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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고창 43코스 역방향 제1부
사포버스정류소-김소희생가-상포마을-반월마을-선운리 미당생가
20230322
1.별빛 흐르는 곰소만 해안을 따라 질마재마을로
곰소만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음력 초하룻날 새벽 하늘에는 달이 졌고 별들이 별밭을 이루었다. 별빛이 곰소만에 흐른다. 별빛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림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특별하게 빛나지도 않지만 은은하다. 곰소만 고창 해안은 어둠에 묻혀 있고, 맞은편 변산반도의 곰소만 해안은 불빛이 길게 늘어서 반짝인다. 곰소만 하늘의 별빛은 수줍은 듯 살포시 곰소만에 내려앉아 흐르다가 변산반도의 반짝이는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곰소만 별빛은 어두운 고창 해안을 따라 은은히 흐른다. 길손은 그 별빛을 따라 미당의 생가가 있는 질마재마을로 향하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들, 곰소항과 내변산, 내죽도를 가늠하며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반월마을에 이르니 동이 텄다. 물상들이 밤새 갇혀 있던 어둠을 털어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송현리 드넓은 안현(鞍峴) 간척들로 나갔다. 건너편에는 선운리(仙雲里) 질마재마을을 품은 소요산(逍遙山)이 우뚝하다. 질마재마을의 뒷산은 예전에 '쇠산'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소요산(逍遙山)이라 불리고 있다. '쇠산'의 쇠잔등에 해당하는 곳이 질마재로, ‘질마’는 짐을 싣기 위해 쇠잔등에 얹는 ‘길마’의 사투리인데, 고갯길이 길마(질마)를 닮아서 질마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은 질마재 아래에 있어서 질마재마을, 또 진마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질마재마을 사람들은 소요산을 삼신산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는 것 같다. 높이는 445.4m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해안에 자리한 소요산은 우뚝 솟아서 사방을 조망하는 명소일 것 같았다.
진마안길을 따라가면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 <질마재 신화>와 관련하여 조성된 조각작품들이 세워져 있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이 자신의 고향마을에 바친 헌시라고 할수 있다. 9살에 이곳을 떠난 미당이 나이 들어서 고향의 그리움을 담은 이 시집은 "원초적, 토속적이며 주술적인 원시적 샤머니즘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질마재는 인간의 본성이 회복되는 곳이며, 잠재되어 있던 원시성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라고 한다.
미당의 생가로 들어갔다. 스물세 살에 쓴 시 '자화상'에 언급된 '대추나무와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을 떠올렸지만 복원한 생가에서 그 모습은 멀리 달아났다.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 "자신을 죄인(罪人)이나 천치(天痴)로 보든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그는 스물세 살 나이에 정직하게 실토했다. 미당의 생애가 눈 앞을 스쳐간다. 그의 친일 행위를 논외로 치더라도 전두환 정권의 찬양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의 정치의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 덮어 버릴 일일까?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이니 그의 시적 언어에 감동하면 되는 것이지 정치나 역사의식의 부재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시대와 역사의 첨병 역할을 하는 선구자여야 한다는 입장에 서면 미당은 언어 표현의 기교에 머문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는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질마재의 노래'가 울려온다. 그는 질마재마을에서 도라지꽃 모양으로, 칡넌출 뻗어가듯, 솔바람과 더불어 살다가, 죽어서 질마재 하늘에 푸르게 빛나고자 했다. 과연 그는 질마재하늘에 푸르게 빛나고 있는가?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서정주의 '질마재의 노래'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2.46km 중 12.5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44분 중 2시간 54분
흥덕면 사포리(沙捕里) 사포(沙浦) 버스정류소 옆에 서해랑길 부안 44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쪽에는 정유재란 때 사진포에서 순국한 무명의병충의위령탑과 최서생 의병장과 관련된 해주 최씨 문중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43코스는 21.1km, 7시간, 보통 난도이다. 뒤쪽에 정유재란 1597년 9월 29일 전투에서 의병장 최서생의 부인 문화 류씨가 투신한 사포리의 거사방죽이 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 고창 43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며 44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뒤쪽으로 가서 무명의병 충의 위령탑과 해주 최씨 관련 비석들을 살피고 서해랑길을 출발한다.
