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의 「임진 적벽도」는 내 고향 고랑포 나루터를 중심구도로 선과 점묘로 활달하면서도 섬세하게 정경을 전개한다. 높낮은 산들이 배수진을 펼치고 있다. 나루터 오르막 오른 쪽 길가, 석축을 둥글게 높이 쌓올리고 그 위에 소박한 정자 한 채가 한적하다. 길을 따라 오르면 사립문이 활짝 열린 단출한 집 두어 채가 눈에 들어온다. 전면에는 너른 임진강이 흐른다. 강의 한가운데는 노를 내린 나룻배 한 척이 한가로이 떠있다. 나루터에는 서너 척의 나룻배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고 배에서 막 내린 길손과 마주 인사를 나누는 사공, 마중 나온 듯한 당나귀와 하인, 그리고 나귀를 타고 나루터로 내려오는 나그네가 보인다. 석벽 위 왼쪽으로 멀리 사라지는 소로에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와 동자가 눈에 띤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강과 경계를 그으며 강 건너 고원을 어깨로 들어올리며 우뚝 서있는 석벽의 기개氣槪이다.
이 석벽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편과 저편에 엇갈려 이어가고 그 사이에 흰모래 사장이 들어선다. 어렸을 때 듣기로는 석벽과 모래사장과 장강을 갖춘 절경이 동양에 세(?) 곳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점기에 일본이 개성에 가까운 고랑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위락처 개발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내 고향 고랑포에서 강 건너를 바라보면 중생대 주라기에 퇴적층이 이루어 놓은 해발 675m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감악산이 솟아있다. 임진강 석벽은 신생대에 깊은 골짜기를 용암이 흐르며 완전히 메우고 세월이 지나면서 현무암으로 변신했고, 그 위를 함경도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한강 하류로 굽이굽이 곡류를 이루며 흘러들면서 침식한 결과로 70리 석벽이 강 이편저편에 이어질 듯 끊기며 빗겨 마주 바라보는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특이한 산수적벽은 수많은 묵객과 시선들을 불러들였음 직하다.
목은牧隱선생은 '고호팔경皐湖八景'사언시四言詩에 고랑포의 8가지 풍광을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다.
掛嵒晩河(괘암만하) 강 양쪽에 우뚝 솟은 석벽에 저녁 안개가 몽연蒙然히 서리니 어찌 절경이 아니리요
芝灘漁火(지탄어화) 고호皐湖고호의 적막한 밤을 깨트리는 여울물 소리와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물결 사이로 너울 거리 도다
嵋城初月(미성초월) 자미산嵫嵋山에 곱게 떠오른 달이 강에 비치니 금실금실 흐르는 금빛 물결 또한 흥을 돋우누나
羅陵落照(라능낙조) 역사는 길고 설음은 많았던 신라 경순왕 능에 석양은 가물거리며 떨어지는구나
酌臺暮雨(작대모우) 목은선생의 낚시터에 저무는 안개는 시절 낚는 어부를 감추는 도다
石浦歸帆(석포귀범) 순풍에 돛단배는 저녁놀을 받으며 석벽 밑으로 소리 없이 돌아오니 한 폭의 그림이로다
赤壁丹楓(적벽단풍) 강수를 휘두른 석벽 단풍이 맑은 물 속에 잠기니 선유객은 더욱 흥을 돋우는 도다
平沙落雁(평사낙안) 백사장 맑은 물가에 내린 기러기 떼도 또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도다
*위의 시해詩解는 고송皐松 이헌李憲(字) 상想(字), 나의 자부慈父께서 손수 번역하신 것이다.
고랑포를 소재로 하는 목은선생의 시와 겸재의 묵화,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제 때의 엽서를 확대복사 해주신 고랑포 포구 사진 한 장과 더불어 초등학교 1학년 때 떠난 고랑포는 내 영혼 깊은 곳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뻐꾹 한 번에 한 뼘,
뻐꾹뻐꾹 두 번에 두 뼘씩
앞산뒷산을 물들여 가는 연둣빛 뻐꾹 시계소리
옛물 물고랑 깨우며 내 안에 강물 한줄기 흐른다
마지리 두지리 장파리 지나
파평산 감악산 휘둘러 장마루에 오르면
강 건너 백학고원 학처럼 외다리로 서본다
잃었던 유년의 강
산마루 물미끄럼 첨벙!
느린 물살 임진강에 합수한다
옛물 물고랑에 일렁이는
뻐꾹새 산조
시간의 섬으로 머물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 물처럼 녹지도 않는다
-졸시 '뻐꾹새의 강' 전문
어느 한순간 물처럼 녹지도 않으며 뻐꾹새 산조로 내 영혼에 머물러 있는 내 유년의 고향은 무작정 고통과 노동이 없는 이상향으로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다. 학처럼 외다리로 위태롭게 그러나 그 위태로움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은 내 고향이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뺏고 뺏기는 요충지였기 때문인 듯하다. 풍요로운 임진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 유물이 발굴 된 것으로 보아 임진강은 선사시대부터 한강유역과 남부지방으로 문물을 전파시키는 중간 매개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조와 이씨조선, 그리고 6‧25 사변에 이르기까지 임진강은 천연적인 방어 요쇄로써 치열한 전략적 각축장이었다. 이곳은 동란 후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안에 경순왕릉처럼 외따로 고즈넉이, 그러나 땅굴이 발견되어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아련한 그리움과 쓸쓸한 적막감과 아름다운 아픔으로 내게 밀물지는 것이다.
