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발전과 남북 교류의 기틀을 다진 거목(巨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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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현대(現代)를 창업,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끌어 온 아산 정주영(峨山 鄭周永).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그리고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큰 족적을 남기며 시대를 이끌어 온 거목(巨木)이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江原道) 통천군(通川郡) 송전면(松田面) 아산리(峨山里)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정봉식(鄭捧植)과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송전(松田)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상 전래의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16살에 소 판 돈 70원을 갖고 상경했다.
그 후 아버지의 설득으로 다시 농촌생활을 했으나 이후에도 2번에 거쳐 가출을 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다. 18살인 1931년의 마지막 가출로 인천 부두, 보성전문학교 신축 공사장 등지에서의 막노동꾼 생활을 거쳐 풍전엿공장에서 일하던 정주영이 마침내 정착한 첫 직장은 경성의 쌀가게인 복흥상회. 정주영은 이 곳에서 특유의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주변의 신뢰를 얻게 되고 마침내 자신이 가게를 인수해 경일상회를 개업하면서 자수성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9년 일제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배급제의 실시로 경일상회가 폐쇄되자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 공장을 운영키로 하고 합자회사 ‘아도서비스’를 설립, 제조업을 운영하는 첫 경험을 쌓게 되지만 이마저도 4년 만인 1943년 일제에 의해 그만두게 된다. |
해방 1년이 지난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정주영이 건설업의 잠재력에 눈을 뜨고 ‘현대토건사(현대건설의 전신)’를 설립한 것은 1947년. 정주영은 바로 이 ‘현대토건사’를 기반으로 6ㆍ25 동란으로 인한 전후복구사업을 수행하면서 마침내 한국경제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각종 다리와 도로, 부두시설 등 전후복구사업을 도맡아 수행하면서 현대건설이 국내건설업계 1위로 올라서자 정주영은 해외 건설시장 진출이라는 모험을 다시 단행한다. 이와 함께 터무니없다는 주변의 비판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강(强)한 나라’를 만드는 산업인 자동차, 중공업, 전자 등 국가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히 진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분야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주영은 중동 주베일산업항 공사, 현대조선소 신화, 포니ㆍ엑셀 신화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이었던 조국을 신흥공업국의 대열에 올려놓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주역으로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가로 자취를 남기게 된다. |
일생을 통해 부강한 조국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펼쳐 온 아산 정주영. 그는 창조적 도전의식과 불굴의 개척정신, 강인한 추진력을 통해 경제 이외의 많은 분야에서도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난 1998년 84세의 고령에 전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소떼몰이 방북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와 교류의 새로운 시대를 연 주역이며, 그 외에도 88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체육인으로, 우리 기업인 최초로 구(舊)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민간 외교인으로, 그리고 아산재단을 만들어 사회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친 사회사업가로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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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계의 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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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에 있어서 정주영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전후복구사업에서 공업입국, 중화학공업화, 첨단산업화로 이어지는 우리 경제사의 주요 물줄기를 민간부문에서 이끌어 온 주역이 바로 정주영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가 6.25동란으로 피폐된 국토를 재건하려 할 때 정주영은 선두에 서서 전후복구공사를 담당했으며, 아울러 196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적인 조국 근대화의 사회간접시설은 거의 정주영에 의해 주도되었다. 소양강다목적댐(1967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울산조선소(1973년), 원자력발전소(1970년) 등 국내 굴지의 대공사는 한국경제사 측면에서 보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미증유의 사업이었다.
한국경제가 자립국가 확립을 목표로 수출에 눈을 돌릴 때 정주영은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 국내 기업 최초로 태국 고속도로 사업 등 해외 건설시장 개척에 나섰다. 당시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해외시장 개척은 새로운 돌파구였지만 기술과 경험, 자본, 장비 등 모든 부분이 미비한 까닭으로 아직 그 누구도 해외시장 개척은 상상조차 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정주영은 과감하게 해외 건설시장 진출을 선언했고, 여기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1970년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수출주도형 경제기반을 구축했다. 특히 오일쇼크로 한국경제가 휘청거릴 때 정주영은 중동에서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여 국내의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
그후 1980년대 한국경제가 공업화를 서두를 때 정주영은 순수 우리 기술의 자동차 생산을 꿈꿨고, 한국경제가 중화학공업에 나섰을 때 ‘조선입국’을 선언하며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그 당시 정주영은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와 울산 미포만 지도 한장을 달랑 들고 외국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고, 조선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박 수주를 받아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정주영의 창조적인 도전정신과 적극적인 의지로 세계 최대 규모인 현대중공업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순수 우리 기술의 포니ㆍ엑셀을 만들고 1986년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포문을 열기도 했다.
