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1~13)
올 한 해동안 이사야 말씀. 한 해를 넘길 수도. 오늘 6장, 이사야를 헤아리기 쉬움. 다음 주부터 1장 부터. 먼저 '신자'의 의미부터 보자. 신자는 부르심을 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 세상이 철벽 같아서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음. 철벽같은 대상. 그런데 알게 된 것이 외면하고 싶은 이유 중의 중요한 것. 이미 내 안에 철벽이 있어서. 시온의 영광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먼저, 내 안에 철벽같은 불신이 보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는 반증. 그렇게 되면, 그때서야 내가 해야, 말해야 할 것을 알게 됨.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내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열매가 없어 보여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상관 없게 됨. 가장 소중한 것이 내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바마 흑인 대통령이 처음 탄생. 그것이 가능한 것은 40여 년 전 그런 것을 주장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 한강 작가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다는 것과 같음.
앗시리아, 앗수르. 너무나 강한 국가. 팔레스타인 소용들이. 생존의 길은 앗수르에 굴복하느냐, 반 앗수르 정책으로 대항하는가의 길. 좌충우돌. 냉정하게는 친앗수르, 반앗수르도 실패의 길임. 반앗수르도 실질적으로 내 편은 없음. 동맹도 이해관계로 맺어진, 부러지기 쉬움. 친 앗수르? '방기와 연루'의 위험. 이게 세상. 역사. 세상에서는 살 길이 없음. 이때 이샤야 등장.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시대 배경과 일치. 일 개 선지자에 불과하지만 그 말씀이 모든 제국을 이겼음. 실제 역사임. 모든 제국은 사그러들었음. 사라졌음. 말씀만 남아서 세계 역사를 주도함. 철벽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은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을 줄기차게 전했음. 이사야는 왕실을 자주 왕래했기에 상황을 잘 알고 있음. 아마도 왕족 출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의 이름을 '이사야'로 명명했음. 사람들의 모습에서 허망함을 느꼈을 것임.
선지자로 부름 받음.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웃시야 왕이 남유다를 지켰는데, 부국강병을 꾀했던 왕. 막판에 안 좋은 일로 죽었지만 남유다의 희망이었음. 그래서 그가 죽어서 불안함이 팽배. 그때 영원히 죽지 않는 왕의 환상이 이사야에게. 이슬랍. 슬랍은 불꽃 같은 자라는 의미. 하나님의 영광. 그때 천사의 노래가 거룩한 삼중창. '거룩하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라는 찬양. 의지하던 왕이 죽어도 괜찮음. 만왕의 왕이 영원히 살아계시다. 실망스런 현실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보임. 그것으로 인해 이사야에게 있는 일. '자각'이 깨우쳐짐. 먼저 그의 실체에 대한 자각.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죄인. 더러운 입술을 가진 죄인. 5~7절, 천사들의 노래를 들어 참여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이사야의 입임을 발견.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지만 나는 거기에 참여할 수 없었음. '나는 망했다. 황폐했구나.' 그런데 그러한 자신에 대한 자각이 중요했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로다 완전히 망했도다.'라고 전하게 되는 계기. 망하게 된 이사야, 이스라엘을 고치게 되는 계기. 화로 숯불로 정결케 하는 과정. 죄를 태우시는 정화의식을 통해 새롭게 하는, 회복을 보여주시는 과정. 이러한 정화의식은 이로부터 700년 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 입술이 정결해져야만 했음. 왜냐하면 그 입술로 하나님이 메시지를 전해야 했기 때문. '내가 누구를 보내며~'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8절에 나오는 내용.