가르마 같은 휴전선
첫 천년 사직 개성에 조아리고
백성들 몸보전 고랑포에 잠든 경순왕
참배하고 그림자 하나 어둠처럼 내려온다
베옷자락 강물에 펄럭이며 물푸레나무
물길 따라 사라져간 비사벌은 어디쯤일까
망국의 태자 한숨마다 뒤따라 내려온다
녹쓴 휴전선 철조망
돌이켜 맨머리 빈손 아버지의 땅
비무장지대에 갇혀버린 고향 땅
넘나드는 나비 등에 등짐 지우고
가슴에 여울지는 강물 거두면서
노을노을 저녁 들길에 그어진다
언제나
가르마 같은 군사분계선
-졸시 '경순왕릉 가는 길' 전문
우리 조상은 우리에게 대흥大興 이李씨라는 족보대계에도 없을 듯한 희귀한 족보를 넘겨주었다. 우리 친족 장손들은 고려의 후예로 살기를 원하며 강화도에서 뱃길건너 삼성도에 지금도 살고 있다. 이성계의 회군을 왕위찬탈로 보고 근본적으로 이씨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대륙의 우리 국토를 포기한 이씨조선의 권력야욕에 대해서 쓸모도 없는 분개를 품고 있고, 그 때문에 최근 수도를 남진하려는 계획이 몹시 못마땅하다. 어땠건 선조들은 경북 의성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야했고, 방원때 대흥군이라는 칭호도 회복되고 귀양은 풀렸다지만 두 임금을 섬기며 조선의 녹을 먹을 수 없다고 전주 이씨 가문을 버리고 대흥 이씨로 새로이 태어난 일족 모두 오랑캐조차 범접하지 못한 강화도에서 또 뱃길 따라 절해의 섬으로 아예 들어 가버렸다는 것이다. 까마득한 후손들이야 조선왕조 5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선조들의 고결한 뜻을 흠모하지만 과거에 급제 벼슬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나의 조부는 청년의 때에 절해고도에 갇혀 살아야하는 자신의 답답한 운명을 한 마리 소에 떠넘기며, 내 대신 네가 울라며 산정 소나무에 목을 바싹 비끌어 매놓고 혈혈단신 상선을 타고 섬을 떠나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이 고려의 도읍 개성에 가까운 고랑포였다. 그때만 해도 고랑포구는 큰 상선이 드나드는 몹시 붐비는 곳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허리가 잘룩한 이곳은 동서를 관통하는 도로가 달리 없었던 때에 관동 특산물이 산길을 넘어 서해에 가까운 이곳으로 집결하여 임진강을 따라 한강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본고장이었다. 내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자두 살구 열매에 살이 오르기 시작할 무렵이면, 각처의 무당들이 몰려들어 포구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전국 굿대회 같은 것을 했다.
떠있다, 별처럼 저물녘 하늘에
비무장 초소 하나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 경순왕릉 너머로
기러기도 제 고향 찾아 날아드는
가을 길목에서
적막한 들녘이 바람에 나부낀다
'평양/개성'갈림길 이정표가
눈을 찌르며 달려든다
돌아올 수 있는 다리
그 건너 내 고향에서
임진강은 동서로 말없이 흘러가는데
기름진 들녘엔
인가 하나 없어 서럽다
내 어릴 적 어머니를 위해
잎 따던 뽕나무 숲은 간데 없고
폭약 내음 얼크러진 한 그루 뽕나무만이
반짝이는 희망으로 석벽 위에 걸려 있다
-졸시 '돌아올 수 있는 다리-고호皐湖 가는 길' 전문
*고호는 내 고향 고랑포(高浪浦)의 다른 이름
임진강은 내가 돌아가야 할 모천母川이기도 하지만, 복어나 연어의 치어稚魚가 성어成魚가 되어 반드시 돌아가는 일회적 회귀의 장소로서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임진강은 나의 유년의 강으로 언제나 유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한 때로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세속에 찌들고 도진都塵에 숨이 차 오를 때, 한마디로 세상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을 때, 나는 뻐꾹새의 산조로 가슴을 설레이며 근심 걱정 없던 어린 시절로 무시로 찾아들 수 있다. 공간적인 의미의 고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에서 뚝 잘라내어 때묻지 않고 한결같은 유년의 때이기 때문이다.