또 정주영은 1980년대 말 1990년 초, 산업의 구조조정기에는 첨단산업에 과감히 투자해 미래지향적 산업분야로의 기업 체질 개선을 도모했다. 그 결과 현대는 반도체, LNG선, 자기부상열차 등 미래지향적인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
이처럼 정주영은 항상 현재의 발전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경제 선진화를 위해 한국기업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의 산업을 개척해 나가는 프론티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다. 정주영은 1977년 기업인들의 만장일치 결의를 통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후, 10년 간 5차례 최장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연임하며 재계의 수장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1978년, 오일쇼크 이후 세계 경제 질서가 무역장벽의 강화, 국제경제권의 다극화 등으로 재편의 조짐이 보일 때,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는「관(官)주도 경제」에서「민간(民間)주도 경제」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해 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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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정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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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경제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기업인이다.
정주영은 1947년 현대를 창업해 중화학산업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가장 먼저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한국경제의 세계화를 주도했다. 또 기술의 국산화를 주창해 건설, 자동차, 중공업, 전자 부문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고, 일찍이 민간주도형 시장경제체제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 기업경영을 강조함으로써 한국 경제 발전사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巨人)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를 창업한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정주영의 기업활동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정주영의 창조적 기업가 정신, 산업보국(産業報國)의 충정, 개척정신과 성취의욕은 한국전쟁이후 피폐해진 우리 경제의 재건 및 발전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잘 부합되었다. 정주영은 민간기업인으로서 실물경제발전에 큰 획을 그었으며, 기업활동을 통해 국가경제발전에 일생을 바쳤다.
정주영은 언제나 남보다 먼저 미래를 계획하는 창조적인 사고와 불굴의 개척정신을 지닌 기업인이다. 정주영의 기업활동을 돌이켜 보면 그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벤처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정주영은 건설경험을 바탕으로 선박이란 물위를 떠가는 탱크일뿐이라는 ‘CAN DO' 정신으로 과감히 조선업에 진출하고, 울산의 황량한 벌판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일구어 냈으며, 현대자동차의 고유브랜드를 고집하며 미국시장을 개척해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로 발전시킨 것도 모두 이런 정신과 신념의 결과인 것이다.
정주영은 전후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산업사회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왔다. 국가경제발전의 바탕이 되는 도로, 항만 등 기간산업의 건설에 주력하면서 해외 건설시장의 개척에 나섰고, 조선공업을 일으켜 수출산업화를 앞당겼으며, ‘기계공업의 꽃’이라고 불리는 자동차공업의 활로를 만들었다. 이밖에도 전자, 철강, 유화 등 현대의 모든 회사는 정주영 자신의 손으로 세워지고 그가 흘린 땀과 노력으로 발전되어 왔다. 한국경제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출산업 중 약 70%가 중화학 제품이고 정주영이 창업한 현대그룹의 주력업종이 모두 이에 해당되는 것을 보면 국가경제발전에 대한 정주영의 주도적 역할을 극명하게 입증된다.
정주영이 1947년 10여명이 근무하는 조그마한 건설업체로 시작했던 현대는 2000년말 기준으로 종업원11만명, 협력업체 17,930개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99년말 기준으로 매출 68조, 수출222억불으로 국민경제와 대비해 볼 경우 매출은 전 산업의 7%를. 수출은 16%를 차지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특히 반도체 및 전자제품, 선박 및 선박용 엔진, 자동차 및 기계류, 석유화학 제품, 해외건설 및 운송 등 상품수출과 용역수출을 포함한 현대의 외화가득액은 287억불에 달한다.
또 한국은행 조사대상 기준으로 현대의 1,2차 협력업체는 17,930개사이다. 이는 전체 협력업체의 17%를 차지한다. 따라서 현대의 직접 고용인원은 11만명이지만 전후방산업의 간접고용을 포함해 보면 약 30만명으로 국내산업 전 근로자 대비 3%를 차지한다.
