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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2 - 1
대한민국의 건장한 성인 남자라면 군대생활은 직업으로 삼기 위함이든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든 피해갈 수 없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삶의 중요한 과정이다.
군대란 것이 적국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재산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근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살상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 삼는 조직이다.
군인이 소지하는 물건의 대부분은 직접적으로는 잘못다루면 생명을 앗아가거나 신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총칼 등의 무기류이거나 설사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더라도 군에서의 모든 물품이 결국 군의 살상수단을 강화하거나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 친 말이 아니고 보면 실상 군대 물건치고 위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검만 하더라도 그 파란 날이 보기보다는 예리하단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대검을 만질 때마다 그 날카로움에서 베어져 나오는 섬뜩함에 소름이 돋던 기억이 난다.
예전의 살상무기의 주류가 검, 과도이고 보면 그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검은 현대기술의 힘을 입어 예전 보다 더 예리하게 만들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군대는 심각한 위험성이 상주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군대로 보내며 근심하지 않은 부모님이 없었고, 남자 친구가 군대로 떠난지 불과 몇 달안에 수년의 질긴 정을 헌신짝 버리듯 내던지고 고무신 거꾸로 신는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애인을 군대로 보내며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의 생리별에 눈물빼지 않은 녀인이 없었다.
입영렬차가 떠나는 기차역은 마치 돌아올 수 없는 생면불지의 곳으로 떠나는 듯한 사람들과 보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탄식과 심지어는 통곡의 소리도 가끔씩 들리는, 그 애절함과 침통함이 가히 범상치 않은 생생한 리별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입영렬차의 차창은 안과 밖을 군대와 사회로 엄연히 구별하며 이미 무엇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장막이 되어 있다.
입대할 당시 장정을 수송하는 군용렬차의 창문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창 안밖의 정경을 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군인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닌 당시의 신분은 호로 덮은 군수품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창문을 가린 검은 천과 혼을 빼 놓았던 조교들의 호통과 몸짓은 창밖에서 애절하게 손을 흔드는 부모님과 친구들과 애인에게 무모한 작별의 손짓을 겁없이 행동으로 옮기려는 장정들을 강력한 위협으로 제지했는데 떠나는 자들에게는 그 상황의 난감함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고마운 면도 오히려 없지 않았다.
한번도 가본적 없던 남쪽으로 그렇게 해군용 LST 승선 처음 도착한 곳은 제주도 서귀포 제 1훈련소의 신체검사장이었다. 그 곳에서 군의관 고등학교 선배님을 만났다.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선배님이었지만 장정인 나를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주던 그의 모습이 65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남자의 인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력정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내가 제주도 훈련소에 입소한 것은 1956년 2월이었다.
입소후 수용연대에서 대기하다가 훈련소에 팔려간것이 2일이되니까 전국에서 모인 장정들이 수천명이 모이는 수용연대에서, 제일 가까이 지내던 친구는 줄을 잘못서는 바람에 생리별하고 아는 사람도 없이 팔려간 곳이 제 1 훈련소 26련대였다.
처음 제주도 1훈련소에 입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호쌓기 사역을 본관쪽으로 간적이 있었는데 깔끔한 복장과 군화에 노란 작대기 하나를 단 이등병들이 빗자루를 어깨에 매고는 列을 맞추어 군가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걸어가던 모습이 아직 정식군복을 입지 못한 상거지 차림의 훈련병이었던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부럽게 보이던지.
그 노란작대기는 훈련병들에게는 정말 커다란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대에 들어가자, 련병장에 집결시커 놓고 좌우로 정열부터 시키고는 나서 이리저리 임의적으로 잘라서 소대를 편성을 한다. 그리고는 기간병들을 다라서 100여명이 들어가는 내무반으로 인솔되었다.“
예~!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주 1 훈련소에서는 제일 빠세다는 26련대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사회의 때를 벗고 인간개조가 되어서 배출되는것이다. 말끝마다 절도있는 액센트를 줘가면서 공포분위기로 만들었다.
모두들 쥐죽은듯 듣기만 했다. 이제부터 4주간 신병훈련을 받는데 있어서 내무반장의 통제에 따라 일사분라하게 움직이면 편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4 주동안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고한다.
지금부터 각자의 주머니에 있는 소지품을 하나도 남긴 없이 자기앞에 꺼내놓는다. 실시!!! 다시 한번 복창한다. 실시” 실시~ 이~“이후 만약에 하나라도 주머니에서 소지품이 나오는 경우는 각오해라~~“
그리고 깊이 숨겨놓은 돈이 자리에서 모두 꺼내 놓는다. 돈을 감춘 곳은 팬티고무줄사이, 바지단, 윗옷의 칼라, 돈을 접어놓고 감은 실패꾸러기.... 등등, 모두 꺼내 놓는다. 알겠나! 늘 다루는 능숙한 솜씨라서 신병의 심리를 아예 꿰 뚫어 버린다.
겁에 질린 신병들은 하나하나 감추었던 돈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후 한번더 강조한다. 다 꺼냈나? 네, 모두들 대답한다. 그리고 신병의 눈을 하나씩 마주치면서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지목된다. 너 이리나와 넵, 훈병 진평수 한명이 불려나갔는데, 몸 수색을 시작했는데, 윗옷 하단에 깊이 돌돌말아 숨겨놓은 지폐가 발견되자. 귀씨데기가 날라간다.