살살 긁으면 완강히 부풀어오르는 황복
하얀 배 톡톡 약올리듯 종알거림 터트려 놓고
감당도 못하면서 또 건드렸느냐고
엄마한테 혼쭐나서 쩔쩔매는 오빠
나는 그 때마다 더 재미있어 했다
고랑포에 노랑띠 황복, 웃고랑 자지포에 자지복어
복어가 고향 찾아들 듯 나도 찾아간다
세상의 압박붕대 조여올 때
지도 밖 꽃길 앞질러 시간의 징검돌
돌다리 밟으며
약이 될까 독이 될까, 봄 산란하는 바다
떠나, 푸들푸들 강줄기 거스르며 먼저 온 놈
회쳐놓고 바다를 들어붓듯 넉넉하게
목줄기에 탁탁 털어 붓는 한잔의 소주
시심도 무릎도 건너지핀 강물 풀리듯 풀려가고
아무려나 고향도 나그네 길목이라지만
어차피 억겁회귀 바다로 떠나는 물목이라지만
오라비야, 복어처럼 성깔부리지 말자고, 언제나
우리 가슴엔 손잡고 돌아갈 어린 섬,
떠도는 섬이 있다고, 한잔, 또 한잔
- 졸시 '고랑포 황복' 전문
고려의 후예로서 자아인식과 고랑포 석벽의 기개와 남북대치의 민족비극 현장으로서 민통선 안의 고향과 세월에 물들지 않는 유년의 임진강은 별로 세상에 뒤섞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는 나의 성정性情을 키워놓았다. 이들은 또한 나에게 시정詩情을 길어 올리게 해주는 발원의 샘이기도 하다.
내리꽂히는 살촉의 통증이다
골 깊은 저기압
태풍의 눈 속에서
생生의 안전띠 조이고 있다
-졸시 '허리케인 그리움' 일부
그래서인지 조상 탓인지는 몰라도 어느 회의에서건 방향이 이것이 아니다 싶을 때 모두 침묵하면 눈치코치 없이 대들 때나, 운전을 못하면 장애자라는 요즘 세상에 왜 운전을 아니하느냐고 가끔 물어올 때, 면허증이 없어서라고 태연히 대답하며 헛바퀴만 돌리는 내 속은 마냥 편하다.
(자전거라도 타봐?)
반세기 장고 끝에
아들아이 자전거 뒤를 따라 나선다
“엄마, 넓은 운동장 다 두고
자꾸 농구대하고 박치기만 해”
바퀴 달린 어느 것 하나도
내 스스로 굴리지 못한다
무면허 내 인생의 수레바퀴
속없는 굴렁쇠만 굴리며
바퀴벌레도 황급히 제 갈길 달려가는데
오늘도 나는 헛바퀴만 돌리고 있다
-졸시 '무면허 내 인생' 전문
고향 못지 않게 내 영혼에 쉴만한 물가가 되어주고 시심과 가락을 준 분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고송한시집皐松漢詩集 5집을 상재하신 나의 아버지와, 내게 영문학과 시의 길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찾아 뵙고 몇 마디 대화면 어지럽고 사나운 심사를 정화시켜주시는 피 천득 선생님,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여 나에게 위로와 시론과 시의 샘을 대주고 있는 영국의 시성詩聖 윌리엄 워즈워드를 들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고랑포 우체국장으로 시작하여 평생 체신부 공무원으로 정년퇴임하셨다. 퇴임 후에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한문으로 한시를 즐기시다가 한 수 두 수 쓰시기 시작하시면서 시인으로 거듭나는 여생을 누리시었다. 아버지는 5언 또는 7언 기승전결의 4행시에 세상만사와 온갖 시감을 함축적으로 담아내시는 한편, 우리말 역시譯詩, 시해詩解, 시의詩意를 덧붙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한시에서 두운 각운과 역시에서 우리 고장 임진강변의 엇박자 가락을, 섹스피어의 소네트에서 정형 율격과 두운 및 각운의 묘미를, 워즈워드의 장시에서 전형적인 보격과 겹박자 운율을 배웠다. 나는 또한 이들에게서 문학은 상처받고 지친 영혼에게 위로를 주고 새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구별된 공간이라는 것도 배웠다.
古今石壁留(고금석벽유) 석벽은 지금도 변함없고
依舊長流水(의구장유수) 강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네
居民更未歸(거민갱미귀) 고향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地虛葦風水(지허위풍수) 빈터엔 갈대만이 나부끼네
- 고송皐松 '향회鄕懷'
올해 춘추 아흔 다섯이신 피선생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에게 맑고 맑은 젊은 피를 수혈하신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시와 영문학사를 강의하시던 그때의 그 카랑카랑한 음성, 세상을 바라보시는 그 때의 그 호기심과 따듯한 눈길, 하나도 변함이 없으신 선생님의 영원한 젊음은 정말 불가사의다. 나는 가능한 선생님처럼 군더더기 다 비워낸 동양화 같은 단시短詩 속에서 우주자연의 비밀과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과 어린아이 같은 무지개 빛 생명력이 잡힐 듯이 펄펄 뛰게 하고 싶다. 선생님의 옛적 시 한 편과 근작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햇빛에 물살이
잉어같이 뛴다
“날들었다!” 부르는 소리
멀리 메아리친다
- 피천득의 '비 개고' 전문
붉은 악마들의
끓는 피
슛! 슛! 슛! 볼이
적의 문을 부수는
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
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는 사람은
정말 미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