정주영이 일구어낸 주요 기업들은 현재 국내 1위는 물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현대건설의 경우 세계 12위, 현대자동차 세계8위, 현대전자의 반도체 부분 세계 1위, 현대중공업 세계 1위, 현대상선은 자동차 운송 세계3위, 해운은 세계 7위를 점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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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간산업 주도 - 산업보국(産業報國) 정신
정주영은 일제 36년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내 사회간접시설을 일으키기 위해 50년대 전후복구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는 미군전시긴급공사와 휴전 후 각종 도로, 항만, 교량 등 토목건축공사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당시는 전문인력과 장비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고, 특히 고령고 복구공사 등 일부 공사는 극심한 인플레로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으나 정주영은 산업보국(産業報國) 정신으로 이를 감수하고 끝내 완공시켜 성실성과 신용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현대건설은 이후,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국경제는 60년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61년 군사혁명 정부가 수립된 후 62년부터 경제개발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공업화에 의한 자립경제 구축과 수출입국이 목표로 정해졌다. 정주영은 한국최대의 다목적 댐인 소양강댐을 비롯한 수력발전공사와 영월 화력발전소 공사를 착공하는 등 국가기간산업에 적극 참여했다.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건설업계가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정주영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정력적인 현장지휘로 각종 댐, 발전소,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건설에 민간기업인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68년 2월 착공해서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을 민족애적 기업인으로 각인시킨 대역사였다. 68년 2월 착공한 이 공사는 2년 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당초 3년이 공기였으나 당시의 기술수준과 장비로는 도저히 기간내 428㎞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모험이고 회사로서도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정주영은 이때 기계화를 통한 공기단축이 이 사업의 열쇠라고 보고 당시 국내 경제상황으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인 8백만달러 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해 투입했는데 당시 한국에 있는 총 중장비수보다 더 많은 장비를 들여와 화제가 되었다. 정주영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를 비롯한 현대 임직원들은 국가적인 대사 앞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계절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한국경제의 세계화 선도-미래를 내다보는 남다른 혜안
정주영은 주변의 부정적인 우려 속에서 과감하게 국내 기업 최초로 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시작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시작했다. 이후 정주영은 괌에서 주택사업을 하고 월남에서 항만공사, 70년대 후반 중동 붐을 타고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여 나라경제를 살찌우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그 당시 한국경제는 자원도 자본도 기술축적도 없었지만 정주영은 남보다 먼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의지로 해외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특히 정주영이 주도한 9억4천말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76년) 공사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일컬어지는데, 여기에 투입된 250만명의 연인원과 장비, 자재는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현대건설과 현대종합상사가 10억불 수출탑을 수상하고 현대중공업이 9억불을 수상하는 등 한국경제의 비약적인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술의 국산화 - 창조적 아이디어와 강인한 추진력
60년대말. 당시 한국의 최대 선박건조 능력은 10만3백톤, 최대 건조실적은 미국에서 수주한 1만7천톤짜리.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수십만톤 규모의 조선소를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착수했다.
정주영은 71년 조선소 사업계획서, 500원짜리 지폐, 울산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만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얻기 위해 떠났다. 배 한 척 만든 경험이 없는 현대에 엄청난 금액의 차관을 쉽게 해 줄 은행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주영은 차관을 구하는 과정에서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면서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전인 1천5백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는 재치있는 임기응변으로 결국 런던의 바클레이스 은행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 영국 정부기관인 수출 보증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조선소도 없이 선박을 수주하는 모험을 감행해서 그리스 선주를 설득하는데도 성공했다. 결국 그는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세계 조선사상 유례없는 신화를 이룩했다. 이는 정주영의 창조적 기업가 정신과 강인한 추진력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정주영은 산업구조 재편과정에서 고도의 기술력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깨닫고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강조했다. 특히 정주영은 자동차 산업이 미래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국산자동차 개발에 관심을 돌렸다. 