분명이 말했는데, 이렇게 어리석은 놈이 있다.“한번 더 기회를 준다. 이후 돈을 감춘 사람이 발견되면 용서치 않겠다. 한명이 귀싸데기 맞는것을 보자 모두 공포분위기로 변하고 숨겨 놓은 지폐를 뽑아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신병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회수해서 모두 이름과 액수를 노트에 기록한다. 이후 회수 해간 돈은 일인당 2만원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모두 송금해버렸다.
그리고 5천원은 쿠폰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훈련소 퇴소할 때 돌려주었다. 훈련소에서 일어나는 도난 사고와 불조리를 막고저하는 취지에서 했다고 하는대 나중에 생각해보니 필요한 조치인듯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러분들이 훈련을 받는 동안에 모든 의식주를 군대에서 해결해 주기 때문에 돈이 필요 없을뿐더러, 사회에서 사용하던 모든 것이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도 몽당 빼앗기고 나서 마음이 허전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군대생활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정신이 든다. 잠시후 간단하게 속옷과 수건을 지급하고 나서, 이제부터는 사회에서 묻었던 떼를 말끔하게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용명스런 군인이 되는 것이다.” 신체검사결과가 량호하여 2 일후 정식으로 제주도 1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입소첫날, 점심시간은 1 분이 주어졌고 그 1 분안에 식사를 마쳐야 했는데 말이 1 분이었지 조교들이 말하는 1 분은 너무 짧았다. 한 30초 정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조교의 "식사 끝"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각이 울리고 식당 옆의 련병장으로 집합한 우리는 선착순과 얼차레를 받으며 그날 午後 내내 리유 모를 얼차례를 받으며 뻉뺑이를 돌았다.
그후 련대, 중대, 소대가 편성되다. 군대서, 특히 신병훈련소에서 명령에 따라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묻는 것은 요즘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아무 리유가 없었다." 2월 추위에 흙과 땀으로 뒤범벅이된 훈련복을 걸친 훈련병이 목불 인견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호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선착순으로 야외풀장으로 뛰어들어"라는 조교의 명령에 뜀박질 잘하는 훈련병 누군가가 풀장에서 하늘높이 점프하여 다이빙을 하였고 잠시 후 들려오는 소리는 차디찬 물로 락하하는 "풍덩"하는 소리가 아니라 "쿵"하는 소리와 연이어지는 "으악"하는 비명소리였다.
그 곳은 물마른 풀장이었다. 삼청 교육대의 참상은 요즘도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 때마다 전신을 감아 오르는 용문신을 새긴 건장한 사람들이 거대한 폭력에 제압당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목봉 체조를 하는 장면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목봉 체조란 것이 신병훈련소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지막지한 목봉체조는 비록 힘들긴 했지만 강하게 기억에 남는 신병훈련소에서 겪었던 소중한 추억의 한토막으로 내게 남아있다. 조교가 처음 목봉체조를 시킬 때는 군대는 오와 열 그리고 키 순이라는 기본을 벗어나 제멋대로 목봉을 들게 했으므로 중간에 끼어 있던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키 작은 것이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키 큰 훈련병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까치발을 하고는 나름대로 용을 썼지만 무슨 큰 도움이 되었으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침내 무질서의 폐단을 깨달은 조교는 목봉을 내려 놓게 한 다음 키 순서대로 헤쳐 모여 하더니 목봉의 굵은 쪽을 키작은 훈령병들이 들게 하여 목 봉체조를 시키는게 아닌가.
키작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란 것은 그리 오래가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낮은 곳으로 미치는 중력의 특성상 그 이후의 키작은 자의 비애를 굳이 적어 무엇할까. 제주도 1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수류탄 투척 련습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눈물고개를 잘 알고 있으리라.
눈물고개는 머리위에 개머리판을 거꾸로 한 소총을 잡고는 오리걸음으로 걷는 훈련병들에게 조교들이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눈물께나 짜게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무슨일에도 고비는 있는 법이어서 이상하게도 이 눈물 고개를 넘은 날 이후의 훈련은 일상이 되어 그리 큰 어려움 없이 받아 낼 수 있었다.
내무반 생활을 하면서 내의 옷(衣)에는 이(슬.蝨)가 많아서 발진티푸스나 몸이 오슬오슬 춥고 괴로운 증세, 몸이 떨림과 함께 고열이 계속되다가 땀을 냄과 함께 해열하고 1주일 후에는 또 다시 發作을 일으킨다.
회귀열이라고도 한다. 같은 전염병을 전파시킨다고 매일 밤 공병에다 이(蝨)를 잡아넣어야만 취침을 할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오징어뒷다리를 조그맣게 떼어서 똘똘 말아 이라고 속여서 공병에 넣어도 전기불이 어둡던 시절이라 그냥 속아 넘어 가곤 하였다.
화장실에 앉아서 용편을 볼 때는 머리에 쓰고 있는 훈련모를 훔쳐가는 바람에 항상 꼭 잡고 있어야만 했다. 야외 훈련장에서 용편을 보고 있으면 이동주부들이 물건을 들고 쑥 내미는 데는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 할 지경이었다.
