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표운여정>
초·추草秋의 아름다운 우정
-다도茶道를 통한 예술혼-
표 민 웅
오랜 기간 가족과 떨어져 수많은 밤을 너섬(여의도의 옛 명칭)에 있는 13층의 한 빌딩에서 홀로 상념想念에 젖으면서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신문 마감시간에 쫓기는 날에는 이곳에서 밤늦게까지 원고 작성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사업문제로 생각에 젖어 들기도 한다. 장년長年에 접어든 '나'를 뒤돌아보기도 했으며 노년老年의 인생 여로를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하는 것도 나의 상념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깊은 밤,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들며 흐르는 강물에 떠 있는 달을 본다. 이 순간 나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차茶를 다리며 생각을 하고, 차를 마시며 고독을 달랜다. 그저 하늘의 달과 강에 비친 달이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된다.
‘밝은 달 촛불 삼고 또 벗삼아
흰 구름 자리 펴고 또 병풍도 하여
………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 모시고
나 홀로 차 한잔 따라 마시니
도인道人이 앉은 자리가 이보다 더 나을 손가’
-초의草衣 동다송東茶頌 31송-
일찍이 다성茶聖 초의 선사는 차 한잔의 멋을 마음껏 즐겼고, 자연과 더불어 동화同化하면서 무아無我의 절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시 한 수로 노래하였다.
여든한 살에 입적할 때까지 초의는 40여 년 간 해남 대흥사의 부속 암자인 일지암에서 홀로 고고孤高하지 않고 다산茶山, 추사秋史, 소치小癡와 같은 당대의 많은 학자와 정치가, 예술가 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조선조 말기의 문예부흥에 기여하며 살다가 갔다. 이 중에서 차茶를 사랑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의 종교와 신분을 초탈한 우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친구의 뜻을 새기게 한다.
친구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여 보자.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겠는가. 진실한 친구와 마주 앉아 차를 들면서 정담을 나누고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생활이 즐겁고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이다. 친구의 격의 없는 충고와 조언은 우리의 판단력에 큰 도움이 되고 부족한 지혜를 보충해 준다. 그래서 참된 우정은 인생의 기쁨을 배로 늘리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 줄 수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 특히 취미와 사상이 같은 친구와의 대화는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준다. 참다운 친구가 한 사람도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여정을 쓸쓸하게 가고있는 것이다.
남도南道의 산승山僧 초의(1786-1866)와 당대 세도가의 기린아 추사(1786-1856)의 아름다운 우정을 우리는 조선조 말의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삶을 음미하며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고 교유交遊한 곳을 필자는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다녀오면서 그들과 함께 다시 한번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추사 고택
(사진#1:고택 옆 추사 무덤: 가장 평안해 보인다.)
지난 초봄 예산을 다녀왔다. 가야산을 둘러싼 지역으로 내포 땅 중심 마을이다. 지형과 인심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예로부터 약천 남구만, 추사 김정희, 만해 한용운, 화가 이응로 등 문화, 예술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다 떠나신 역사적 고장이기도 하다. 최근 홍성에서 태어나 예산에서 수학한 우리나라 문학계의 큰 어른 청하 성기조 선생이 2023년 10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쉬운 마음에 청하 선생의 초년 시절의 꿈이 서려 있을 예산을 올해 첫 여행지로 하였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龍宮里에는 추사秋史 고택이 있다. 먼저 발 길이 닫는 곳은 추사의 무덤이다. 이른 봄이지만 고택 옆에 편안하게 보이는 무덤이 넓은 푸른 잔디에 아름답게 펼처져있다. ‘완당선생경주김공위정희’ 묘비에서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잠시 묵상에 잠겼다. 살아생전 수많은 영욕의 생활을 거친 추사의 묘소는 평화롭기만 하였다.(사진#1)
추사는 1786년 6월 정조 10년에 조선조 세도가 집안인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은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에게 장가를 들어 영조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짐으로써 종척宗戚이 된다. 또 할아버지(김이주)와 10촌 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영조의 계비가 되어 겹친 종척 가문이 되었다. 이로써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기 전, 추사 가문인 경주 김씨가 세도를 누리게 된다. 추사의 큰아버지인 예조참판 김노영이 후사가 없어 그에게 양자로 입적되니 추사는 월성위 궁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추사 고택은 영조의 부마인 증조할아버지 월성위가 지은 집이다. 추사 사후 백여 년이 지나는 사이, 건물이 퇴락되어 충청남도에서 이 고택과 그 일대를 매수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1977년 재단장을 하게 되었다.(사진#2) 지금은 지방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안채, 사랑채, 문간채, 솟을대문 등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었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추사가 직접 새긴 석년石年이란 돌기둥 해시계 하나가 서 있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추사가 제작한 것이다. 고택을 돌아보면 기둥마다 판각되어 걸려 있는 수많은 글씨가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모두가 해동 제일의 추사가 남긴 시와 글씨이련만 나와 같은 나그네가 그 뜻을 느끼기보다는 붓의 운필을 따라다니다 보면 획마다 뻗쳐 있는 추사의 필력의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2:추사고택)
