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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6월 21일 일요정례법회
> 제목: 대종경 제3 수행품 53장
> 방길터 교무님 설법
> 타이핑: 백도원
1. 구산 방길터 교무님
겁나 교당이 편안하네요. 제 교당 같은데 어떡하죠? 제가 인사권은 없지만 보산님을 내년에 저하고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겁나게 편안하네요. 보산님하고 저는 동창이구요, 생일도 거의 비슷하고, 나이도 같고. 또 무엇보다도 머리에 든 생각이 같아요. 비슷하게. 별로 그래서 싸울 일도 없는 것 같고, 같이 동문서학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보산님이 안암교당을 통해서 열심히 교화를 하시고, 뭔가 활동을 하려고 애쓰실 때마다 제가 많이 도와드려야 하는데 항상 멀리서 응원만 했구요. 사실 제가 대학 교당에 있을 때, 우리 원광대학교 한의대 출신이나, 서울에 인연이 있던 똑똑한 친구들, 서울에 직장 잡아서 올라가면 이 안암교당에 소개를 많이 해줬어요. 그런데 잘 다니지 못하더라구. 한의대 다녔던 친구들은 보산님이 잘 챙겨서 지금 제법 안암교당에 뿌리를 내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애들은 잘 안 되더라구요. 물론 시집도 가고 그래서 그런데요, 제가 안암교당 교화에 일조를 했더랬습니다. 짝짝짝
2. 어눌하고 맑게 ∙ 진지하고 밝게
저는 겁나게 편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겁나게 편하게 들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사람은 좀 어눌해야죠. 어눌해야 만만하게 알고 막 파리떼 달라들 듯이 달라 들어요. 근데 너무 어눌하기만 하면 어떻습니까? 너무 어눌하면 사람이 바보스럽게 생각해서 무시를 합니다. 그래도 바보 소리 듣는 게 낫죠. 일단 어눌하고 볼 일이죠. 그런데 너무 어눌하면 안되니까 어때야 되냐면, 어눌하면서 맑아야 합니다. 어눌한 듯 하면서도 사람이 맑아야, 정말 진국 같고 값어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어떠십니까? 교도님들은? 너무 어눌하기만 하고 맑지 못하신가요? 어눌하기도 하고 맑기도 합니까? 두 개 답니까? 아니면 너무 맑기만 합니까?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어눌하고 맑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너무 혼탁해집니다. 어눌하면서 맑아야 하지만, 그때 반드시 진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또 진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휴 힘들어요. 교당에 와서도 좀 편안하게 공부하고 싶은데, 너무 진지하게 교리만 설명하면 재미없잖아요. 뭔가 좀 진지하지만 어때야 되죠? 밝아야 되고 유쾌해야 되고 그러죠? 진지하지만 유쾌해야 어눌하고 맑은 그 기운이 진지하면서 이 세상에 유쾌한 활동으로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공부 끝! 하하하. 더 이상 뭘 더 바라십니까? 뭘 더 알고 싶으세요? 질문! 사실 더 이상 할 거 없죠~
자 그런데, 어눌하고 맑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해요? 진지하고 밝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그것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나누기 위해서 이 교당이라는 공간을, 메르스가 위협하는 이 일요일 날, 이 교당을 찾아주셨습니다. 다행히 안암교당 기도 원력으로 어제는 메르스 확진 환자가 0명으로 나왔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데요. 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법회에 소중히 나오셨으니까, 제가 사람 살아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 간단히 말씀 드리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3. 내려놓기; 방하착 (放下着)
제가 오늘 말씀드릴 것은 이겁니다.
방 하 착 (放下着)
놓을 방, 아래 하, 붙을 착.
제가 방씨니까 항상 방으로 된 글씨를..^^
‘손을 아래로 내려라.’ ‘뭔가를 내려라.’ 이런 뜻입니다. 내려라 하는 말을 다른 말로, 우리 원불교적인 말로 표현하면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겠죠? 삶의 의욕이나, 삶에 충만된 거, 열정, 사랑, 증오, 슬픔, 화, 기쁨, 자비, 애욕, 어리석음, 이 많은 것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러면 내려놓으라고 그러는데, 무엇을 내려 놓을 것인가? 내려놓되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 요걸 또 고민을 해봐야 되겠죠. 어떻게 삶의 의욕을 내려놓을 것인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화를 내려놓고 세상을 어떻게 삽니까? 그래서 홧병 터져서 죽어버리면.. 화도 적당히 낼 줄 알아야 하죠. 자비스러운 것도 마찬가지죠. 너무 자비스럽기만 하면 어떻습니까? 아까 서두에 말씀 드린 내용과 똑같습니다.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려놓으라고 하는가? 그것을 알아봐야 하겠죠.
