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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의 나중 형편은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
누가복음 11장 24-26절 /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에서 본문은 예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고치신 이적을 행하신 사건으로 바알세불 논쟁이 벌어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반대자로 있는 그들의 형편이 어찌될 것인지를 일괄적인 한 사건의 덩어리로 말씀해 주시는 내용의 전개로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12장에 있으며 본문과 같은 내용을 43-45절에서 보게 되는데, 여기서의 문장 구조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귀신의 왕, 곧 바알세불 들린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하심이 없는 성령훼방죄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며,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전적 부패한데 따른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서기관(율법학자)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께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의 형편이 어찌 될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에서 사건의 흐름이 시간을 갖고 전개되어 온 앞서의 내용 모두를 싸잡아서 끝맺는 말씀을 하시는 독립되어 있는 내용의 전개로 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 12:43-45)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의도는 누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여기서는 문장 끝에 기록되어 있는“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신 것에 이 악한 세대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신 형편을 악한 세대도 그대로 따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예수님은“이 악한 세대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같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악한 세대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에서 성령훼방죄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악한 세대가 어찌 될 것인지를 비유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죠.
마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한 행위에 있는 것을 악한 세대의 특징적인 행위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말이죠. 이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과 같음을 들어서 설명합니다. 이 악한 세대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어떻게 같은지를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간혹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을 떠나 잠시 동안 물 없는 광야를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아다니는데, 찾다가 찾지 못하면 더러운 귀신은“내가 나왔던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가자”고 말하며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의 마음이 청소되어 있으나 자신이 나갔던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는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찌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데“전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악한 세대 - 넓은 의미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좇아 따르는 당시의 패역한 유대인들을 포함한다 - 로 규정하며 그들의 악한 행태를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형편으로 비유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며 존경 받는 모습은 결코 그들이 사악한 사단(마귀)에게서 벗어나 자유하기 때문이 아닌 외식된 위선적인 모습에 의한 것으로서 그들의 나중 형편인 인생의 결국은 처음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한 귀신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까지 가세하여 그들을 압제하고 있는 형편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악한 귀신(사단)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행하시는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자신 스스로를 사단의 세력을 자신들의 마음에서 몰아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이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태는 예수께서 종말론 강화에서 말씀하신 바인“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마 23:31-32)에서 보게 되는 그들의 조상이 걸어간 악행의 길을 그대로 밟아 가고 그들의 악을 다 채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의로운 사람 아벨의 피부터 성전의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의인들의 피값이 그들의 머리에 쏟아지는 것에서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지나간 세대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이 이 악한 세대에 내려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3:35-36). 그리고 이는 종말론적으로도 조상들의 악행을 좇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소리쳐 요구하며 예수님을 피 흘려 죽음에 이르게 한 악한 세대의 죄와 그 죄에 있는 후손들의 머리에 내려질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마 27:26).유대인은 역사적으로 이를 이미 겪어 경험한 터였습니다. 바벨론 귀환 이후 유대인들은 경건을 힘쓰며 우상숭배를 척결함으로써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갖는 신앙의 회복을 위해 큰 힘을 쏟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선두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외형적 경건에만 치중하여 눈에 보이는 악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비유하신 바인 소제(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으나 그 안은 비어 있는 집과 같았습니다. 이런 그 마음을 악한 사단의 세력이 차지하고서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그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악을 범하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그 마음에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어 지배하는 사단의 악함을 따르는 상태를 그들의 조상이 처했던 역사적 정황과 연결시켜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함은 오늘날의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과 관련하여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보는 바인 외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모습을 갖춘 경우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주일을 지킵니다. 할 수 있는 한에는 매일 성경을 몇 장이라도 읽으려고 애쓰며, 기도도 시간을 정하여 놓고 빠지지 않고 하려고 합니다. 전도지도 돌리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며 교회에 오라고도 합니다.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해 놓고서는 철저히 지키려고 합니다. 이 모두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변화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를 잡고서 주인 행세하는 것은 악한 영인 사단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가득찬 것은 악한 사단이 갖는 생각을 따름에 있는 죄성의 부패한 욕망입니다. 이 욕망에서 용암 솟듯이 분출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갖는 생각에서 원하는 것들인 자신의 잘됨입니다. 자신의 남편과 아내, 자신의 부모와 자식, 자신의 집과 사업, 이 모두의 번성과 번창을 기대하는 것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주일을 지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모임에 참석하고 전도하며 봉사할 일거리를 찾고 만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에 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자기가 구하는 모두를 들어주셔서 축복하실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해서, 경건의 모양으로 자기 몸을 치장하여 아름답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 그들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더러운 귀신에서 보는, 악한 사단에서 보는 더러움, 악함이 그들의 특징이 되니,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있어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굳게 닫혀져 있어 그분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라는 자라고 규정합니다(딤후 3:5).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지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을 따름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그분이 흘리신 구속의 피공로를 힘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서 비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비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겠는지요. 비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뜻인데 말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인 것이며,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그리스도이심도 생명의 주님이심도 믿음으로 가진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서 비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쓰일 수 있는 말이 비그리스도인인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비그리스도인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양 그리스도인의 모양을 띨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특징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이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지도를 따르는 유대인에게서 보는 바인 선을 가장한 외식으로 그들의 신앙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외식에 참으로 열심인 것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고, 존경 받는 것에서 신앙의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며, 금생에서나 내세에서나 참으로 잘되는 성공하는 삶을 사는 길이라고 여기는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서 보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그리스도인을 다른 용어로는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사실 이 용어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단지 종교인의 행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을 신앙, 곧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인에 불과한 신앙 정도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인양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실하게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서 쓸 수 있는 말이죠. 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란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세력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서 그리스도인인양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죠. 그는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것을 그도 행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신앙, 곧 기독교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정복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기독교적인 온갖 행위에 열심을 갖고 여기에 마음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힘을 다 바치고자 하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마음은 없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작정하신 영생하는 참생명이 아닙니다. 금생에서 한 세상 사는 것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도 자신의 잘됨에 소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이 종교성을 띠고서 나타나는 것, 그것을 기독교적인 신앙의 형태로 가져나가는 것이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에게서 보게 되는 것,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보게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대하는 신앙, 곧 믿음을 가져나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용어로는 성도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그런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된 자, 곧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없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없는, 그래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에게는 없는,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유일한 것이 그들의 내면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이시오 하나님이 그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유일하게 있는 생명의 주님으로 사는 믿음에 있는 것이니, 하나님은 이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해 나가십니다.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종교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 앞에서 경건의 모양은 경건의 능력으로 사는 것에서 가져나갑니다. 경건의 모양을 경시여기고 도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이란 위선으로 가져나가며 외식으로 가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인으로 함께 모이는 그들에게서 필요로 갖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모양을 가져나가면 가져나가는 것에서 경건의 능력으로 사는 힘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교회로 회집하고 주일마다 예배를 가져나가며 성경 읽으며 기도하며 찬송하며 전도하며 봉사하는 등등의 일을 무엇 때문에 가져나가는 것인지요. 우리가 신앙이 좋으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치장을 해나가는 것에서인지요. 아닙니다. 그 모두에서의 경건에 있는 내용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있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이 마음을 다짐에 있게 하는 것이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는 것이며 경건의 모습을 띠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믿음의 진보에 있어 나가야겠습니다. 이 믿음의 진보에 있는 자의 나중 형편이 어찌 되겠는지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서 그 대답을 듣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1:3-11; 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