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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제적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1886년까지 한국은 수많은 강대국들에게 문을 열어야 했고, 그와 더불어 1894년 청일전쟁, 1895년의 명성황후의 시해, 1904년 러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통과해야 했다.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은 청일전쟁 후 한층 더 강화되더니 러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본색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 개신교는 겨우 왕의 양해와 환심을 사게 되어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시점에서, 이제 외국의 통치하에서 살아야 하는 비운을 당한 민족의 고난과 종교적인 핍박을 동시에 견디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제 외래 종교로서 한국의 전통 문화 속에 자리를 잡고 자라기 위하여 시련을 견디며 노력하는 한편,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다하며 민족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였다.
1. 일본의 침략 야욕과 명성황후 시해
청국을 밀어내고 한반도의 종주국이 된 일본은 계획했던 흉계대로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유린하고 친청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청일전쟁 직후인 1894년 7월부터 정치, 경제, 재정, 군사, 경찰 등에 이르는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제시하고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일제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일본화폐를 혼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시키는 한편, 봉건적인 신분제, 가족제도, 관료의 사회적 특권 그리고 복제 등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종래의 조혼제도를 폐지시키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일본의 이와 같은 개혁은 조선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한 처사로 실제로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의 사회체제를 일본의 그것과 같이 변개시킴으로써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 침투를 신속, 유효하게 하려는 야망”때문이었다.
중국세력을 조선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과 갑오경장을 요구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 ‘삼국간섭’을 성사시킨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에 의해 일본은 조선을 다시 잃게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는 대세를 뒤집기 위해‘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이른 새벽 일본의 군대와 정치 낭인(깡패)의 주역급인 구니토모 시게아키, 이에이리 가키쓰와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를 시켜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
일본의 수비대의 호위를 받고 입성한 일본인 부랑배들은 황후의 침실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침실에서 끌어내 보물을 모두 약탈하고 칼로 찌른 후 벌거벗기고는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시체 위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잔인하게 태워 버렸다. 이것이 소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일의 자세한 진상이 러시아 측이 보관하고 있던 ‘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문서는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가 외상 로바노프 로스토브스키에게 보낸 보고서와 고종을 위시한 여러 목격자의 증언 등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고종은 사건 이전에 왕후의 신변을 염려해 서양인 궁궐경비원까지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러시아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고 경비원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시해 당일 밤 궁궐경비대는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 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고종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궁궐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베베르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이 보고서는 말한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
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의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 날 작성되어 일본 본국에 보고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에조 보고서’이다. 이는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에조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에조 보고서에 의하면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고 하였다.
작가 김진명 씨는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라고 이 부분을 해석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일본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정부의 개입을 부인해 왔고, 국내 학계에서도 당시 주한 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단독 범행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도설 등이 제기돼 왔다. 그런데 당시 일본 최고 지도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각료들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근거 사료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고 조선일보는 2005년 10월 5일 보도하였다. 이 사료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110년을 맞아 명성황후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이던 다큐서울 정수웅 대표가 요시카와(芳川顯正) 사법상(司法相·법무장관)의 1895년 6월 20일자 편지를 발굴하여 공개한 것이다.
무쓰(陸奧宗光) 외상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요시카와는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이토 총리에게) 미봉책은 단연히 포기하고 ‘결행의 방침’을 채택하도록 강하게 권유하라고 말했다.”며, “이쪽의 희망대로 움직여 갈 것 같다.”고 쓰고 있다.