이런 정경들은 제주 1훈련소 입소후 4주간의 기초훈련을 받은 후 한달 보름만의 가족들과의 대면을 자못 쑥스럽게 하는 바가 있었으니 군대란 그리 못갈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가는 법, 어찌됐던 국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마침내 우리들에게도 그 위대해 보이던 노란줄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다는 날은 왔고 일주일 후 훈련소를 퇴소하게 되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출소하는 날 아침에 물 한모금마시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그만큼의 양을 배설하는 지독한 설사를 만난 일이었다. 아픈 몸으로 더블백을 매고 훈련소를 출발하여 병아리 이등병들이 타고 갈 LST군함이 있는 서귀포에 도착한 것은 그 날 오후 2시쯤이었다.
장병들을 실은 군함이 출항 이동하면서 조교의 호명에 3팀으로 분류 1팀은 강원도 보충대, 2 팀은 광주 상무대, 3팀은 부산 9보충대로 6시간 후 도착한 곳은 부산 제 2부두에 정박하다.
보충대란 훈련소에서 출소한 병사들이 배치되기 전에 잠시 대기하는 곳 이었는데 1주일이나 2 주일안에 자대로 배치되어 가는게 보통이었다. 일주일간을 대기중 補充隊 군의관을 찾아가 진료를 받고 약을 받아 먹을 수 있었는데 나을 때가 되어서였는지 씻은 듯이 설사가 나았다.
정말 지독한 설사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한 겨울 좋지 못한 환경에서 이동하던 중에 걸린 이질이 아니었나 싶다. 그 상태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주일이나 버틸 수 있었던 내가 신기하기도 했다.
아픈 사람은 제 1 훈련소에서 퇴소를 못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미련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렇게나 훈련소 내 생활이 지긋지긋했었나 싶다.
퇴소 준비중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몸무게 48㎏이었던 내가 42名의 소대원을 항상 앞장서 인솔을 한다는 것은 무리 중에서 상 무리였다. 무학력 자가 있는가 하면, 국민학교 4학년의 자식을 둔 중늙은이도 있었으며, 양아치까지도 있어서 그들의 불평을 다 들어준다는 것은 나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아침 8 時부터 오후 5시까지는 훈련을 받아야 하니 허약한 나의 신체로는 부가한 일이어서 몇 번이나 선임하사에게 사의를 표해도 아니 되기에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 돈을 잃어버리는 병사, 내의나 양망 등을 분실하는 등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날이 없는 훈련소 생활이었다. 그러다 훈련소를 졸업하고 배출대에서 며칠을 놀면서 시간을 보내니 정말 무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른 병사들은 두꺼운 담요로 된 누런 방한복을 지급받고는 최전방으로 전출되어 죽을 상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로 색맹이 아닌 자, 독자가 아닌 자, 밤눈이 어둡지 않는 자를 가려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훈련소 조교를 선발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11중대 출신 향도 4명이 PX로 도망을 가서 그곳 기간사병에게 정보 수집을 부탁하니 조금 있다가 돌아와서 “지상의 왕자 Tank병을 모집하고 있으니 빨리 가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사병에게 질문을 하였다.
지상의 왕자인 Tank병이 무엇이 그렇게 좋으냐고 그가 말하기를,
첫째, 훈련을 할 때 다른 兵士들은 다 걸어가는데 Tank兵은 탱크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힘든 줄을 모른다.
둘째, 다른 兵士들은 M-1이나 Carbine 소총을 메는데 비해 Tank병은 권총을 차기 때문에 무겁지도 않고 폼(form)이 난다.
셋째, 훈련을 할 때는 겨울이라 날씨가 매우 춥지만 Tank병은 따뜻한 탱크 안에 있기 때문에 추위를 모르고 아울러 뜨거운 Muffle爐 위에다 고구마도 구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좋은 兵科이니 지금 빨리 내무반으로 가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돌아왔는데 늦게 참석을 하였다고 뺨을 몇 대씩 두들겨 맞았다. 우리 일행은 야간 군용렬차를 타고 기갑학교가 있는 광주로 가면서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고 있으니 가슴에 전차부대의 상징인 번개를 금실로 수놓은 Mark를 달고 있는 전차병이 우리에게 “어떤 부대로 가는데 이렇게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고 있느냐 ?”고 물었다.
“우리는 선배님과 같은 전차병이 되기 위해 륙군 기갑학교를 가고 있습니다.”라고 답을 하니 그 전차병이 무엇이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어서 나는 훈련소에서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그의 손바닥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약 1주일을 대기중 차출되어 기자를 타고 내린 곳이 광주보병학교 내 상무대 있는 기갑학교 기갑 주특기생을 양성 배출하는 전차승무과정, 전차정비과정. 장갑병과정 등 교육 12주를 를 이수하는 동안 멘토 역활을 해주신 담임교관님 덕분에 무사히 과정을 이수 軍에 갓 들어온 이병에께 고가장비인 전차조종을 맡끼고 있는 실정이어서 기갑부대 사고 부담이 컸으며 특히 전차를 조종하는 병사 심리적인 증악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매끈하지를 않고 곰발바닥처럼 갈라져 있지 않은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경열열 하지만 갈이천정인 일을 이제 와서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한들 도로 애를 써서 이루든 일이 한 순간의 실수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이 되었으니 비로 머리를 감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는다는 것으로 모진 고통을 참아가며 일한다는 뜻을 하는 수 밖에 없는 우리 일행은 그렇게 힘차게 부르던 군가를 멈추고 기갑학교로 갔다.