사진포(沙津浦) 전투에서 순국한 무명의병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과 송죽 최일수의 건립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포(沙津浦)는 지금의 흥덕면 사포리 북단에 있는 포구로 조선 시대에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고 왜구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옛 모습이 사라지고 한산한 포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포 전투에서 의병장 최서생이 전사하자 그의 부인 문화 류씨는 자결하였다.
해주 최씨 서생과 기종의 유적비, 최서생 부인 문화 류씨 열행비와 열부각, 열부 문화 류씨 노비 순동 공로비 등이 세워져 있다.
왼쪽 전봇대 기둥에 서해랑길 44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43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후포(後浦)마을 방향은 서해랑길 44코스에서 진행한다. "마을 앞에 개가 있으므로 뒷개 또는 후포(後浦)라 하였다. 사포마을은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활발한 항구로 왜적들의 침입이 잦았다. 19세기까지 호남 내륙의 해산물 운송처였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되었다. 후포마을은 사포항이 폐항되면서 호남 지역의 해산물을 공급하는 항구였으나, 8·15 해방 후 퇴적 작용으로 역시 폐항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 43코스 종점이며 44코스 시작지점인 사포 버스정류소 주변 모습이다.
서해랑길 43코스 역방향,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사포마을 김소희 생가 방향으로 진행한다. "사포리(沙捕里) 사포(沙浦)마을은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활발한 항구로 왜적들의 침입이 잦았다. 19세기까지 호남 내륙의 해산물 운송처였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건물은 흥덕면 사포리(沙捕里) 경로당이다.
"沙捕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 속하는 법정리. 갯가에 모래가 많으므로 사진포(沙津浦) 또는 사포(沙浦)라 하였다. 사포리는 흥덕면의 중부에 있다. 사포리·주황리 2개의 행정리와 사포·고사리바탕·새터·술항골·회목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사포에는 조선 시대에 흥덕골에서 거둬들인 세미를 쌓아 두었던 곳집이 있던 창 터가 있고, 강진 터 위 갯가에 봄과 가을철이면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해수욕을 했다는 해수통 터[일명 천연탕 터]가 있는데 지금은 메워졌다. 문화 유적으로 김소희 생가가 있다. 사포리 오른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국악계의 사표이며 국창으로 불리운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김순옥)는 1917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하고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춤·기악을 두루 사사하였다. 김소희는 100년에 한 번 나기 힘든 천부적인 목소리에 노력을 더하여 3~4년의 짧은 기간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정악, 한학, 서예 등을 익혀 그의 예술에 품격을 더하여 왔으며 판소리 춘향가 김소희(制)를 창제하고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 받았다. 국창 김소희는 도제교육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여 국악 전문교육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전통음악의 진면목을 세계에 펼친 선구자이다. 김소희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1회 동리대상,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등을 수상하였고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던 중 1995년 4월(향년 79세)에 타계하였으며 묘소는 유언에 따라 고향에 모셔졌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제1호)을 추서하였고 '광복50주년 역사를 만든 한반도의 주역50인'에 선정되었다. 작품으로는 판소리, 민요, 구음 등의 음반과 다수의 창극 창작품들이 있고 슬하에 2남1녀를 두었으며 명창 박윤초가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다. 이 집은 마을 주민이 개축, 관리하여 오던 것을 2002년 5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왼쪽이 사랑채이고 오른쪽이 안채이다. 안방 문 위 벽에 가족 사진과 김소희 사진이 걸려 있다.
"金素姬는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호는 만정(晩汀)이며, 본명은 순옥(順玉)이다. 1917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김소희길 33]에서 태어났다. 김소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광주로 시집간 언니 집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이때 광주에 내려온 이화중선(李花仲仙) 일행의 공연을 보게 된 뒤 소리에 이끌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협률사 공연을 보러 다녔고, 결국 「심청가」의 눈대목[판소리에서, 가장 두드러지거나 흥미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추월만정」을 그럴 듯하게 흉내낼 정도로 소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 언니는 나무랐으나 형부가 독려해 주면서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입문시켰다. 이후 김소희는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단가(短歌)를 6개월 정도 배우면서 애기 명창이란 이름으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 서울로 올라온 지 한 달여 만에 한성주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이후 전계문(全桂文)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에는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丁貞烈)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朴東實)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鄭應珉)·김여란(金如蘭)·정권진(鄭權鎭)·김연수(金演洙)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이렇게 내로라하는 명창들로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으면서 김소희는 박유전(朴裕全)-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박동실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한 흐름과, 박유전-정재근(鄭在根)-정응민으로 이어지는 서편제의 또 다른 흐름, 그리고 송흥록(宋興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의 흐름까지 꿰뚫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광복 이후인 1948년 김소희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해 이사가 되고,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 국극인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다. 「햇님 달님」은 공연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여 가며 어렵게 만든 무대였는데, 막을 올리자마다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 「햇님 달님」은 우리 공연계에 여성 국극의 전성기를 가져오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국악예술고등학교 재단이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 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1995년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4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95년 사망 후 해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발전소 주변지역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한 지원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발전소는 어느 발전소인가?
