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의 최후를 지켜본 삼척 궁촌리 음나무
1394년 3월 14일 공양왕 3부자의 최후를 지켜본 궁촌리 음나무
1388년 요동정벌군의 지휘자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창왕을 폐하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올렸다.
왕요(王瑤)는 1389년에 고려의 34대 왕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공양왕은 1392년 조선의 개창과 함께 폐위되어 원주로 갔으며,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하여 간성군(杆城郡)에 두었다가, 모반의 기운이 있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태조 3년(1394년) 3월 14일 공양군 3부자를 삼척 근덕면 궁촌리로 옮겨 안치시켰다.
그 후 새로운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왕씨를 제거하고 공양왕을 앞세운 모반 계획의 상소기 이따르자 1394년 4월 17일 교살하였다.
공양왕은 삼척으로 옮겨와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커다란 음나무(엄나무라고도 함)가 있는 집을 찾아 거처로 삼았을 것이다. 음나무는 옛 부터 귀신을 쫓고 불행을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다고 알려져 왔으니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이 나무에 걸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 음나무도 바꿀 수는 없었는가 보다.
그는 이곳으로 옮겨 온지 한 달 남짓 살다가 음나무의 효험도 보지 못하고 474년 34대를 이어오던 고려왕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실록에 ‘교살(絞殺)시켰다’라고 하였으니, 이 마을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당시에도 500살이나 된 커다란 이 음나무에 목매달려 죽었으리라.
궁촌리의 당산목으로서 음력 보름과 단오에 재사를 지내며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리는 음나무
공양왕이 거쳐하던 집은 민가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집은 사라지고 성황당이 들어서 음나무는 자연스럽게 신목으로 자리 잡아 이 마을 궁촌리의 당산목으로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과 단오에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며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나무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리는 신목의 대접을 받아 오늘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지금은 성황당도 사라지고 소나무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가 시립을 하듯 음나무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돌담을 쌓고 대문을 달았으며 돌 제단까지 갖추고 있다.
비극의 현장을 지켜본 음나무는 그 당시의 뼈아픈 슬픔의 역사를 나이테에 새겨두고는 오늘도 말없이 세월의 흐름과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 자손을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이 음나무는 지금도 꽃을 피워 왕성하게 자손을 퍼트리고 있다.
아직도 새나라 조선보다는 고려조의 백성으로 생각하던 궁촌리 마을 사람들은 팽개쳐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여꾼들은 얼마 가지 못해 발이 땅에 붙어 상여가 꼼짝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자 그 자리가 왕이 묻힐 곳이라고 믿고 산소를 만든 곳이 지금의 공양왕릉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능은 왕과 왕비의 합장 능과 두 왕자의 능, 그리고 시녀의 능이거나 말의 능으로 추정되는 네 기의 능이 있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그리고 강원도 고성군 고성산 자락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삼척의 궁촌리 사람들은 궁촌리의 능이 공양왕릉이라 믿고 있다.
경기도 고양의 능에는 공양왕의 머리만 이장해 갔고, 시신은 삼척에 묻었기에 공양왕릉이 2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설이라고 본다.
고성군의 능은 공양왕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함부열이 조성하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공양군으로 강등하였던 공양왕은 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무정보
•나무위치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452
•나무등급 : 천연기념물 제363호(1969. 09. 16 지정)
•나무나이 : 700년에~1000년으로 추정
•나무높이 : 18m
•가슴높이둘레 : 5.4m
•가지펼침 : 동서 22.6m, 남북 32.6m
※참고문헌
•삼척공양왕릉(김도현 지음, 삼척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