일본 근대사 연구자인 고마쓰(小松裕) 구마모토대 교수는 “‘미봉책’은 조선 정부에 대여금을 줘서 회유하려는 이노우에의 방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결행의 방침’은 무단적인 수단으로서의 해결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이 서한에 대해 5일“사법상과 외상이 편지로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내각 차원에서 명성황후 시해를 의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제임스 게일의 말대로 1895년 10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선의 왕은 한 명의 죄수로 지내야 했다. 이리하여 1895년 10월 개편된 김홍집 내각은 일본 공사와 일본인 고문관이 요구하는 대로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일본 정부의 사주 아래 김홍집 내각이 1895년 11월 망건(網巾) 착용을 폐지시키고 외국 복제의 착용도 무방하다고 국민에게 고시하자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또한 황후가 일제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일본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한층 더 격화되었다. 국민의 정서나 진실 규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는 잔인한 방법으로 국모를 살해한 일, 실제의 주동자들을 일본으로 빼돌리고는 박선, 이하회, 윤석우 등 하수인들만을 처형한 일, 게다가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들을 형식상의 재판만 거친 후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기각시켜 버림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배일감정은 극에 달했다. 이것은 1896년 8월 19일 조선 주재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라 타카시가 외부대신 후작 사이콘지 키이모치에게 보낸 ‘한국의 현황’(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이라는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현황을 대충 말씀드린다면, 한국의 관민은 물론 한국에 머물러 있는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배일의 풍조가 매우 왕성하여 우리가 하는 일에는 그 일이 어떤 일이거나 모두 반대하려고 드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의 최근의 내정간섭에 대한 반발과 작년 10월 8일의 왕비 살해사건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선인의 오랜 전통과 미풍으로 여겨 온 긴머리를 자르라는 단발령마저 반포되자 민중 사이에 배일감정은 더욱 고조되어만 갔다. 1896년 1월부터 4월까지 일제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자 전국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과 친일정권에 무력으로 저항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위정척사론(爲政斥邪論)을 표방한 유학자들로 구성된 의병의 봉
기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자원이나 무기의 지원 없이 의병들이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 군대에 대항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2. 겨레와 함께한 교회
1) 춘생문 사건
1895년 10월 8일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왕실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성의 배일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일본을 신뢰할 수 없었던 고종은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교사들은 고종의 침실 옆에 있는 왕실도서관에서 번갈아 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윤치호를 비롯한 친(親) 서구(西歐) 인사들과 미국 공사 알렌 그리고 헐버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민비시해 이후 불안에 떨고 있는 고종을 궁궐 밖으로 이어하려고 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춘생문 사건이다.
이 사건은 1895년 11월 28일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에비슨(O. R. Avison), 헐버트(H. B. Hulbert), 다이(W. Mc. Dye) 등 미국인 선교사와 교사 및 교관, 그리고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H. N. Allen), 러시아공사 베베르(K. I.Veber) 등이 정동파(貞洞派) 관료 이범진(李範瑨),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이하영(李夏榮), 민상호(閔商鎬), 현흥택(玄興澤),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南萬里)와 제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李奎泓) 이하 수십명의 장교들의 호응을 받아 일으킨 사건이었다.
1895년 11월 28일 새벽에 남만리와 이규홍 등의 중대장은 800명의 군인을 인솔,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建春門)에 이르러 입궐을 기도하였다. 뜻대로 안 되자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미리 서리군부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쿠데타군이 춘생문에 나타나자 궁성 내의 친위부대가 즉각 반격을 가하고 또 어윤중이 직접 현장에 달려와 선제공격을 폄으로써 일부 쿠데타군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거사가 실패하자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측은 이 ‘국왕탈취사건’에 서양인이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세력인 정동파는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켜 일시적이나마 일본세력을 물러나게 하기도 하였다.
위기 가운데 맺어진 왕실과 선교사들의 관계는 기왕에 갖고있던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를 더욱 견고히 만들었고,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위기가 한국선교의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 즈음 한국을 방문해 존스와 함께 궁중에서 밤번을 보게 된 헨리 루미스는 고종과 왕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날 밤 고종은 루미스에게 제2왕자 이강공(李堈公, 義和君)의 미국 유학 알선을 의뢰했다.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약속을 지킨 루미스의 행동은 선교사들에 대한 왕실의 신뢰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왕실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비록 일본에 대한 배일감정의 우회적 표현이었지만, 적어도 압박받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민족애를 고양하는 전기가 되었다.
2)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1) 언론 매체를 통한 민족의식 형성
고종황제의 선교사들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진 가운데,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문을 발행하여 한국인들에게 신앙과 아울러 민족애를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해서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1897년 2월부터 ‘죠션크리스도인회보’를 발행하였고,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1897년 4월 1일부터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다.
