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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발현악기. 거의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상고시대에 중국을 정점으로 동남아 일대로 퍼져 나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 빗살무늬토기
등잔모양토기- 한번에 다섯잔...
임신서기석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맹서한 것을 새긴 신라 때의 비석.1934년 5월 경주 북쪽의 현곡면(見谷面)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냇돌의 자연석에 5행으로 74자를 새겼다. 돌의 길이는 약 34cm, 너비는 윗부분이 12.5cm이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두께는 약 2cm이며, 1행 18자, 2행 16자, 3행 14자, 4행 16자, 5행 10자로 되어 있다. 글자는 모두 알아볼 수 있으며,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식의 한문체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맹서)을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받아들임을 맹서한다.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詩)·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
금강역사상
국보 제 126호 무구정광대다리니경(복제품)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釋迦塔) 제3층 탑신(塔身)의 윗면 중앙부에 뚫려진 네모형으로 50cm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발견된 일련의 사리장치 유물이다.
이 사리공의 중심부에 놓여졌던 너비 17.2cm, 높이 18cm의 전각형(殿閣形) 금동 사리외함(舍利外函) 안에는 계란형으로 된 은제(銀製)의 2중 사리함을 중앙에 안치하고, 그 둘레에는 장방형(長方形)의 금동 사리함(舍利函) 1좌, 은제 사리소대(舍利小臺) 1좌, 목판인쇄의 다라니경(陀羅尼經) 권1축 등이 비단에 싼 향류, 각종 구슬과 함께 장치되어 있었다.
은제의 비천상(飛天像), 동경(銅鏡), 소형목탑비취곡옥(小形木塔翡翠曲玉) 등은 섬유편 및 잡물과 함께 사리공 안에 놓인 금동사리외함 둘레에 깔려 있었으며, 이 금동사리외함 기단부 바깥 바닥에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서명(書銘) 4각형 종이뭉치가 장치되어 있었으나, 종이뭉치는 거의 의결(疑結)되어 내용을 조사할 수 없게 되었다.
황룡사지에서 출토 되었다는 거대한 치미-황룡사가 얼마나 거대한 절이 었는지
가늠케 한다.
황룡사는 약 2만 5천 평의 늪지를 메워 만든 터에 세운 신라시대의 호국 사찰이다. 절의 규모도 크지만 그곳에 사용된 기와 역시 그러하다. 특히 치미는 높이가 무려 182센치미터, 바닥 너비가 자그마치 105센치미터에 달한다. 황룡사의 어느 건물 지붕 꼭대기에 올려져 건물의 균형을 유지하고, 그 웅장함을 자랑했던 것 같다.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한 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 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다. 그런데 양쪽 옆면과 뒷면에 연꽃무늬와 남녀의 얼굴을 교대로 새겨 넣은 것에 주목할 만하다. 딱딱해 보이고 엄숙해 보이는 호국 사찰의 꼭대기에 순박한 웃음을 짓는 시골 노인 부부와 효심 깊은 그의 아들이나 며느리로 보이는 인물을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이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솔직 담백했던 신라인들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치미에 사람을 새겨 넣은 것은 치미를 만들었던 와공이었겠으나, 그것을 건물 위에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한 많은 사람들과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안압지
국보 207호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 )복제품 천마도장니는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말그림이다. 가로 75㎝, 세로 53㎝, 두께는 약 6㎜로 1973년 경주 황남동고분 155호분(천마총)에서 발견되었다.
천마도가 그려져 있는 채화판은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맨 위에 고운 껍질로 누빈 후,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 것이다. 중앙에는 흰색으로 천마가 그려져 있으며, 테두리는 흰색·붉은색·갈색·검정색의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천마는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다리 앞뒤에 고리모양의 돌기가 나와 있고 혀를 내민 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준다. 이는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나르는 역할이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5∼6세기의 신라시대에 그려진 천마도의 천마의 모습 및 테두리의 덩굴무늬는 고구려 무용총이나 고분벽화의 무늬와 같은 양식으로, 신라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신라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크다. 천마도는 사실 말이 아니고 신화에 등장하는 기린(麒麟)이라고...
천마총 출토 금관(국보 제188호) 관(棺) 안에서 착장(着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천마총 출토 금제나비형 관식(복제품, 국보 제 617호) , 금제내관(복제품, 국보 제189호) , 금제조익형관식(보물 618호)-이 관식(冠飾)에는 무엇엔가 고착시켰던 듯 못구멍이 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에 고착 시켰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제과대 및 요패(국보 190호) 관 안에서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천마총 내부 천마총은 사적 40호인 경주황남리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에 속해있는 무덤이다. 경주황남리고분군에는 크고 작은 무덤 20여 기가 있는데, 1973년 '대릉원' 이란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이 안에는 천마총뿐만 아니라, 황남대총, 검검총 등과 미추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대부분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진처럼 돌을 두텁게 덮어 두었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 고분과 달리 도굴되지 않고 원형을 온전히 보존 할 수있던 것이다.그 중 천마총은 금관·금제허리띠(금제과대)등을 비롯하여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나왔으며, 색이 칠해진 천마도가 나와 신라시대 그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무덤으로 추정됨.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됨.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장니로 인해 천마총이라 불림.
면적 : 201,945㎡
1963년 1월 21일 사적 40호 지정
황룡사 터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여기에도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비지가 거의 탑을 완성했는데 꿈에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래서 탑의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가 다시 꿈을 꾸는데 금강역사가 나타나서 탑을 완성시키는 꿈을 꾸게 된다. 이에 아비지는 이것은 불력에 의한 탑이구나하여 탑을 완성하게된다. 이 탑의 높이는 무려 88미터에 이른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의 면적은 380,087㎡ 이고 신라의 왕궁 바로 옆에 지어졌다.
진평왕릉 1969년 사적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 4만 3645㎡. 631년경 조성. 구황동(九黃洞) 3층석탑의 동쪽,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그 동쪽에 명활산(明活山), 남쪽에 보문사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狼山)이 솟아 있다.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다. 다른 왕릉들과 달리 별다른 장식물도 없고 웅장한 봉분으로 사람을 기죽이는 맛도 없다. 이정표도 제대로 없어 가다보면 웬 카페와 설총묘가 보인다. 잘 못 들어간나 싶어 돌려 나오다 보니 농로길로 보이는 진흙탕길에 낡고 찌그러진 이정표가 보였다. 그 모습이 초라하여 왕릉 치고는 홀대 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마져 들었다. 인적도 드물어 걸을 때 마다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 붙었다. 내 눈에 띠는 것이라고는 왕릉옆에 저 미루나무가 고작이었다. 이 사진 찍고 차 돌려 다오다 나무에 부딪쳐 공연히 차만 찌그려 트렸다.
내 차 트렁크를 찌그려 트린 기울어진 나무. 똑바로 서 있었다면 범퍼로 막았을 텐데 저렇게 기울어진 탓에 트렁크가 찌그러 졌다.
첫댓글 위 사진들이 직접 찍은 거였어?.......박물관 내부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