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기원 전 6/2~기원 후 36년?)
1.생애
신약성경 4개의 복음서 서두에는 공통으로 세례자 요한이 소개되고 있다. 가장 일찍 쓰인 것으로 추정하는 마르코 복음서(1, 1-8)는 요한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마태오 복음서(3, 1-20)와 루카 복음서(3, 1-11)와 거의 유사하게 쓰여 있다.
요한의 탄생과 가족 사항은 루카 복음서(1, 5-25)가 전하고 있는데, 이 보도에 따르면 요한은 사제직 신분을 계승하는 아론계 혈통의 레위 지파이며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의 아들이다. 사제직은 유다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이며 세습직이다. 그런데 요한은 아버지 즈카르야의 사제직의 계승 하지 않는데, 이것은 당시 유다사회의 최고 권위와 권력의 세습을 끊어 버린 셈이다. 그 대신 요한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회개시키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펼칠 구원을 준비하는 선구자이며 예언자가 될 것이다. (루카1,15-17;76-77) 루카는 요한과 예수 두 인물의 ‘잉태-탄생-유년-공적 생활 시작’에 대해 교차 보도하는 복음서 구조를 제시하며, 두 사람의 운명과 만남이 역사적 구세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과 동일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마르 8,28;루카 3,15)
2.활동
그는 요르단 지역의 광야 생활을 마친 뒤 요르단강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세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낙타 털옷과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생활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구약의 대 예언자 엘리야의 입성을 연상하게 한다.(2열왕1,8) 그 무렵 예수님도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았는데, 요한은 예수님이 복음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체포되었다. (마르 1,14;마태4,12)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의 녹음선포 운동을 전해 듣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그분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였다.(마태 11,2-6)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유로,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왕실의 도덕적 부패를 비판한 일이 빌미가 되어 비참하게 참수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루카와 요한 복음은 침묵한다. 한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진짜 이유는 민중들에게 엄청난 지지와 추종을 받는 그의 인기가 반란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숙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이유는 왕실 비판의 정치적 이유만이 아닌, 그가 전개한 세례 운동의 종교 사회적인 측면이 함께 크게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자크 뒤켄이 쓴 책 “예수, 5장 세례“에서 제시된 내용을 참고해본다.
<요한이 설교할 무렵 유다 민족을 위로해 주는 ‘글과 설교’가 쏟아져 나왔다. 유다인들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날이 곧 다가온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묵시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오늘날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때가 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된다“ 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엉뚱한 사기꾼들도 덩달아 예언자 행세를 하면서 구세주로 자처하는 혼란한 세상이었다. 불의가 부패가 점점 더 확산되자 군중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런 백성에게 행복한 내일도 찬란한 미래도 알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비난의 독설을 퍼붓는다. (마태 3,7;루카 3,7) 이렇게 요한은 군중을 달콤한 말과 글로 부채질하는 자들과는 영 딴판이다. 그는 예수보다 직설적이다. 요한이 이렇게 열정적이고 무시무시한 연설을 시작할 무렵 예수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한의 말이 직설적이고 두려웠음에도 군중을 떠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중에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요한을 기억하며 “요한은 유다인들을 덕과 정의로 대하고 하느님께는 신앙심으로 대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했던 덕망 있는 사람”으로 묘사할 정도이다. 문제는 요한이 대대적으로 세례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베푸는 세례는 종전의 기득권적 성전 집단과 세력에 대한 확연한 절연이며 엄청난 도전이었다. 세례에 사용된 물, 그 물의 상징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사막에 살거나 물이 귀한 민족들에게 물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바로 유다인들이 그렇다 성서에는 천국 같은 곳이나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곳을 묘사할 때, 거기에는 으레 맑은 샘물이 솟아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다교에는 물로 정결하게 하는 예식이 많다. 제관들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후에 몸을 깨끗하게 해야만 했는데 이때 맑게 흐르는 물을 ‘마임 하임-살아 있는 물’이라고 하며 빗물이나 길어 놓은 물이 아닌 흐르는 샘물을 이용했다. 왜냐하면 길어 놓은 물은 부정을 없애주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과 예수 시대에 유다인들은 그리스-로마의 거대한 외세의 영향력에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였고, 물로 그들 자신을 정화하겠다는 의지는 거의 강박관념처럼 되어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는데 가장 열을 올린 바리사이들이 그러했다. 대부분의 회당 랍비들은 바리사이들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모든 신자들에게 제관들의 의무 사항인 정결례를 철저히 지키라고 요구했다. 특히 이방인과 접촉한 물건과 옷은 반드시 물에 담가야 했다. 이처럼 물로써 유다인을 부정한 이방인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얻지 못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정결례를 자꾸 올릴 수밖에. 그런데 그 옛날 엘리야 예언자를 연상시키는 낙타 털 옷과 허리띠를 매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던 세례자 예언자 요한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터트렸다. 바로 세례 운동으로, 그가 터트린 혁명이란 바로 단 한 번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구원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 한 번 만에 끝나며 결정적이다. 또한 당시 관례로 되어있던 정결례는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에, 신심이 깊은 유대인들은 각자 자주 정결례인 목욕재계를 했던 반면, 요한은 침례를 공공연하게 베풀었다. 이것은 기득권의 성전 세력에 대한 엄청난 위협이고 도전이었다. 죄는 성전 사람들인 사제만 용서할 수 있는데, 무자격자인 평신도인 요한이 공공연하게 단 한 번 만에 부정과 죄를 씻어주어 용서받을 수 있게 하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제 자신의 굳이 성전에 바칠 봉헌물을 들고 제관들에게 세금을 내고 속죄를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돈을 써가며 힘든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진정을 뉘우치고 자신의 행실을 고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콸콸 흐르는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성전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 운동과 그 성공을 곱게 보아줄 리 만무하다. 세례자 요한이 하는 일은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요한은 아주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이 최고의 인물이라고 극찬하였다.(마태 11,11;루카 7,18절)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가 일으킨 세례운동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선구자 예언자였으며 동시에 이 운동으로 죽음을 앞당 길 수 밖에 없는 순교자가 되어야했다.>
<기울임체 내용>: 자크 뒤켄, 예수, 5장 세례의 내용을 거의 복사하였고 일부 편집했음을 밝힙니다.
입력: 최성옥 마리 에스텔(2022년 6월 26일 PM 20: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