"김소희 생가 근방은 줄포만[곰소만]에 자리 잡은 포구였으나 지금은 갯벌이 간척되어 대부분 논으로 바뀌었지만 하천을 따라 바다로 가는 물길이 남아 있다. 김소희 생가의 마루에 앉아서 보면 왼쪽으로부터 노령산맥이 포진하였고, 오른편으로는 변산반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 주민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축하여 관리하던 것을 헐고 2002년 5월에 주민들의 기억과 고증을 토대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ㄱ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안방 문 위에 김소희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뒤뜰에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헛간도 한 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소희 생가를 살피고 집 앞의 김소희길을 따라 해안 방향으로 진행한다.
김소희 생가 100m 지점의 사포상암로에 해안문화마실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미당시문학관 13.3km 방향으로 이어간다.
사포상암로를 따라 앞쪽 갈곡천 배수갑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흥덕면 사포리에서 갈곡천을 건너 부안면 수앙리로 넘어가서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곰소만 남쪽 해안을 따라 북진한다.
"갈곡천(葛谷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면 중흥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하천. 신림면 가평리 방장산 북쪽 갈촌(葛村)에서 발원하여 세곡(細谷)까지의 각 골짜기의 물을 합류시키기 때문에 갈곡천으로 불리고 있다. 갈곡천은 해천(蟹川), 혹은 ‘게내’라고도 하였다. 곰소만[줄포만]으로 직접 유입되는 해안과 인접한 하천으로 하상이 점토 및 실트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잡초와 수풀이 무성하게 형성되어 있다. 하구 지점에 배수갑문[5m×3m×5련]이 설치되어 있고, 하천 주변은 대부분 경지 정리가 완료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미당시문학관 13.2km 방향으로 북진한다. 흥덕면 사포리에서 부안면(富安面) 수앙리로 넘어왔다.
"부안면(富安面)은 간척지 논이 많아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부안(富安)이라 하였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이서면(二西面)의 등성(登城)·신안(新安)·죽도(竹島)·선운(仙雲)을 부안면에 병합하여 고창군에 편입하고 중흥·오산·수남·검산·수동·수앙·상암·봉암·송현·선운의 10개리로 개편하였다.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백사면의 운양·사창·상등·용산을 편입하여 14개리가 되었다. 부안면의 남서부는 소요산(逍遙山)[444.2m] 등 300~400m 높이의 산지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데, 중생대 백악기의 신기분출암으로 이루어져 남쪽의 아산면까지 연장되고, 기타 지역은 모두 대보화강암이다. 간석지를 간척하여 선운리·상암리 등지에 회색토가, 기타 화강암 지역에 적황색토가 분포한다. 북동·북서쪽은 서해의 넓은 간석지로서 내죽도(內竹島)가 있다.
중흥리·오산리·수남리·검산리·수동리·수앙리·상암리·봉암리·송현리·선운리·운양리·사창리·상등리·용산리의 14개 법정리 37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 흥덕면, 남쪽으로 아산면·신림면과 이웃하고, 서쪽과 북쪽은 서해와 맞닿아 있다. 주민들은 주곡(主穀) 농업 외에 축산업과 양잠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공공 기관으로 부안면사무소·부안우체국·부안면보건지소 등이 있고, 교육 기관으로 고창북중학교·부안초등학교·봉암초등학교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115호인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요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인 인촌 선생 생가, 봉암리 유물산포지 등이 있다. 부안면의 남부를 동서 방향으로 정읍~영광 간 국도 22호선이 통과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멀리 위쪽은 고창군 부안면 면소재지 중흥리 지역일 것이다.