내가 정말 더 이상 가진 것도 없고 내가 정말 빈털터리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으라고 하는가. 내 삶이 정말 고단하고 역경에 찌들어 있고, 피곤하고, 지치고… 뭔가 내 삶의 미래가 내 눈에 확 나타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뭘 내려놓으라고 하요? 한번 찾아볼 필요가 있겠죠. 저도 항상 뭔가 내려놓기 위해서 가만히 내 인생을 생각해보면, 별로 가진 게 없어요. 제가 재산이 있습니까. 오로지 보증수표는 저의 부모님하고 처자식, 그리고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차 한대 하고. 현재 교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거 그거 말고는 갖고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뭐 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교도님들 다 그럴 겁니다. 내려놓으라고 그러면 마땅히 내려놓을 것이 없어.
당나라 때 불교가 굉장히 융성을 했죠. 그래서 중국 불교 얘기를 하면 항상 당나라 얘기를 하는데, 그 때 엄양 존자라는 사람하고 조주화상이 사람이 있었죠. 엄양존자라는 사람이 조주화상한테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떤가요?” 하고 물어요. 그러니까 조주화상이 “방하착” 이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말로 하면 “내려놔라” 이렇게 했겠죠. 근데 엄양이 납득이 안가요. “이미 내가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버려야 하는 겁니까?” 하고 반문을 해요. 그러니까 조주화상이 뭐라고 대답하냐면, “내려놓을 것이 없으면 다시 짊어지고 가라.” 이렇게 얘기를 해요. 이 때 엄양이 깨달았다고 해요. 불교 보면 항상 이렇게 깨달아요. 좀 소설 같기도 하고 그래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엄양이라는 사람이 깨달았다고 그래요. 이 “방하착” 이라는 얘기를 듣고.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소유인데요.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거죠. 이 방하착 하는 것은. 결국 이 방하착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관념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고, 동시에 버린다고 하는 관념마저 놓아버리라는 말일 겁니다. 이 방하착이라는 말을 해석하면요. 단순히 무엇이 손에는 없으니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없다고 하는 생각마저도 놔 버리라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이런 공부를 어디서 하고 있죠? 수도 없이 우리는 공부를 하는데, 공부하는 표준의 기본은 삼학 공부를 떠나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 상시응용시,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이 다 삼학 공부입니다. 우리는 평상시 이 삼학 공부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고, 사은으로 신앙을 하게 되는 거고, 조금 부족하면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일원상 서원문을 바탕으로…일원상 서원문은 뭐죠? 그냥 서원문이에요. 깨달음의 완성체가 아니라 그렇게 가고자 하는 서원문. 맨 뒤에 “위력을 얻도록 까지 서원함. “ 일원의 위력을 못 얻었어요. 얻었다고 해도, 대종사님도 나 포함 일원상 서원문에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했으니까. 또,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 위력을 얻는다는 것은 뭡니까. 항상 내가 은혜를 생산해서 원망을 감사심으로 하는거죠. 신앙적인거죠.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은 뭡니까? 그렇게 항상 감사심이 나와야 하는데, 때로는 원망과 분별심이 일어날 때. 일원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체성에 합하기 위해서 자꾸 수행을 하라는 것이죠.
두 번째 내용도 끝났어요. 더 이상 사실 할 거 없어요. 어렵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은 좀 더 다른 각도의 지혜를 연마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쉽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념까지 다 내려놓으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면 될거에요.