‘그리스도신문’은 전면 8면으로 1면은 논설란, 2면은 농지편설란이라 하여 농민에 관한 지도 기사, 3면은 공장편리설란이라 하여 과학 계몽·소개 기사, 4면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논설, 5면은 관보, 6면은 성경강론회 대관과 교회 통신, 7면은 기도회에 관한 것, 8면은 외방 통신, 국내 각부 통신, 전보·광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종교를 토대로 한 종합적인 편집 형태는 당시 신문으로서는 이채로운 편집이었다. 그리스도신문의 창간사에 따르면 『조선 백성을 위하여 지식을 널리 펴려 하는 것이니 지식을 말하려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와 형상과 법을 아는 것이요, 타국 백성의 사는 풍속을 아는 것이요, 모든 물건을 만드는 법을 아는 것이라. 아무 생업이라도 각 의문을 배우는 것이 유익지 아님이 없으니 지식이라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자유로 유익하게 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된다.…』고 하였다.
고종황제는 ‘그리스도신문’의 창간 의도를 높이 사 언더우드가 발행하는 주간 ‘그리스도신문’467부를 정기 구독하였는데, 이를 367명의 관리들 각 사람에게 보냈고, 10부씩을 10개의 각 중앙부처에 배부했으며, 자신도 ‘그리스도신문’을 정기적으로 받아 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신문’과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그 성격상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으나 한편 건전한 사회윤리관과 도덕심을 함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형성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신앙을 심어 주는 것과 아울러 관심을 가졌던 또 한 분야는 한국인의 의식 개혁이었는데, 이는 신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종래의 중세적 신분질서와 계층 간의 위화감을 배제한 서양식 근대 교육방법은 기회균등 원칙에 따라 남녀평등을 실천에 옮겼으며, 근로에 대한 인식 또한 새롭게 하였다. 한편 자주·자립정신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운동회, 연설회, 토론회를 장려함으로써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이른바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 기여했다. 요컨대 개인 영달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과거 봉건적 사회에서의 전근대적 교육방법을 불식하는 대신 새로운 사회의 역동적 봉사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자립적인 인격도야를 새로운 교육 목표로 설정, 이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교육방법이 과거 개인과 가족의 이익을 최고의 교육적 목적으로 삼았던 가치관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후 신교육을 수학한 사람들의 사고는 보다 합리적인 판단 하에서 자신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할 수 있는 근대적인 사고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충군(忠君) 애국(愛國) 사상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한층 고취되었고, 교회는 겨레의 아픔에 깊숙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교인들 사이에는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물론 반드시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가져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더욱 국가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으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의식이 고취되었다.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은 1890년대 초기 단계에서는 충군애국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강력하게 침투해 오는 외세로부터 국가를 보위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 앞에 기독교인들은 교회별로 우선 황실의 안녕을 곧 국권수호의 길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왕과 황태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각 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축하 행사를 추진하여 기도회와 연설
회 등을 개최하였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애국가 제창을 빼놓지 않았으며, 교회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그 후 한국 교회의 전통이 되어 국가와 민족이 위란의 위기를 맞을 때면 역사 앞에 분연히 참여하곤 하였다.
