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애월 시집> 『어떤 혹성을 위하여』 서평
광활한 제국의 아침을 여는 삶의 의지
박현솔 / 시인.문학박사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노마드(nomade)라 하며 들뢰즈는 이런 사람을 유목적인 삶 속에서도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창조적 행위로써 자신을 바꾸어나가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는 불모지를 생성의 땅으로 바꿔서 탈주선을 그리는 사유의 세계를 의미한다. 즉 공간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사유적 창조를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척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임애월 시인의 시집 <어떤 혹성을 위하여>에는 이러한 유랑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애월 시인의 시에 있어서의 유랑의식은 고향과 근원이 되는 ‘어머니’를 의식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강한 연계성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온 자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유랑을 선택하지만 자신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인 어머니는 거친 유랑생활 속에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임애월 시인의 시에서는 슬픔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고 진한 슬픔이 작품마다 토로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독자들이 슬픔을 잘 느끼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씀처럼 예술이 비극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임애월 시인의 시에서도 예술미학의 비극적 정서가 깔려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 전반에 깔려 있는 이 슬픔의 정서가 큰 능선을 그리고 있는듯하여 그냥 단순하게 비극적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만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임애월 시인의 시에 깔려 있는 슬픔의 정서는 비극 그 자체에 머물러 있기보다 또 다른 삶을 분출하려는 태동의 기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다를 향하는 강물과 같이 고향을 향해 무한한 기운으로 잠잠히 흐르고 있다.
기차는 오지 않았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하구에서 끌고 온 노을 자락을
8월의 레일 위에 풀어놓고 있었다
목이 긴 물새들도 떠나버린 금강하구
탁류의 물빛이 궁금한 사람들만
철새처럼 하류로 모여들었다
굽이진 세월을 흘러 온 강물이
지나온 길들을 소리 없이 지우며
긴 몸을 누이고 있는 소멸의 시간
전설 속 비익조의 눈빛을 찾아 고여 든 물길
서러운 혼돈의 계절을 보내고
비로소 가슴이 열리는 바다여
두 시간째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하구의 노을빛에 갇힌 사람들은
누구도
늦어지는 기차를 탓하지 않았다
-「기차는 오지 않았다」전문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철새들처럼 금강하구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탁류의 물빛이 궁금한 사람들이다. 세파를 견디고 굽이진 세월을 흘러 온 사람들, 강물처럼 ‘긴 몸을 누이고 있는 소멸의 시간’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전설 속 비익조의 눈빛을 찾아 고여 든 물길’과 같은 사람들이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들이 굽이진 세월을 건너 하나하나 금강하구로 모여든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함께해야 자신들의 이상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야만 ‘서러운 혼돈의 계절을 보내고 / 비로소 가슴이 열리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기차는 오지 않고 사람들은 노을빛에 갇혔지만 누구도 늦게 오는 기차를 탓하지 않듯 자신들의 이상향에 대해 의심치 않는 것이다. 현실보다는 이상향의 세계를 갈망하는 화자, 떠나는 이미지가 가득한 시이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려는 삶의 의지가 가득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시에서도 떠남의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삶의 초월적인 측면과 극복의 의지가 가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자년 해토머리에
도반도 없이 홀로 칠불봉을 오른다
대가야국 일곱 왕자의 현신인가
암봉 끝에 매달린 소나무들
천수보살 손끝마다 상고대를 매달고
해인삼매에 드셨는지
투명하고 맑은 속살이 눈부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날이 열린다고
선문답 주고받는 해인사 산까마귀들
선계인 듯 속세인 듯
칠불의 깊은 구름바다에
옹이진 계절의 상흔들 봄안개 풀어내면
바람도 긴 날개를 접어
산 아래 영지에 그림자로 드는 저녁
홍매화 붉은 가지마다
화엄세계 피어나네
-「가야산에서」전문
가야산의 정경을 가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서두 부분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대가야를 연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외삼촌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함께 수도하였다는 칠불봉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일곱 왕자의 어머니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찾아왔으나 아들들은 보지 못하고 호수에서 그림자만 보고 애달픈 마음을 달래며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 그곳에 서린 영지의 정경이 화자와 동일화된 정서로 전달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 길은 다시 시작되고 / 희망이 끝나는 곳에서 / 새로운 날이 열린다고 / 선문답 주고받는 해인사 산까마귀들’은 화자의 선문답 같기도 해서 삶의 열망을 지닌 중생들을 선문수행에 들게 한다. 그리하여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닦아 덕과(德果)를 장엄하게 할 화엄세계를 열고자 한다.
그리움도 이쯤이면
터져야 하리
한 계절을 참아 낸
인고의 시간들
농익은 사월 햇살에
몸이 먼저 달아올라
격정으로 줄을 타는
높은음자리
생각도 잦아드는
비슬산 능선에서
바람이 만든 벽
그 경계를 지우며
잔인한 침묵의
황무지를 깨우려
피 흘리며 목을 놓은
붉은 메아리
-「비슬산 진달래」전문
위의 시에서는 시인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의 응어리가 터지는 현상을 보인다. ‘그리움도 이쯤이면 / 터져야 하’고 ‘한 계절을 참아 낸 / 인고의 시간들’도 이쯤이면 터져야 한다고 한다. ‘격정으로 줄을 타는 / 높은음자리’에서 ‘경계를 지우’고 ‘잔인한 침묵의 / 황무지를 깨우’듯 슬픔도 이쯤이면 터져야 한다고 한다. 슬픔은 터트려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붉은 메아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염원을 향한 분출이며 어떤 객체에서 승화시킨 해탈이다. 진달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위의 시「비슬산 진달래」에서는 앞에 있는 시의 ‘홍매화 붉은 가지처럼 응혈된 삶의 열망’이 진달래의 피 울음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극한의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극복의지이며 변화와 변신을 꾀하는 상징적 메아리이다. 다음에 오는 「어떤 혹성을 위하여」는 그러한 서사적 상징의 플롯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보여준다.
