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할리우드 시나리오 시스템은 '분업화'와 '단계화'라는 말로 두루뭉실하게 설명된다. 하지만 그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밀한 작업을 거쳐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헐리우드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힘은 철저한 시나리오 작업에서 나온다.
세상에서 고립된 청년에게 용기를 북돋는 어른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원한다고 하자.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톰 행크스를 보이스카웃 단장으로, 맷 데이먼을 역경을 물리치는 청년으로, 클레어 데인즈를 애인에게 힘을 주는 여자친구로 내정할 것이다. 그리고 감독으로는 로버트 저메키스 정도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없지만 이 네명이 OK 사인을 보내고 계약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면서 영화제작에 돌입한다. 헐리우드 기획영화는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한편의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로버트 알트만의 헐리우드 풍자극 <플레이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25단어 이내로 얘기하라"는 팀 로빈스의 요구는, 그만의 독특한 괴벽이 아니라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보편적인 마인드다. 1년에 수백 편의 시나리오를 접해야 하는 그들에게, 영화제작은 두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컨셉션(conception,착상)'에서 시작한다. 관객들이 성향과 기호를 주시하는 제작자는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 '트렌드(trend,경향)'를 파악하고, 그 중에서 돈이 되겠다 싶은 아이템을 뽑아 짧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할리우드는 가장 간단명료하게 요약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평가한다. 영화는 단순한 컨셉션에서 시작하지만,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건 '흥행요소(elements)'다. 유명 감독, 스타, 베스트셀러, 흥행가도를 달리는 제작자 등의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어떠한 컨셉션에 관심을 보이면, '영화제작 청신호'다. 이러한 요소들은 패키지를 이루어 제작자를 자극한다(스콜세지-드 니로 콤비,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등).
하지만 컨셉션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가 시나리오를 쓰거나 혹은 컨셉션을 '트리트먼트(treatment,가공)'해야 한다. 작가가 고용되고, 이 순간이 바로 '디벨로프먼트(development,전개)'가 시작되는 시점이다.(디벨로프먼트는 '시나리오에서 촬영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제작자가 원작의 판권을 사는 경우, 헐리우드는 한국과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는 '옵션(option)계약'이라는 것이 있다. 옵션 계약 기간 동안 영화화를 결정하면 판권을 구입하지만, 제작을 포기하면 원작은 다시 자유롭게 풀린다. 시나리오 작가가 혼자서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때도 한국과 할리우드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의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사에 직접 찾아가거나 공모전에서 내지만, 할리우드엔 에이전트가 존재한다.
하나의 착상을 작가에 의해 '스토리 아웃라인(story outline)'으로 변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는 짧은 글이다. 우리가 흔히 '시놉시스(synopsis)'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스토리의 아웃라인을 잡는 과정이다. 그리고 트리트먼트 단계로 넘어간다.
트리트먼트는 스토리 아웃라인을 몇 개의 드라마 덩어리로 나누는 것이다. 트리트먼트는 영화가 진행되는 순서대로 주요 배역과 액션을 제시한다. 스토리 아웃라인 단계에서는, 영화에서 어떤 순서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는 정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런 이야기다'라는 것을 제시할 뿐이다. 트리트먼트를 거치면 영화의 극적 구조가 어떤 순서로 진행될 것인가가 결정된다. 간단히 말하면 트리트먼트는 스토리를 플롯으로 바꾸는 작업이며, 제작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영화를 파악할 수 있다.
트리트먼트가 끝나고 영화의 구조가 대강 정해지면 비로소 시나리오 작업으로 들어간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집필은 꽤 복잡하며, 크게 세 개의 과정으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초고(first draft)' 혹은 '임시 시나리오(temporary screenplay)'를 만드는 과정. 이 단계부터 시나리오 작가는 철저한 계약 아래서 작업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몇 번을 고쳐 쓰든 간에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시나리오를 쓰는 셈이다. 임시 시나리오는 '작가 최종고(author's final)'라고도 불리는데, 처음 단계에서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최종고만을 넘기고 작업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임시 시나리오를 받은 제작자는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두 번째 단계는 '최종 시나리오(final screenplay)'를 만드는 과정이다. 새로운 시나리오 작가가 고용되기도 하고, 장르와 분야(대사,지문,상황 등)에 따라 분업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몇 고(稿)'라고 표현하는 단계가 최종 시나리오 집필 단계인데, 제작자가 만족할 때까지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계약 관계다. 무턱대고 시나리오를 쓰며 무료로 봉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최종 시나리오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수정 최종고(revised final)'가 남았다. 최종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한 번의 수정 단계를 거친다. 한국에는 없는 개념이지만, 할리우드에는 '수정1고, 수정2고...'가 존재한다. 수정이 모두 끝난 상태가 수종 최종고인 셈이다. 수정 최종고는 촬영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시나리오다.