그러면 아까 우리는 집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얘기를 했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결국은 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졌다 안 가졌다. 선 악 아름다움, 미함, 추함, 이런 모든 분별심, 분별들에 대해서 벗어나라는 것이죠. 결국은 뭐냐면, 핵심은 여행자처럼 살아야 돼. 여행자처럼. 우리가 여행을 다닐 때,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죠? 우리 집 안방이에요. 우리 인생도 최종 목적지는 태어나서 한 바퀴 돌고 죽음으로 가듯이, 오늘 하루도 결국 우리 집 안방에서 자고 일어나서 결국 다시 우리 집 안방으로 기어들어가죠. 여행지의 최종 목적이 아무리 유럽으로 가서 좋고 화려한 것을 보고 왔다고 해도, 결국은 내 집 내 안 방으로 돌아오는 것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죠? 우리가 여행을 갖다 와서 유럽에 있는 멋있는 이태리 남자를 데리고 오고, 파스타를 갖고 오고, 아름다운 고궁 성들을 내가 들고 옵니까? 마음의 형상으로 담아오고 사진으로 밖에 담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죠? 여행자처럼 그렇게 살면, 아까 분별심, 분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원상의 진리 자리, 그 근본 자리가 분명히 아까 사은이라고 했어요, 그 사은의 신앙을 통해서 알았으니까 우리는 그날그날 매일 여행을 떠나듯이, 그날그날 집착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면서 감사하며 거기서 억지로라도, 미워죽겠어도, 억지로라도 감사를 발견해서 감사해내면서 거기서 은혜를 발견해서 사는 것이죠.
억지춘향이라는 말이 정답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삶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는 것이지, 확 깨달아 알아가지고 어느 날 문득 편안해지고 억지로 감사심이 나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를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요, (아까 같이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그 자리를 거듭거듭 확인하기 위해서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 까지 서원하고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계속 그렇게 해 나가는 겁니다. 아주아주 이것을 잊지 마시고, 일원상 서원문도 항상 따라하고 봉독하라고 하듯이 내가 천도독경을 할 때 일원상 서원문을 독경할 때는 그렇게 위력과 체성에 합하도록 열반 전 후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면서 하는 거고, 이런 법회에서는 여행지를 떠나듯이 잘 돌아와서 다 놓고 오듯이, 내 삶이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서원을 올리면은, 똑 같은 일원상 서원문을 한 번 봉독한 결과는 우리에게 큰 복이 다가온다. 복이 그래서 나한테 오는 복이어야, 내 삶은 지배하는 복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쫓아가는 복이 되기 때문에 또 다시 삶의 고통을 계속 잊어버리고 반복되는 속에서 허우적 되는 수가 있다.
대종사님께서도 살다 보니까 짜증이 나실 때 있어요. 대종사님도 제법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특히 전라도 사투리 들어보면 되게 무식하게 들려요. 사투리로 대종사님이 호령 한 번 하시면 총부가 난리가 났대요. 삼천초목이 떨었다는 말이 사실이래요. 그 큰 굵은 목소리로. 겉으로 보기엔 엄청 좋으신데 사투리 엄청 쓰셨대요. 재밌었을 거 같아요. 그러셨대요. 대종사님도 살다 보니까 짜증나고 기쁜 일이 있겠죠. 그래서 우리가 뭐라고 그랬어요. 유무로 변한다고 했었잖아요. 유무로 그렇게 반복이 되요. 우리가 마음으로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살지 ‘그래야겠다’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가끔, 원망심도 나고 또 인연들과의 갈등 속에서 힘들어지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은 저 법신불 일원상을 통해서 위력을 얻도록 까지 그리고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 서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내려놓으면 편안합니다. 내려놓아야 편안해요. 정말 저도 지금도 알 수 없는 거지만, 이런 관계에서 얽히면 막 생각나고 짜증하고 하잖아요. 이것 같이 무거운 것이 어디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삶의 무게를 참 내려놓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딱 풀리면 얼마나 가뿐하고 홀가분해요.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거우면 잠시 놨다가 다시 들면 되는데, 이놈의 가슴으로 들어온 것은 내려놓을 수가 있어요? 가라고 가라고 해도 안가요. 그러니까 저녁에 술 한잔으로 가라고 하고. 그것은 정신을 마취시키는 거죠. 막 헬스장 가서 힘써서 가라고 하기도 하고, 저는 달리기 같은 것을 많이 했어요. 죽어라고 뛰어버리면 다 잊어버려. 내려놓기가 힘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육신의 고단함과 정신의 편안함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을 저는 달리기로 했죠. 산을 가던지. 호연지기를 산에 가서 하라는 말이 정답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하다보면 편안해 지더라구. 그럼 다시 설령 와서 다시 집착이 되더라도 그때그때 자꾸 내려놓고 풀어 나가는 공부를 해야 되겠죠. 왜 운동할 때 그러잖아요. 모든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라. 처음부터 힘을 바짝 주고 하는 운동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힘쓰는 격투기도 힘 잔뜩 줘서 때리면 안 아파요. 힘이 빠진 상태에서 탁 와야 아프지.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삶이 항상 어눌하지만 맑도록 힘이 빠져있어야 되요. 그게 내려놓는 기본인데, 그렇게 되야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방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근데 그 중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4. 내려놓는 방법
1)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첫째, 힘을 빼려면 먼저 힘을 안 넣어야 되겠죠. 일단은 힘을 안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남의 허물을 보지 않아야해요. 왜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길 거리 가면서도 보여요. ‘아따 이쁘다.’ 그렇 것도 허물이니까. 무심하게 봐야 하는데 그게 보여. 아직도 멀었나봐. 힘을 먼저 안 넣고 평상시 잠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멍한 상태로 내 삶이 그렇게 유지가 되려면 첫째 남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평상시 내려놓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생각을 딱 내려놓고 있을 때 허물이 안보이는거죠.