‘도노미오름 돌아 바다로 가는 길 / 장다리꽃 하얗게 흔들리던 밭둑길 / 인동꽃 따서 말리던 / 그 여린 조그만 손 // 그늘도 혹여 빛 될까 아껴둔 행간의 언어 / 이상은 산맥 같고 현실은 深海였네 / 이승의 질긴 인연들 / 한 잔 술에 놓여날까 // 진눈깨비 날리는 낯선 길 낯선 들녘 / 허물 벗는 나비처럼 휘돌아온 승화장 / 이제는 날개를 얻어 / 겨울하늘 오르네’ -「어떤 혹성을 위하여」전문
‘때론 / 슬픔도 위안이 된다 // 그대 / 먼 하늘에서 흘리는 / 눈물 송이들 // 긴 침묵의 / 시간을 접고 // 지상의 축제로 / 화려하게 부활하느니’ -「어떤 혹성을 위하여 5」전문
‘허물 벗는 나비처럼 휘돌아온 승화장 / 이제는 날개를 얻어 / 겨울하늘 오르’는 현상이 염원 같기도 하고 해탈의 전형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이 있어 ‘먼 하늘에서 흘리는 / 눈물 송이들 // 긴 침묵의 / 시간을 접고 // 지상의 축제로 /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돌아간 어머니의 세월 속에서 유년부터 회돌이 되는 삶의 재생성을 확보한다.
어머니의 숨소리는 적막하다
홀로 오래 묵어서 발효된
누룩 냄새가 난다
길 잃은 들짐승처럼
그 침묵 속으로 기어들어
짧지 않은 세월을 돌려놓는다
그립던 이름들조차 서먹해진 새벽별 아래
동짓달 한풍이
마당을 쓸고 지나는 소리
밤마다 별빛이 저 홀로 부서졌을
어머니의 낮은 창가에
양수처럼 출렁이는 유년의 시간들
그 마른 시간들을 적시며
다시 거슬러 오르는
역류의 강물소리
그 긴 강물 속으로
오늘
아득한 기억의 닻을 올린다
-「歸鄕日記」전문
시인은 고단한 삶의 행로를 지나면서도 어머니와 고향을 늘 가슴 속에 지니고 살았다. 시인이 어머니와 고향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자신 본연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적막한 어머니의 숨소리, ‘오래 묵어서 발효된 / 누룩 냄새’가 나는 것, ‘길 잃은 들짐승처럼 / 그 침묵 속으로 기어들어 / 짧지 않은 세월을 돌려놓는’ 것 등 내면에 잠재된 어머니를 화자 자신과 동일화시킨 것이다. 그곳에서 ‘양수처럼 출렁이는 유년의 시간들’로 돌아가 ‘그 마른 시간들을 적시며 / 다시 거슬러 오르는 / 역류의 강물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회돌이 되어 나가는 ‘그 긴 강물 속으로 / 오늘’ 시인은 ‘아득한 기억의 닻을’ 다시 올린다. 그리고는 다음에 오는 시와 같이 광활한 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무의식의 지층 깊은 곳에서
떠나야한다고
그것이 숙명이라고
희미한 떨림으로 수신된 메시지
여린 촉수의 예감에
긴 그리움을 싣고
가량없이 낯선 비행길에 오르면
절제된 날갯짓만이
거친 바람을 가를 수 있다
스쳐가는 황무지의 밤은
장미의 가시처럼 고독했으나
가시에 찔린 내밀한 상처는
차라리 감미로웠다
깊은 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견고한 금단의 경계를 넘어서면
푸른 잎맥으로 가득 찬
목 빛 맑은 始原의 전나무 숲이여
서러운 날개마다 돋아나는 찬란한 문양이여
아무도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광활한 제국의 아침을 나는 보았노라
-「제왕나비」전문
시인의 염원을 향한 끝없는 도전의식과 그러면서도 숙명을 거스르려하지 않는 삶의 경건함이 위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인 자신이 설정해 놓은 숙명의 경계가 아닐까 할 정도로 시인의 비장한 여로는 단호하리만큼 거침이 없다. 여린 촉수를 가졌지만 긴 여로에서 얻는 경험과 그에 따른 깨달음이 있었기에 절제된 날갯짓으로 바람을 가를 수 있는 의지는 ‘스쳐가는 황무지의 밤은 / 장미의 가시처럼 고독했으나 / 가시에 찔린 내밀한 상처는 / 차라리 감미로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결연함을 내포하고 있다.
나비는 영혼을 상징한다. 또한 나비라는 단어에서는 프시케 공주의 전설이 떠오른다. ‘깊은 어둠의 시간을 지나고 / 견고한 금단의 경계를 넘어서면 / 푸른 잎맥으로 가득 찬 / 목 빛 맑은 始原의 전나무 숲이여 / 서러운 날개마다 돋아나는 찬란한 문양’이란 시행은 프시케가 금단의 경계를 극복하고 나중에는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으며 사랑의 희열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길은 뻗어있고 그 길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시인은 또 다른 길을 꿈꾼다. 시인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끄는 것은 정체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이것은 유랑의식을 가진 자가 느껴야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제왕나비’가 황무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은 탐색적인 유랑의식에서의 시인의 길은 끝없는 도전의식과 경건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가려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정신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광활한 제국의 아침’을 열고자 하는 강한 삶의 의지가 그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