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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여름의 끝자락
여름이 한창인지 더위가 한창인지는 모르지만,
'이놈의 더위가 언제나 가나?' 하고 후텁지근한 날씨를 원망하면서 기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하늘엔 제법 짙은 구름이 껴 있어서,
'저놈의 구름 때문인가?'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사이, 어느새 7월도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확히 따지고 보면... 여름도 그 끝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a, 아픈 손가락
b, 내 '장난기'와 그 피해자
c,
d, 스페인 손님들과 함께...
e, 여름의 끝자락
a, 아픈 손가락
"장씨, 한 번... 와 줄텨?"
기로는 새벽같이 박 만석의 전화를 받고는, 부랴부랴... 산장집에 갔다.
그랬더니 근래에 보기 드물게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박 만석이,
"우리, 전주 아파트에 있는 둘째 딸년이... 말썽을 일으켰어!"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하자,
한숨까지 쉬었던 박 만석은,
"그 놈이... 머리는 비상혀서, 대학도 잘 다니고 혔는디... 언제부턴가 우리 집 골칫덩어리로 변혔어... 근디 요즘, 더 오락가락허네..." 하더니, "근디, 오늘은... 무슨 판매원 모집이라는디(들어보니 다단계 피라미드 식인 것 같았다.)... 갈라고 허는디, 못 가게 말려야 허는디... 아무리 뜯어 말려도, 우리 말로는... 안 되야. 그려서, 하도 답답혀서... 장씨헌티, 말이라도 허고 싶어서 전화헌 거여..." 하는 거 아닌가.
더구나 '정신병'적이기도 해서, 기로에게마저도 여태까지 쉬쉬하고 지냈다는... 실토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 박 만석의 표정은 정말, 금방 울기라도 하려는 듯... 슬퍼보이기도 했다.
'산장 아저씨 부부를 보면, 배움은 없을지라도... 두 분이 머리가 좋은 건 나도 인정을 하는데,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라... 머리는 좋을 것인데, 대학까지 다니던 딸이 '정신병'이라니......'
기로 역시,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면서 기로가 나름 분석을 해 보니, 박 만석 부부는 5남매가 되는 자식들을 전주의 한 아파트에 살게 하고는, 여기 고향 둔터니에 머물면서 돈만 벌고 있는 것이... 어쩌면 그 원인이자 결과일 수도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서는 것이었다.
물론 기로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했겠지만, 그래서... 그 어떤 공신력이나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러니까 두 부부는 자식들과 떨어져 살면서(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둔터니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지만, 중학교 이후 부터는 전주로 보냈다는데), 교육은 학교와 아이들 스스로에게 맡긴 채, '돈이 있어야 자식들도 가르친다'는 신념으로(?)... 오로지 돈벌이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그런 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 중 제일 맏딸은 이미 결혼까지 해서 첫손자도 본 상태였는데, 둘째가 대학까지(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정신병으로 제대로 직장도 구할 수 없어서... 동생들을 데리고 전주에 살고는 있지만, 이렇게 간간히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어떤 집이거나 뭔가 문제가 있다지만... 이 집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구나!' 하고 이제야 산장집의 문제를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기로가 본 박 만석은, 죽도록 일을 해서(돈을 벌어서)... 자식들(딸 넷에 아들 하나) 뒷바라지만 하고 있는 꼴이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는 '교육'에 대해선 무지하기 때문에, 자식들이 돈을 요구하면... 무조건 주는 식으로(정작 돈을 버는 박 만석 스스로는, 돈을 아끼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인데) 살아왔던 것인데... 본인의 노력과 약간의 운까지 작용해서, 한 재산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 속내에는 이런 문제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로는,
'아, 내가 저 양반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평소와 다르게 풀이 죽어있는 박 만석이 안 돼 보였지만,
자신이 나서서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뭐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주고 싶다.' 는 절실한 감정이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나약해 보일 정도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지난 얘기도 듣다 보니... 어차피 아침은 산장 집에서 먹게 되었고,
9시가 넘어가면서는... 그 딸아이가 다닌다는 대학병원의 담당의사와 통화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등,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그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박 만석과 상의해 보기도 했지만... 실제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무래도 정신병적인 것이라... 기로가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는 문제였을 뿐더러, 또... 다른 병처럼 병원에만 다녀도 치료가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던 것인데,
기로 자신이 제 3자의 입장이긴 했지만, 마치... 긴 터널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뭐 하나 시원하게 도와준 것도 없이... ' 夢想?'으로 돌아오는데도,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후텁지근하다 보니 '夢想?' 앞 평상에 나왔던 키큰 아저씨와 반장은 각자 집으로들 돌아갔고,
기로는 옆집 할머니 댁에 한 번 들러 보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는지 마당에 서 있던 할머니는 기로를 보자마자 반색이었다.
"어떻게 왔어?"
"예, 비가 올 것 같아서요......"
"그려? 비가 올 거 같어서 왔어?"
"예......" 그렇게 대답을 하는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로가 당황스러워 움찔하는데,
"고마워. 이렇게 와줘서..." 하기까지 하니,
"예? 아, 예......" 하고 말았다.
