. 제가 조금 허세가 심하기도 하고요.”
“어쨌든 맨손으로 일어나 5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이만큼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것이.”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웃는 김기복의 얼굴을 보자 조철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금방 어깨를 폈다. 이쪽은 알고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다시 바짝 다가붙은 김기복이 말을 이었다.
“이번 평양공단 사업을 시작으로 조 사장 사업이 일취월장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철봉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거의 없는 계약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땅에서 사업가로서 인정을 받으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기운이 절로 난 조철봉은 옌타이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시간인데도 회의를 소집했다. 왠지 조급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옌타이의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는 오전 8시 반이었다. 침실의 인터폰이 울렸기 때문인데 아래층에서 운전사 겸 경호원인 조선족 박용호가 연락을 한 것이다.
“사장님, 외부 전화가 왔었는데 주무신다고 했더니 30분쯤 후에 다시 연락을 한다는데요.”
박용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울에서 온 홍 사장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조철봉이 홍경수와 마주앉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응접실에는 홍경수와 동행한 30대 중반쯤의 사내까지 셋이 모였는데 먼저 홍경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양에 다녀오셨지요?”
“예, 어제.”
조철봉이 선뜻 대답했다.
“국방위원장도 만났습니다.”
“평양공단의 협상은 잘 되었다던데, 그렇습니까?”
“예, 그쪽에서 적극 협력해주고 있어서요. 오히려 중국보다 조건이 좋습니다.”
“허어.”
“국방위원장이 직접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니까요.”
“저녁에 같이 술도 드셨다던데.”
홍경수가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귀빈 대접을 받으셨더군요.”
“아주 좋았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난생 처음으로 높은 사람한테서 인정을 받아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우등상 한번 못타본 처지라 머리가 핑 돌더만요.”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홍경수는 기관원이다. 소속은 알 수 없었지만 정보를 관리하는 부처의 고위직이었고 지난번 김성산과의 사업을 조건으로 거액의 대출을 받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조철봉으로서는 홍경수가 원하는 정보를 감출 이유가 없었으므로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히려 정보를 줄 수 있는 현실이 즐겁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어서 홍경수와 동행의 얼굴도 밝아졌다. 이윽고 허리를 편 홍경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다음번 평양에 가실 적에 김정일 위원장하고 만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거야.”
“갑자기 초대를 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알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어젯밤 파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조 사장님한테 상당히 호감을 품고 있는것 같다던데요.”
“벌써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거야 기본 아닙니까?”
홍경수가 빙글 웃었다. 아마 어젯밤 연회에 참석했던 한국측 경영자들한테서 들었을 것이었다. 허리를 편 홍경수가 다시 정색을 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 혹시 말입니다. 조 사장님.”
“뭡니까?”
“다음 번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래서요?”
“지나가는 말처럼 한번 물어봐 주시렵니까? 한국 방문계획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아, 그건 정부측에서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여러 가지로 복잡해서.”
쓴웃음을 지은 홍경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잘 아시다시피 밀고 당기는 협상이 여러 개 겹쳐 있어서요.”
“그건 그렇죠.”
“그 협상들 사이에 위원장 방문 카드가 나올 여지가 없단 말씀이지요. 저쪽은 그 카드로 큰 딜을 할 것이고 우리는 대비를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제가 왜?”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시면 위원장이 불쑥 대답해줄 수도 있을 거란 말씀이죠.”
“위원장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니, 그라도 의도적으로 조 사장님을 통해서 흘릴 수도 있지요. 작전에 노련하신 분이니까요.”
“그럴까요?”
“부탁합니다.”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무슨 큰 수가 납니까?”
그러자 홍경수가 활짝 웃었고 30대 사내도 따라 웃었다.
“상징적인 효과지만 곧 큰 영향이 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그것을 감수해야 하겠지요.”
“평화가 정착되면 좋지요.”
마침내 조철봉도 그렇게 동조했다.
“기회가 오면 물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조 사장님이 북한에서 한건 올리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그것이 유정심을 말하는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흘끗 홍경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홍경수의 웃음 띤 얼굴에는 그런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홍경수 일행을 배웅하고 돌아온 조철봉에게 박용호가 말했다.
“사장님, 공장에 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군, 늦었다.”