고택 바로 옆에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려문이 있다. 이 정려문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최초의 열녀문이다. 월성위 김한신은 왕의 부마가 된 후에도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언행이 엄정하였고 옹주를 깊이 사랑하며 선비와 같은 평범한 생활을 보내다가 38세로 요절하였다. 그의 부인 화순옹주 또한 비록 영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인효정숙仁孝貞淑하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지내다가 남편을 여의게 되니, 십여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주야로 통곡하다가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사위가 죽자 영조는 옹주에게 다시 대궐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이 못내 서운하여 정려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일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
요즈음에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무덤은 정려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그들의 마음을 엮듯 합장되어 있어 나의 발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
추사의 중시조인 김자수(경주 김씨)는 고려말의 성리학자로 고려의 충절을 지키고자 충청도 관찰사 직위를 버리고 은거하던 중 태종 방원이 형조판서로 부르자 한양가는 길에 용인에 있는 정몽주 묘소에 이르러 자결함으로써 절의節義를 빛낸 가문의 후손이다.(고려사열전 33권. 김자수 전)
그로부터 5대를 내려와 황해도 서흥부사가 된 김연金堧은 대도 임거정林巨正을 토벌하고 안주목사를 지냈는데 서울 저동苧洞에 살다가 말년인 1500년대 중반 그가 바로 이곳 가야산 서쪽 취령봉 아래 한다리, 즉 지금의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에 터를 잡은 것이 추사 가문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는 가야산 동쪽 내포 지역을 사들여 이곳에 부모의 산소를 쓰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둥궁리 일대에 영조가 하사한 향저를 지었다.
지세의 대부분이 낮은 구릉인 이곳에 유일하게 용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이 산 양 끝이 봉우리를 이루는데 북쪽이 '앵무봉'이고 남쪽이 '오석산'이다. 앵무봉 아래에 추사의 생가와 묘소, 증조부모의 묘소, 고조부의 묘와 추사가 중국에서 갖고 와 심은 백송(천연기넘물 106호)이 있다.
*초의 선사와의 대면
그 무렵에는 누가 뭐래도 조선 제일의 세도가는 경주 김씨였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순조(재위 1800-1834)의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당시 추사 가문은 겹겹의 사돈이요, 영의정을 위시해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당대에도 일가 20여 명이 지체 높은 권좌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추사는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물론 생부 김노경도 추사를 장차 가문을 이끌어 갈 재목으로 믿었다.
그 추사가 어쩌다 초의 선사와 사귀자마자 그만 그에게 폭삭 빠져 버린 것이다. 이조판서와 4부 판서를 역임한 아버지 김노경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사귀는 친구에 대한 부모의 관심은 큰 것이다. 정쟁과 당파 싸움이 심하였던 조선조 때, 정부 요직에 있는 추사 가문인지라 승려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출세에 지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노경은 아들의 교우관계를 직접 살피기 위하여 직접 초의를 만나기로 결심하였다.
초의가 한양에 올 때 만나 볼 수도 있었지만 그가 평소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당쟁에 휘말려 강진현의 고금도에 위리 안치 유배를 하고 1833년 해배가 되어 한양으로 돌아 갈 때 초의를 만나러 해남 대흥사 일지암으로 갔다.
김노경은 해남현 동헌에서 유숙하기를 청하는 현감의 요청을 물리치고 초의와 함께 토굴과 진배없는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행자가 장만한 산나물과 우거지국으로 저녁 공양을 마치고 밤이 새도록 담론을 나누었다. 화제는 경서經書, 시작詩作, 금석金石, 서화 그리고 일상 다반사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일지암 토굴 뒤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초의가 손수 끓인 차를 연거푸 들었다. 김노경은 유천乳泉으로 끓인 소락(穌酪:우유를 가공하여 만든 진미)같다고 감탄하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초의에게 넉넉한 미소를 보낸 추사의 생부 김노경은, '과연 내 자식이야, 더는 시험하고 알아 볼 것도 없다. 이만한 인물이니 정희正喜가 빠질 수 밖에…'
*일지암을 찾아