육조 혜능스님은, 아 우리 원불교는 맨 스님들 얘기만 하는지 몰라. 안타까워요. 제 얘기도 많이 있는데 그 건 우리 후진들이 하도록 하고요. 우리가 아직 백 년 밖에 안됐으니까. 육조 혜능스님의 명성을 듣고 신혜 스님이 찾아왔어요. “스님은 좌선하면서 보십니까 안보십니까?” 교도님들은 좌선하면서 봐요 안 봐요? 저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어요. 어떻습니까? 빙고!! 볼 때도 있고 안볼 때도 있죠. 한 시간 좌선하는데 55분은 보고, 5분 안보고, 5분 안보는 것은 졸고. 어쩔 때는 40분을 보고 5분은 보고 15분은 졸고. 뭐 볼 때도 안볼 때도 있는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물어보니까 혜능이 벌떡 일어나서 신혜를 몽둥이로 빡 쳤어요. 불교는 잘 때려요. 똥을 갖다 찌끄러버리고 때리고 막 그래요. 스님들한테 물어볼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러니까 신혜를 몽둥이로 세 번을 때려요. 신혜 스님이 얼마나 고민을 하고 갔었겠어요. 하여간 저도 교당에 있다 보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물으러 와서 한나절씩 잡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뭐 책 보다 그냥 의심되니까 교무님 이거 어떻게 되요. 가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설명이라는 것은 하나를 설명하다 보면, 설명이 설명을 낳고, 설명이 설명을 낳고.. “인과가 있어요?” 질문 하나 해가지고 그 놈의 세상 얘기 다 해도 그래도 해결이 안 나요. 그러죠? 이 신혜 스님도 얼마나 고민을 하고 물어보러 왔겠어요. 그런데 세대를 맞고 ‘얼라, 이 양반이 뭐하는 짓이지? 여기에는 뭔가 뜻이 있을 텐데’ 하면서 고민을 하겠죠. 상황을 이해하면서 들어야 본문도 잘 이해가 되요. 그냥 좋은 문구로만 들으면 안돼. ‘이 뜻이 뭘까 이 뜻이 뭘까.’ 하고 있는데 혜능스님이 물어요. “내가 너 때렸는데 아프냐 안 아프냐?” 이렇게 물으니 신혜스님이 ‘얼라 이거 어떻게 대답하지.’ 하고 고민하다가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합니다” 하고 대답을 했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아무리 저한테 물어봐도 그 이상 대답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혜능스님이 “나는 보기도 하고 안보기도 한다.” 하고 대답을 하니까, 이 스님이 확 오는 거에요. 뭔가 삶을 통해서 답이 온 겁니다.