(3) 독립협회
한국 초대교회 당시의 선교사들에게 교회와 민족은 별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했다.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만약 국법이 하나님의 계명에 벗어난다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재학당 재학생들에게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킨 아펜젤러가 교회의 지나친 정치화를 우려해 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군애국사상을 고취하면서도 선을 분명히 그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선교사들의 의식 속에 국가와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하나님 신앙이 우선이었던 것을 발견한다. 이들은 교회가 흥왕케 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역시 이 나라를 민족적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자연히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일깨우는 작업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일어났다. 청일전쟁이 나던 1894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그 학교 교사로 임명받은 이승만(李承晩), 1887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1892년 언더우드의 신학반을 수료한 홍정후(洪正厚), 미국 밴더빌드대학을 졸업하고 1895년 귀국해 남감리교를 창설한 윤치호(尹致昊), 그리고 1896년 제4차 김홍집 내각의 고문으로 초청을 받고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은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이들은 협
성회를 만들어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국내의 상황이 개혁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재필은 아펜젤러, 이승만, 윤치호 등이 행했던 한국의 기독교 문화 창달과 민족의 독립을 향한 노력에 고무되어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한국의 기독교 문화 창달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계획을 접어두기도 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는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여 월봉 300원을 받는 조건으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그러나 중추원 고문으로서의 일은 거의 없었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독립신문’의 발행, 독립협회의 창립과 운영, 독립문건립, 배재학당에서의 강의 등이었다. 당시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생활을 보장하는 한편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개인 생계와 가옥임대비 명목으로 1,400원을 별도로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창간에 필요한 경비로 모두 4,400원을 지급했다. 서재필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주선한 것은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었는데 그는 신문을 개화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인식했던 사람이다. 또한 정부가 자금을 댄 이유는 신문을 발간하여 국민을 계몽하겠다는 목적과 함께 일본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한성신보’(漢城新報)에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측은 이 신문이 창간되기 1년 전인 1895년 2월부터 외무성의 보조금을 받아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했는데, 이 신문을 통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황실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어서 정부가 일본측에 항의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정부는 ‘독립신문’의 창간자금을 전액 지원했을 뿐 아니라 신문 우송요금을 할인하고 취재활동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특혜를 주었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근대 신문의 효시로 독립정신 앙양, 국민계몽, 민주주의 발전 그리고 기독교 문화 창달등을 통해 한국의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이라는 본래의 기독교의 본질과 성격이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된 구체적인 증거들이었다.
이승만, 윤치호, 홍정후, 남궁억(南宮檍) 등 독립신문에 관여한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사를 담론하면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정동클럽’이라고 부르다가 회원이 증가하면서 ‘인디펜던스 클럽’(Independence Club)이라 부르고, 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로 이름을 고쳐 정치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부요인들과 사회 중견인물들이 합류하면서 이제 독립협회는 한국 사회와 정치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1대 회장 학부대신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전보되자 윤치호가 2대 회장에 오르면서 민중계몽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898년 러시아의 내정간섭이 강화되고, 친러 수구정권
의 이기적 야합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각종 이권과 자주국권이 크게 손상을 입자 윤치호는 독립협회를 민중계몽 단체에서 정치 단체로 전환시켜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2월 21일 독립협회 회원 135명은 독립관에 모여 윤치호의 제의에 따라 결사적인 구국운동을 서약하고 “밖으로는 외국인 수중의 재정권, 군사권, 인사권을 되찾고, 안으로는 전장법도를 준행하여 국권을 자주(自主)하라”는 요지의 구국선언상소를 올렸다.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당시 서울 시민 17만 명 중에서 성인 남자만 1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이 집회에서는 시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자발적으로 등단한 현공렴, 이승만, 홍정후, 조한우, 문경오 등이 연설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의 절영도조차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기지 철수, 한러은행 철거,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등을 결의하였다. 러시아의 절영도조차요구란, 친러 수구파 정부가 제정러시아의 요구에 동의하여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부산 영도)의 토지를 석탄고기지로 러시아에 조차(租借)해 주려고 한 것을 말한다.
이에 놀란 정부와 열강 사이에 복잡한 외교교섭과 각축이 벌어져 마침내 러시아의 절영도조차요구가 철회되었고, 한러은행과 군사교관·재정고문도 철수하였으며,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기지를 돌려보냈다.
