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에 대하여>
-이현주 목사님-
그리스도교의 교리(dogma)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교리를 곧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과 그 속에 담겨진 음식을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 착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음식이다.
물론 그릇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의 중요성이 음식의 중요성을 능가하는 법은 없다.
때로 무슨 호사스런 왕들이 금과 은으로 비싼 그릇을 만들어 그 속에 담기는 음식보다 훨씬 더 귀하게 보관하여 왔고 오늘에도 쓸개 빠진 인간들이 그런 것들을 무슨 골동품이라 하여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인데, 아무리 비싼 포도주잔이라 한들 세상에 만일 포도주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식품은 될 수 있겠지.
그러나 포도주잔은 장식품으로 둬도 괜찮겠지만, 종교의 교리를 장식품으로 모실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어떤 종교에 대하여 인간이 궁극적으로 관심해야 할 것은 그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그 종교의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셨다는 교리는, 그분의 죽음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우리에게 있어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그분의 삶과 죽음이지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이나 교리가 아니다. 해설과 교리란 그릇과 같다.그릇을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것이 내용물을 대신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는 창을 통해 뜰의 꽃을 본다. 보아야 할 것은 꽃이다. 창은 뜰을 내다보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이다.
시선을 창에 두면 꽃은 희미해진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뿌옇게 먼지가 묻은 창유리다. 창을 가장 잘 보는 방법은 창을 보지 않는 것이다. 교리가 이와 같다. 교리를 가장 잘 대하는 길은 그 교리가 담고 있는 내용인 진리에 몰두함으로써 교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무시당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창이요 교리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엘 다녔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라는 노래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목이 찢어지도록 부르고 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교리를 노래하는 찬송이었다.
그 분이 내가 죽어야 할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랐다.
우선 내가 죽었어야만 했는데 지금 살아 있다는 말이 납득되지 않았다.
죽었어야만 했다면 지금 죽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 분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건가?
사람이 남을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걸까?
이런 마음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하고 뭐가 뭔지 모르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교회엘 나가라고 하시니까 나가서는 목이 찢어지도록 "속죄함, 속죄함"을 외쳐댔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되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나의 잘못을(선생님들은 나의 죄 값이라고 했지!) 그 분이 대신 갚으셔야 했을까?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해달라고 빌어 본 적도 없는데, 그분이 왜 자기 마음대로 내 죄를 대신 지셨단 말인가?
그것도 나의 것만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의 죄를 대신 지셨고,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것을 모두 자기 몸으로 지셨다는 것이다.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었다.
뒤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초대 교회 교인들의 히브리적 해석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그 수수께끼의 답답함을 벗어 버릴 수 있었다.
도대체 자기 죄를 갚기 위하여 양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 희생시킬 줄 모르던 이 한 민족의 핏줄에서 태어난 내가 어찌 그들의 "희생 제물" 논리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목사가 된 지 6년이 된 지금에도 아직 나는 이 대속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 오히려 무리가 된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양식집에 가면 밥을 접시에 담아 준다. 그것을 삼지창처럼 생긴 포크로 떠서 먹어야 한다. 어떤 이는 칼과 포크를 양손에 들고 밥을 인절미처럼 궁글러 포크의 등에다 밀어붙여 잘도 먹더라만 도무지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은 그게 폼도 좋고 맛도 있을지 모르나, 나는 주발에 담은 밥을 숟갈로 푹푹 떠서 먹어야 한다.
그게 밥 먹는 맛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단 말이다. 같은 밥이지만 어떤 그릇에 담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그릇이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끊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는 진리"가 중요하지 그것을 설명한 "대속의 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갚으려고 죄 없는 양과 비둘기와 황소 따위를 다반사로 대신 잡아 바치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알맞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었으리라. (대속의 교리를 말한 바울도 예수도 결국 유대인이셨다!) 그러나 나 대신 누가 종아리만 한 대 맞아도 견디지 못하는 이 한민족의 아들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이었다. 어째서 그분의 죽음이 시(時)와 공(空)의 장벽을 뛰어 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끊어질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는지, 나는 그 까닭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 까닭을 설명하는 유대인들의 "대속 교리"는 나에게 있어 쌀 밥을 담은 접시처럼 도무지 어색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다시 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과 연결되는 죽음이라는 사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 그것을 하느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으면 되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분이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만민에게 상관되는 분이라면 그분의 죽음은 유대인들의 해석을 넘어서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내 죄를 대속하신 분이라기보다는 나의 삶을 바꿔놓으시는 분이다.
성서에서 내가 만나는 예수님은 바로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듯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으신 분이다.
베드로는 그분을 만나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잡는 어부로 바뀌었다.