현대자동차는 66년 미국 포드사와 자동차조립생산 계획을 맺고 합작회사 형태로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정주영은 포드사와 결별하고 100% 우리 노력으로 국산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정주영은 우리 기술과 고유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만이 앞으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우리나라의 기계공업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주영의 기술자립 의지가 76년 1월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승용차를 만들어 냈다. 만약 그때 국산 고유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아마도 현재 자동차 공업수준은 외국자동차의 조립생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주영의 지휘 아래 자체기술로 고유모델 개발에 힘쓴 현대자동차는 드디어 86년 ‘포니엑셀’이 국내 최초로 한국 자동차업계의 숙원이었던 미국시장에 진출, 언론들로부터 “어느 한 기업과 그 종업원만의 자랑이기 보다 국민 모두가 기뻐해야 할 경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건설, 중공업, 자동차 등 중후장대한 산업에서 기술력과 안정성을 인정받은 정주영은 그 후 21세기를 이끌어갈 경박단소의 첨단산업에 눈을 돌렸다. 미래는 첨단 전자산업이 지배하며 현대의 주력분야인 건설, 자동차, 중공업 분야에서도 계속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첨단전자 부분의 기술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83년 현대전자를 설립. 창립 10년도 안되어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로 성장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는 내수기반이 튼튼한 가전사업을 위주로 성장해온 한국의 다른 전자업체들과는 달리 해외지향적인 수출위주의 산업전자를 전문화하여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현대전자는 98년 LG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전문회사로 거듭나 성장해 현재 세계 1위의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90년대 들어 정주영의 과감한 기술개발 투자는 전자분야 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기계, 조선 등에도 계속됐다. 이로 인해 순수 우리 기술의 자동차 엔진개발, 자기부상열차,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 알콜자동차 개발, LNG선 건조 등 환경 친화적인 고부가가치 제품을 끊임없이 개발되었다. 그 당시 정주영은 매출액의 약 10% 이상을 기술개발에 투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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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경영의 선진화에 앞장서
- 민간주도형 시장경제 강조 - 소유와 경영 분리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경제는 80년대 들어서면서 노동집약적인 산업만으로는 세계의 유수업체들과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정주영은 한국 산업경제가 중요한 변화시기를 맞고 있을 때 한국재계를 이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77년부터 10년 동안 5번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연임한 정주영은 시장경제원리를 바탕으로 「관(官)주도경제」에서 「민간(民間)주도경제」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계의 수장으로서 한국의 기업이 나갈 방향과 역할을 제시했다. 그 당시 한국정부의 경제개발정책도 산업구조의 고도화로 방향을 잡았다.
이밖에도 정주영은 한국 기업경영의 선진화를 위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강조했다. 2000년 5월 31일,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3부자 퇴진 선언‘은 가족형 그룹체제 중심으로 되어있는 우리나라 재계가 선진화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주영은 발표문을 통해 “본인은 현재 시대의 흐름과 우리 경제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거에는 그룹체제가 각 사간의 협조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이제 세계적인 흐름과 여건은 각 기업들의 독자적인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는 것만이 국제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50년 넘게 몸담고 있던 현대그룹 경영일선에서 완전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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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윤의 사회환원 -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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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은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峨山社會福祉事業財團)을 설립,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당초 현대건설의 기업공개를 요구하는 주변의 여론에 대해 기업공개는 결국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환원이라는 결실을 거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으로 그는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계층간의 격차, 도농(都農)간의 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사회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지역과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 없이 우리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에서 아산재단을 설립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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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은 처음부터 아산재단을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포드 재단에 버금가는 재단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재단의 중점 사업부문을 의료사업과 사회복지 지원사업, 연구개발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 4개 부분으로 설정했다. 그는 특히 전국의 의료 취약지역에 대한 지원사업에 관심을 갖고 9개의 병원을 건립하는 한편 울산의과대학 및 아산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의료 지원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왔다.