조철봉이 서둘러 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요즘처럼 의욕적으로 일한 적은 드물었다.
*
한국에서는 공장을 하나 짓는데 도장을 2백 몇 개나 받아야 한다는 신문기사를 조철봉이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규제나 간섭하는 부서가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평양공단 입주에 대해서도 오성산업 실무진들은 걱정이 많았다. 북한은 중국과 달라서 경쟁적으로 외국 자본이나 공장을 유치해온 경력이 없는 것이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되는 법이다.
그것은 조직이나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도 그렇다. 평양공단에 다녀온 김택현이 지친 모습으로 조철봉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성산업 옌타이공장 사장인 김택현은 평양공단 입주작업의 실무 책임자인 것이다. 김택현은 보름 만에 돌아온 것이니 이미 공단 입주작업이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난 셈이었다.
“고생이 많은데.”
마주 앉았을 때 조철봉이 위로하자 김택현은 싱긋 웃었다.
“보람은 있습니다. 공장 건설도 일정보다 빨리 진척이 되구요.”
공장 건물은 북한측이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건설회사는 한국의 대웅 건설이다. 그때 김택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급수 문제라든가 전력 문제, 그리고 회사 앞의 도로 포장 문제 등 사소한 문제를 협의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택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공단 본부에서 총괄하고는 있지만 담당자가 바쁘다 보니까 며칠간 결재가 나지 않고 또.”
“의욕을 내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김택현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열심히는 하는데 열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한테 직접적인 혜택이 없기 때문이지.”
당연한 듯 말한 조철봉이 지그시 김택현을 보더니 곧 인터폰을 눌렀다.
“예, 사장님.”
스피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울리자 조철봉이 최갑중을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최갑중도 옌타이에 와 있었던 것이다. 곧 최갑중이 들어섰고 조철봉은 김택현한테서 들은 상황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고는 최갑중에게 지시했다.
.
“자네가 평양공단에 가서 김 사장을 도와줘야겠어.”
김택현이 옆에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최갑중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담당자들이 의욕을 내지 않는 모양이야.”
“그럼 제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아직 눈치를 못 챈 최갑중이 머리까지 비틀며 묻자 조철봉은 혀를 찼다.
“방법이 있지 않아? 의욕을 내도록 하는 방법 말이야.”
조철봉이 아직도 눈만 껌벅이는 최갑중을 흘겨보았다.
“봉투에다 100불짜리를 넣어서 건별로 먹이도록. 100불짜리 건에서부터 1000불짜리 건도 있겠지.”
“그, 그러면 뇌물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뇌물 맛을 알면 의욕이 솟구치게 될 것이야.”
“하, 하지만.”
“건설 본부에 있는 머리통 큰놈들은 조금 크게 먹여야겠지. 물론 상황을 봐서 말이야.”
“괜찮을까요?”
“괜찮다마다.”
혀를 찬 조철봉이 다시 최갑중을 흘겨보았다.
“뇌물 안 통하는 데가 어디 있어? 걱정 말고 준비하도록.”
*
그렇게 해서 최갑중이 다시 김택현과 함께 평양으로 떠난 지 닷새 째가 되는 날 아침이었다. 조철봉은 김택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어제 회사 앞까지 고속도로가 건설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김택현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용수 문제도 해결되었고 기숙사도 6500명 기준으로 건설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쪽이 요구한 조건은 다 들어준 셈이었다. 만족한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잘했군. 우리 계획대로 된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장님.”
“최 전무는 잘하고 있나?”
“예. 최 전무님 덕분에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
“그래?”
전화상이어서 김택현은 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만해도 충분했다. 최갑중의 뇌물작전이 성공했다는 말인 것이다. 흥이 난 조철봉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그래.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니까 그래.”
그동안 중국에만 머물면서 일에 매달려 있던 조철봉이다. 그에게 평양공단의 사업은 지금까지 추진했던 어떤 사업보다 더 신경이 쓰였고 규모도 컸다. 북한측이 공장을 무상으로 건설해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혜택을 주고 있었지만 조철봉으로서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일에 몰두하면 침식을 잃다시피 하면서 끝장을 보는 것이 조철봉의 성격이다.