예산을 떠나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국토의 숨결이 다하는 해남의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대흥사와 일지암을 찾았다. 신라 말기에 건립된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1604년 묘향산에서 85세 때 입적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안치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서산대사는 이곳이 바다와 산에 둘러싸여 있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외침을 받지 않고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 하였다. 이러한 연유인지는 몰라도 서산대사 이후 6·25 동란 중에도 피해가 없었고 13인의 대종사와 13인의 대강사를 배출한 명찰이 되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22구 본사로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제된 7개 사찰 중 하나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이 주위에 무질서하게 있었던 식당, 상점, 여관 등을 절에서부터 2Km이상 떨어진 외각 지역으로 전부 이전하였다. 이제는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이 조용한 숲길이 되었다. 소나무, 떡갈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의 노목들이 하늘을 가리는 나무터널로 장관을 이룬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 와도 제 빛을 한껏 돋우고 있다. 대흥사 입구에 백 년된 유선 여관이라는 운치 있는 한옥이 있는데, 철거 대상에서 제외된 이 집은 최근 한옥 호텔 유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초기의 전통 한옥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오래전부터 일지암을 찾기위해 필자는 이 여관에 투숙했다. 그 이유는 우선 조용한 산사山寺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두 마리의 진돗개가 투숙객을 대흥사와 일지암까지 안내하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 찾아와서 투숙할 때 우리는 이 두 마리 진돗개의 안내를 받기 위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제일 먼저 일어나 이 개를 찾아 머리를 쓰다듬으니 반갑게 꼬리치며 앞장서 간다. 대흥사 대웅전을 보고 난 후, 다음은 어디로 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으니 잽싸게 앞장서서 천불전, 극락전, 지장전 등을 차례로 안내하고 난 후 일지암을 향하여 산길로 이끈다. 새벽이라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초의 선사의 영정을 모신 표충각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산길을
30여 분 올라가니 초의 선사가 지었다는 일지암이 어스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동의 다성茶聖 초의草衣선사가 39세 때인 1824년 이곳에 띠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一枝)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시詩의 내용에서 일지암一枝庵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그마한 연못과 왼쪽에는 초의의 다실茶室인 초암草庵, 오른쪽은 기와를 얹은 선원禪苑이 있다.(사진#3) 초암의 부뚜막에는 곱돌 솥을 놓아 물을 끓이게 하는 차 부뚜막을 만들어 둔 것이 다른 부뚜막과 다른 점이다. 주위에는 그 옛날 초의가 심어 놓은 차나무
(사진 #3, 일지암: 현판은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1913-1999>의 글씨)
로 덮여 있다.
산사山寺의 새벽공기가 싸아하니 두 볼을 흘치고 달아난다. 어디선가 다향茶香이 흘러와 코끝을 스치는 듯도 하다. 이곳에서 녹차 한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러한 마음을 아는 듯 같이 간 친구가 배낭을 푼다. 주섬주섬 배낭 속에서 다기茶器와 찻잔이 나오니 어이 반갑지 않으랴. 이미 알고 이 친구는 서울에서부터 다기茶器를 준비해 왔다. 우리는 초암 툇마루 턱에 앉아서 일지암의 샘물로 차 한잔을 다려 마셨다.
“내가 사는 산에는 끝도 없이 흐르는 물이 있어, 시방에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각자 표주박을 하나씩 들고 와 물을 떠가라. 갈 때는 달빛 하나씩을 건져가라.”
초의선사의 시와 같이 우리들도 이보다 더 뛰어난 차맛을 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초의 선사와 추사의 우정이 이 차茶로 이어졌듯이 우리도 차茶를 다리는 정성처럼, 차茶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香처럼, 가슴과 가슴으로 영원한 우정이 따뜻하게 흐르기를 기원해 본다.
다산茶山 정약용도 추사秋史 김정희도 외로운 유배 생활 중에 가장 가까운 벗은 한 잔의 차茶였다.
이들이 외로울 때, 함께 차를 즐기며 위로를 나눈 이는 초의 선사였다.
다산의 실학, 추사의 금석학, 소치의 남종화. 이들의 학문과 예술은 한잔의 차를 소중히 다룬 초의 선사의 격의 없는 우정과 다도茶道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詩, 글씨書, 그림畵에 능한 분을 삼절三絶이라고 불렀으며 삼절을 다도와 함께 즐긴 다산, 추사, 초의와 소치를 조선시대 말 사절四絶이라고 일컫는다.
*초의 선사는
초의는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추사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다.
속성은 장張씨, 본명은 의순意恂이다. 다섯 살 때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승려가 구해준 것이 속세를 떠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15세(1800년)에 나주군 다도면茶道面의 운흥사에서 벽봉碧峰선사께 의지하여 중이 되었다. 20세(1805년)때 대흥사의 완호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21세 때 대교大敎를 수료하였다. 초의草衣는 완호 선사가 준 그의 법호이다. 초의가 좋은 차를 즐겨 마시며, 좋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차의 명인名人이 된 것은 다산 정약용과의 교유였다고 한다.
다산과 다茶를 통해 친교를 맺어 온 백련사 주지 혜장이 급환으로 열반하기 전 초의를 다산에 소개함으로서 초의와 다산의 차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24세 때에 강진의 다산 초당으로 찾아가 다산茶山 정약용으로 부터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고 경서를 이야기하며 다산茶山과 차를 나누었다. 다산초당에서 차나무를 키운 장 다산은 차를 직접 재배하여 유배 생활의 외로움을 차 한잔으로 달래기도 하였다. 다산 초당 앞마당에는 평평한 바위로 다조茶竈를 만들어 놓고 오는 손님과 차담을 즐겼다.