"갈곡천이 서해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한 부안면 중흥리는 면소재지로 난산마을과 서당촌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당촌마을에 자라 형국의 뒷산인 오산(鰲山)이 있다. 난산마을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상 자라가 부화한 알과 같다고 해서 붙었다. 서당촌은 원래 해리면 임해마을에 임진왜란 때 터를 잡았던 김해김씨(金海金氏) 후손들이 서당을 이루고 살아서 서당촌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이천서씨(利川徐氏)들이 들어와 많이 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방금 걸었던 흥덕면 사포리 사포마을 반석교회와 사포리 경로당, 김소희 생가가 어림된다.
갈곡천 배수갑문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곰소만 남쪽 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곰소만 남쪽 해안에 조성된 제방길을 따라 서진한다.
고창군 부안면 수앙리 지역에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고, 축사에 홍등 불빛이 빛난다.
"水央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수앙리는 수강산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수앙(水央)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용현(龍峴)·반룡(盤龍)·신천(新川)을 병합하여 수앙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수앙리는 부안면의 북동부에 있다. 용현리·반용리 2개의 행정리와 용현·반룡·신촌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에 가운데뜸·굉잇벌·샘잇골·아랫뜸·웃뜸 등의 마을도 있다. 가운데뜸은 용현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고, 굉잇벌은 가운데뜸 남쪽 들 옆에 있는 마을이다. 반룡은 용현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소반에 앉은 용과 같아 붙인 이름이고, 샘잇골은 신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좋은 샘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신천은 반룡 북쪽에 새로 이룬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고, 아랫뜸은 용현의 아래쪽, 웃뜸은 용현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용현은 수앙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용고개 밑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지방도 734호선이 수앙리를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로 앞 수앙배수장 사진을 찍지 못하고 지나쳐왔다. 수앙배수장 뒤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갈곡천 배수갑문일 것이다.
곰소만 고창 해안의 생물권보전지역에 와 있다.
김소희 생가 2.7km, 미당시문학관 10.7km 지점이다.
김소희 생가 5km, 미당시문학관 8.4km 지점, 부안면 수앙리와 상암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로에 배수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포마을 입구에서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왼쪽 우회로를 따라간다
위쪽으로 진행하면 해안을 따라가지만 우회로를 따라 상포마을로 진행한다.
상포마을은 1900년까지 어판장이 있을 정도로 어업이 발달했으나 지금은 조개 채취와 농사가 주업이라고 한다.
"象岩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상암리는 상포(象浦)의 ‘상’자와 석암(石岩)의 ‘암’자를 따서 상암(象岩)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석암·원당(元堂)·상포·반월(半月)·인촌(仁村) 일부를 병합하여 상암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황시암골 위에 서쪽 부안면 봉암리의 대섬과 마주 보는 대섬등, 낙파정(樂波亭) 터가 있는 비석등, 반월 동쪽에 정문등 등의 산등성이가 있다. 정문등 서쪽에 황시암골, 황시암골 서쪽에 방죽이 있던 방죽골, 반월 북쪽 갯가에 샘이 있던 시암골, 상포 서쪽에 옛날 장자가 살았다는 장자동(長者洞)[일명 장재동] 등의 골짜기가 있다. 비석등 동쪽에 높이 6m 되는 벼랑인 평풍석이 있는데 벼랑 위에 오르면 서해, 서북쪽으로 곰소만, 동북쪽으로 곰소만[줄포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황시암골에 황시암이라는 샘이 있고, 상암에 상암저수지가 있다. 상포 서남쪽 개 안에 주섬[일명 쥐섬]이 있는데 쥐의 형국이어서 코끼리 형국을 한 상포의 코끼리를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상암리는 부안면의 북부에 있다. 석암리·농원리·신농원리·상포리·반월리 5개의 행정리와 석암·원당·쥐섬·농원(農園)[일명 은흥촌(恩興村)]·신농원·반월·상포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농원은 상포 남쪽에 있는 마을로 1954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원을 조성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반월은 상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반월 모양이어서, 상포는 상암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형이 코끼리와 같고 갯가에 있어서, 석암은 상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신농원은 농원 옆에 새로 이룬 마을이고, 원당은 석암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가장 먼저 이룬 마을이다. 쥐섬은 상포 동쪽 갯가에 불쑥 솟아 있는 마을이다. 상암리에 지방도 734호선이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포마을을 우회하는 우회로가 이곳에서 해안로와 만난다.