조철봉이 다시 평양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0일쯤 후였는데 공장 건물은 순조롭게 세워지고 있었다. 1백만 평의 공단 부지에서 5만평 정도를 차지한 오성산업 제2공장의 건설속도가 가장 빨랐다. 그리고 고속도로까지 공장 앞으로 연결되었고 용수나 전력 문제도 가장 먼저 해결되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최갑중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최갑중이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형님. 오늘 저녁에 건설위원장을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차 안에는 최갑중의 심복인 운전사까지 셋뿐이었지만 최갑중은 목소리를 낮췄다.
“호텔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해놓았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최갑중이 쓴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저보다 형님이 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야?”
“인사말입니다.”
그러자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조철봉의 특명을 받고 평양에 온 최갑중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봉투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오성산업 공사현장에 얼굴을 내민 북한측 건설 지도위원은 모두 봉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간부급에 대한 인사는 확실해서 오성산업에 대한 배려는 각별했다.
따라서 오성산업 공사 현장이 가장 활기에 찼고 모범 케이스가 되었다. 중앙에서 시찰단이 내려오면 오성산업 건설 현장만 둘러보고 칭찬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뇌물 먹어서 좋고 공사 빨라서 좋고 칭찬 받아서 좋은 것이다. 조철봉의 표정을 살핀 최갑중이 빙긋 웃었다.
“역시 형님의 생각이 맞으셨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봉투맛을 보더니 정신을 못차립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게.”
기분이 좋아진 조철봉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마무리 뇌물이 되는 셈이로군.”
“그렇습니다. 형님.”
*
건설위원장 김영조는 60대 중반으로 북한 정권의 실세였다. 당서열이 20위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외모는 50대쯤으로 보였다. 흰머리가 하나도 없었고 피부는 팽팽하게 윤기가 흘렀다.
조철봉과는 구면인데다 쾌활한 성품이어서 식탁 주위의 분위기는 밝았다. 호텔 식당의 밀실 안이었다. 최갑중과 셋이서 식사를 했는데 주로 이야기는 김영조가 했다. 김영조는 다변인 편이었다. 식사와 함께 양주를 마셨으므로 셋의 얼굴은 모두 붉었다. 그중 최갑중의 얼굴이 제일 붉었다.
“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속이 거북해서.”
그러면서 최갑중이 일어서 방을 나가자 방안에는 둘만 남았다.
“저 친구가 술이 약해서요.”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김영조를 보았다.
“술 마시다가 잠이 들어버리는 버릇이 있지요. 오늘은 나은 편입니다.”
“그거 괜찮은 술버릇이오.”
김영조가 말했을 때 조철봉이 의자 밑에 놓았던 검정색 가방을 들어 김영조의 의자 옆에다 놓았다.
“가방에 10만 불 들었습니다.”
조철봉이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낮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국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이니까 부담 느끼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김영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조철봉은 여유 있게 웃었다.
“뭘 더 봐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잘 해주셨고 바랄 것도 없습니다. 순수한 인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허, 이거 참.”
마침내 쓴웃음을 지은 김영조가 술잔을 쥐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한국 기업가들이 뇌물 먹이는 것에 도통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겪게 되는군.”
“이건 뇌물이 아닙니다, 건설위원장님.”
“뇌물이 아니고 인사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설날이나 추석때 하는 인사 같은 것이지요.”
이제는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는 명절때의 인사까지 규제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하지만 10만 불은 거금인데.”
“인사도 격에 맞게 해야지요.”
“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김영조가 손에 쥔 술잔을 들어 한모금에 삼키더니 내려놓았다.
“한국 정치인들이 이런 식으로 인사를 받았을까?”
혼잣소리처럼 김영조가 말했을 때 조철봉이 긴장으로 치켜들고 있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마 이렇게 뒤탈이 없는 인사는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까?”
“더구나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렇군.”
다시 쓴웃음을 지었던 김영조가 팔목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 10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조 사장.”
“아, 예.”
따라 일어선 조철봉은 김영조가 의자 옆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드는 것을 보았다.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을 때 김영조가 말했다.
“고맙소 조 사장.”
“아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영조를 호텔 현관까지 배웅한 조철봉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곧 노크 소리가 울렸다. 최갑중이다. 최갑중이 문을 열자마자 물었다.
“가방 받았습니까?”
“당연하지.”
“이제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군요.”
최갑중의 표정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