초의는 팔자에 역마살이 끼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양 나들이가 잦았다. 조선의 최남단 해남 대흥사에서 도보로 한양을 내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 온 초의는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이 연결하여 추사와의 첫 교류를 하게 된다. 그는 한양에 오면, 도봉산 아래 청량사에 머물거나 말년에는 추사가 거처한 용호집에서 지냈다. 초의가 한양에 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촌놈의 중'을 만나려고 내 노라는 명사들이 줄을 이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의 아들 정학연, 학유 형제, 정조의 사위 홍현주, 이재 권돈인, 위당 신관호 등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당파를 초월하고 당대의 수많은 명사, 유학자, 예술가들과 사귀었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당시의 대 유학자 신헌구는 그의 책에 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양의 명사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덕망 높은 수도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나 친근할 수 있는 인간성 때문이다. 특히 우리들이 그를 아끼는 것은 그의 詩, 書, 畵 및 茶道가 밖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차근차근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허소치를 가르치다
우리나라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시詩와 글씨(書)에까지 뛰어난, 허유許維 소치小癡는 초의와 추사를 만나지 않았던들 진도 섬에서 민화나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소치는 그림 공부를 위해 27세가 되는 1835년 바다를 건너 일지암의 초의 선사를 찾는다. 그는 초의 밑에서 다도茶道를 익히며 그림 공부를 하였다.
화가로서 초의는 한국 회화사에서 큰 일을 한다. 초의는 낭암스님으로부터 탱화라고 불리는 불화를 전수 받으면서부터 그림을 시작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갔다. 현재 대흥사에 있는 탱화와 전국 곳곳에 있는 사찰의 많은 불화가 초의의 작품이거나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수준 높은 화가로 평가하고 있다.
초의는 그를 지도하면서 당대의 화가 공재 윤두서 집안의 그림을 모사케도 하였으나 더 이상 초의는 소치를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그를 추사에게 보낸다. 초의의 추천으로 허유는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배워 대가를 이루게 된다. 소치가 장동 월성궁의 추사집 행랑채에서 그림을 공부할 때 대원군 이하응도 함께 난蘭치는 그림을 추사로부터 사사師事하였다.
추사는 당시 많은 서화 묵객들과 교유시켜 소치를 화가로서 대성을 하게 한다. 마침내 소치는 헌종 임금께 나아가 그림을 그려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남종화의 종주 소치는 이후 직계 자손인 미산, 남농, 임전으로 남종화를 뿌리내리니 초의는 실질적인 남종화의 시원始原인 셈이다.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 허소치의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세한도의 고향 제주도 대정의 추사 적거지謫居地를 다녀보면서, 차茶를 통한 추사와 초의의 교유와 두 사람의 제자인 남종화의 대가 진도 출신 허소치의 사제지간의 사랑, 정다산과 초의 선사의 종파를 초월한 관계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추사의 유배 생활과 초·추의 차茶사랑-
그 옛날 죄인으로 취급받은 분들이 집과 가족을 떠나 유배지에서 고난과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과 예술을 정진하여 좋은 작품을 남겼다.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다산 정 약용(1761-1836)은 유배기간(1801-1818) 초당에 묻혀 독서와 명상을 하고,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고, 호남 학자등 여러 실학자와 백련사의 혜장과, 일지암 초의 선사와의 인간적·사상적 대화를 통하여 실학사상을 완성하였다.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전반에 걸친 500여 권의 훌륭한 책을 후세에 남겼다.
영조의 부마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자인 추사 김정희도 8년간(1840-1848)의 제주도 유배생활 동안 학문과 시·서·화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위대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비록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집을 떠난 생활이기에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전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대학졸업을 앞둔 1965년 7월 필자는 친구 10여 명과 함께 제주도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있었다. 목포에서 떠나는 정기 여객선은 제주까지 8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 행 여객선 창성호에 몸을 실었다. 완도를 지나 제주로 항해할 때 잔잔한 바다에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며 거센 파도가 뱃전을 크게 때리기 시작한다. 배는 요동치고 사람들은 선실에서 배멀미로 모두들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선실 한 가운데 풍채 좋은 노인 한 분이 곱게 한복을 입은 수명의 젊은 여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강한 바람과 거센 물결에 선실 내에서도 일부 승객들은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 때 나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고 좌중을 이끌면서 승객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승객 모두가 함께 합창할 수 있는 노래를 우리는 힘차게 불렀다.
파도와 바람 소리와 함께 합창을 이룬 우리의 노래 소리는 거친 파도를 압도할 수 있었다.