기갑학교 전차병 지원병 기본과정 18기로 입교를 했는데 광주의 2月은 왜 그리도 춥고 또 바람은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확실히 고생은 많이 한 모양이다.
강원도의 가을은 빨리 찾아 왔다. 강원도 군부대의 주변 산야는 아주 깊은 가을이었다. 보충대 련병장 가에는 플라타너스를 비롯한 락엽수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는데 보충대에서 하는 일은 허리까지 쌓이는 락엽을 치우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이곳으로 온지 일주일 이 곳에서 내무반 생활에 필요한 개인보급품을 지급받아 더블백에 담고 대기중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눈썹이 짙은 마른체격을 한 중키의 40대의 준위는 인사 담당관, 우리를 인솔해 갈 상사는 우리 중대의 인사계였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할 동기 3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춘천보충대의 정문으로 빠져나온 후 약 50 분정도를 달리니 어느 외딴 부대의 위장용 그물망이 덮힌 위병소가 멀리 보였다.
마침내 자대배치를 명령 받게 곳이 경기도 포천 지포리 위치한 10탱크 창설부대의 정문위병소를 통과하는 순간 충~성하는 위병의 경례소리가 귀를 울리는데, 흙먼지 날리며 련병장을 지나 대대본부 앞에 차가 도착, 마침내 집 떠난 2월 以後 약 8개월 보름에 달하는 훈련과 이동이 반부되는 불안하고 고단했던 방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앞으로 3년간 복무할 자대에 도착한 순간이 온 것이었다.
이 부대는 창설부대로 편재개편 륙군 10전차대대는 중대당 14전차로 편성, 부대는 말 그대로 기동력과 화력의 강화를 위하여 전차로 편성된 전투부대로 나는 정비소대에 배치되었다.
군대생활 2-2
중대장이 아버지라면 인사계는 복무하는 3년동안 우리 병사들에게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같이 도착한 2월 군번 동기 셋과 함께 중대본부에서 간단 한 입소절차를 마친 후 침식을 할 내무반으로 내가 인도되어 간 곳은 2소대였다. 우리 중대는 전차정비와 수송 정비부 구성되어 같이 일하는 전우들과 함께 생활하는 2소대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이 전차정비반에서 3년동안 내가 손때 묻히며 관리하던 보급 카드란 것이 일반회사의 장부란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근본은 같은 것이어서 어쩌면 군에서의 보직이 지금 밥그릇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서의 직업으로 까지 련결된 경우라 할 수도 있겠다.
계급 이등병에서부터 병장까지의 선임들이 오후근무를 마치고 관물정리를 하거나 구두를 딱고 있던 내무반으로 더 블백을 매고 들어가 경례를 하며 "이병 금흥수는 1956 년 10월 xx일부로 10기갑중대 정비소대에 근무를 명받았으므로 이에 신고합니다.
"큰 소리로 자대배치 보고 겸 인사를 하고는 군기가 바싹들어 뻣뻣이 차렷자세로 서 있으니 한가롭게 구두에 광을 내고 있던 어느 병장이 "너 거기 우두커니 서있지 말고 이리 내 옆에 와서 앉아라" 하며 다정하게 손짓으로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포근한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긴장감이 풀리려는 자신을 억제하며 다가가니 고향이 어딘지 군에 오기전에 한 일이 무언지 이것저것 물었다.
큰 소리로 "예 이병 김흥수 고향은........."대답을 하니 "아따 귀청 떨어지겠다. 자~ 자~ 긴장풀고 편안하게 목소리 낮춰서 대답해라"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따라 목소리 톤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이 녀석, 어디서 군기가 빠져 가지고 서는, 목소리 좀 봐라 너 누구와 군대생활 오래할 것 같애? 이렇듯 사병생활은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배를 타고 공동운명체인데 병사들의 인격은 완전히 무시되는 점이 특히 견디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제일 괴로운 것은 구타였다. 잘못이 있거나 군대의 규률에 위반하면 응당 처벌받는 것은 당연하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서거나 또한 부당한 지시에 순응 않다고 때리는 등 리유없이 구타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욕설과 사역 아닌 사역 등 아무리 군대 말단의 사병이라 하지만 병사들에게도 인격이 있고 자존심이 있는데 그것이 무시되는 것 같아 졸병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해서 사병생활 면하고 싶었다.
그 병장님은 머지 않아 곧 집으로 돌아가실 분이야 "하며 호통을 치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큰 소리로"예 이병 김흥수는....."하자 처음 나를 불렀던 병장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며 "어이 그 참... 리병장, 나 군대생활 4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屍體 취급할거야" 하면서 "김흥수 너 나랑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하며 식당으로 데려 갔다.
