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마장터, 화전민터
설악산 마장터에 가면 새로운 삶을 볼 수 있다. 바로 우리 선조들이 산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옛 모습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집을 짓고 살았을까? 말로만 듣던 산간가옥, 너무나 단촐 했다. 아마도 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태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된 삶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리라. 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산의 일부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을 누구나 그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산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산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결코 산과 인간이 둘이 될 수 없는, 하나로 산 현장이다. 이곳엔 두 가지 형태의 산간가옥이 있었다.
하나는 작은 부엌에 달랑 방 한 칸이 전부인 집이다. 마당도 하나 없이 작은 집터에 동그라니 그렇게 놓여 있었다. 이런 데서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것이다. 가구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비바람만 막아주고, 짐승들로부터 방어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옛 이야기에 보면 집에서 자고 있는데 호랑이가 방에 들어와서 사람을 물고 갔다는 사건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엌에는 아궁이 하나에 솥 하나가 걸려 있었고, 찬장도 없이 몇 개의 주방용기가 있을 따름이었다. 부엌문만 닫으면 온통 캄캄하고 겨우 한 사람 정도 앉아서 불을 땔 수 있는 공간이었다. 방도 그랬다.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길이에 달랑 창문 하나만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엌을 통해야 했으니, 그 창문마저 없다면 어찌 답답해 살았을까? 창문살에는 몇 번이나 덧바른 창호지가 찌들어서 까맣게 절어 있었다. 그렇게 설악산 마장터의 산간가옥은 산의 일부가 되어 동그라니 놓여 있었다.
또 하나는 단칸 방 보다 조금 큰 집이었다.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나 있고, 본채에 붙여 지은 마굿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식구가 더 많은 집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누가 썼는지, 집 앞에는 꽤나 오래된 빨래가 걸려 있었다. 빨래줄에 걸린 옷가지가 햇빛에 낡아 컬러색이 변했다. 나무토막을 베어서 엇갈려 포개 지은 토막집이다. 나무토막 사이에는 진흙을 이개서 메웠다. 상당히 오래된 집이지만 아직도 멀쩡하였다. 지붕은 새를 베어서 이었다. 부엌을 열어보았더니, 양쪽으로 놓인 아궁이가 있고 그곳엔 가마솥 하나에 밥솥 하나가 걸려 있었다. 허름하지만 제법 주방그릇을 포개 올려놓은 찬장이 있는 것을 봐서 꽤나 많은 식구들이 함께 산 집이었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새로운 산간가옥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 가옥 옆에만 장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그 노인은 싸리비를 맬 싸리를 단으로 묶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설악산처럼 해맑은 모습이었다. 노인은 37년 전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정준기(72세) 씨였다. 필자에게 길 안내를 해 주신 박관신(77세) 씨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박관신 씨는 “있는 줄 알았으면 소주라도 한 병 사들고 오는 건데 ….”라며 아쉬움을 말했다. 속초에 가족들이 있고, 정 노인 혼자서 이곳에 머문다고 했다. 얼음을 깨서 우물을 하고, 샘이 나오는 곳에 작은 토막으로 광을 만들어서 냉장고로 쓰고 있었다. 샘 옆에 나무토막으로 된 찬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 흐르는 물에 대충 그릇을 씻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정 노인의 집 역시 옆에 있는 오래된 산간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고 있기에 조금 다르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부엌문을 열자 사람의 손이 간 흔적만 다를 뿐이었다. 집의 크기도 살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원래 있던 가옥 중 하나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관계로 성냥을 써서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 아궁이에 넣었다. 정 노인의 집은 설악산을 찾았다가 날이 저물어 오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피 장소로도 쓰인다고 한다.
여기 있는 집들이 언제 지어졌느냐고 필자가 물었다. 정 노인은 수복 후에 지은 집이라고 말했다. 정 노인이 이곳에 들어오기 한 참 전부터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 노인은 이곳에 화전 정리를 한 직후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산간가옥은 6.25한국전쟁이 끝난 후 먹고 살기 위해서 산으로 찾아든 사람들이 남긴 집이다. 하지만, 집의 모양새 등으로 보면 아주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이 집을 짓고 살아온 그 방식대로 지은 집이리라. 설악산의 토막집은 잘 보전을 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주택 및 주거사 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여기 마장터에는 1975년 화전정리를 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바로 이곳이 동서를 잇는 교통로의 중간이었다. 게다가 넓은 화전터가 있어서 삶의 터전을 이루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어 생산을 하면 바로 판매를 할 수 있는 판로의 기점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 생필품이 필요한 사람, 생계를 잇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제에서 고성으로 고성에서 인제로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말 등에, 소 등에 물건을 싣고, 사람은 등에 물건을 힘껏 지고 다니다가 모이는 곳이었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더 나은 터전을 잡고자 가족의 손을 잡고 넘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장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들끓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 때문에 이곳을 잘 아는 노인들은 물물교환을 했다고 말한다. 바로 동해안에서 지고 온 어염(魚鹽)과 인제에서 지고 온 잡곡을 바꾸어가기도 했단다. 그 증거로 고성군 거진읍 송정리에 있는 팽자나무거리의 역사를 들 수 있다. 팽자나무거리에서는 무곡보부상들의 검문소가 있었다 한다. 그곳에서는 동해바다에서 나는 저린 고기와 식염을 지고 인제로 가서 곡식과 바꾸어 오던 통과요로였다. 얼마나 많은 상인들이 넘나들었으면 고을의 현에서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을 검문할 정도였을까? 하기야 마장터 주막집에서 손님들 술을 대기 위해서 양조장을 운영했다고 하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마장터는 5,6만평의 넓은 평지로 된 산간마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장터로 가기 위해서는 대간령(大間嶺)과 소간령을 넘어야 한다. 고성 방면에서는 대간령을 넘고, 인제 방면에서는 소간령을 넘어야 마장터로 갈 수 있다. 설악산 북쪽의 신선봉(1,204m)과 마산(1,052m) 사이에 있는 령이라 하여 새이령이라 부르기도 하고,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령이라 하여 또 새이령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사이령이라 한자로 사이 간(間)자를 써서 간령(間嶺)이라 불렀던 것이다. 대간령을 기점으로 작은 계곡의 물이 고여 흐르는데, 인제 방면으로는 북천을 이루고, 고성 방면으로는 문암천을 이룬다. 인제는 용대3리로 이어지고 고성은 문암리 쪽으로 이어진다. 진부령과 미시령의 국도가 뚫리기 전에는 동서 교통의 주요 통로였다.