제주에 무사히 도착한 후 우리들은 근엄한 그 노인의 집에 초대받고 큰 대접을 받았고 하룻 밤을 유숙하였다. 그 노인의 집은 한라산 입구 관음사 근처 삼천당에 있었다. 제주도는 물이 귀하나 이 마을은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분은 민속종교의 교주인 것 같았으며, 그의 시중을 들던 젊은 여인들은 교인이었던 것이다. 대학생 시절 좋은 경험이었다.
1840년 9월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기 위해 추사는 초의를 찾아 일지암을 방문한다. 오롯한 가을의 풍광에 휩싸인 일지암에서 추사는 애틋한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동지부사의 고위직에서 하룻밤 사이에 유배를 떠나는 추사에 대해 초의 선사의 위로는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추사가 초의 선사, 허 소치, 이상적의 배웅을 받으며 제주도로 향하던 그 날도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어 키와 돛대가 제멋대로 놀아나서 배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추사는 그의 품에서 쇠(지남철)를 꺼내어 방향을 맞춘 다음 도사공에게 키의 방향을 지시하고 의연하게 뱃머리에 앉아서 시를 지어 높게 읊으니 그의 소리는 바람과 파도에 지지 않았다고 한다. 배는 날 듯이 파도 위를 치달았다. 모두들 신기하게 느꼈다. 아침에 해남 관머리를 출항한 배가 제주도에 닿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2,3일 때로는 닷새 이상 걸리는 제주도를 한나절 만에 도착하니 제주도 사람은 날아서 건너왔다고 크게 놀라워하였다.(완당 전집에서).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제주도에 도착한 추사는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마을 적거지에 도착하여 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대부분 돌길인 이곳을 힘들게 찾아간 추사는 문득 자신의 처지도 잊고 겨울에도 푸르러 시들지 않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 푸른 바다 등 제주도의 남국 정취에 취하였음은 비록 귀양길에도 추사의 예술가다운 감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완당 金公小傳)
추사는 이와 같은 남국의 절경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승화시킬 수 있었다.
1965년 최초로 한라산을 등반한 우리 일행은 서귀포에서 비포장된 길을 버스를 타고, 돌길을 걸으면서 추사가 유배 생활을 했던 대정마을 적거지를 찾았다. 그러나 그 옛집은 흔적도 없고 그 자리는 텃밭이 되어 조와 옥수수 등 가을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다만 제주도의 밭고랑과 산야에 수선화와 난꽃 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특히 추사는 수선화를 마치 백설의 대지 같다고 표현하여 자기 신세에 비유한 적이 있어 집터 주위에 있는 수선화는 더욱 쓸쓸함을 느끼게 하였다.
1984년 추사 제자 강도순의 증손이 150여 년 전의 고가를 구해 적거지 초당을 복원하였다.
이제는 6백여 평의 대지 위에 초가 4동, 연자방아 1동과 추사관 등 추사의 적거지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제주도 특유의 정문인 굵은 통나무 3개를 걸쳐놓은 정술랑과 정술랑을 받치는 돌 등 세심한 배려가 눈에 띈다. 적거지 입구에는 추사 동상과 8년간의 적거 생활을 돌에 새긴 그림과 글에서 볼 수 있다.(사진#4)
(사진#4. 세한도의 송백松柏을 표현한 추사관과 우측 뒷편 초당)
추사관에는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세한도와 추사작품 탁본과 사본, 그 당시 사용했던 민구류 등을 전시하고 있어 여기를 찾는 방문객에게 그의 예술과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유배 생활
종척권문宗戚權門에서 금지옥엽으로 태어나서 일찍이 학문에 진력한 추사는 타고난 천품과 아름다운 자태로 항상 주변의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살아와서 세상의 어려움을 몸소 겪어보지 않았던 터에 안동 김씨와의 정치적 마찰로 갖은 수모와 고통을 받아 심한 충격을 받
는다. 고결한 성품으로 평생 불의와 부정을 용납하지 않은 그가 안동 김씨의 독수에 걸려 옥사獄事를 겪으니, 그 참담한 심경이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의 정황을 추사는 '고문을 당할 때 선인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나무에 궤여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이 두 가지를 40여 일 동안 참혹하게 당한 일을 고금古今의 어느 곳엔들 어찌 있었겠습니까?'라고 그의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로 알리고 있다.
그러나 고금의 역사에 정통하고 생사의 이치에 통달한 추사로서 이만한 곤욕쯤으로 적거생활에 흐트러질리는 만무하였다. 그는 귀양살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을 각오하였다. 굳센 신념을 붓끝에 올려 불굴의 의지를 태연히 화폭에 담는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편이 닿는 대로 서책을 가져오게 하여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이곳의 총명한 자제들을 모아 훈도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김구오, 강도순 등 이곳 제자들을 기르친 덕분인지 제주도에 있는 이들의 후손들 손으로 훌륭한 적거지를 복원한 것은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든다.