더 궁금해서 신혜가 다시 묻습니다. “스님께서 보기도 하고 안보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무엇은 보고 무엇은 안보십니까?” 여기까지 들어와 버리면 조금 답이 어렵죠?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아주 멋지게 대답합니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니 본다고 말하는 것이고,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니,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멋지죠? 아까 우리가 본다 안 본다 하는 것은 뭐였어요. 눈으로만 나타나는 것이었잖아요. 조금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갖고 우리는 얘기를 했는데, 육조스님은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안보십니까? 제가 아까 삼학으로 이야기 했어요. 방금 것은 육조스님 이야기고 우리는 우리 이야기로 알아야죠. 무엇을 보겠습니까? 원망을 보겠습니까? 은혜를 발견하라고 그랬으니까. 사은의 신앙의 핵심인 저 법신불 동그란 일원상을 괜히 저기다 해둔거 아니죠. 무엇을 보겠습니까 저것을 통해서? 감사심을 봐야죠! 모든 것에서. 그럼 무엇을 안보겠습니까? 원망심을 안 봐야죠! 수도 없이 우리 마음에서 살면서 일어나면서 교차하는 원망과 감사. 이것을 어떻게 보고 안볼 것인가는 실지 원망스럽더라도 억지춘향으로 그렇게 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뭐가 있다고요? 그걸 못하니까 대종사님이 일기법에 뭐라고 해뒀어요. 계문을 체크해라. 그때그때. 좌산종사님께서 “경계가 오면 그때가 공부할 때다.” 이렇게 얘기해 주신 것도 유무념으로 체크해라. 오죽했으면 콩으로 만들었다 넣다 뺐다. 시계로 만들어서 체크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했다 안했다 이렇게 하라는 거죠. 그때그때. 그러나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르면 원망심을 안봐야 되는데 막 보여요. 막 일어나요. 이게 십분 내에서 멈추면 성공한거죠. 십초에서 멈추면 더 성공한 거고. 보든 순간 돌리면 깨달아가는 것이고. 십초 정도 하면 견성한거고. 한 십분 정도 되면 왕창 중생인거고. 한 일분 정도는 했다가 이게 안보일 때 그럴 때는 억지춘향으로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뭐에요? 다른 동네에서 많이 쓰는 방법 삼십육계입니다. 주역에서 공부중의 제일은 삼십육계라고 써있어요. 일단 피해야 됩니다. 피경. 뭐가 잘났다고 그걸 맞닥뜨려가지고 이기는가 안 이기는가 해보자. 부부싸움할 때도 그러잖아요. 끝까지 니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바락바락. 그런다고 이기는거 아닌데. 사실 저도 부부싸움할 때는 그렇게 해요. 정토가 져줘야 하는데 끝까지 안 져. 내 말이 분명히 옳은데. 그렇게 해놓고도 제 자신을 보고 한참 웃고 그러고 합니다. 화날 때도 마찬가지로 그래요. 그렇게 되는 원리는 그렇다는 거죠. 여기서 시간의 많고 적은 것은 우리 교도님들이 알아서 챙기는 겁니다.
2) 나 자신을 알라
두 번째는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면 나를 좀 찾을 줄 알아야 해요. 내가 누군가를 좀 알아야 되요. 내가 누군가를 알아야, 5분, 10분, 30분 가는 내 성격 구조가 그렇게 생겼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되요? 하루가 가버렸어요. 잠잘 때 그랬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내일 가서 사과하지 뭐.” 그럼 그 사람은 늦는 거에요. 그 즉시 뭔가를 해야 되요. 감각감상을 쓰던,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하든. “아깐 내가 정신이 나갔나벼. 미안혀” 하든지 아님 뭐 어쩐다든지. 너무 말하기 자존심 상하면 문자로라도. 문자가 쉽잖아요. 그러면 조금 해결이 되죠. 근데 한 삼일 가가지고 말도 안고 지내고, 한 일주일 한달. 우리 50세 이상 어르신들은 많이 그래보셨죠? 나만 그런가? 부부싸움은 주로 남자들이 삐쳐가지고 말 안하잖아요. 남자들 진짜 잘 삐쳐요. 어른들 특히. 우리 아버지도 옛날에 보면 엄마한테 일주일간 말 안해버려. 나도 같이 말 안해버려. 저도 똑같아요. 말하기가 싫어. 남자하고 여자는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의 각도가 다르니까. 어쩔 수가 없는데. 또 여자분들은 저런 왠수. 누가 이기는가 끝까지 가보자구. 솔직히 50 넘으면 남자가 더 아쉽거든, 60넘으면 더 아쉽고, 70 넘으면 완전 아쉽고. 그러니까 불쌍한 중생들 여자분들이 조금 살려주셔야 하는데, 저거 니가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고 참 서로 괴로운 일이라 많이 양보해주세요. 많이 구제해 주세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어느 날 혜능이 길을 가는데요. 낭떠러지에서 누가 막 나무를 잡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외쳐요. 혜능이 보고 있으니까 낭떠러지에서 나무를 잡고 살려달라고 하는데 지나가다 보니까 참 볼만 해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왜그러요?” 하고 물어보니까. “나는 장님인데요. 내가 길에서 미끄러져가지고 낭떠러지에서 나무를 잡고 있는데 빨리 나좀 안전하게 내려주세요” 그러는데 보니까 이 사람이 땅에서 10 cm 밖에 안 떨어져 있어. 막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데. 경계를 당한 사람과 경계를 보는 사람의 차이는 그거죠. 우리는 행인이여. 내가 당할 때는 맹인이고. 당한 사람은 절박하지 그게 잘 안보여요. 그런데 그 외 행인들은 그게 보여요. 발이 땅에서 10 cm 밖에 안 떨어진게 그러니까 “그냥 손 놔” 그러니까 그 맹인이 못 믿어. 우리 그러잖아요. 경계를 맞닥뜨렸을 때 제 3자가 “ 잊어버려. 니가 손해 좀 봐” 하고 충고해줘도 그걸 못 놓잖아요. 용인을 못하잖아요. 똑같아요.