그는 나와 같이 밥을 먹고는 PX로 가서 고량주 3병과 오징어 한마리를 사서 보급창고 뒤로 가더니 한잔하라고 권하였다. 술을 잘 못먹는다 했더니" 너 생긴거는 제법 할것 같은데 술을 못한다고? 그래, 그럼 한잔만 해라"고 한다.
더 거절을 하다가는 진짜 경을 칠 노릇이었다. 자대배치 받은 날 술마신 졸병이 몇이나 될까, 아니 있기나 할까 생각이 드는데 새삼 이색 경험을 하게 해준 그 고참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그 고참은 더는 아무 말 없이 병채로 입으로 가져 가더니 그 자리에서 2홉이 소주병만한 고량주 3병을 비워버리는게 아닌가. 그러고도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고 걸음도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도 군기가 빠졌다며 졸병 목을 발로 밟으며 물을 먹이는 상당히 폭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나에게는 왜 그리 잘 대해 줬는지 모를 일이다.
그 이후로도 단체 기합때를 제외하고는 그가 나에게 구타를 하거나 기합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는 고향이 창원인 權 xx라는 사람이었는데 사회에서는 술집 종업원으로 일 했었다고 했다.
체격이 중간 정도인데도 不구하고 힘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는데 속된 말로해서 통뼈였다. 6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의 이름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강하게 남았던 탓이 아닌가 싶다.
잊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은 내가 자대에 배치를 받아 오기 전 저녁 점호시간인 줄도 모르고 초저녁부터 야적장 호로 밑에서 잠을 자다가 탈영한 것으로 오해를 받아 온 중대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중대에서 고문관으로 알려진 이른바 돌아이 기질이 있는 3 월군번 일병인 고참이었는데 평소 나를 못마땅하게 보았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까다롭게 굴더니 자대에 배치를 받고 어느 정도 군대생활이 몸에 조금은 익어 가던 두달이 지났을 어느 날, 보초를 다 서고 난 그가 밤 1시 쯤 나를 깨워 예의 창고 뒤로 데려가더니 "차렷, 열중 쉬어! 야 김흥수 너 똑바로 못해"하면서 쪼인트를 까는게 아닌가. 몇대를 맞고 나니 오기가 생겨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열중 쉬엇 "하는 그의 구령에 짝발을 짚고는 동작을 하는 둥 마는 둥 그냥 서있었다.
열 받은 그가 약 1시간 동안을 발과 주먹으로 때렸는데 나는 그런 자세로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매를 맞았다. 그날 이후로는 그가 특별히 나만 괴롭히는 일은 없었는데 아마 그때 내 태도에 조금은 질린게 아니었나 싶다.
역시 오기를 부릴 때는 확실히 부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2月 군번 동기들과 함께 기합을 받는 단체집합은 부쩍 늘었다. 군대에서는 1월에 입대한 병사들을 1월 군번, 2월에 입대한 병사를 2月 군번하는 식으로 동기를 정하였는데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날씨가 추운 1월, 2월에 입대한 군번들의 사람들이 조금 강한 기질을 가진 것 같았고 3월, 4월 군번은 그 보다는 유했지만 조금 깐깐한 면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5, 6月 군번과 7, 8월 군번은 훈련받을 때의 날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무르고 약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9월에서 12월까지의 군번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아마 이 時期에는 입영하는 병사가 적고 부대에 배치되어 오는 병사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월군번 동기들은 막내같은 기질을 가진 유한 기질의 전우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더 윗 동기들의 표적이 되어 자주 기합을 받지 않았나 싶다.
한창 피끓는 젊은 시절에 거친 남자들끼리 모여사는 병영생활이고 보니 기합을 주는 사람이나 기합을 받는 사람이나 그때 뿐 아픔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어찌됐던 6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그들이 잊혀지지 않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낼까 생각나며, 지금 다시 만나면 그 때의 감정들은 다 잊고 소주라도 나누어 마시며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밤을 새워 얘기 나누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세월은 당시에는 그렇게 밉던 사람도 보고 싶어지게 만들 정도로 강한 망각의 미덕을 가지고 대인의 관대함을 불러 일으키는 묘약인게 분명한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원도의 겨울은 엄청추운 것이어서 밤중에 소편을 누면 영화에서 보는 북극에서 처럼은 아니 었지만 김이 나는 몸쪽의 것과는 달리 흘러가는 물줄기의 끝은 이미 얼어가고 있었고 세척장에서 밥을 먹고 난 후 식기를 딱으면 물기가 닿는 순간 강력본드 이상의 강한 접착력으로 식기에 손이 쩍쩍 달라 붙었다.
에스키모들이 짓는 얼음집은 분명 콘크리트집 이상으로 견고할 것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는데 랑만으로 보는 즐거움은 잠시뿐 겨우 내내 치워야 하는 눈은 고역일 뿐이었다.
쌓인 눈이 련병장 한쪽에 치워져 햇볕 난 따스한 날에는 녹았다 다시 눈이 와 쌓이면 치워져 한쪽에 쌓여 있다 다시 녹고 다시 쌓이고 하였다. 겨울이 한창인 어느 눈오는 날 예의 그 고참이 마시다 버린 술병이 막사 뒤쪽 뜰에 버려진 것을 중대장이 발견 했는데 전 중대원이 집합명령에 따라 팬티만 입고 눈오는 연병장에서 허수아비 자세로 서서 술병을 버린 사람이 스스로 걸어 나올 때까지 서있어야 하는 기합을 받았다.