독립협회는 1898년 4월부터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을 계몽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7월 3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의회설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수구파 정부각료들과 의논한 뒤 이를 거부하는 회답을 내렸다. 고종과 수구파의 반대가 거듭되자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1일부터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상소시위를 전개하여, 10월 12일 친러수구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박정양(朴定陽)·민영환(閔泳煥)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협회는 신정부와 즉각 의회설립을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의회설립법인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였다. 전문 17조로 된 ‘중추원신관제’는 ‘상원’설치를 내용으로 의원 50명 중 반수인 25명은 황제와 정부가 임명하고, 나머지 25명은 인민협회에서 투표로 선거하되 당분간 독립협회가 인민협회를 대행하기로 하였다. 대한제국의 개혁파 정부는 1898년 11월 5일을 민선의원 선거일로 정하여, 전제군주제로부터 입헌대의군주제로의 대개혁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회가 설립되고 개혁파 정부가 입헌대의군주제를 수립하면, 정권에서 영원히 배제될 것으로 판단한 친러수구파들은 모략전술을 썼다. 저들은 독립협회가 11월 5일 의회를 설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황제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수립할 것이라는 전단을 독립협회의 이름으로 시내 요소요소에 뿌렸다. 거짓 보고에 놀란 황제는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
으로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趙秉式)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부터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던 독립협회 등 개혁파의 운동은 성공 일보직전에 좌절당하였다. 서울시민들은 11월 5일부터 만 42일간 철야시위를 하면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여 보부상단체인 수구파행동대 황국협회(皇國協會)의 공격을 물리쳐, 독립협회의 복설과 의회설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자주독립세력을 꺾어버려야 한국침략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주한일본공사는 친위대를 사용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할 것을 황제에게 권고하였다. 황제가 이를 추종함으로써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대한제국 정치체제개혁운동은 1898년 12월 25일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독립협회지도자 430여 명이 일시에 체포되었으며, 독립협회·만민공동회도 완전히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이 투옥 사건은 이들 젊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승만 일행이 투옥된 후 감리교계의 벙커(D. A. Bunker) 선교사가 매주일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드리며 저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배재학당시절 복음을 들었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이승만은 비로소 옥중에서 진실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승만의 옥중전도와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서울 묘동교회 장로가 된 이원긍, 1906년 국한문신약전서 역간에 큰 공헌을 하고 서울 안국동교회 장로가 된 유성준, 한국YMCA 창설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상재와 신흥우, 일본 동경 한국인 YMCA를 창설하여 일본의 한국유학생 지도자가 된 김정식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외에도 서울 안국동교회 장로가 된 관찰사 박승봉, 묘동교회 장로 성천군수 조종만, 양평교회 목사가 된 왕족 이재형은 교회로 영입되기
시작한 수많은 당대의 지식층을 대변한다. 이들의 회심과 교회로의 영입은 교회와 정치를 밀접하게 연계시켜 교회를 정치화시키는 폐단을 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대 민족적 사회적 책임과 사명을 일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회심으로 사회와 교회 두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민중으로 시작한 한국교회가 이제는 사회와 민족을 이끄는 구심점이 되기 시작했다.
3) 러일전쟁과 민족의 수난
(1) 아관파천(俄館播遷)
1894년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던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이를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속 견제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1895년 11월 28일에 있었던 춘생문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러시아는 1896년 1월 스폐예르(Alexei de Speyer)가 부임한 후 친러파 이범진(李範晉)과 밀의하여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오는 한편,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왕비의 피살 이후 일본을 경계하고 신변의 불안을 느낀 국왕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친러파의 권유에 따라 왕세자와 궁중을 탈출하여 정동에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것이 이른바‘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다. 베베르 공사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150명의 러시아군을 상륙시켰다. 당시 고종으로서는 일본에 머리 숙여 아부하고 철저하게 굴종하면 무사히 옥좌를 지키면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사안일한 굴종 대신 위험천만한 저항을 택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호위병도 딸리지 않는 궁녀의 가마에 몸을 싣고 궁궐을 탈출한 것이다.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는 파국을 각오해야만 감행할 수 있는 비상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아관파천은 단순히 외형적인 면만 보자면 조선의 군주가 자신의 커다란 궁궐을 버리고 한낱 조그만 외국 공사관 담장 안으로 피신한 괴이하고 구차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보면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의 군주가 자국이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정국 운용의 주도권을 쥐고 ‘오랑캐(러시아)로서 오랑캐(일본)를 제압하는(以夷制夷)’전술을 선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으로 러시아 공사관을 습격하여 모두 도륙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즉각 러시아와 일본의 전면전이 발발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일본으로서는 일절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냉철하게 계산한 전술이었다. 아관파천은 여러 차원에 걸친 특이한 영향과 파문을 일으켰다. 국제관계로 보자면 당대의 열강들의 권력 구도와 정세에 격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뒷날 일어난 러일전쟁의 실마리가 되었고, 국내 정계로 보자면 친일파를 모두 거세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권력을 잡게 되어 권력 판도가 일시에 바뀌었다.