이전에도 이사야에게는 말할 의무가 있었으나 철벽같이 느껴져서 할 수 없었으나 지금 나에게 철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 철벽같은 죄가 자기 안에 있었다. 이제 그것을 무너뜨리게 됨. 그것을 허무시는 주님께 나를 완전히 맡김으로 가능해짐. 듣든지 안듣든지.... 상관 없이 내가 가서 말하는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 외는 하나님이 하실 일. 하나님은 보낼 자를 찾으심. 이때 손을 들고 싶은 사람은 누구? 배신자 소리를 들을 자리에는 손들지 않을 것임. 백성을 위로하는 자리에는 손을 들겠지... 그러나 지금은 백성의 완악함을 선포하고 망할 것을 말해야 함. 돌 맞을 자리. 9~10절, 하나님께서 화남. '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반증.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안깨닫는 자들이다! 라고 전하라는 것임. 보고, 듣고, 깨닫지 말아라! 라고 말하라는 것. 왜 그렇게 말하라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이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켜서 고침받을까 두렵다는 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임. 이유는 2가지. 첫째, 우리가 때때로 쪼잔하게 귀가 뒤틀릴 때가 있음. 이럴 때 바른 소리, 쓴 소리에 못 들음. '나도 알아'라고 하면서 안 들으려고 함. 내 자신의 눈과 귀가 확증편향되면 제대로 된 것을 안 들으려 함. 마음이 왜곡되고 부폐한 자에게 호응받으려면 왜곡되고, 부폐한 메시지를 보내면 됨. 그들이 환호한다는 것은 메신저와 메시지도 왜곡되었다는 반증.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던지 계속해서 바른 소리, 쓴 소리를 전하라고 하심. 완악함이 더욱 드러나게 하라는 의미임. 둘째, 본래의 뜻은 고침 받는 것이지만 자기 왜곡이 가득차 있는 곳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보거나, 듣거나, 깨달으면 안 되는 상황. 내 욕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음. 그렇게 간약함. 모든 왜곡과 악함이 다 깨지고 박살날 때에만 들을 수 있는 세미한 진실의 메시지. 그래서 악한 이들에게는 그것을 악용하는 메시지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세미한 진실의 메시지... 말씀을 적당히 아는 사람들의 악행이 너무 크다. 섣부르게 듣고 섣부르게 깨닫고 행하는 것이 오히려 저주. 11~13절, 언제까지입니까? 다 망할 때까지. 완전히 황폐할 때까지. 어떤 가능성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은근한 자신감도 남지 않을 때까지. 13절 그 중의 1/10이 남아도 안 됨. 어떤 말도 안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증인이다. 우리의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를 알지 않는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쉼 없이 솟구치는 욕정과 끝없이 이어지는 편가르기를 보면... 욕망의 불순물이 섞여서는 희망이 싹트지 않음. 어쩌면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황폐하게 무너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리적인 것보다 내 마음이. 심령이. 내 안에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들지 않는 한. 우리의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속된 욕망이 스며들어 있으니까. 매일 말씀 앞에 엎드리고 철저히 무너져야 함. 내가 죽고 예수께서 사시도록. 우리가 얼마나 교묘한 지 알지 않는가? 내려놓음을 말하면서 그것조차 내 공로가 되는 것 등. 룻기. 요즘 큐티. 흉년이 되자 나만 살겠다고 챙겨서 이민. 그러나 남편이 죽고 가족이 죽고. 황폐함이 기다림. 버렸던 고향 땅에 가서 내가 버린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 일. 그럴러면 내가 완전히 죽어야만 함. 나오미가 그런 길을 감. 과부, 이방인에게 희망이 시작. 소망은 황폐함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임. 예수님은 가장 처절한 방식을 죽으심. 요즘 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완전한 황폐함 그 자체. 그렇지만 왕으로 부활. 바로 그것. 황폐함 속에 소망. 한강 작가 부친 한승원. '산돌 키우기' 자서전. 수컷 공작새. 화려한 날개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것. 수치스러운 치부의 드러남과 지극한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드러나 있다. 아름다움이란? 있는 모습 그대로가 드러나도 상관 없을 만큼 솔직함. 새 희망. 완전하 흑암에 갇힌 것 같은 나에게 day by day, one by one. 급진적을 순종하기만 하자. 그럴 때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 던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