밤 1시에 시작된 기합은 그 고참이 자신이 마셨음을 밝히고 난 밤 3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그제서야 빼치카를 땐 따스한 내무반으로 들어가 쪼개진 짧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물론 술을 마셨던 그 고참은 완전군장을 하고 다음 날 오전내내 련병장을 돌아야 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조금 피곤하기는 했으나 몸은 멀쩡했다. 그렇게 혹독한 날씨에 팬티만 입고 눈오는 련병장에서 2 시간을 가만히 서 있었는데도 감기하나 걸리지 않은 것은 그 무엇으로도 식힐 수 없는 뜨거운 젊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월에는 입대 후 8개월만에 첫 휴가를 가게 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첫 휴가를 나가는 졸병의 구두를 고참이 광이 나도록 딱아서 신기고, 베일 정도로 목깃을 빳빳히 다린 전투복을 입혀서 "고향 앞으로" 휴가를 보내는 게 그 시절의 군대미풍량속이었다.
광내고 때빼고 중대정문을 나오는 순간에 느끼는 해방감은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상쾌함이었다. 그 길로 포천시내의 시외버스 터미날로 가서 룡산역에 내려 삼각지에 위치한 륙군본부 부감감실에 찾아가 소개하는 사람, 아는 사람 그곳을 찾아가 병적담당자를 만나 카투사에 가는 시험이 있는지 문의하니 없다하면서 부산에 있는 륙군인쇄공창에서 기술공 모집이 있다하면서 시험응시원서를 받아 륙군본부에서 당일 시험에 응시하고서 용산역으로 찾아가 12열차에 승차 부산역에 내려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초가을 10월 군용렬차를 타고 하염없이 北으로 올라 온 때가 그저께였는데 벌써 계절이 겨울이 머지 않은 봄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향에서 보내는 5박 6일의 휴가는 친구들과의 만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6일간의 시간은 흘렀고 군인에게 사회에서의 6日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저 집에서 잠자고 친구들 만나 술마신 일이 전부였는데 그 때는 휴가라는 단어가 왜 그리도 간절함으로 다가 왔었던지. 별로 한 일도 없이 아쉬운 휴가가 끝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진역에서 12군용렬차에 탑승 용산역에 내려 포천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예정보다 빨리 포천에 도착하여 혼자서 다방에서 커피도 마시고 하며 단 1분의 어김도 없이 주어진 시간을 다 소모한 다음에야 귀대를 하니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중대본부에서 휴가 귀대보고를 하고 식판을 들고 식당으로 향하니 고참이 "김 일병 휴가는 잘 갔다 왔나? 사제밥 먹다 짠밥 먹겠어? 너 사회생활 며칠하더니 아주 사회인이 다 되었구나. 휴가도 다녀 오고 했으니 이제부턴 군기부터 원위치 해야지" 하는 소리에 한층 군가소리의 톤을 높혔다.
군대에서 이동중에는 항상 구령을 붙이거나 군가를 부른다. 식사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 마치고서 두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얼싸 좋다. 김일병 신나는 어깨춤..... "그렇게 그 해 겨울이 지나갔다.
이듬 해 때는 1958년 10月에 광주보병학교 상무대내 기갑학교 교육 명을 받았다. 기갑학교 12주간 교육기간의 초반기에는 기갑제식훈련부터 시작해서 각종 군기교육을 통하여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주는 지상의 왕자 무적 전차병을 양성한다.
하루의 일가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군기를 잠시도 잊을 수 있도록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를 한다. 초반기에는 리론교육을 위주로 하지만 중반기에 접어들면 직접 전차에 승차하여 조종장치와 무전기 조작법 그리고 포사격 전술등을 손으로 직접 조종하면서 실전훈련에 들어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후반기에 접어들면 실제 전차를 조종하는 훈련을 받는다.
거꾸러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를 돌아간다는 명언을 마음에 세기면서 교육훈련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마음에 위안을 삼는다. 마지막 단계로 후반기에는 전차조종 교육을 받는다. 조종교육장은 장성의 비아교육장이라고 하는데, 그곳애서는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황토길 비포장 도로는 탱크가 지나가면 뽀얗게 먼지가 일어서 앞이 보이지 않고, 비가 내리면 황토가 군화에 달라붙어 발이 빠지지 않을 정도다. 조종교육장은 자동차 운전학원처럼 각종코스를 통과하고, 평지 주행도하며, 특이한 지향지물인 장애물 통과와 강을 건너는 도하훈련까지 한다. 전차조종교육은 초반기 받은 정신교육에 주특기 리론교육 그리고 실습훈련을 종합적으로 응용해서 마지막으로 하는 敎育이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실제로 조종교육장 교육이 실시된다” 전차는 조종수 한사람의 실수로 국방부 재산의 손실과 인명피해를 가져올 수 있기때는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먼저 1차적으로 주지를 시킨다.
”좌우로 정열“ ”앉아“ 일어서” 앉아“일어서.”저쪽에 보이는 장애물들을 돌아서 선착순으로 집합“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승하차훈련을 실시한다. ”조종수는 다른 승무원보다 특히 신속한 행동을 요하며, 승차! 라는 구호와 함께 승차를 한다.