이와 같은 의료 지원사업 외에도 각종 사회복지단체를 지원하고,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대학의 학술연구 지원을 통해 산(産)ㆍ학(學)ㆍ연(硏) 협동체제를 구축하는 등 아산재단을 통한 사회복지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온 그는 이와는 별도로 언론의 창달에도 관심을 기울여 신영연구기금 조성과 관훈클럽 지원을 통해 언론인의 자질향상에도 기여해 왔으며, 문화예술과 국민체육진흥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러 분야의 스포츠단 창단을 통해 국민의 체력 및 국제경쟁력 향상에 이바지했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 88 서울올림픽의 유치 및 성공적인 개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불과 5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주위의 냉소를 뒤로한 채 혼신의 노력으로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바덴바덴의 신화’ 등 활발한 체육 지원활동에 대한 보답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는 1998년 초 정주영에게 IOC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 | |
해외에서 보는 정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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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25동란 이후 불모지와 같았던 국내 상황 속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해외에서는 이런 정주영을 ▲한국 산업근대화의 주역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 ▲불가능했던 일을 실현한 사람 ▲강인한 추진력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지닌 기업인으로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 홍콩<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 아시아 10대 인물 선정(1999년 11월) 20세기 말 홍콩의 경제전문 주간지인<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20세기 아시아 10대 인물’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선정했다. 정주영의 선정 이유에 대해 이 잡지는 “정회장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한국을 막강한 산업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하며 “정주영 신화는 한국 근대사회 성립과 거의 동격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 영국<이코노미스트>지,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1999년 2월) 영국의 유력한 경제전문 주간지인<이코노미스트>지는 한국이 외화부족으로 인한 경제위기로 지난 1997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에, 정주영이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기아자동차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불가능은 없다”는 신화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정회장이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목표달성을 위해 전력투구한다는 점에서 나폴레옹과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 홍콩<아시아위크>지 「사업가 명예의 전당」에 선정(1994년 12월) 또 지난 1994년에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경제지인<아시아위크>지에서 아시아 지역 발전에 공헌이 큰 사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제1회 사업가 명예의 전당」을 제정하고, 그 첫 인물로 5명의 기업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 정주영을 제일 먼저 소개했다.<아시아위크>지는 정주영을 첫번째로 소개한 이유에 대해 “정회장은 쌀가게 배달소년에서 한국의 최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
■ IOC로부터 올림픽훈장 수여받아(1998년 2월) 정주영은 기업인으로서의 평가 외에도 지난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올림픽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올림픽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정주영은 지난 81년부터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며, 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 미국 헤리티지 재단,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개인 명의의 “정주영 펠로우쉽” 프로그램 창설(1999년 10월) 또 미국의 권위 있는 헤리티지 재단은 1999년 10월 정주영의 이름을 딴 펠로우쉽(연구기금) 프로그램을 창설하고 ‘정주영 연구실’을 개설했다.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유력 연구소로, 이 재단에서 인명을 딴 펠로우쉽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1992년 로널드 레이건 전(前) 미국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한 ‘로널드 펠로우’에 이어 두번째이며,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헤리티지 재단측은 정주영 명의의 펠로우쉽 프로그램 창설 배경에 대해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기억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을 원했는데 정회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며, 한국의 성공담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온 20세기가 낳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 해외 학자들 정주영에 대한 연구 활발 한편 1997년 중국(中國)에서 『세기(世紀)의 가교(架橋) 건설자 정주영(建設者 鄭周永)』이라는 전기 화보가 나온 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해외에서 활발히 진행됐다.
중국 최고 권위의 출판사인 삼련서점에서 이 전기 화보를 발간한 이유는 “정회장이 건설을 외치며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자임한 현대 한국의 건설자, 유교문화의 계승자,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해 주는 가교의 역할을 가장 성실하게 수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1998년 미국(美國)의 오레곤 대학교(大學校) 리차드 스티어스(Richard M. Steers) 교수가 현지에서 경영학자적인 시각으로 쓴 정주영의 전기 『Made in Korea-Chung Ju Yung and the Rise of Hyundai』를 출간해 화제를 일으켰다. 이 책의 서문에는 “미국의 기업영웅에 대한 저서는 방대한 반면, 새로운 국제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다른 세계에 있는 기업과 기업 지도자들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형편”이라고 전제하고 “이 책은 다른 세계의 기업가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정주영은 앞으로 전세계 기업가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며, 또한 학문적으로 연구 분석할 가치가 있는 뛰어난 기업가이다.
또, 국내에서는 1997년 숭실대학교(大學校)에서 ‘정주영(鄭周永) 창업론’이 개설되어 대학가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으며, 1999년에는 한국경영사학회에서 창업대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아산 정주영 연구(峨山 鄭周永 硏究)>라는 정기 학술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 외국에서 받은 수상 경력 정주영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물론 외국과의 기술협력을 통해 양국 간 산업발전 및 인적자원 교류에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나라 국가수반으로부터 각종 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77년 영국여왕 대영(大英)제국 코멘더 장(章), 79년 세네갈 국(國) 공로훈장, 82년 자이레 국가훈장, 83년 중국(中國) 경성(景星)훈장, 98년 노르웨이왕실 코멘더위드스타 훈장, 2001년 러시아 푸틴대통령 친선훈장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외국에서 받은 학위 현황 정주영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국내외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외 지명도 높은 대학으로부터 각종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해외에서는 1982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1995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명예 인문학박사’, 국내에서는 1975년 경희대학에서 ‘명예 공학박사’, 1976년 충남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1985년 연세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198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1990년 서강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1995년 고려대에서 ‘명예 철학박사’를 수여 받은 바 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