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3)
(가회동성당∼약현성당, 2023년 1월 29일)
瓦也 정유순
종로구 평동의 서울적십자병원과 서울충정로우체국 일대는 조선시대에 서대문 밖이었던 지역으로, 경기감영이 있었던 자리였다. 현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사거리 3번 출구 쪽 도로변에 ‘경기감영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784년 조선 천주교가 명례방에서 처음 창립된 후 성장해 오던 신앙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는데, 이 때 경기지역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 했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이다.
<경기감영 터 표지>
경기감영(京畿監營)은 지금의 경기도청이랄 수 있는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가 있던 관아였다. 관찰사(觀察使)는 예하의 부윤(府尹), 목사(牧使),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도호부사(都護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지방관을 감독하는 한편 감영(監營)에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이 있고 도사(都事), 판관(判官), 막비(幕費) 등의 기관을 두어서 일반 행정과 군정, 사법, 경찰 등의 정사를 보았다. 경기감영은 1393년(태조 2)에 설치되었다.
<경기감영 터(현 적십자병원)>
서대문로타리를 건너면 서대문구 미근동이다. 미근동(渼芹洞)은 돈의문(서대문) 밖의 ‘미나리가 물결을 이룬다.’는 뜻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원래 이곳에는 미나릿골, 초리우물골 등의 자연마을, 웃초리우물, 초리우물 등의 우물이 있었다. 미나릿골은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이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유하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미나리꽝으로도 부른다. 미근동에는 경찰청과 서대문경찰서가 있다.
<서대문교차로>
경찰청(警察廳)은 조선시대 포도청이 1905년 12월 일본의 조선통감부 아래 경무부가 설치되면서 경찰의 효시가 된다. 한일강제병탄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에 독립관서로 경무총감부가 설치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총독부 관제 개편이 이뤄져 경무총감부 대신 경무국이 설치되었고, 지방에서는 각 도에 제3부(1921년 2월 경찰부로 개칭)를 두어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했다. 특히 경찰부 산하 고등경찰과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집회⋅결사와 대중 운동에 대한 통제 등 항일 운동과 사상을 탄압했다.
<조선경찰 - 네이버캡쳐>
해방 후 1945년 10월 21일 미군청정이 일제 경무국 조직을 답습하고 각 도지사 소속하에 경찰부를 두는 체제를 마련 후, 1946년 1월 16일 경무국을 경무부로 확대하면서 경무부 산하에 5국을 설치하여 경무부 체제가 출범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경무부가 내무부로 인수되면서 내무부의 보조기관인 치안국으로 축소되었으나, 치안사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1974년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해 내무부 치안국이 치안본부로 확대되었다.
<경찰청 - 네이버캡쳐>
1991년에는 경찰법이 제정되면서 내무부의 보조기관이던 치안본부가 내무부장관 소속하의 경찰청으로, 시도지사의 보조기관이던 지방경찰국이 경찰청장의 지휘감독을 받는 지방경찰청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위원회를 내무부에 설치하고, 경찰의 인사예산장비 등에 관한 주요 정책과 경찰행정에 관한 업무발전 및 인권보호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의결하게 하였다. 내무부는 지금의 행정안전부의 옛 이름이다.
<경찰캐릭터 - 네이버캡쳐>
경찰청 앞과 서소문 고가차도 밑으로 하여 서소문순교역사공원에 당도한다. 서소문(西小門)은 소의문(昭義門) 속칭이다. 1396년(태조 5)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지으면서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1744년(영조 20) 문루(門樓)를 세우면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서소문동 큰길에 있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라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다.
<소의문(서소문) - 네이버캡쳐>
서소문순교역사공원은 숭례문 밖의 칠패시장으로 통하는 문으로 새벽부터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어서 사람에게 범죄예방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형 터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신자에 대한 사형집행은 대체로 신유박해(1801) 때부터로 평신도가 많이 순교한 성지다. 이곳에서 순교하여 이름이 밝혀진 이는 98명이고, 44명은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평신도 지도자였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강완숙 콜롬바, 이승훈 베드로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표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입구>
기해박해(1839) 때에는 장하상 바오르를 비롯하여 41명의 순교성인과 병인박해(1866) 때에 3명의 성인을 합하여 모두 44명의 성인이 되었다. 그 밖에 수많은 이들이 박해 때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참수 터에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시복식에 앞서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인 서소문순교성지를 찾아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고 참배했다.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으로 성장하여 평신도가 처형된 대표적 장소인 서소문순교성지에 현양탑을 세워 순교영성을 되새기고 있다.
<서소문밖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지상>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순교역사박물관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지만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건물 내부는 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외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에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독특하게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 2층은 상설전시관이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지하 입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전시물>
계단을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오면 하늘광장을 만나게 된다. 하늘광장은 경건함을 가득 담은 공간으로 절제된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빛, 직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천주교 박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처형 장소였던 지상을 그대로 올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존재하여 추모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2014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매주 목요일에는 서소문 역사탐방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박물관 내 성당>
<44명의 성인 부활 상>
서소문역사공원을 대충 둘러보고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향한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교차로에 있는 ‘고산자 김정호생가비’를 거쳐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약현(藥峴)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고, 이를 줄여 ‘약현’이라 하였는데, 점차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 성당이 들어선 것은 ‘서소문 밖 순교성지’가 발아래 굽어보이기 때문이다.
<약현성당>
사적(제252호)으로 지정된 약현성당은 1887년 블랑 주교에 의해 시작된 교리 강습소가 이후 약현공소로 변모하였다.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어 뮈텔 주교의 동의를 얻어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891년 10월 성당 정초식을 거행한 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서울대교구의 두 번째 본당이며 1892년 9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조 건물이 완성되어 1893년 4월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1998년 2월 화재로 첨탑과 성당 내부가 완전히 훼손된 후 복원 공사를 거쳐 2000년 9월 본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약현성당 내부>
서소문순교자기념관은 1991년 약현성당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약현성당(藥峴聖堂) 내에 있다. 약현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에는 서소문 순교자들의 유품과 천주교 관련 고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자기념관 성당의 제대(祭臺) 중앙에는 성인유해(聖人遺骸) 16위(位), 오른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성인위패(位牌) 44위, 왼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순교자위패 54위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순교자기념관>
https://blog.naver.com/waya555/223003519300
첫댓글 순례길 너무 좋습니다