“승차” ‘하차“ 그래도 무진장 빠르 속도로 뛰어서 전차에 올라가서 햇지를 열고 조종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안든다고 하차 시킨다. 하차” 이번에는 연속으로 지시를 한다. “승차” “하차”“승차”“ 하차" 전차에 뛰어올라 조종석에 들어갈만 하면 하차하라고 하고 하차하면 승차하라고 한다. 이렇게 1단계 승차하자 훈련을 하면서 숨이 차서 벌써 핵핵덴다. 다음 조종훈련이다.
먼저 전차에 오르면 핼맷을 쓴다음 구내전화를 개방해라,” “그다음에 조교의 지시에 따른다. 만약지시에 따를지 않는 병사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알겠는냐? 조교말한마디 한마디마다가 편한말이 하나 없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나서 순서를 정하고 몇대의 전차에 나누어서 조교 한명에 조종수 한명씩 1 : 1조종훈련을 시작한다. “김일병 승차” “냅! 승차” 하면서 복장을 하고 초고속으로 궤도를 밝고 전차에 올라 선다.
어허! 동작봐라~ 다시하차“ ”승차“이렇게 다시한번 승차를 하고나서 햇치를 열고 조종석에 앉아서 가뿐숨을 몰아쉰다. 핼맷을 쓰고 나서 바로 구내전화를 개방해여한다. 그렇지 않으면 엔진소리가 왕왕대기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정신이 없어서 핼맷만 쓰고 구내전화 개방하는것을 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후 무전기 안데나를 뽑아들고 핼맷의 머리통을 후려 갈긴다.“야! 이 ××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어 양” 포탑위를 처다보니 조교가 구내전화 개방하라고 손짓을 한다.
얼런 핼맷의 구내전화 스윗치를 조작하니 그때서 부터는 핼멧의 핸드폰으로부터 욕지거리가 솥아진다. “정신 똑바로 안차리면 죽어버리다” 사실 처음으로 시동걸린 탱크 조종석에 앉으니 전차가 왜그리도 커보이는지 “조종수! 출발준비 됐나?”
“넵! ”그럼 출발한다“ 주자브레이크를 들고 변속레바를 드라이브로 옮긴다. 다음 조종핸들을 잡고 가속페달을 밟으면 전진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게 아니였다. 핼맷을 쓰고 있으나 머리가 멍하고, 엔진소리는 왜그리 크게 들리는지 왕왕내니 정신이 없다.
그리고 평소에 시동걸지 않고 조작만 해보다가 시동걸린 상태로 출발하려니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뭐하나 야! 이새 ×× 야 출발하란 말이야“ 순간 갑자기 가속페달을 쿡! 밟으니 덜거덩 전차가 뛰어 나간다.
"야! 뭐하나 야! 이 개 ×× 야 조종 똑바로 않해! 양!” 그러나 자동차 운전을 배울때는 누구나 그렇지만 조교가 욕하고 소리 지르면 주눅이 들어서 못하는것 처럼, 벌벌 떨면서 전차의 핸들을 잡고 있으니 저절로 조종이 될리 없다.
가속페달을 밟았다거 놓았다가 하니까 연신 전차가 옮컴댄다. 그리고 조종핸들도 살포시 잡고서 가법게 조종하면 되지만 불안해서 꼭잡고 조종을 하니 50톤이나 되는 전차가 먼지를 풍기며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하면서 조종 실력이 엉망이다.
이것이 초보 전차조종수의 특징이다. 잠시도 끊지 않도록 질러되는 말소리는 지시가 아니고, 아예 욕지거리로 고함을 잘러대니 귀가 아풀 정도다. 나중에 조교가 전차장석에서 밖으로 나와 조종수 머리에 아예 서있다. 똑 바로 가란말이야 개 × × 야“ 점점 불안해서 탱크가 제대로 갈리가 없다.
비틀비틀 가다가 여기저기 장애물도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잠시후 쾅! 하면서 벼락이 내리친다. 조교가 군화발로 핼맷쓴 머리통을 내려 밟았다. 깜짝 놀라 모가지를 빼고 비틀비틀 전차가 먼지를 풍기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언제 또 군화발로 머리통을 내려 밟을지 몰라서 조마조마하다. 이렇게 초보자의 조종은 시작되고 군화발로 머리를 몇번 밟히다 보니 얼떨결에 서너바퀴 주행을 했다. 이렇게 초보자의 조종은 시작되고 군화발로 머리를 몇번 밟히다 보니 얼떨결에 서너바퀴 주행했다.
이런 현상은 나혼자만의 現狀이 아니였다. 여가저기 지나가는 초보조종수들의 조종 실력은 한마디로 엉멍이다. 어떤 초보자는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어떠멍청 초보조종수는 시설물을 들어 받아 사고도 발생한다. ‘조종수 스톱“ ”하차“ 이렇게 평지주행 서너바퀴 들면서 하차하여 전차를 처다보니 어떻게 저렇게 큰 덩치를 조종했는지 알수 없었다. 잠시후 하차후 조교는 초보조종사의 실수를 그대로 덮어두지 않았다.”야! 이 개×× 들 그만큼 시켰는데, 그따위로 밖에 못해, 앙.“ 조교가 잡아먹을 듯이 앙칼지게 말을 내 뱉는다.