추사는 서울 집에 소장된 각종 장서와 중국으로부터 새로 부쳐 보내오는 신간 서적들을 받아 볼 수 있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책들은 권돈인과 조인영의 비호 아래 문인 이상적(1804-1865)이 역관으로 연경을 내왕하며 심부름해 옴으로써 새로운 문물을 받아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예원의 종장宗匠답게 서울에서는 국왕 현종을 위시하여 여러 상공들이 추사의 작품을 끊임없이 요구해 오고 권돈인을 비롯한 친지나 제자들이 명품의 감정과 작품의 품명을 자문하는 인편이 뒤를 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 속사俗事에 급급하느라 미쳐 보거나 읽지 못한 많은 책들을 차분히 읽게 되고, 익히지 못하였던 서화의 여러 체體를 터득함으로써 추사체를 완성함으로 그의 학문과 예술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얼마나 독서에 열중하였던가는 막내아우 상희相喜에게 보내줄 것을 독촉한 편지에 수록된 목록을 보면 짐작이 가능한데 국내와 중국의 시문, 율법, 주역 등의 각종 책들과 역대 서예의 이론과 실기를 집대성한 예술 관련 책들이니, 추사가 학문과 예술수련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한도歲寒圖의 탄생
추사의 많은 제자 중 우선藕船 이상적李尙適이 있다. 문체 풍류가 뛰어났으며 박학다재하고 시詩·서書에 능하였다. 대대로 역관의 가문에 태어나 그가 연경 나들이를 열두 번 하는 동안 중국의 명사·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그들에게 추사의 근황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새로운 책들과 귀한 물건을 갖고 와 추사에게 이를 보내어 스승의 무료를 위로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학문의 깊이를 더 빛내 주었다. 이 제자에게 추사는 크게 감명을 받고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추사의 뇌리에는 번개처럼 논어의 한 구절이 스쳐갔다. 그는 필현筆峴을 당겨 먹을 갈고 장지를 펴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장지 위에 밑둥이 부실한 노송 두 그릇을 그리고(秋), 한녁으로는 또 두 그루의 젊은 잣나무를 쳤다 (史). 노송 아래는 적거하고 있는 야트막한 한 채의 한옥을 그려 넣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전예체로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이상적에게 선물을 주다)’이라고 썼으며 완당阮當을 낙관하였다. 그리고 그림 한 옆으로는 단정한 해서체로 제문을 써 내려갔다. (사진#5)
(사진#5: 세한도: 秋史를 상징하는 소나무松와 잣나무栢)
『지난해에 그대가 계미곡桂未谷의 <만학집>과 운자거惲子居의 <대운산방문집>을 보내주었고 올해에 또 하경우賀耕藕의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보내주니,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다 …….
또 세상 사람들은 도도하게 오직 권세와 이익에만 쫓는 것이 예사인데 그대는 어렵사리 구한 책을 세도가에게 주지 않고, 도리어 절해고도絶海孤島 유배지에 있는 초체하고 마른 나에게 보내주니, 세간의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마천의 말대로 '권세와 이익으로 얽힌 자는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 고 하지 않았던가.
공자孔子는 '추운 겨울(歲寒)을 당한 후에야 소나무(松)와 잣나무(栢)가 다른 나무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송백松栢은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인 것이다. 송백에는 변함이 없으나 공자는 특히 세한 이후의 송백을 칭찬하였다.
이제 그대와 나와는 귀양살이 전이나 후나 더하고 덜 하고 가 없는 사이이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귀양살이에도 불구하고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성의를 보였도다 ……."』
이 세한도는 인편으로 한양의 이상적에게 전해졌다. 이상적은 은사로부터 뜻깊은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그 해 1844년(헌종 10년) 10월에 동지사 이정응李晸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다. 그는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청나라의 유명한 문인·학자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 싶었다.