바울은 그분을 만나 율법을 위하여 사람을 때려잡던 삶이 바뀌어
사람을 위하여 율법주의자들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창녀 마리아는 성녀 마리아가 되었고,
자기만 알던 삭개오는 자기 집 문밖의 가난한 자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일이 예를 들 필요조차 없다.
그분은 과연 소경을 눈뜨게 하셨고 보는 자는 소경이 되게 하셨다.
자기의 삶에 자신만만하던 젊은 부자는 그분을 만난 후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
그분은 서있는 자는 넘어뜨리고 넘어진 자는 일으키셨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의인을 죄인으로 만드셨다.
어제의 삶이 오늘 그분을 만나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그분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만난 시늉만 했든지 아니면 그때에도 숱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분을 구경만 하고 스쳐지나간 것뿐이다.
나는 예수님을 순간순간 만난다.
참으로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내가 그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경우보다는 내가 있는 곳으로 그분이 오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내 죄를 속하셨다는 대속의 교리가 나에게 주는 감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러움이다)보다 몇 배 더 뜨거운 감격을, 지금 이 역사 속에서 나에게 오시는 그분이 주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유치장 독방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철창문을 소리 나게 닫아걸고 관리가 돌아갔을 때 남은 것은 말 못할 적막과 알 수 없는 미래의 공포 속에 던져진 나 자신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두운 방구석에서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겨진 군용 담요 한 장뿐이었다.
담요를 끌어다 무릎을 덮고 앉았다.
그때 구석 쪽에서 누군가가 웃는 듯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겁이 나서
"누구요?"
하고 속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제 오니? 너를 많이 기다렸다. 반갑구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은 뚜렷하게 계속되었다.
"내가 누구냐고? 너는 목사라면서 나를 모르니?"
나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반갑고 기뻤다.
"너희는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고..."
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그 순간 내 생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만나 주시는 그분을 만났었다.
두려움은 어디론지 사라졌고 잃었던 밥맛도 되찾았다.
그때 그 유치장 독방에 그분은 나보다 먼저 가 계시다가 나를 반겨 주셨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문득 문득 옳은 일을 하다가 공연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들의 얼굴에서 나는 예수님을 본다.
그분은 옛날 2천 년 전에만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이 서울 구석에서 거듭거듭 성육신하신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알몸으로 오시는 임이여
지난 날
나사렛 예수라는 옷을 입고 가난한 호숫가를 거니셨듯이,
오늘은 나를 당신의 옷으로 두르시고
동강난 이 강산에 오십시오.
가난한 자는 아직도 많습니다.
이 마을 언덕 골짜기, 서울 가는 길목에,
남루한 이 몸은 그대로 당신의 옷이 되어
바람 부는 언덕에 펄럭이겠습니다.
펄럭이다가
남에서 올라오던 나그네,
북에서 내려오던 나그네,
칼 든 자 만나 쓰러져 뒹굴 때
당신의 몸을 떠나
그의 몸을 감싸겠습니다.
당신의 몸에서 또 다른 당신의 몸으로
펄럭이며 깃발처럼 옮겨 다니겠습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분에 관한 옛 사람들의 설명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초호화판 호텔에서 성찬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모임을 가지는 분들이 있는 모양인데 도대체 "여우도 참새도 있는 보금자리가 나에게는 없다"던 그분을 어떻게 믿는 이들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그렇게 안락한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도할 때, 아직도 감옥에 갇혀 계시는 그분은 도대체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목소리를 맞추어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니까 그러면 됐다고 흐믓해 하실까?
진리는 진리다.
어떤 그릇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다.
삶은 삶이다.
어떤 옷으로도 감추어 둘 수 없다.
교리는 부단히 비워져야하고
옷은 부지런히 갈아입어야한다.
새 진리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교리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깨어져야 할 때 깨어지지 않으면
그 귀중한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원효가 이 나라 모든 중들보다 한결 높은 고승(高僧)인 까닭은
그가 감히 불교의 규례를 깨고 불교의 진리를 삶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터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은 그리스도교에 갇혀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고 나의 생명이 성숙하여 그리스도교를 깨뜨리는
참된 하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나의 생명을 보호하는 그릇이요 옷이다.
그러나 언제고 이 그릇은 비워져야 한다.
언제고 이 옷은 벗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부활이 없으매 모든 신앙생활이 아무것도 아니요 오히려 억울함이듯이,
나의 그리스도교 생활이란 한낱 무덤일 뿐이다.
강을 건넌 다음 나룻배를 등에 지고 가는 자가 어디 있는가?
***이현주 목사님***
첫댓글 교리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압축하고 요약한 것이다. 원 교리는 성경이다. 교리에 관심있다면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교회)하느님 백성들이 서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니, 교회가 깊고 정확한 공부로 교리를 해석하고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목사님의 글이 참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