상포길이라 명명된 곰소만 제방길을 따라간다. 왼쪽에는 태양광발전소 대단지가 펼쳐져 있고, 건너편은 변산반도이다.
오른쪽 곰소만 해안에 왕새우 양식장이 있어 길가에 수차(산소공급기)들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 맨 뒤 곰소만 안쪽 끝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출발하여 곰소만 남쪽 해안을 따라 서남진하고 있다. 맨 오른쪽 불빛은 부안면 상암리 상포마을, 왼쪽 건너편은 곰소만 부안군 보안면과 줄포면 일대라고 가늠한다.
부안군 변산반도 곰소만 해안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줄포면, 보안면, 진서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안군 변산반도 곰소만 해안이 진서면에서 왼쪽 변산면으로 이어지고, 중앙의 불빛 반짝이는 곳은 진서면 곰소항일 것이다.
곰소만 고창 해안 제방길인 상포길을 따라 서남진한다. 건너편 중앙 불빛은 부안군 진서면 왕포항일 것이다.
뒤쪽의 불빛 반짝이는 상포마을에서 간척지에 조성된 태양광발전소 대단지 옆 제방길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다.
왼쪽에는 여전히 태양광발전소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 뒤 불빛 있는 곳은 고창군 부안면 내죽도일 것이다.
왼쪽 구릉 뒤에 부안면 상암리 반월마을, 건너편 맨 오른쪽에 부안군 진서면 곰소항, 중앙에 왕포항, 맨 끝에는 변산면 모항일 것이라 어림한다.
미당시문학관 1km 지점, 이곳에서 오른쪽 해안으로 나가지 않고 왼쪽 들길로 나가 돌아서 반월마을로 향한다.
중앙에 솟은 소요산 아래 질마재마을에 미당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왼쪽으로 돌아서 오른쪽 반월마을로 진입한다.
왼쪽에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반월마을과 간척들, 건너편에 곰소만 변산반도의 내변산 산줄기와 곰소항이 가늠된다.
곰소만 남쪽 해안을 따라오다가 반월들길로 들어와 오른쪽 언덕의 태양광벌전소 아래를 거쳐왔다.
구릉 뒤쪽에 부안면 상암리 반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 솔숲 앞으로 이어간다.
반월마을 입구 언덕에 묘지들이 조성되어 있다. 솔숲 언덕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순흥 안씨 세천비(世阡碑)가 서 있고, 반월마을은 반월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반월마을 앞을 거쳐 양식업과 수산물 판매업체인 덕진수산 앞으로 왔다.
수로를 건너 부안면 상암리에서 봉암리로 넘어간다. 뒤쪽에 거쳐온 부안면 상암리 반월마을이 보인다. 반월마을 주민들은 조개와 새우잡이를 주업으로 했으나, 지금은 양식업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부안면 상암리에서 봉암리로 넘어왔다. 중앙에 봉암리 봉오마을과 그 왼쪽에 인촌 김성수 생가가 있는 인촌마을이 가늠된다.
"鳳岩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봉오(鳳梧)·인촌(仁村)·대고(大姑) 각 일부, 이서면 죽도(竹島)를 병합하여 봉암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봉암리는 부안면의 북부에 있다. 인촌리·봉오리·죽도리 3개 행정리와 인촌[일명 임촌]·할미당[일명 고당]·죽도·봉오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다락골은 할미당 서남쪽에 있던 마을이고, 죽도는 내죽도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봉오는 봉암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다. 인촌은 봉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있다. 매봉재[일명 떠퐁재]에서 내려다보면 좌우에 모두 일곱 가닥의 줄기를 겹겹이 거느리고 있어 칠곡수 또는 일곱가닥 명당이라 부른다. 마을 지형이 ‘사람 인(人)’자 형국이라 한다. 할미당은 고당산 밑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교육 기관인 봉암초등학교가 있고, 문화 유적으로는 인촌 선생 생가 외에 봉암리 인촌 당산, 봉암리 죽도 영당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양식장 뒤에 내죽도가 보인다. 곰소만 입구 심원면 동호항 앞 두 개의 섬인 외죽도에 대응하여 내죽도라고 한다. 건너편에 부안군 변산반도의 내변산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內竹島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 속하는 유인도. 섬 이름은 섬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섬[竹島]’이라는 말과 섬이 크게 보인다고 해서 ‘대섬[大島]’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죽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섬(왼죽도) 안 쪽에 있다고 해서 내죽도라고 한다. 입도 시기는 고려 후기로 난민이었던 주씨가 처음 들어왔고 임진왜란 후에는 순흥 안씨, 김해 김씨, 광산 김씨 등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부안군 진서면 곰소항과 내죽도 사이의 거리는 약 3㎞이고,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에서 내죽도까지는 약 2.8㎞이다. 내죽도는 전체적으로 남쪽이 넓은 삼각형 모양이다. 내죽도 왼쪽과 오른쪽에 야산이 있다.