중국의 서화가·묵객 유학자들 70여 명이 모인 연회장에서 이상적은 추사의 근황을 말씀드리고 이 세한도를 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림으로 쏠렸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천의무봉 天衣無縫한 선비가 철학적으로 스스로 승화시킨, 조선은 물론 중원의 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대담한 선과 추상으로 단숨에 팽개치듯 그려진 문인화文人畵의 극치라고 표현하였다. 그림·글·글씨가 천하일품이려니와 더욱 뜻깊은 것은 완당 선생과 우선 선생의 고매한 인간관계라고 평하면서 그림의 말미에 ‘열 여섯 명’의 중국학자들이 발문跋文을 썼다. 이상적은 그 세한도와 발문을 잘 가지고 와서 다시 제주의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자신의 그림에 열 여섯 명의 명사들이 쓴 발문을 보고 읽고 얼마나 감회가 깊었는가를 독자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자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나 그 작품이 제작된 1844년부터 지금까지 176년 동안 매우 기구한 이력을 겪었다. 우리나라 서예계의 거봉이던 소전素筌 손재형은 1943년 10월 당시로서는 매우 큰 3천 엔을 갖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세한도를 보관하고 있는 후지쓰까 지카지(藤塚 隣) 도쿄대 교수 (추사 연구가)집으로 9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을 드리면서 세한도를 자기에게 양도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그때마다 거절하였다고 한다. 미군의 공습이 점점 심해지자 후지쓰까 박사는 폭격으로 귀중한 세한도가 파손될 것을 염려하던 차 손재형의 세한도 사랑에 감복하고 세한도를 원래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건 없이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세한도에는 손재형씨의 공적을 치하하는 오세창과 정인보 선생의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발문 총수 18인). 그러나 손재형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하여 타인에게 양도하였다고 한다. 이근태씨를 거쳐 새한도를 보관한 개성 갑부 집안인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씨가 2020년 아무 조건없이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여 세한도 원본이 세상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다시금 생각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초·추의 차茶사랑
추사가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가 한양과 중국의 연경을 돌고 돌아 다시 그의 적소에 되돌아온 후 두 달이 지났을 때, 일지암의 초의가 그를 찾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차를 끓여 계속해서 차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추사와 초의의 우정은 차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사는 차가 떨어지면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올 것을 독촉하니 초의는 그를 위하여 매년 곡우 때에 차를 만들어 허소치 편으로 때로는 인편으로 계속 공급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초의가 제주에 6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차향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제주도 대정 적거지의 초당에는 추사와 초의의 차를 들며 대화하는 밀랍蜜蠟 인형을 볼 수 있다.(사진#6)
추사의 유배 중 허소치는 3번이나 제주도에 가 초의가 만든 차를 선생께 드리고 그에게 그림을 계속 배웠다. 추사는 해남 우수영의 신관호 대장에게 소치를 소개함으로써 소치는 헌종의 어화御畵를 그릴 수 있는 영광을 갖게 된다. 소치는 기회 있는 데로 헌종에게 추사의 근황을 들려주면서 간접적으로 구명 운동을 하였다. 1848년 12월 헌종 14년 추사는 귀양살이에서 방면되었다.
흥선대원군(석파 이하응)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이 되고 추사는 영조의 외현손外玄孫이 되므로 따지고 보면 그들은 8촌 간이지만 추사가 연장자였다. 평소 대망을 꿈꾸고 있는 석파는 추사를 남달리 존경하였으며 허소치와 함께 그에게서 난치기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다.
(사진#6. 적거지에서 추사와 초의가 차를 나누는 장면)
해마다 추사의 배소에 하례 편지를 보낼 정도로 석파는 추사를 항상 염려하였다. 귀양이 풀
린 것을 안 석파는 이 기쁜 소식을 급히 인편으로 추사에게 알렸다. 석파의 추사에 대한 애정
을 엿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추사가 살아 있었다면 추사는 중요한 개혁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온 이후 안동 김씨들이 감행하는 엄청난 비리를 목도하고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한다.
추사는 일체 그들을 자극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광주 퇴촌에 있는 지우知友 권돈인 별장인 옥적산방에서 보내면서 「계첩고」를 짓고 작품에만 몰두하였다.
이때 임금은 추사를 영의정에 등용시킬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세도를 쥐고 있던 안동 김씨 쪽에서 이를 막기 위하여 권돈인과 두 동생과 함께 추사는 제주에서 돌아온 지 3년만인 1851년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과지초당瓜地草堂
1년 만에 귀양이 풀린 추사는 세상이 싫었던지 과천에 있는 친자식 상우가 살고있는 과지초당과 강남 봉은사를 내왕하면서 서예를 몰두하여 후학을 지도하는 한가로운 생활을 보낸다. 〈허소치의 몽연록에서〉
추사가 말년에 거주한 과지초당은 생부 유당 김노경(1766-1837)이 1824년 청계산 옥녀봉 아래 돌무깨(현 주암동)에 초당을 조성하여 휴식용 별장으로 이용하였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다 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리운 초당은 정원과 아름다운 연못을 갖추고 있다.
당시 김노경이 청나라 학자 등전밀(1795-1870)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저는 이미 노쇠한 몸입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아취雅趣를 느낄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 합니다(1824.11.20)" 라고 하였다.
1837년(현종3)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 상을 치루었고, 그 후 과천을 자주 찾아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었다. 추사는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3) 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과천시에서는 추사 선생의 삶과 예술을 기리고자 2007년 과지초당과 독우물을 복원하였다
특히 추사는 봉은사에서도 묵향 그윽한 방을 차지하고 예도에 몰입하고 한편 발우 공양과 참회를 행하는 등 불교생활에도 열중하였다.
