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서쪽 끝에는 가거도라는 섬이 있다. 그리고 그 섬에는 지지리도 가난한 소년, 조용갑이 살았다.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 그것이 섬 소년 조용갑의 주소다. 아버지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산에서 약초를 캤다. 두 분이 아무리 부지런해도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생활에 지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수고 가족들을 때렸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 가난에 대한 절망은 그를 가거도 문제아로 만들었다.
어느 날, 그날도 아버지를 피해 도망 나왔는데 어디선가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가보니 조용갑의 집이었다. 불타버린 집의 기둥을 붙들고 쓴 울음을 삼켰다.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년한테 남은 건 분노뿐이었다. “나는 왜 이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을까?” “왜 이렇게 우리 집은 가난한 걸까?”
전교생이 40명도 안되었던 가거도 분교에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아버지는 그에게 서울로 가라고 했다. 공부 같은 건 더 해봐야 소용도 없다고. 서울 가서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라고 했다. 결국 중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열네 살 가거도 소년은 추운 겨울, 육지로 가는 배에 올랐다.
공장에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맞고 일이 서툴다고 맞았다. 망치로 맞아가며 일을 배웠다. 일을 하다 보면 또래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는 게 보이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리라. 나도 생각을 바꿔보리라. 처음으로 결심이란 걸 해봤다.
그 첫 번째가 꿈을 갖는 것이었다. 첫 번째 꿈. 그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거였다. 공장에서 번 돈으로 지하 월셋방을 얻고 고등학교를 알아봤다. 일반 고등학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편이 안되었다. 결국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 신문배달부터 시작해 우유배달, 자장면 배달, 호떡 장사, 지하철 비옷 팔이, 아파트 세차원. 안 해본 게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배달 일이 끝나면 오후 내내 또 일을 했다. 그리고 5시 반에 학교를 가면 10시 반에 수업이 끝났다. 집에 오면 11시. 씻고 나면 12시. 그리고 또 새벽에 일어나서 배달일. 그렇게 꼬박 3년을 살았다.
우연히 배운 복싱에서 길이 보이나 싶었다. 복싱은 어느새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대 갔다가 돌아온 후 프로로 전향했다. 복싱만 잘하면 가난을 면할 것 같아 신이 났다. 경기를 치르고 대전료를 받으며 신학대학 학비를 마련했다. 경기가 끝나고 오면 하도 맞아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만…그래도 이제야 내 길을 찾았나 보다 했다. 내 꿈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것쯤이야 하면서 버텨냈다. 그렇게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는지 한국랭킹 7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 보이는가 싶더니 한국챔피언 전초전을 앞두고 몸에 이상이 생겼다. 어쩔 수 없었다. 6년간의 복서 생활은 그렇게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끝나버렸다.
내 길이 뭘까…나 같은 놈에게도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유일한 친구는 노래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노래를 부르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조용갑에게 노래는친구였고 유일한 위로였다. 어느 날 우연히 구입한 파바로티 테잎을 듣는데 가슴이 막 뛰었다. 파바로티 노래 가사를 한글로 옮겨서 받아 적고 내내 부르고 다녔다.집에서 부르다 이웃에서 신고하면 다리 밑에서 불렀고 거기서도 쫓겨나면 산으로 갔다. 그렇게 노래가 좋았다.
성악은 이태리에서 배우면 좋다던데…자꾸 두 번째 꿈이 생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건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허황된 것 같았다. 야간 고등학교도 겨우 나왔는데 이태리 유학이라니…수중에는 돈 한 푼도 없는데… 그래도 꿈이라는 건 꿀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꿈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나는 이태리에서 성악을 배울거야.
몇 번이나 절망스러운 순간이 있었고 꿈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랬다.
꿈은, 네가 가슴에서 내려놓지 만 않으면…간직하고만 있으면 이루어진대…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이건 내 꿈이 아닌 걸까. 내가 너무 얼토당토않은 꿈을 꾼 걸까…수십 번을 의심했다가 다시 포기할 뻔한 꿈을 다잡았다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갑의 인생에도 기적이 일어났다. 교회에서 그의 노래를 유심히 듣던 목사님이 유학자금을 후원한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이태리로 갔다. 하루 열 시간 씩 연습했다. 먹고 살 돈도 모자라 개나 고양이용으로 나온 사료를 사다가 먹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산타 체칠리아 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졸업한 명문 학교였다. 정식 레슨도 받은 적 없고 악보도 잘 볼 줄 모르던 그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루에 10시간씩 흘린 땀은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유학생활 2년이 지난 뒤부턴 콩쿠르에 도전했다. 처음엔 그저 콩쿠르 입상하면 나오는 상금이 필요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그에겐 그게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으니까. 그 이후 28번이나 콩쿠르 입상. 조용갑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300회 유럽 공연, 오페라 가수로 성공. 2006년엔 독일 레겐스부르크 국립극장에서 <오셀로>의 주연을 맡아 현지 언론으로부터 ‘리틀 파바로티’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조용갑은 치열했던 세상살이가 오페라 무대를 설 때는 오히려 큰 힘이 된다고 했다.
“복서로서 링 위에 오른 경험, 아르바이트, 장사하며 숱한 사람을 접했던 어려운 시절의 경험이 무대에서의 나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목을 풀 때도 복싱 동작을 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훨씬 잘 풀려요. 복싱을 하면서 지옥훈련을 했던 경험이 몸에 베어 연습도 열심히 하게 되구요…”
지금 조용갑은 세 번째 꿈을 위해 도전 중이다.
그것은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 이것이 그의 현재진행형 꿈이다. 가난했던 가거도 소년이, 중학교 졸업도 못한 채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니며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그 소년이… 어떻게 세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어 냈는지. 그것들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새로운 인생의 사명으로 삼고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