러시아 공사관 내에서 김병태를 수반으로 한 친러 정권이 태동되었다. 고종은 1년이 넘게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러시아에 한국군 재건을 요청, 러시아 군대는 한국군을 재조직하고 3,000개의 베르단(Berdan) 총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한국에서 이권을 챙기기 위해 재정장관을 보내 실사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정세에 힘입어 한국에서의 자신들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일본이 한국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든지 러시아가 쟁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국에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1899년 혹은 1900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가 한국에 들어왔다. 정교회를 극동아시아에서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해온 러시아는 조선에서도 정교회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는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헐버트가 기술한 한국영사 제2권에 보면 1901년경에 이르러 러시아의 정치적인 통치를 받으며 러시아교회의 지부라고 소문난 한국인들이 남부지방을 여행하면서 대중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1900년 서울과 충청도 남포 지방에 성은 고씨요, 호는 ‘정길당’이라는 여인이 스스로를 아부인이라 하고 십자기를 세워놓고 동방정교를 포교하고 다녔다. 그녀는 이승에서는 출세하고 저승에서는 천당에 간다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소송에 관여하여 금품을 거둬들이기도 했는데, 당시 친러 천하의 시운을 타고 정교회는 무섭게 번져나갔다. 해서 러시아의 한국 통치와 한국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힘입어 1904년까지 러시아 정교회는 국내에 약 8천 내지 9천의 교인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대결이 시기상조라고 판단, 그 대신 협상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하여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외상대리 사이온지(西園寺公望)와 러시아공사 히트로보(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원칙에 동의하였다. 5월 14일에는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 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그리고 주한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 외교의 대승리였다.
이에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明)를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Rovanov)와 타협 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8선 기준의 국토 분할 안을 후퇴시킨 대신, 장래 필요한 경우에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조선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게 탈취 당하였다. 이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Alexiev, K.)를 탁지부 고문으로 삼아 조선의 재정을 요리하였고, 정식 조인은 되지 않았으나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비밀리에 열린 로바노프·민영환 회담에서는 러시아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한 대신 조선에게는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균등을 요구하며 전차, 철도부설권, 삼림채벌권, 금광·광산채굴권 등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2) 러일전쟁
일본은 조선에서의 러시아의 세력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본이 오랫동안 확보한 경제적 영향력은 청일전쟁 이전에 청국이 차지했던 것보다도 훨씬 압도적이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개설된 일본은행의 조선지점은 20여 개에 달했고, 조선에 있는 일본 제일은행 지점은 조선의 해관세의 위탁취급, 지금은(地金銀)의 매입, 조선 정부에의 차관, 조선의 국고관리, 은행
권의 발행 등 사실상 조선 정부의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상인들은 일본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조선의 상권을 점점 더 확대해 나갔고, 개항장에서 일본의 상점은 외국의 어느 나라의 숫자보다도 압도적이었다.
이미 획득한 상권을 비롯해 이와 같은 기득권을 러시아에 이양한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매년 예산의 40-50%나 군비증강에 투자하면서 조선을 독점하고 장차 러시아에 대항할 준비를 착수하였다.
또한 용의주도한 일본은 한편으로는 이미 얻은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군비를 증강시켜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1902년 2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은 일본은 한국에서, 영국은 청국에서 정치적 상업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상호인정하고 침해를 받을 경우 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뒤 계속 증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10년이 채 되지 않아 20만의 육군과 26만톤의 함대를 갖춘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1903년 8월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서 철수할 것과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승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을 거부하고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은 1904년 2월, 10년 전에 청국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은 2월 8일 뤼순(旅順)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0일에야 비로소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고 열국에게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2월 23일 일본은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에는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遼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奉天)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1905년 1월초 뤼순항을 함락시키자, 러시아군은 대세를 만회하고자 발틱 함대를 파견했으나,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과의 격전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전세를 돌이킬 수 없게되었다.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권고를 수락하여 일본과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 내에서의 이권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