내죽도는 부안면 북서부에 있다. 주민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여 바지락, 가무락 등 어패류를 채취하여 판매하고 있다. 교통편은 곰소항에서 개인 어선으로 왕래하는데 약 5분이 소요된다. 내죽도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도서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총 사업비 45억 7,700만 원을 들여 갯벌 건강 공원 조성, 향토·갯벌 민박 단지 조성, 해안 순환도로 건설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2011년에는 전기공급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2002년에는 해양수산부의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마을 뒤편의 야산 단애면과 마을 안 밭에서 봉암리 죽도 패총이 확인되었으나, 경작에 의해 파괴가 심한 편이다. 무문토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연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집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면 봉암리에서 송현리로 넘어왔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들길을 돌아 소요산 아래 질마재마을로 이어간다.
김소희 생가 10.7km, 신기마을 0.8km, 미당시문학관 2.7km 지점. 오른쪽 이정목 날개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송현리(松峴里) 간척들을 돌아서 소요산 아래 질마재마을로 향한다. 앞의 구릉 뒤에 안현(鞍峴)마을이 있다.
"富安面 松峴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송현리는 송암(松岩)의 ‘송’자와 안현(鞍峴)의 ‘현’자를 따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소고(小古)·안현·대고(大古)·송암·신흥(新興) 일부를 병합하여 송현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안현 뒤에 산등성이인 산정등이 있고, 산정물에 부안면 선운리 신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솔갓재가 있다. 산정등에는 서해의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 낙조정(落照亭)이 있다.
송현리는 부안면의 중북부에 있다. 고잔리(罟棧里)·안현리(鞍峴里)·신기리(新基里) 3개의 행정리와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고랑뜸·대고·소고·산정물·새터[新基]·선암뜸·속뜸·태용골 등의 마을도 있다. 고랑뜸은 고잔 북쪽 고랑에 있는 마을이고, 고잔은 송암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어옹산망(漁翁散網) 형국이라고 한다. 대고는 고잔의 큰 마을, 소고는 고잔의 작은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산정물(山亭)은 안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정자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새터는 안현 북쪽에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고, 선암뜸은 고잔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속뜸은 고잔 남쪽에, 태용골은 안현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현은 송현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마을 뒤의 지형이 말안장 모양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송현리에 2006년에 녹색 체험 마을로 선정된 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이 있는데, 2008년 9월에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송현리 아래로 군도 16호선이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현리 간척들 너머가 선운리 들녘이며 들녘 오른쪽 끝에 곰소만 해안이 있다.
왼쪽 끝에 곰소만 선운리 해안이 있을 것이고, 중앙에 송현리 대형 양식장&수산업체, 오른쪽에 대형 한우축사가 있다.
신기마을 입구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앞에 신기마을, 오른쪽 더 위쪽에 고잔마을이 있을 것이다.
간척들길을 따라간다. 왼쪽 구릉 뒤에 송현리 안현마을이 있다.
위쪽에 있는 송현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송현천이라고 불러본다. 아래 곰소만 바다로 흘러들 것이다.
송현리 안현 간척들 너머로 소요산 아래 선운리 질마재마을이 펼쳐져 있다. 산줄기 맨 왼쪽 끝이 질마재이다.
선운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곰소만 바다로 흘러들기에 선운천이라 불러본다. 건너편에 변산반도 내변산이 보인다.
왼쪽에 송현리 안현(鞍峴)마을, 선운천 오른쪽 소요산 아래 선운리 질마재마을, 중앙 맨 뒤에 질마재가 분명히 보인다.
언덕 오른쪽 아래에 송현리 안현(鞍峴)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언덕에 미당 서정주 선영이 있다고 한다.
송현리에서 선운천을 건너 선운리로 넘어간다. 소요산이 멋지게 솟아 있다. 예전에 이곳은 바다였다고 한다.
