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가족이라니? 뭐 영어로 말하자면 'artificial family' 쯤이나 되려나? 소설 『나쁜 피』(김이설, 민음사, 2009)의 작품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백지은님은 이 소설을 21세기의 한 가족상(家族像)으로 고통도, 남자도, 핏줄도 공유하지 않은 인공가족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출신부터가 간질병을 않는 데다 보잘것 없는 육신을 가진 어머니를 둔 화자(話者) 화숙- 물론 화자마저도 하나 내세울 것 없이 작은 신장에다 가진 것, 배운 것도 적은-의 확고한 인생철학은 '나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없고, 상처 없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라는 2분법이었다.
해서리 그녀는 외삼촌의 폭력에 죽어가는 어머니를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늙은 할머니, 같은 나이의 외사촌 수연과 친구 진순에게 더욱 심하게 화풀이하곤 하는데...
소설의 곳곳에서 화숙의 화풀이 또는 복수의 행각이 여과 없이 나오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당한 아픔에 대한 보상심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심심풀이 파적삼아 저지르는 모양새를 취함에 읽는 이들에게 일견 어이없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리라. 뭐 수연이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재현이에게 그녀가 사는 곳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과 먼저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거나, 수연이가 진정 사랑하는 재현이의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알려줌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행위 등이 그런 사례로 나온다.
핏줄을 공유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으로 인공가족이란 말을 썼다곤 하나 소설 속에서 화숙이에게 죽은 어머니와 외삼촌, 외사촌 수연, 나중에 외삼촌과 살을 섞고 사는 친구 진순, 그리고 수연의 딸은 분명 가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숙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도 마음과 정을 나누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할머니에게만은 보험을 들어준 건 또 무슨 심뽀인지...
천변(川邊) 이쪽으로 상징되는 가난한 자들의 삶터에서 건너다 보이는 저편의 화려한 모습을 보면서 화숙은 자신의 가난과 아픔을 일견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밑바닥 삶을 하루하루 끈기있게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자신만의 목표? 그건 화숙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도록 폭행하고 많은 직원들을 호령한 데다 나아가선 딸의 친구를 데리고 사는 무지막지한 외삼촌의 권능을 능가하는 것으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을 터. 이는 문학평론가 백지은님의 평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바, 가장 증오해 왔던 외삼촌의 힘을 역설적이게도 화숙이 가장 원했던 것이라는 얘기인데...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외삼촌의 죽음을 확인하고 화자는 말한다.
'내 손으로 부흥 고물상의 철문을 열던 날, 나는 그 분류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이제 무섭지 않았다.' 외삼촌의 부흥 고물상은 그의 권력의 장(場)을 상징하고, 분류장은 바로 화숙이 어머니가 외삼촌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곳이었으니 화숙은 이제 의식 저 깊은 곳에서 바라고 바라던 권력을 쟁취한 모습이다. 그러면서 진순과 조카의 보호자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게 되지만,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욱 복잡해질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 아닐까? 진순은 화숙 자신의 친구임과 동시에 외삼촌과 살을 섞고 살아왔으니 외숙모의 지위 또한 갖는 게 아닌가? 뿐인가? 외사촌 수연의 딸이 진순을 엄마라고 하면 또 화숙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감? 그래서 백지은님은 이 소설을 인공가족 서사로 부르는 모양인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