아직 끝난게 아니다.
촬영 중에도 시나리오는 조금씩 고쳐진다. 수정 최종고마저 고쳐질 때, 할리우드에서는 고쳐진 페이지에 꼭 날짜를 기입하고 백지를 끼워넣는다.
시나리오에서 현장으로
시나리오만으로 촬영을 시작할 수는 없다. 현장 작업에 적합하도록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그 첫 단계가 '마스터-신 대본(master-scene script)'이다. 신에 따라 구분된 마스터-신 대본에는 등장인물 이름, 인물지시, 대사, 무대지시(배우들 간의 행동 지시), 페이지 번호, 신 번호 등이 기입된다. 마스터-신 대본은 다시 '촬영 대본(shooting script)'으로 변한다.
촬영 대본의 중심은 카메라의 위치다. 마스터-신 대본에서는 하나의 신이었지만 촬영 대본에서는 카메라 앵글에 따라 5개의 신으로 바뀔 수도 있다.(이렇게 쪼개진 신은 편집에 의해 더 많은 장면으로 분할된다). 촬영 대본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지침서며, 각 액션과 시점의 변화를 지시한다. 촬영 대본 단계에 오면 시나리오 작가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대게 촬영 대본 1페이지는 1분에 해당하며, 영화 한편에 90-120장 정도 분량이다.
이젠 정말 마지막 시나리오, '커팅 콘티뉴이티(cutting continuity)'다. 이것은 극장에 상영되는 영화의 장면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 이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시나리오에도 취약점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전체적인 수정이 아닌 부분 수정 과정을 거친다. 바로 '시나리오 개작(script doctoring)'이다.
<대부>에서 비토 콜레오네가 아들 마이클에게 "상원의원 콜레오네...주지사 콜레오네..."를 말하며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 장면은, 마리오 푸조나 코폴라의 작품이 아니라 <차이나타운>을 썼던 1급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타운의 솜씨였다. 크레디트에 그의 이름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대부>에 자신의 체취를 남겨 놓았다. 타운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딕 트레이시>같은 영화에도 이름없이 개작 작업에 참여했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은 메이저 영화사 작품에서 통용되는 시스템이다.
인디펜던트 영화사의 경우엔, 제작자와 몇 명의 수뇌부가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제작을 결정하고 투자자가 결정되면 곧바로 제작에 들어간다.
에이전트와 스토리 에디터
할리우드의 에이전트는 가능성 있는 아이템을 제작자에게 연결하는 사람이다. 제작자들은 에이전트의 상업적 마인드를 신뢰하며, 에이젠트는 잠재력 있는 시나리오, 감독, 배우 등을 제작자에게 연결한다. 에이전트가 한 편의 시나리오를 선택해 제작자에게 소개하면, 제작자는 스튜디오의 '스토리 부서(story department)'에 시나리오를 넘긴다. 그곳은 리서치를 통해 아이템을 만들어내고, 들어온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곳인데, 부서 책임자는 제작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하는 핵심 인물이다.
스토리 부서로 시나리오가 넘어오면 책임자는 '스토리 에디터(story editor)'에게 넘긴다. 에디터는 '리더(reader)'에게 다시 넘기고, 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부서 책임자에게 전달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꼭 에이전트를 통해 제작사와 연결되는 건 아니다. 스튜디오의 스토리 에디터를 직접 만나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스토리 에디터보다 에이전트 만나기가 더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가 선택되면 계약에 들어간다. 작품료는 '착수금(front end)'과 '성과급(back end)'으로 분류되는데, 착수금은 말그대로 작품료다. 착수금이 적을수록 흥행에 대한 배당인 성과급이 올라간다. 이런 식의 흥정은 비단 시나리오 작가만이 아니라 감독이나 배우들에게도 보편적으로 통용된다. 할리우드에서는 시나리오 작가도 인센티브 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첫댓글 노엘님!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v
금마루님 건필하세요.
그것은태양과어울린...님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 정말 감사 ^^*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시나리오 강의 듣는 기분이에요.
자료 감사해요^_^ 잘봤어요, 근데 한가지 쓸데없는거 물어볼게 있는데요,ㅠㅠ 위에 예로 드신 영화중에 멧데이먼 나오는거 그 영화제목이 뭐죠?? ㅠ.ㅠ 영화 로 만들어진거 맞나요??ㅠㅠ 죄송합니당,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