그는 봉은사의 판전板殿에 대한 현판을 써주고 나서(1856년 9월) 그 해 철종 7년 10월 10일에 아무런 병 없이 71세로 서거하였다.(사진#7)
추사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 제자인 서예가 우봉 조희룡趙熙龍이 과지초당으로 추사를 문병하였다. 조희룡은 추사의 마지막 장면을 허소치에게 편지로 보냈다. 『맥이 끊어진 지 사흘이 지났지만 정신이 또렷하였으며 붓을 팔목에 묶고 심혈을 기우리며 글자 획의 변함이 없이 부채에 썼다』고 회고하였다. 평생 벼루 10개, 붓 천 자루를 쓰며 추사체를 완성한 그의 기개는 맥이 끊어져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7, 추사가 71세 병중에 쓴 봉은사 판전)
조선조 말 거인이 간 자리인 과지 초당 바로 옆에 과천시가 건립한 추사박물관이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다만 추사가 말년에 기거했을 때에는 초당이었으나 기와집으로 복원하여 옛 맛을 잃었다. 그러나 이곳 추사 박물관에 추사 작품 소장가인 후지쓰까 지카지 도쿄대 교수 부자가 추사 유품을 과천시에 기증함으로 추사박물관이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추사를 사랑한 후지쓰카 지카시교수의 자제인 아키나오(明直)가 아버지가 수집한 추사 작품과 자료 2,700여점을 과천시에 기증하여 추사 연구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 아카나오씨는 일제 당시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분으로 필자의 자랑스러운 선배임을 알게 되니 더 반가웠다.
* 대팽고회大烹高會
서거하기 두 달여 전 1856년 9월에 ‘이 세상 부귀영화도 한낱 헛된 꿈이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의미가 있는 대팽고회大烹高會 대련對聯 글씨와 시귀詩句를 남겼는데 과천의 과지초당과 예산의 추사고택의 집 기둥에서 볼 수 있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대팽두부과강채 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 高會夫妻兒女孫
칠십일과(七十一果 : 일흔 한 살의 과천 사람이)
서거하기 두 달여 전에 쓴 이 글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표현하여 추사 말년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추사는 ‘이것은 시골 글방선생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최상의 즐거움이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한 큰 황금인을 차고, 몇 장 길이의 밥상에 심부름꾼과 시녀가 몇 백 명이라 하더라도, 능히 이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사람을 위해 쓰다.’라고 이 대련 시귀를 부연 설명하였다.
*초·추의 영원한 우정
초의는 추사가 세상을 하직한 1년여 후 그를 조문하기 위해 1858년 2월 과지초당을 찾았다.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상경이었다. 언제나 추사의 강녕康寧을 빌던 초의는 때마침 진도 운림산방에서 상경하는 허소치 편에 문안 편지와 차를 보냈던 해가 그가 사망하기 1년여 전 1855년 봄이 아니었던가. 실로 추사의 부음은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으리라.
그는 추사의 영전에 제문祭文과 차를 올려, 이생을 하직한 벗을 위로하였다. ‘무오년(1858) 2월 청명한 날에 방외(세상 속의 세상 밖)의 벗, 의순(초의의 법명)은 삼가 맑은 차를 올려 완당 선생 김공의 영전 앞에 고하나이다‘
그의 제문에 ‘42년 동안 아름다운 교유 어긋나지 않아, 수천만 겁 향화香火(우리가 돌아가야 할 진짜 고향)의 인연 함께 맺은 사이지만, 먼 곳에 떨어져서 만나기가 어려우니 항상 편지로 대면하였고, 자신(귀한 신분)을 낮춰 이야기할 때에는 서로의 신분조차 잊었다. 반년 간 제주도 대정을 찾아 서로 차담을 하였고, 한양 집 용호에서 두 해를 머물면서 진리를 담론할 때 다투는 소리가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위태로웠고, 마음을 논할 때에는 온화한 기운이 마치 봄바람이나 따뜻한 햇살처럼 훈훈하였다. 손수 차를 다려 함께 마시고, 슬픈 소식에는 적삼을 적시기도 하였으며, 생전에 바른 말씀은 둥근 거울처럼 성의 있었다’고 하였다, 초의는 추사를 잃은 슬픔은 용란龍鸞의 소리처럼 더욱 사무친다고 하였다
그 옛날 종자기種子期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해주던 백아伯牙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던 것처럼, 초의는 추사가 세상을 뜨자 열반할 때까지 더 이상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완당 김 정희와 초의선사는 결코 신비스런 인간이 아니다.
두 사람은 42년 간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 떠났지만 그들의 삶의 테두리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한편은 명문 호족의 후예인데 반하여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었고, 추사는 빼어난 유림인데 반하여 초의는 독실한 불제자였으며, 한쪽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도가의 와중에 있었고 한쪽은 산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초의의 제문 같이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외에 이들이 그토록 친교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동갑(1786)내기 라는 것이요
둘째는 천성이 지극히 순수했다는 것이요,
셋째는 종교와 신분계급을 초탈했다는 것이요,
넷째는 시, 서, 화 예술의 본질에 투철했다는 것이요,
다섯째는 추사는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초의는 유학, 경서를 공부하여 대화가 풍부하였다.
여섯째는 그들의 예술혼이 다도茶道의 진수를 체득한 발로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두 사람의 교유는 너무나 아름다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실한 우정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