맹인이 손을 딱 놓고. 어쩌다 손을 놨어요? 중요해요. 어쩌다 손을 놨어요? 정말 중요해요. 힘들어서 손을 놨어요. 공부를 하고 마음의 상황을 알아서 우리 같이 법회를 통해서 또는 뭘 통해서 늘 상 그것을 마음에 갖고 있을 때는 돌리는 공부로 그걸 놓는데, 그것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잡고 있다가 어쩔 때 놔요? 힘 떨어지는건 어떨 때 힘 떨어져요. 인생 나락에 빠지면 힘들잖아. 인생 나락에 빠지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상왕님께서도 메르스가 창궐하니까 결국은 나오실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 정치인들 ‘민생이 제일이다’ 하고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똑같아요. 모든 세상의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힘 있을 때 돌리는 것으로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어떻게 돌리는가는 이따 얘기해줄게요. 이미 답은 나왔는데.
오늘 봉독하신 53장 말씀이 여러분들 공부하는데 표준으로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는 능히 모든 인연에 대한 착심을 끊고 안으로는 또한 일심의 집착까지도 놓아야 할 것이니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법박(法縛)이라고 하나니라. 사람이 만일 법박에 걸리고 보면 눈 한 번 궁글리고 몸 한 번 동작하는 사이에도 법에 항상 구애되어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나니, 어찌 큰 해탈(解脫)의 문에 들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성품을 기르되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기르고 활발하게 운전하여 다만 육근이 일 없을 때에는 그 잡념만 제거하고 일 있을 때에는 그 불의만 제거할 따름이라, 어찌 일심 가운데 다시 일심에 집착하리요. 비하건데, 아기를 보는 사람이 아기의 가고 옴과 노는 것을 자유에 맡겨서 그 심신을 활발하게 하되, 다만 위태한 곳에 당하거든 붙잡아서 가지 못하게 하고 위태한 물건을 가지거든 빼앗아서 가지지 못하게만 하면 가히 아기를 잘 본다고 할 것이어늘, 아기를 본다 하여 아기를 붙잡고 굳게 앉아서 종일토록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아기는 자연히 구속에 괴로와 할 것이니 일심에 집착하는 폐단도 또한 이에 다름이 없나니라.]