'뭔가 서러운 생각을 하셨던 것일까? 할머니 음성도 젖어있고, 오늘따라 다른 모습이시다. 사람의 정이 못 견디게 그리우셨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기로는,
"할머니, 마음을 굳게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하세요......" 하고 그런 식으로만 위로를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어저끄가... 내 둘째 아들 놈 생일이었는디... 가가 사람은 다시 없이 좋은 놈인디, 각시를 잘 못 얻어서 이혼허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 하면서 할머니가 한숨을 짓는 것이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렇지만 할머니... 아드님은 아직은 젊으니, 어떻게든 살아가겠지요... 너무 그런 생각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며 위로를 해드리기는 했지만,
"어떻게 에미가 자식을 모른 척허고... 살 수 있긌어?" 하니,
"그렇긴 하지요." 하고 한숨까지 쉬었던 기로는,
'에이,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하는 심정으로,
"사실은요, 할머니, 저도... 이혼한 몸으로 이렇게 살고 있답니다......"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렸어? 아이고, 어쩌까?" 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기로의 팔을 잡으니,
"그래도 이렇게... 호수에서 배도 타고, 개도 키우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하는데,
"그려도 집이는... 배운 거라도 있잖여?" 하는 것이었다.
"글쎄요, ... 근데, 그러나 저러나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하자,
"그건, 그려!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벱인게..." 하는 할머니는, "그려도 그 집은 성수들이 김치도 담가준 게... 우리 아들네들은 그러지도 못 혀..." 하고 역시 한숨을 쉬시니,
기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할머니께... '자신의 이혼' 얘기를 실토한 꼴이었다.
여태까진 그럭저럭 그런 얘기를 피해가면서 지내왔는데......
사실, 기로는 요즘 할머니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할머니 집에 들러서도, 그저 인사만 할 뿐 바로 돌아오곤 하면서.
이제 할머니와 할 얘기도 없을 뿐더러, 할머니의 물음이라는 것이... 기로에게 결혼을 않고(할머니는 기로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혼자 살아갈 거냐는, 돈 벌이도 없이 살아가느냐는 둥의, 기로가 썩 내놓고 말하지 못할 얘기를 반복적으로 물어보니... 게다가 기로가 하는 일에 뭐든 꼬치꼬치 물어서, 어떤 때는 대답하기도 애매하거나 어색할 때가 많아서였다.
그리고 아예 그 집 아들들이 안 찾아오면 모를까, 그리고 아예 홀로 사는 가련한 노일이라면 또 모를까,
가끔은 아들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오니... 기로가 뭐, 뻔질나게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섭렵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고,
사실 기로의 입장에서는 할머니 아들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들과 마주치는 것도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건, 지난번 할머니 친정집에 갔을 때, 친정 동생 가족의 행동에서도 나타나는 일이었다. 잘은 몰라도 할머니 아들들과 할머니 친정 동생 가족과의 어떤 금전적인 문제로 인한 그리고 할머니 동생의 입장에서는 홀어머니를 그렇게 잘 모시지 못하고 있는 조카들에 대한 불만 등)
물론 할머니 아들들도 기로를 대하기가 썩 자유롭지가 않을 터라서(왜냐하면 자신들이 해야 될 일을 어느 정도 기로가 대신 하고 있는 것에 따른 미안함과 면목 없음일 터라서), 가능하면 할머니를 제외한 그 집 식구들과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할머니는, 이렇게 살다가 기로가 가버리면 어떡하느냐고 벌써부터 걱정이라... 기로는 조금씩 그런 일에 대비해서, 할머니와의 거리를 두려고 하는... 의식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앞으로 언제까지 기로가 옆에서 보살펴 드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기로가 확 달라진 것도 없었다.
틈틈이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고, 또 먹을 것을 갖다 드리거나 하는 일은... 전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로가 '夢想?'을 비울 때는, 언제나 할머니를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고... 그러면서 격이 밥 주는 것을 부탁하면서(그러면 할머니는 빠짐없이 그런 일을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얘기도 나누고...
그런데, 오늘 눈물을 글썽인 할머니를 보니... 기로의 마음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노인네가, 얼마나 사람의 정이 그리웠으면... 저러실까?' 하는 생각에, 기로 가슴도 아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로는 태연한 척 돌아왔다.
물론,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또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 요즘엔 '행복'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담고 살고 있었는데, 오늘은... 왜 이런 일들만 생긴다지?'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인생이 그런 거 아니던가.
날마다 행복일 수만도, 그 반대로 날마다 불행만 닥치는 것도 아닌 거니까......
그러면서 기로는, 또 당연히(?)... 자기 자신의 처지로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도, 이렇게 문득 문득... 그 일을 떠올릴 일들이 생기니,
'남 걱정할 거 없이, 나 자신 역시... 코가 석자로 빠져있는 사람인데......' 하면서, '지금 한창 커나갈 나인데, 우리 애들에게 '양육비'도 못 주고 살아가는 처지에, 무슨... 오지랖?' 하면서, 전처 송 선희와 살고 있는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비록 자식들과도 인연을 끊자며 살고는 있지만, 기로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양육비 정도는 송 선희에게 보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그렇다 보니... 그저 맘 뿐으로,
'언젠가 기회가 생긴다면......' 하면서 몇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혼을 하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은 거의 다 송 선희에게 양보했고, 지난 봄에 그림이 팔렸을 때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하는 심정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고, 최근의 일에서는...
'일단 '차 순애' 빚부터 갚고......' 하면서 그 쪽부터 신경을 썼기에,
'이렇게 살다가는, 이제 내 핏줄들하곤... 영영 남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그 문제로 아무리 고민을 해도,
'이렇게 혼자 살다가, 나중에 '치매' 같은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떡한다지?' 하는 사안처럼,
'마음만 아팠지, 당장 내 스스로 풀 수는 없는 문제일 수도 있어......' 하는 선에서,
일단 잊을 수밖에 없는 일로 치부되어야만 했다.
그런 일로 다른 일까지 못할 수는 없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