"안현(鞍峴)마을은 송현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마을 뒤의 지형이 말안장 모양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송현리에 2006년에 녹색 체험마을로 선정된 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이 있는데, 2008년 9월에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송현리 아래로 군도 16호선이 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선운천(仙雲川)이라 불러본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선운천은 禪雲川이다. 소요산 아래 진마마을이라 불리는 질마재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질마재 신화』라는 제목의 시집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시가 고향인 진마마을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리고 마을이 불러일으키는 정감이야말로 시의 본령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이 시로 나타내고자 한 ‘마을의 정감’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시집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여러 일화와 상징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토속적 세계, 즉 유년의 뜨락[뜰]처럼 여겨진 마을 공동체의 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마마을은 외부로 통하는 길이 질마재 하나뿐인데다, 아래쪽으로는 바다가 막고 있어 다른 마을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폐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이 오히려 진마마을을 독특한 정감이 어우러지는 신화적 공간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이것이 다시 서정주 시인과 같은 유려한 감각의 시인을 길러 낸 자양분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촌로 오른쪽은 주진천 방향으로 이어진다. 오른쪽 뒤에 미당의 외갓집이 있었다고 한다.
질마안길을 따라 미당의 생가를 찾아간다. 왼쪽에 선운리마을회관이 있다.
"질마재를 문으로 삼을 만큼 산 속에 위치한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은 시인 서정주의 고향답게 서정주의 생가와 시문학관 등을 비롯해, 국화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남다른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촌은 부안면 송현리에 있는 지명이다. 지명에서 인촌로 도로명을 취했다. 김성수는 그의 고향 지명을 호로 삼았다. 도로 건너편에 '대시인의 의자' 조각작품이 설치되어 있으며, 왼쪽 뒤에 미당 외갓집이 있었다고 한다.
"진마마을 입구 쪽에는 그가 어렸을 적 글을 배웠던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글공부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그 자리에 오롯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서당의 기억을 돌이켜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대시인의 의자’라는 조형물 앞으로 다가가 보면, 마주하고 있는 도로변에 서정주 시인의 외갓집이 있었던 자리가 나온다. 지금은 집이 없어지고 그 집터만, 그리고 그 앞으로 방앗간이 들어서서 예전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인의 회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만날 수 있는 외갓집의 정경에서 예전에 있었을 법한 분위기를 느껴 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닐이날마다 칠해져 온 곳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전문
"仙雲里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어서 선운포(仙雲浦)라고 명명한 것에서 기원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이서면과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안면의 구룡리(九龍里)·신흥리(新興里) 일부, 이서면 선운리를 병합하여 선운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리 마을 진영이 아재 쟁기질 솜씬/ 예쁜 계집애 배 먹어가듯/ 예쁜 계집애 배 먹어가듯/ 안개 헤치듯, 장갓길 가듯.
샛별 동곳 밑 구레나룻은/ 싸리밭마냥으로, 싸리밭마냥으로,/ 앞마당 뒷마당 두루 쓰시는/ 아주먼네 손끝에 싸리비마냥으로.
수박꽃 피어 수박 때 되면/ 소소리바람 위 원두막같이,/ 숭어가 자라서 숭어 때 되면/ 숭어 뛰노는 강물과 같이,
당산나무 밑 놓는 고누는,/ 늙은이 젊은 애 다 훈수 대어/ 어깨 너머 기우뚱 놓는 고누는/ 낱낱이 뚜렷이 칠성(七星)판 같더니."