-대종경 제3 수행품 53장 (전서 173쪽)-
내가 갖고 있는 일심의 집착이 무엇인지 스스로 모르면 아까와 같이 맹인이 되는 것이고, 일심의 집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행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법박입니다. 그러죠? 법박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교당을 다시면서 내가 알았던 지혜와 방향이 좋은 거라고만 생각하고 꽉 잡고 있는 순간 맹인이 됩니다. 즉, 그것은 지혜를 단련하는 계단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일심에 집착하는 것을 아기 보는 거와 비교해서 말씀해주셨어요. 나를 찾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어리석게도 번뇌가 사라지면서 내 영혼의 참다운 미소가 살짝이 들어와요. 그때마다 미소가 살짝이 들어오면서 헛웃음도 나오고 이 생은 아닌가벼. 아이 이번은 아닌가벼 하며 포기를 하게 된다. 나를 놓아버려라. 꼭 그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뭐에요?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웰빙이죠. 그거 참다운 생활이잖아요. 농약 안친 농산물만 먹어서 웰빙인 것이 아니라. 선하고 명상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런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이게 바로 또 중요한 거죠. 웰 다잉 입니다. 웰 다잉이 뭐죠? 잘 죽는 거잖아요. 저희 아버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3개월간 딱 쓰러져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90되셔서 돌아가셨으니까 충분히 사셨다고 하실 수도 있는데, 어찌나 건강하시던지요, 85세 정도 됐는데 이 어른이 150까지 사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찌나 건강하시던지 한 60 되신 어르신 같았어요. 정말 건강하셨는데, 저희는 집안이 가족력이 있어요. 당숙들부터 어르신들이 다 쓰러지셔서 가셨어요. 아버지도 결국은 쓰러지셔서 가셨죠. 제 동생이 방길등 교무입니다. 제가 방길터고요. 근데 둘이 맨날 기도했어요. 딱 3개월만 허락하겠습니다. 법신불 사은님. 3개월 후에는 모셔 가십시요. 저희 협박했어요. 맨날. 3개월이 다 됐어요. 내일 모레가 3개월인데 안 가셔요. 더 막 초롱초롱 하시고. 얼레 빨리빨리 가셔야 하는데.. 내가 편할라고 하는게 아니라, 너무 옆에서 지켜보는게 괴롭더라고. 근데 한 3개월 이틀 째 되는 날 딱 가시더라구요. 어찌나 내가 기도의 위력에 감동을 했는지. 나 이런 사람이에요. 앞으로 뭐 기도할거 있으면 저한테 가지고 오세요. 보산님하고 저하고는 차원이 다른 뭔가 있어요. 방송으로 찍어갖고요 이놈이 뭔소리했는가 볼거에요. 편집 잘해요.
3)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라.
남의 허물을 안보는 것도 그렇고 나를 찾는 것도 그렇고 비슷비슷한데요. 이것이 되려면은 이 세번 째가 잘 되야 되요. 결국은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이 잘 들면, 경계 따라서 정리하는 습관이 잘 들고요 일과 상황 따라서 정리하는 습관이 잘 들고, 모든 일에 따라서 정리하는 습관이 듭니다. 정리를 하지 못하면 정돈이 안 되는 거구요. 정돈이 안되면 정리도 안 되는 겁니다. 정리 정돈은 진리의 표상입니다. 내 삶을 정리하고 정돈시키고, 내 삶을 정돈시키고 정리시키고. 여기서 정리와 정돈은 집안의 청소와 물건을 바로 놓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개판으로 놓는 사람은 정돈된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삶이 그렇게 생겼어요. 너무 정리정돈을 잘해가지고 누가 와서 하나 삐투로 놓으니까 말 뭐라고 하고. 이럴 땐 또 못살죠. 그럴 땐 안볼 때 살짝이 가서 다시 돌려 놓으면 되는데..그것은 삶의 철학이고 방법이죠.
내려 놓을 수 없다면 조금 갖고는 있어야죠. 당장 못 내려 놓으면 한숨이 나고 힘들어도 갖고 있어야죠. 그러나 언제는 내려 놓아야 되냐면은 잠자기 전에는 가급적 내려 놓으라고 했어요. 잠자려고 누웠는데도 미치겠어요. 그러잖아요. 실지로. 저도 많이 그래요. 저도 교구 법인 국장 일을 하다 보니까, 서울 교구 교화부나 어렵고 힘든 곳에만 쫓아다니니까 맨날 괴로워 죽겠어요. 왜요? 다 돈하고 관계가 되니까. 서울에 많은 사업이 벌어지고 있는데 회관만 해도 540억, 원남교당 집 짓는데 150억, 저쪽에 50억, 이쪽에 50억. 강남 교당 올라가는데 170억, 그 자리를 우리가 50억에 샀잖아요. 또 교당 하나는 옮기고. 이 교화가 안된다는 마당에 몇 백억씩.. 괴로워 죽겠어요. 그래서 잠잘라고 하면 이게 막 생각이나네. 그러나 1분 이상 안가더라구~ 제 성격이 그래요. 그건 왜 그래요? 갖고 있을라고 안하니까 그런거에요. 세상에 누우면 자는 사람이 어딨어요? 단순해져야되요. 명료한 것이 아니라. 단순해 질라니까 어눌해야죠. 단순하니까 누우면 자는 거죠. 그걸 뭘 복잡하게 잠잘라고 누워서 해법을 찾아요. 그때 자버려야죠. 그렇게 했을 때 속상한 일이나 화난 일 이런 것이 내려놓아지면서 수양이 되는 거죠. 그래야 앙금이 없어지고 하루가 정리되고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삶의 에너지가 내 영혼에 잔뜩 태양빛으로 머금어서 들어오는 거죠. 내려놓지 못하면 또다시 생각이 걸려서 그 마음에 힘이 쌓이고, 날 또 괴롭히게 되고, 이때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병도 오게 되고, 자꾸 억울하고 분하고 해서 병이 더 깊어지고, 자기 삶을 옥죄어 오는 것이죠.