1개조가 조종교育이 끝나고 모두 집합하니, 이제부터는 조교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것에 댓가를 치루어야한다. ”전차조종 잘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스스로 죄를 인장하는구나“ 지금부터 전차밑을 통과하여 선착순으로 집합한다”“실시” 순간적으로 우루르 뛰어서 전차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전차 바닥이 낮기 때문에 최대한 낮은 포복으로 기어 통과할수 있다. 납짝 업드려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나온다. 그런데 탱크가 크다는 생각은 했지만 바닥의 길이가 이렇게 긴줄은 에전에 미쳐 몰랐다.
팔꿈치와 다리를 허우적 대면서 통과한다. 그러나 한번만에 끝나는게 아니고 야속한 조교는 3번까지 전차의 바닥으로 기어나오게 만들었다. “김일병! 저 원수덩어리, 사회에서 만나면 죽어 바릴꺼야” 혼자만의 독백을 하면서 화를 푼다.
그리고 연약하던 사나이들이 매일같이 악을 쓰다보니 깡다구가 길러지고 있었다. 강한 훈련이 지속될수록 전차병들은 저 큰 덩치의 전차가 내 손으로 움직이고 있다니 대견스럽기만하다. 이렇게 악마같은 조교들 밑에서 철저한 훈련과 기압을 받아가며 자상의 왕자 무적전차병으로 태여난다. 이제 황색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얼룩무늬 베래모를 쓴 전차병으로 탄생되어 전방으로 올리간다.
기갑학교 입교하여 철저한 군기교육부터 배우기 時作하여 지옥같은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몸에 익으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도있고 군기가 바싹들어 눈알이 똘방똘방하게 돌아가 강인한 전차병이 되었다.
12주 교육이 끝날무렵 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에 있는데 기갑학교 인사담당 장교가 찾아와 전속명령지를 보이면서 본대귀대 준비하란다. 서둘러 개인보급품을 챙겨 더블백에 담고 인사 담당장교를 찾아가 귀대 명령지를 받고 광주역으로 찾아가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 서울행렬차를 바꾸어 타고서 서울 룡산역에 내려 경기도 포천 지포리가는 버스로 본대에 귀대신고를 하니 인사계가 1959년 1월 30日부로 륙군인쇄공창으로 명령이 났다하면서 내일 출발신고를 하란다. 중대 본부에 찾아가 인사장교에께 출발신고 륙본인사(병)명령을 수령하니 1월 28일 출발 1월 30일까지 육군인쇄공창에 전입신고도록 되어있었다. 10 탱크부대에서 힘들게 동고동악을 같이한 장,병 중대요員의 부러움을 뒤로하고 선배, 동기와 서로 부등켜안고 남은 군대생활을 최선을 다하고 고향가까운 곳으로 간다면 아쉬운 리별을 고하다. “잘있거라 포천 지포리 쪽을 보면서 오줌도 안눈다. ‘이런 생각들었다. ”야호! 드디어 고향 가까운 부산으로 떠난다. 마치 군대생활을 다한것 마냥 신났다.
포천을 출발 서울 룡산역에 도착하여 12렬차에 몸을 싣고 부산에 도착 남구소재 육군인쇄공창 정문에 도착하니 위병소 입구에 들어서자 위병소에 대기하던 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면서 중대본부에 안내되어 전입신고를 마치고 곧바로 소속중대에 배치되지 앉아서 일시적으로 본부중대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사담당 상사님의 모든 안내를 받으며 하루동안을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말소리가 부드러웠으며 차근차근 설명도 잘해주면서 전군에서 차출해 온 인쇄기술공이 8명이라며 설명을 해주신다. 륙군인쇄공창 편재는 중대본부, 관리부, 평판부, 활판부, 제본부로 세분되고 대대병력으로 전군이 필요로 하는 인쇄물을 평판인쇄, 활판인쇄하여 제본부에 제본하여 출고하는 일을 하다.
나는 활판부 서무계로 보직을 받게 되어 공장 내부을 들러본봐 전지 삽지기 7대 전지반 삽지기 16대 옵셋 인쇄기 15대로 倒合 인쇄기 30대로 종일 짤각짤각하는 기계소리를 듣고 사무실 5평정도에 방음장치가 되는곳에 보직을 받아 들러가니 선임 병장 서무가 반갑다하면서 악수를 나누니 일주후 제대 귀대하다면서 업무인계 하기에 업무를 인계 받고서 다음날부터 인쇄된 용지를 전지환산하여 일일보고서를 작성하여 부장에께 결재를 得하고 일가가 끝나면 내무반 생활도 상병진급 간섭받지 않는 생활로 1년동안 生活하면서 토요일면 외박신청하여 고향에 자주 갔고, 당시 시내 뻐스는 군인에께는 혜택주어 무료로 외출증을 받아 부산시역 전곳을 다녔다.
국방 의무시계는 36개월 4개월이라는 세월이 지나 제대 명령 받게 되다. 제대하면서 군에 지급받은 모든 것을 반납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고향으로 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