- 서정주(1915~2000)의 '진영이 아재 화상(畵像)' 전문
진영이 아재는 강한 정열과 힘이 넘치던 남성의 상징으로 본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강한 남성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인물의 두상을 역동감있게 표현하였다. - 조각가 김동헌
"선운리(仙雲里)는 부안면의 서부에 있다. 진마리·신흥리 2개의 행정리와 진마·신흥·서당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서당은 선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서당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신흥는 선운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진마는 질마재 밑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구룡동 동쪽에 귀영다래, 독내들 밑에 남생이 모양의 남생잇골, 서당물[일명 서당리(書堂里)] 남쪽에 법고낭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서당물에서 부안면 검산리 쇠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질마재[일명 안현(鞍峴)]가 있다. 모양이 길마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서당물 앞에 지형이 구유처럼 생긴 구숫들, 서당물 동남쪽에 독네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서당물 남서쪽에 더운바우, 더운바우 위에 노적가리 모양의 노적바우, 노적바우 위에 산기슭에 툭 불거져 솟은 불근바우가 있다. 송현리 안현은 옛 흥덕현에 속했으므로 흥덕질마재, 선운리 안현은 옛 고부군에 속했으므로 고부질마재라 한다. 선운리 앞 바닷가에 선운포 터가 있다.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삼신산의 어머님이신 소요산/ 그 아래 단성(丹誠)선민이 사는 곳/ 우리 영원한 고향/ 모두 힘 모아/ 선운리에 마을집 새로 지었나니/ 천지와 더불어 무궁토록 남으리로다. - 우하 서정태, 1997년 6월 28일 준공
미당 서정주 시인이 등단을 하기 전까지 글을 쓰시던 곳으로 고창읍 월곡리에 있었다. 죽림 속의 초당으로 초가집 형태에 방 한 칸만 딸려있는 검소한 곳이다. 본 작품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하던 모습을 표사하기 위하여 단칸의 초가집 형태와 그 지붕 위에 홀로 앉아 사색하는 형태로 표현하였다. - 조각가 장용훈
미당 생가 아래 미당의 8살 아래 동생인 우하 서정태 시인의 우하정이 있다. 서정태 시인은 2020년 3월 타계하였다.
"미당 생가 옆으로는 얼마 전까지 김복덕[1923년생] 씨가 살다가, 시인의 친동생인 서정태[1923년생] 씨가 오랜 객지 생활을 마감하고 들어와 살고 있다. 시인이 태어났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원형을 살리려 한 집과 그의 어렸을 적 장면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하 서정태 시인은 미당의 8살 아래 동생이다. 선운리 마을회관 건립비에 우하 서정태 시인의 '고향 사랑' 시가 새겨져 있다. 우하정은 서정태 시인이 노년에 지어 죽을 때(2000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又下는 '모든 것의 아래'라는 뜻으로 미당에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우하정은 현재 아무도 살지 않아 방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서 건너편 안현마을에 선영이 있어 미당과 우하의 무덤이 가늠된다.
산에 가서 땀 흘리며 줏어온 산돌./ 하이얀 순이 돋은 수정 산돌을/ 국화밭 새에 두고 길렀습니다.//
어머니가 심어 피눙 노란 국화꽃/ 그 밑에다 내 산돌도 놓아두고서/ 아침마다 물을 주어 길렀습니다.//
사랑채 벽에 '국화 옆에서' 시가 적혀 있으며, 그 앞 뜰에 '미당 생가' 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전라북도 고창 출생, 아호는 미당(未堂). 미당은 이곳에서 태어나 9살 때까지 살았다. 미당이 살았던 그 집터는 그대로 있지만 집은 1972년에 스레트지붕을 얹어 새로 고친 것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다.
사랑채 바깥벽에 적혀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읍디다." - '선운사 동구' 전문
우물 옆에 있는 나무가 대추나무일까?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미당 생가 사랑채 뒤쪽의 뜰에 있는 조형물로, 다섯살 때의 어린 서정주가 다듬잇돌을 베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부모가 웬 일인지 나만 혼자 집에 떼놓고 온종일을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듬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싫은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듯 이끌고 갔다. 그 바닷속에서는, 쑥국새라든가ㅡ어머니한테서 이름만 들은 형체도 모를 새가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초파일 연등밤의 초록 등불 수효를 늘여가듯 울음을 늘여 가면서, 침몰해 가는 내 주위와 밑바닥에서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뛰어내려서 나는 사립문 밖 개울 물가에 와 섰다. 아까 빠져 있던 가위눌림이 얄따라이 흑흑 소리를 내며, 여뀌풀 밑에 물거울에 비쳐 잔잔해지면서, 거기 떠 가는 얇은 솜구름이 또 정월 열나흗날 밤에 어머니가 해 입히는 종이적삼 모양으로 등짝에 가슴패기에 선선하게 닿아 오기 비롯했다." - '다섯 살 때' 전문
미당은 1915년 음력 5월 18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1942년 부친 서광한이 별세한 후, 친척이 거주·관리하면서 지붕을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가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로 지어진 생가는, 서정주 시인이 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이다.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 아홉 살까지 살았던 집으로, 옛 모습 그대로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 복원되어 있다. 시인이 태어났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원형을 살리려 한 집과 그의 어렸을 적 장면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自畵像'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