5. 마무리: 쉬운 방법 염불
자 이런 삶을 쉽게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자꾸 내려놓고 이렇게 세가지 말씀드린 것을 반복반복반복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깨달음을 실천하는 삶인 거죠. 자, 깨달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실 없습니다. 깨달은 것은 상황성이지 영원성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을 내서 그때그때 닥치는 일과 현실 속에서 그러한 상황성을 내가 헤쳐나갈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거죠. 깨달음은 알아차림이니까. 그래서 그 삶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되고, 그러한 내 삶으로 인해서 내 주변에 영혼의 파도가 커져가겠죠, 행복의 파도가 물결쳐서 멀리멀리 끼쳐나가는 것이고. 그 힘이 굳게 이 안암교당에 뭉쳐있을 때, 지역사회에 끼쳐나가고, 우리 교단에 미치고 세계로 끼쳐나가게 되겠죠.
안암교당에서 나름대로 특화되어 있는 청년교화나 여러 가지 인재 육성이나 이런 것들 갖고 자꾸 안암교당에서 그런 생산성을 만들어 내니까, 교구에서도 더 청년 교화에 힘을 보태게 되는 거고, 교단에서도 관심 갖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귀찮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넓게 보면 엄청난 일을 우리들은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우리 일반 교도님들은 그러한 중심에서 지켜봐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삶으로 하고 계시는 거죠. 애를 쓴다고 금방 되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내려놓는데 빠르고 더딘 것은 없습니다. 그러죠? 다이어트를 아무리 잘해도 바로 요요 오죠? 요요가 안 올라면 어떻게 해야되요? 다 알잖아요.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그것이 체질화가 되도록 할 수밖에 없잖아요. 끊임 없이 내려놓으면서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니까 꼭 그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방하착 하는 것입니다.
뒷간 다녀오면 행복하죠. 화장실 다녀오면 행복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욕망을 가득 채웠을 때 오는 포만감으로서 오는 행복. 뭔가 좋고 슬프고 기쁜 모든 것이 자꾸 내 삶에 끼어들 때 그때 오는 포만감이 행복인 것이고, 또 하나는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가벼운 행복이 있습니다. 채웠을 때도 행복이고 비웠을 때도 행복입니다. 두 개를 따로 보면 안됩니다. 행복의 조건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어떻게 취사선택하는가는 사리 연구에서 대종사님께서 얼마든지 밝혀주셨습니다. 전자의 욕망은 계속 욕망을 끌어들여요. 풍선에 바람을 안 불어주는 순간 바람이 빠져가지고 휙 빠져버리듯이 계속 욕망을 부르게 되고. 후자의 행복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그대로그대로. 그대로 평화가 지속되는 거죠. 이 전자의 욕망과 후자의 욕망을 적당하게 취해가는 삶. 오늘 그것을 확실히 아시길 바랍니다. 그걸 뭐로 해야 하느냐구요? 저는 정답이 염불 같습니다. 하우~한숨 나오죠? 그 때 나무아미타불 몇 번 하시죠! 저는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좌선의 공덕과 염불의 공덕이 정전에 따로 나와있지 않아요. 좌선의 공덕과 염불의 공덕이 같이 있어요. 같은 겁니다. 괜히 힘들게 다리 아파서 앉아서 한 시간 반 선하는 것이 좋다고 할라고 하지 말고, 그때그때 힘들 때 염불 한마디 해버리십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