인제에서 마장터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지금은 설악산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조만간 출입이 허용될 것을 기대하면서 먼저 그 길을 따라 가보았다. 멋진 설악산 소개를 위해서였다. 눈으로 봐야 현장감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제 용대3리에서 미시령 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하얗게 우뚝 솟은 창바위를 볼 수 있다. 창바위는 바위 가운데 창모양의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어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군사지도에도 나올 정도라니 상당히 중요한 바위일 게다. 창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개울을 건너면 시원하게 뚫린 산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산길을 줄곧 따라 가면 소간령을 지나서 마장터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 산길이 시원하게 뚫린 데는 이유가 있다. 약 20여 년 전 이곳에 마을 사람들이 당근과 무를 마장터에 심어서 군용트럭으로 날라 팔았기 때문이다. 트럭이 마장터까지 다녔던 것이다. 설악산에 트럭이 다녔다고 하면 좀 의아하기도 하겠지만, 이곳 길은 평탄해서 길 폭만 넓히면 얼마든지 트럭이 다닐 수 있다. 농사가 아주 잘 되었는데, 지금은 천연보호구역이면서 국립공원관리구역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길을 따라 가다가 보면 작은 계곡물에 버들치라고 하는 물고기가 오밀조밀 모여 노니는 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길옆으로 가득 우거진 수림이 눈을 압도한다. 하늘을 볼 수 없이 나무가 우거져 있어 수풀 터널을 빠지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길은 무엇보다도 아주 많은 계곡물을 건너야 한다. 하기야 길을 걷다가 잠시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는 재미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한참을 단조롭게 걷다가 보면 소간령을 오르는 길을 만나게 된다. 소간령을 오르다 보면 길가에서 작은 돌무더기를 만나게 된다.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그 돌무더기 안에는 샘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양은그릇을 바쳐놓아서 길손들이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아주 달콤한 물맛이 일품이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살만하지 않은가?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힘을 내어 소간령 정상으로 올랐다. 소간령 정상에는 가운데 나무를 두고 빙 둘러 누군가 쌓아놓은 꽤나 큰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돌무더기는 새이령을 지나던 길손들이 무탈과 소원을 바라면서 서낭신께 기원을 하던 흔적이었다. 돌을 집어 들고 가다가 서낭당 돌무더기에 올리면서 각자 소원을 빈 것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큰 돌무더기가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서낭당 돌무더기를 바라보다가 보면 왼쪽 큰 나무 밑에 새로운 당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토막나무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소반을 놓고 제물을 올려놓았다. 싱싱한 감귤이 있는 것을 봐서 이곳을 지나는 최근의 등산객이 올려놓고 기원을 한 것일 게다. 궁금해서 정 노인에게 소간령 당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 당집은 2014년 정 노인이 설악산 신령을 모시기 위해서 지은 것이라 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새벽 동트기 전에 그곳에서 정성으로 제의를 지낸다. 제물이라야 소주 1병으로 제주를 삼고, 메(밥)를 한 그릇 올리는 것이 전부라 한다. 물론 비손 기원은 당연히 할 것이다. 정 노인의 수고로 설악산 마장터를 찾는 사람들은 새로운 위로를 받는 것이다. 영마루를 넘으면서 산령이 갖는 또 다른 의미가 들 것이기도 하다. 정 노인이 등산객의 무사고와 안녕을 위해서 행한 배려라 봐야 할 것이다.
소간령을 지나면 마장터까지 다시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우거진 숲이 하늘을 찌르듯 한데, 그곳에서 사람 사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드디어 오막살이 한 두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장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살았던 흔적을 마장터의 가옥들에서 찾고, 그리고 설악산 사람들이 사는 모습, 수림이 우거진 설악산의 또 다른 모습을 모두들 만끽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